정부개혁의 선구자 이계식<br>일주(一舟) 이계식 박사 추모집 편집위원회 지음, 청조사, 403쪽, 1만5000원
자화자찬 성공신화로 그득한 자서전이 범람해 독자는 이런 홍보성 책자에 진절머리가 났으리라. 특히 ‘정치의 계절’에는 활짝 웃는 얼굴사진이 실린 표지와 함께 낯 뜨거울 정도의 자랑이 담긴 정치인 자서전이 쏟아져 나오고 그 책을 알리느라 요란한 출판기념회가 열리지 않는가. 그런 자서전 대부분이 대필 작가가 한두 달 사이에 후닥닥 날림으로 쓴 책자임을 알 만한 사람은 안다. 명사의 회고록도 무용담 일색이어서 실책에 대한 반성을 통해 배울 게 보이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 불멸의 고전 반열에 오른 것은 저자가 방탕한 청년시절의 행각을 낱낱이 밝히고 통렬히 뉘우쳤기 때문이리라. 아우구스티누스는 매음굴에 들락거렸던 사실을 털어놓았다.
언젠가 서점에서 ‘판사 한기택’이라는 책을 우연히 발견하고 얼른 사서 밤새 읽은 적이 있다. 일반인에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법조계에서는 ‘목숨 걸고 재판하는 판사’로 유명했던 한기택 법관에 관한 추모집이었다. 그가 작고한 지 1년이 지나자 지인들이 고인에 대한 회고 글과 고인의 일기 등을 묶어낸 것이었다. 법과 양심에 따라 공정한 판결을 내리려 치열한 삶을 살아간 고인의 고결한 인품이 책 곳곳에 배어 있었다. 현직 권력자가 아닌데다 이세상 사람이 아닌 인물에 대해 책을 낸다는 것 자체가 고인이 얼마나 존경받는지를 나타내지 않는가. 책 만들어 현실적으로 득(得) 볼 일도 없는데….
최근에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서점 서가에서 ‘정부개혁의 선구자 이계식’이란 책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출판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책인데도 신간코너에 ‘눕혀져’ 전시되지 못하고 인물 코너 한구석에 ‘세워져’ 꽂혀 있었다. 일간지 서평 기사에서도 본 기억이 없다. ‘숨은 진주’ 같은 귀중한 책을 찾아 독자에게 소개하는 것은 서평자의 큰 보람 가운데 하나다. 이계식 박사는 2010년 2월 타계했고 그의 1주기를 맞아 이 책이 나왔다.
“그날은 오리라”… 정부개혁 이루는 날
이코노미스트 이계식(李啓植) 박사…. 일반인에게는 썩 익숙한 이름은 아니리라. 경제부처 장관을 지내지도 않았고 스타 학자로 언론에 자주 등장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계, 관계에서 그는 유능하면서도 기개 높은 의인으로 정평 난 인물이었다. 아호는 일주(一舟).
이 박사의 약력을 살펴보자. 1948년 목포 출생. 목포 유달초등학교-목포중-경기고-서울대 경제학과-미국 뉴욕주립대 경제학 박사 등 화려한 학력을 가졌다. 행정고시에 합격해 관세청 사무관으로 일하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재정학을 전공하고 귀국 후에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연구위원으로 20년 가까이 활동했다. 그가 ‘정부개혁의 선구자’라는 별칭을 얻은 것은 1998년 3월부터 2000년 8월까지 2년 5개월간 정부개혁실 실장(1급)으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이 추모 책자는 지인들끼리 서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추모집을 만들어야 할 것 아니냐”고 말하면서 준비됐다고 한다. 고인의 마지막 일터인 부산발전연구원에서 편집 실무를 맡았다. 편집위원회 대표(이종희, 좌승희)는 서문에서 고인에 대한 추모의 정을 다음과 같이 썼다.
수학을 잘했던 천재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을 꿈꾸며 경제학자의 길을 택했다. 우리나라가 일류 선진사회가 되길 갈망했다. 그렇기에 사회의 부조리와 불합리한 제도와 조직을 볼 때 안타까워하며 바꾸어 보려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다산의 역사를 찾아 실사구시의 정신을 되새겼으며, 명치유신을 일으킨 인재들과 그때의 사회·경제시스템을 궁구하였다. 미국, 벨기에, 이스라엘, 뉴질랜드, 일본 등을 돌아보며 그 나라의 좋은 점을 우리 시스템에 적용하려고 시도하였다. 그의 열정과 고뇌는 정부개혁과 지방의 발전을 넘어 남북교류 구상에까지 이르렀다.
오늘도 그가 그립기만 하다. 그는 천재와 개혁가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오만’과 ‘경박’ 그리고 ‘독선’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하고 진심으로 사랑을 아는 사람이었다.
전두환 정부 시절에 경제수석을 지내다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순직한 김재익 박사 추모집 ‘시대의 선각자 김재익’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김 수석은 통찰력, 인품 등 여러 면에서 존경을 받았다. 수많은 인사가 그의 비보에 애통해했다. 추모 책자가 발간돼 유족들이 출판기념회를 열었을 때 800여 명의 지인이 찾아왔다.
