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호

지식커뮤니티 Book치고 ; 장강명의 ‘산 자들’을 읽고

포식자들의 잘 짜인 각본

회색지대의 노동소설

  • 구단비 자유기고가·Book치고 2기

    입력2019-10-31 14:07:57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책은 찰(察)이다. 남을 관찰(觀察)하고, 나를 성찰(省察)하며, 세상을 통찰(洞察)하는 도구여서다. 찰과 찰이 모여 지식과 교양을 잉태한다. 덕분에 찰나의 ‘책 수다’가 묘한 지적 쾌감을 제공한다. 정작 살다보면 이 쾌감을 충족하기가 녹록지 않다. 이에 창간 88주년을 맞는 국내 최고 권위의 시사 종합지 ‘신동아’가 ‘지식커뮤니티 Book치고’를 만들었다. 회원들은 한 시즌(4개월)간 월 1회 씩 책 한 권을 고재석 기자와 함께 읽는다. [편집자 주]
    “우리 회사에 육아휴직? 출산휴가도 잘 안 가. 아 1층 미영 씨가 육아휴직 간 뒤로는 점점 쓰는 것 같더라. 근데 그 미영 씨 진짜 나쁜 사람이야. 팀장이랑 상의도 없이 육아휴직 냈나봐. 팀이 엄청 바쁜 시기였는데 말이야. 팀장이 엄청 화가 났어. 복직 못 하는 것 아닌가 몰라. 곧 돌아올 때인데 절대 자기 팀에서는 일 못 한다고 난리야. 단비 씨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지?” 

    ‘육아휴직 쓴 미영 씨는 왜 나쁜 사람이 됐나요? 요새 애 안 낳아서 난린데…. 대신 일할 사람 뽑았으면 된 거 아니에요? 육아휴직 후 미영 씨 자리가 없으면 노동청 신고 대상 아닌가요?’ 따위의 대꾸는 속으로 꾹 삼켰다. 

    나도 그 회사에서 하루 12시간 넘게 일했다. 체력을 넘어서는 근무는 나를 내가 아닌 사람으로 만들었다. 흘러가는 시간은 아무리 좇아도 흘러갔다. 평일마다 야근한 뒤 주말에도 출근해야 할 때 정말 죽고 싶었다. 

    누군가 낙오하는 순간 내가 죽어 나갔다. 누군가 한 달 근무일을 꽉꽉 채워 정당하게 받은 월차를 쓰면 그 공백은 나머지 사람들이 메워야 했다. 갑작스러운 주말 스케줄을 누가 감당해야 할지 정할 때 회의실에선 눈빛이 오갔다. 그 눈빛이 싫었다. 

    누군가 갑자기 육아휴직을 이유로 사라지면 어떨까. 그의 정당한 권리임에도 ‘한 명이라도 빠지면 나도 고민 말고 재빨리 그만둬야지’ 생각할 정도였다. 그만큼 괴로웠다. 



    연이은 추가근무, 주말근무가 모두 수당으로 되돌아오지는 않았다. 드물게나마 별도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는 스케줄이 있었다. 그런 스케줄은 모두가 가고 싶어 했다. 비슷한 연차의 다른 팀 직원이 나보다 돈을 조금이라도 더 받는다는 걸 알게 되면 정말 화가 났다. 진짜 ‘조져야 할 존재’는 따로 있었으나 개미들이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꼴이었다. 개미가 개미의 허리와 목을 조르고 이리저리 휘두르며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개미끼리 치고받고 싸울 때 최상위 포식자는 웃었다. 최상위 포식자는 제일 잘 싸우는 개미 중 충성심 높은 개미를 아꼈다. ‘라인’ 잘 탄 개미는 원하는 보직에도 앉고 원하는 팀원을 데리고 일했다. 그러나 개미는 결국 개미라는 걸 그 개미는 알았을까. 

    장강명의 소설에서도 개미끼리 아귀다툼한다. 알바생을 자르는 건 과장이고, 자영업자와 싸우는 건 자영업자다. 파업 찬반 진영으로 나뉜 노동자와 노동자가 서로에게 핏대를 올린다. 개미끼리 비정규직을 차별대우하고 월차와 보너스·주휴수당·퇴직수당 등을 챙기는 다른 개미를 얌체라고 욕하는 것이, 즉 개미가 개미에게 ‘갑질’하는 것이 최상위 포식자들이 잘 짜놓은 각본은 아니었을까.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