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거치며 본모습 잃은 석굴암
이후 보수 공사했지만 결로 현상까지 일어나
훼손 막기 위해 유리문으로 석굴암 막았지만…
보호막이 감상 방해, 석굴암 감동 전혀 느낄 수 없어
![석굴암 전실에서 본 주실의 내부. [한석홍 국립문화재연구소 기증]](https://dimg.donga.com/a/459/0/90/5/ugc/CDB/SHINDONGA/Article/61/b1/63/5b/61b1635b2708d2738276.jpg)
석굴암 전실에서 본 주실의 내부. [한석홍 국립문화재연구소 기증]
석굴암은 현재 유리문으로 막아놓아 전실(前室)과 주실(主室) 등 내부로 들어갈 수 없다. 그저 유리문 밖에서 들여다보아야 한다. 유리문의 반사와 흔들림으로 석굴암 본존불과 팔부중상(八部衆像), 인왕상(仁王像) 등의 조각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내부 공간의 구조도 경험할 수 없다. 누군가 석굴암에서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건 현장에서의 감동이 아니라 그동안 보아온 ‘석굴암 사진’의 감동일 것이다.
사진이나 영상을 통해 기억하고 있는 멋진 이미지를 현장에 대입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우리는 사진작가들의 멋진 사진을 떠올리며 석굴암에 간다. 그러나 본존불이나 팔부중상은 유리문이 가로막고 있어 우리는 본존불의 숨결을 느껴볼 수 없다. 사진작가가 보여주는 기막힌 앵글을 현장에서 경험할 수 없다. 그저 유리문 밖에서 석굴암 사진의 미학을 기억해 낼 뿐이다. 그런데 감동이라니, 대체 이 유리문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일제 손 닿으며 망가지기 시작한 석굴암
경주 토함산 석굴암은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최고의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 한국의 국보를 넘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도 등재됐다. 석굴암은 1000년 넘게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런데 지금처럼 즐기고 답사하고 여행하는 인기 대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일제강점기에 시작됐다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다.물론 조선시대에도 석굴암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이와 관련된 기록도 남아 있다. 하지만 석굴암은 조선 말기 언젠가 일부 무너져 내렸고 그 상태로 방치됐다. 조선을 식민지화하던 일제는 석굴암에 주목했다. 비록 무너진 상태였지만 불교 조각의 걸작임을 그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일제는 석굴암을 식민지 통치에 활용하기로 했다. 일제는 석굴암을 해체해 일본으로 반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것이 무산되자 1913~1915년 조선총독부는 석굴암을 대대적으로 수리 보수했다.
이러한 분위기와 함께 석굴암에 대한 가치 평가가 진행됐다. 1910년대 일제는 석굴암을 ‘조선고적도보’에 소개했다. 국어학자 안확의 글과 일본인 건축학자 세키노 다다시의 ‘조선미술사’에서도 석굴암을 부각했다. 민예 이론가인 야나기 무네요시는 자신의 글 ‘석굴암 조각에 관하여(石佛寺の彫刻について)’에서 “영원의 걸작”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무너진 채 방치된 석굴암의 존재 가치와 매력을 다시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1920년대 석굴암 여행 붐이 일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이르면 교과서를 통해 그러한 인식이 더욱 확산되고 재생산됐다.
여기에는 일제의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었다. 석굴암 등 신라의 미술 문화를 한반도 문화의 최정점으로 두고 이후 점점 퇴락해 조선시대에 이르렀다는 인식, 문명화된 일본이 석굴암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보수함으로써 석굴암의 옛 영화를 찾아주었다는 인식을 이식하기 위한 것이었다.(강희정,‘식민지 조선의 표상:석굴암의 공론화’, 동악미술사19호, 동악미술사학회, 2009)
보수하려다 원래의 아름다움 잃어
수난도 적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는 석굴암을 수리하면서 본존불이 있는 주실의 천장 외부를 시멘트 콘크리트로 덮어 씌웠다. 석굴암을 콘크리트 돔 구조물로 바꿔버린 것이다. 1961~1964년엔 우리 정부가 석굴암을 보수했다. 이 보수공사에서 일제가 씌워놓은 콘크리트 외부에 또 한 겹의 콘크리트층을 만들어 씌웠다. 석굴암을 현대식 콘크리트로 완전히 밀봉해 버린 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황당한 보수공사는 적지 않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콘크리트로 인해 내부와 외부의 온도차가 커져 석굴암 내부에 습기가 더 많이 차고 이슬이 맺히는 결로(結露) 현상이 발생했다. 급기야는 1966년 내부의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에어컨을 설치하는 진풍경까지 벌어졌다. 이런 상태로 석굴암을 개방해 왔고 급기야 석굴암의 보존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1976년 12월 유리문을 설치한 것이다.두 차례의 보수공사는 석굴암에 지울 수 없는 후유증을 남겼다. 석굴암은 본존불을 모신 원형의 주실, 그 앞에 있는 사각형의 전실, 주실과 전실을 연결하는 통로로 이뤄져 있다. 전실을 보면 좌우 벽에 각각 4구의 조각상이 일렬로 배치돼 있다. 이를 팔부중상이라 한다. 그런데 보수공사 이후 팔부중상의 수와 배치 등을 놓고 논란이 불거졌다. 좌우 4구가 지금처럼 일직선으로 놓여 있는 것이 석굴암의 원래 모습일까, 좌우의 4번째 팔부중상이 안쪽으로 꺾여 있는 것이 원래 모습일까, 이 의문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일제는 1915년 석굴암 보수공사 과정에서 전실 좌우 벽에 불상을 3구씩 세우고 그 끝 전실 입구 쪽에 각각 한 구씩을 직각으로 꺾어 연결했다. 그 후 1964년 우리가 다시 석굴암을 보수하면서 일제가 직각으로 꺾어놓았던 부분을 곧게 펴서 전실 좌우 벽에 4구씩 직선으로 펼쳐놓았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모습이다. 1913년 보수공사 이전에 촬영한 사진을 검토하면, 좌우 3구씩 배치돼 있음이 확실해 보인다. 일제는 보수공사 하면서 주변에서 발견한 조각상을 덧붙여 4구씩 배치했다. 그런데 그것을 일제는 꺾어서 배치했고 1964년 우리 정부는 그것을 일직선으로 펼쳐놓았다. 무엇이 석굴암의 원래 모습일까. 아직도 의문거리다.
팔부중상 가운데 일제가 추가했다는 2구(왼쪽 벽의 아수라 조각상과 오른쪽 벽의 금시조 조각상)의 모습도 논란거리다. 나머지 6구와 크기, 조각 수법, 표현 방식 등이 현저히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이 두 조각상은 옹색하기 짝이 없다. 팔부중상이나 석굴암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아수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