경제정책 수립자는 이해(利害) 관계에 얽힌 사안에 대해 용단을 내려야 할 때가 많아 손해 보는 쪽으로부터 비방받기 일쑤다. 그래서인지 이코노미스트 인물에 관한 추모집은 매우 드물다. 이계식 박사에 관한 책이 돋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추모집은 ▲고인이 걸어온 길 ▲지인 45명의 추모 글 ▲고인의 글 ▲고인의 연구물 51편에 대한 해제(解題) 등 4개 부로 구성됐다.
초·중학교 시절에 그는 몸놀림이 빨라 ‘날쌘돌이’로 불리던 축구 달인이었다. 학업 성적도 두각을 나타냈다. 시골 중학교에서 당대 최고 명문인 경기고로 진학했으니…. 고교 시절에는 영시(英詩)를 줄줄 암송했다고 한다. 영어회화 클럽 ‘선(Sun)’을 조직해 회장을 맡았고 수학에 재능을 보여 이과반에서 공부했다. 서울대 상대에 진학한 고교 동기생은 한덕수 전 국무총리 등이다. 대학생 때는 대학신문 기자로 필력을 떨치기도 했다.
박사 학위를 받고 KDI에 들어가서는 주로 재정 분야 연구에서 성과를 냈다. 대학 스승인 조순 교수가 경제부총리로 입각하자 부총리 자문관으로 발탁된다. 정부가 금융실명제 추진, 토지공개념 확대 등 개혁 정책을 입안하는 과정에서 이 박사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집무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출입기자들이 방문하면 언제든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는 벨기에 루벵대학 객원교수와 국제통화기금(IMF) 이코노미스트로 활동한 다음 KDI로 돌아왔다. 그는 국제적 경륜을 바탕으로 한국경제를 살리는 데 일조하려 했다. ‘정부혁신: 선진국의 전략과 교훈’이라는 저서를 냈다.
그는 1998년 3월 대통령 직속기관인 기획예산위원회 정부개혁실장에 임용되면서 방만한 정부조직에 메스를 들이댔다. 30대 국책사업이 제대로 이뤄지는지도 따졌다. 그는 “향후 5년간은 (기득권 세력과) 싸움의 나날(daily battle)이 될 것”이라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비장한 각오로 개혁 작업에 나섰고 적지 않은 성과를 냈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의 지독한 음해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개혁 성공) 그날은 오리라/ 우리의 병이 우리 사회의 더러운 병이 깨끗이 사라지고/ 부끄러운 후진의 가죽을 바꾸어 자랑스런 선진의 면모를 갖출 그날이/ 우리 세대가 가기 전에 오리라 정녕 오리라’고 외쳤다.
그와 함께 정부개혁을 추진한 박개성 엘리오앤컴퍼니 대표는 “정부개혁실은 민영화, 인력감축, 운영시스템 혁신, 규제개혁, 전자정부 등 다양한 분야에서 높은 성과를 거두었다”면서 “그의 통찰력과 실험정신이 토양이 되었고 강직한 인품이 씨앗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20세기의 정암 조광조
이 박사는 공직을 떠난 후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에 와서 부산발전연구원 원장을 맡아 부산 발전계획을 세우느라 마지막 열정을 불태웠다. 그러는 사이에 몸에 병이 깊어갔다. 이 박사의 지인들이 쓴 ‘일주(一舟)를 회상하며’라는 글에는 고인에 대한 애틋한 정이 듬뿍 배어 있다.
“이계식 원장님, 당신께서는 부산에서 태어난 사람보다 더 부산을 사랑했고 더 깊이 이해했고, 부산 발전을 위해 불철주야 애썼던 진정한 부산사람입니다.”(허남식 부산광역시장)
“당신은 바른 세상을 꿈꾸던 20세기의 정암 조광조이셨습니다. 영악한 자들은 당신의 우직한 올곧음을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압니다. 당신의 이상과 열정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황원규 강릉원주대 국제통상학부 교수)
“정부를 구조조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더구나 연구에만 몰두해온 학자가 갑자기 정부에 들어가서 이해가 걸린 많은 조직이나 사람들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 일인가? 그런데 그는 그 일을 뚝심을 가지고 이루어냈다. 그가 관직에 욕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소신보다는 요령껏 처신해서 후일을 도모했으리라. 그는 그런 처신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곽태원 서강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이 박사님은 내가 고3 때 과외 선생님이셨다. 친구 4명이 한 팀이 돼 과외를 받았는데 수학은 당시 서울대 2학년생인 이 박사님, 영어는 한덕수 현 주미대사였다. (세월이 흘러) 내가 행정개혁위원으로 임명받는 자리에서 다시 만났다. 정부 산하 연구기관의 조직을 대수술하는 업무를 추진하시느라 사방에서 원성이 자자했다. 님이 그 일들을 잘 마무리시킨 것을 나는 기억한다.”(이계경 17대 국회의원)
“우리 둘은 종로구 동숭동에 있던 서울대 종합기숙사인 정영사에서 한 방을 썼다. 그는 문학청년이었다. 소설이건 시건 수필이건 많이 읽고 공책에 빽빽이 기록해두었다가 여행이라도 갈라치면 예쁜 엽서에 시 한 수, 소설 또는 수필 한 두 구절을 꼭 적어 보내주었다. 이 박사를 알게 된 후 언젠가부터 그를 닮고 싶어했다. 그러나 반도 닮지 못했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
“평생 쌓아올린 연구실적, 그리고 후학을 양성해온 그 열정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속병도 많았을 텐데 그때는 미처 그런 고뇌를 헤아리지도 못했습니다.”(송성현 수필가, 청조사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