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면·진라면 3배 가격 책정 파격
즉석밥 출시 땐 他社 ‘첨가제’ 언급
하림 ‘네거티브 전략’에 업계 불쾌
‘발주장려금’ 공세로 편의점 공략
다각화 행보, 이스타 인수전도 참전
물류·HMR까지…몸집 확대 능사 아냐
김홍국 하림그룹 회장이 10월 14일 서울 강남구 하림 본사에서 열린 ‘더 미식 장인라면’ 출시 행사에서 라면을 끓여 맛보고 있다. [뉴스1]
닭고기 업체 하림이 지난 10월 라면 시장에 진출하면서 내건 광고 문구다. 라면 주제에 ‘진짜’ 재료로만 만든 고급 제품이니 야식으로 먹어도 되고, 아이들에게 추천해도 된다는 내용의 광고다. 인스턴트 음식이라는 카테고리에서 빼달라는 문구도 눈에 띈다.
이제 막 라면 시장에 첫발을 내디딘 업체답게(?) 도발적인 문구를 담았다. 광고모델은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으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배우 이정재를 발탁했다. 일단 눈에 띄는 데에는 성공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림이 내놓은 라면의 이름은 ‘더 미식 장인라면’(이하 장인라면)이다. ‘더 미식’은 하림이 만든 가정간편식(HMR) 브랜드다. 장인라면을 시작으로 종합 HMR 브랜드로 육성하겠다는 목표다. 이런 계획의 일환으로 하림은 앞서 올해 3월 ‘순밥’이라는 즉석밥을 출시하기도 했다.
하림은 장인라면 출시에 맞춰 기자간담회를 열어 홍보활동에 시동을 걸었다. 간담회에는 김홍국 하림 회장이 나와 라면을 직접 조리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딸이 수년 전 라면을 먹다가 아토피 증상을 겪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장인라면이 이런 일을 겪은 뒤 딸을 위해 만든 프리미엄 라면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런 일련의 홍보 전략은 일단 성공적이었다. 미디어와 여론의 관심을 끌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최근 식품 시장의 관심사는 단연 건강이다. 코로나19로 건강한 음식을 찾는 이들이 더욱 많아졌다. 장인라면 역시 이런 수요를 겨냥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시장 특수성 고려 않은 발상
다만 장인라면에 호의적 의견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림은 장인라면의 가격을 2200원으로 책정했다. 국내 라면 시장 점유율 1, 2위인 신라면과 진라면(700원대)보다 세 배에 달하는 가격이다. 기존 시장에서 프리미엄급으로 여겨지는 신라면 블랙이나 오뚜기 라면비책 닭개장면의 가격이 1500~1800원인 점을 고려해도 파격적인 수준이다. 게다가 하림이라는 업계 신생 업체가 이런 가격을 책정했다는 점에서 더욱 눈길을 끌 만한 일이다.하림 측은 ‘합리적인 가격’이라는 입장이다. 하림에 따르면 신제품 출시에 앞서 실시한 소비자 조사에서 라면값이 비싸더라도 제대로 된 라면을 원하는 소비자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응답을 한 소비자는 전체의 약 30~40%에 달했다. 제품만 제대로 만든다면 수요가 충분하다는 의미다.
하림은 장인라면의 건더기나 육수 제조 방법 등을 차별화해 원가가 높아진 것도 판매가 상승에 영향을 줬다고 설명했다. 수프는 분말 소스 대신 육류와 채소를 20시간 동안 고아 만든 액상 수프를 썼다고 강조했다. 면발은 육수로 반죽한 건면으로 만들었다. 건면임에도 유탕면과 유사한 식감을 살렸다는 게 하림 측의 설명이다.
하림의 설명만 들으면 2200원이라는 가격이 전혀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라는 판단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농심이나 오뚜기, 삼양 등 기존 라면 제조업체 관계자들은 고개를 젓는다. 라면 시장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발상이라는 지적이다.
국내 라면 시장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2011년 4월 농심은 신라면 출시 25주년에 맞춰 ‘신라면 블랙’을 내놨다. 당시 농심은 이 제품이 ‘우골보양식사’라며 프리미엄 라면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다만 이때도 가격이 가장 큰 이슈가 됐다. 당시 신라면 블랙의 권장가는 1600원이었다. 기존 신라면의 두 배가 넘는 수준이다.
게다가 당시는 이명박 정부가 민생 물가 안정을 외치던 때였다. 실제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취임 이후 첫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라면값 100원 인상은 서민들에게 타격이 크다”고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시기가 좋지 않았다.
결국 정부가 나섰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신라면 블랙에 대해 과장광고를 했다며 과징금을 부과하며 ‘가격 논란’에 불을 붙였다. 공정위는 신라면 블랙이 기존의 신라면에 비해 품질이 고급화된 정도에 비해 판매 가격이 상대적으로 높게 책정됐다고 설명했다. 물론 공정위가 신라면 블랙의 가격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징계한 건 아니다. ‘설렁탕 한 그릇의 영양이 그대로 담겨 있다’ ‘완전식품에 가까운 식품’ 등의 광고 문구를 문제 삼았다. 하지만 시장 안팎에서는 정부의 ‘민생 물가 안정’ 기조에 따라 공정위가 움직인 결과라는 해석이 많았다.
결국 신라면 블랙은 출시 4개월 만에 판매를 중단했다. 다만 신라면 블랙은 이후 해외에서 꾸준히 인기를 끌면서 14개월 뒤인 2012년에 국내 판매를 재개했다.
이처럼 우리는 라면값에 무척 민감한 편이다. ‘서민 음식’의 대표 격으로 여겨지는 만큼 여론이 들썩이면 정부가 나서기도 한다. 농심이나 오뚜기 등 기존 업체들의 경우 이를 잘 알고 있다. 한 라면 업체 관계자는 “품질이 좋은 제품을 못 만들어서 내놓지 않는 게 아니다”라고 밝혔다. 라면의 가격 저항선이 워낙 공고한 탓에 제품의 품질을 무작정 높이기는 어렵다는 설명이다. 그러니 ‘적당한’ 가격에 맞는 제품을 만들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11월 2일 서울시내 한 대형마트에서 한 시민이 라면을 구매하고 있다. [뉴스1]
타사 겨냥한 ‘네거티브 방식’ 전략
그렇다면 하림은 라면 업계의 생리를 전혀 모르고 아마추어처럼 이런 결정을 했을까? 하림 역시 창립 이래 35년간 닭고기 전문 업체로 국내 식품 시장의 한 축을 담당해 온 기업이다. 아무리 라면 시장에서 신생 업체이지만 아무 전략 없이 무모한 시도를 했을 가능성은 낮다.하림은 지난 3월 즉석밥 제품인 ‘순밥’을 출시하면서 “집에서 밥 지을 때도 첨가제를 넣나요?”라는 홍보 문구를 내세운 바 있다. 경쟁사 제품의 경우 첨가제를 넣지만, 자사 제품에는 넣지 않았다는 ‘네거티브 방식’의 전략이다.
장인라면을 출시하며 내건 “감히 라면 주제에”라는 문구 역시 같은 맥락으로 여겨진다. 시중 라면 제품에 ‘감히’라는 수식어를 붙여놓은 모양새다. 기존 라면과 다르게 장인라면은 ‘요리’와 비슷하다는 네거티브 방식의 전략을 취했다.
기존 라면 업체들은 불쾌한 내색이다. 한 라면 업체 관계자는 “마치 시중 라면을 먹으면 건강에 좋지 않고, 하림 라면만 무해하다는 식의 주장은 소비자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데다가 전반적인 라면 시장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라면값 2200원도 어쩌면 큰 틀의 마케팅 전략의 일환일지도 모른다. 일단 눈에 띄어보자는 전략이다. 국내 라면값의 심리적 저항선은 ‘1000원대’ 정도로 여겨진다. 신라면 블랙 사건은 국내 라면값 1000원대의 벽을 깬 계기가 됐다. 오뚜기가 올해 초 고급 라면 브랜드라며 선보인 ‘라면비책’의 닭개장면 가격은 1800원이다. 이 정도만 해도 “너무 비싼 것 아니냐”는 반응이 많았다. 1000원대 후반으로만 가도 저항이 만만치 않다.
하림이 이런 분위기를 알고도 2000원대 가격을 책정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다. 국내 라면 시장은 농심과 오뚜기, 삼양, 팔도가 점유율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 점유율은 오랜 기간 공고히 유지돼 왔다. 신세계푸드나 풀무원 등이 시장에 진출했지만 공략이 쉽지 않았다. 하림은 이런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논란을 예측하고도 ‘고가 라면’을 내놨는지도 모를 일이다.
2800원 컵라면 사면 편의점이 1000원
하림은 제품 유통 과정에서도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쳐 눈길을 끌기도 했다. 주요 편의점에 입점하기 위해 점주들에게 이른바 ‘발주장려금’을 박스(12개입)당 1만2000원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2800원인 장인라면 컵라면 하나를 주문할 때마다 1000원을 주는 식이다. 기존 라면 업체들도 신제품을 출시하면 판매 장려금을 지급하곤 한다. 하지만 통상 제품가의 10% 이내로 책정한다는 게 편의점 업계의 설명이다.편의점주는 손해 볼 게 없기 때문에 장인라면을 발주해 매대에 올려놓을 가능성이 크다. 서울시내 한 편의점주는 “가격이 너무 비싸 팔릴 것 같지 않아서 발주를 안 하려 했는데, 장려금이 워낙 높으니 일단 한 박스를 들여놨다”고 설명했다.
하림이 이처럼 ‘신사업’에 적극적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선 사업을 다각화하기 위해서다. 하림뿐만 아니라 국내 여러 식품업체들이 이런 시도를 하고 있다. 출생률 저하로 인해 인구는 지속해 줄 전망이다. 이에 내수시장에서는 이제 하나의 품목만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참치캔 제품으로 잘 알려진 동원그룹의 경우 최근 수산업에 이어 축산업으로 사업을 확대하겠다고 밝히면서 눈길을 끌었다. 수산물과 축산물 등으로 단백질 식품을 제조해 판매하는 ‘종합 단백질 식품사’로 거듭나겠다는 목표다.
한국야쿠르트의 경우 올해 3월 사명을 ‘hy’로 바꾸면서 유통전문기업이 되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이를 위해 지난 9월에는 충청남도 논산시에 총 1170억 원을 투자해 물류센터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내놓는 등 분주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하림의 경우 전체 매출의 80%가량을 육계, 즉 닭고기 사업에 의존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수년간 매출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지난 2017년 8673억 원이던 연간 매출액은 2019년 8056억 원으로 주는 추세였다. 지난해 매출액은 8955억 원이다. 코로나19에 따른 치킨 배달 수요 증가 등으로 매출이 늘긴 했지만 상승세가 지속될지는 미지수다. 하림에 사업 포트폴리오 확대는 절박한 과제인 셈이다.
이에 따라 하림은 HMR 제품군 확대를 위해 5200억 원을 들여 전라북도 익산에 ‘하림푸드 콤플렉스’를 만들기도 했다. 이를 통해 하림의 HMR 브랜드인 ‘더 미식’의 중장기적 매출을 연 1조5000억 원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물류에서 항공까지 아우르는 행보
하림은 물류사업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지난 2015년에는 해운업체 팬오션을 1조 원을 들여 인수했고, 2016년부터는 서울 양재동에 도시첨단물류단지 조성에 나선 바 있다. 최근에는 이스타항공 인수전에 뛰어들며 눈길을 끌기도 했다. 사업 확장 속도가 여타 식품 기업 중에서도 공격적인 편이다.전망은 엇갈린다. 일단 하림이 닭고기 업체에서 만족하지 않고 기업의 몸집을 키우려는 ‘도전’을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있다. 반면 사업 확장에 따른 리스크를 우려하는 시선도 있다.
한 식품업계 관계자는 “하림을 비롯해 대부분의 국내 식품 기업은 각자의 영역에서 안정적인 경영을 하는 편이었지만, 이제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영역을 확장해 덩치를 키워야만 한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다만 사업 확장에는 언제나 리스크가 있기 마련이라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 기업에 큰 타격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할 필요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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