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사라진 세상’ 곧 도래할지도…
은행·편의점 브랜드명 함께 쓴 간판
필요하면 편의점서 은행과 화상 상담
디지털화 따른 점포 폐쇄 상쇄할 대안
금융 기술 진화에 규제 완화 영향도
서울 송파구 ‘CU마천파크×하나은행’(왼쪽)과 강원 정선군 고한읍 ‘GS25 x 신한은행’의 모습. [뉴스1, 신한은행 제공]
고승범 금융위원장은 지난 10월 28일 국내 은행장들과 취임 후 첫 간담회 자리에서 ‘은행의 위기론’을 언급했다. 국내에서는 네이버와 카카오로 대표되는 ‘빅테크’ 업체들이 빠른 속도로 금융의 영역을 잠식하면서 은행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는 데 따른 발언이다. 위기에 처한 은행의 변화가 필요하고, 정부도 이를 돕겠다는 취지다.
‘은행 위기론’은 오래전부터 끊임없이 등장했던 말이다. 특히 인터넷이 확장하면서 은행 업무 역시 온라인으로 대체될 거라는 전망이 지속해 흘러나왔다. 하지만 오랜 기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CU x Hana Bank’ ‘GS25 x 신한은행’
위기론은 최근까지 현실과 거리가 먼 이야기인 듯했다. 올해만 해도 KB와 신한 등 주요 금융 그룹들이 3분기 누적 사상 최대 순익을 기록하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고 위원장 역시 ‘위기론’을 언급하면서 부연을 해야 했다. “은행들이 사상 최대의 수익을 거두고 있는 상황에서 아직은 실현되지 않은 먼 미래의 일로 생각되긴 한다”는 설명이다.최근에는 달라진 분위기가 읽힌다. 국내 은행들의 최근 움직임을 보면 그간 안일했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두고 있긴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도태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느껴지는 행보다.
시중은행들은 여러 면에서 ‘체질 개선’에 몰두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시도는 편의점과의 적극적인 협업이다. 그간 은행들은 편의점 업체들과 ATM 입출금 수수료를 무료로 해주는 등의 가벼운 제휴를 맺어왔다. 각 은행이 직접 운영하던 ATM을 없애는 대신 편의점 ATM을 이용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제는 은행과 편의점 두 업체가 함께 전면에 나서서 점포를 만드는 시도를 하고 있다. 지난 10월 하나은행이 서울 송파구에 문을 연 ‘CU마천파크점’과 신한은행이 강원 정선군에 오픈한 편의점 혁신점포 1호점이 대표적이다. 신한은행은 GS25와 손잡았다.
두 점포는 간판부터 눈에 띈다. ‘CU x Hana Bank’ ‘GS25 x 신한은행’으로 은행과 편의점의 브랜드명을 함께 담은 간판이다. 편의점 점포이면서 은행 점포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10월 12일 문을 연 하나은행의 ‘CU마천파크점’에서는 종합 금융 기기 STM(Smart Teller Machine)을 통해 기존 ATM 업무는 물론 계좌 개설과 통장 재발행, 체크카드 발급, 보안카드 발급 등 영업점을 방문해야 처리할 수 있었던 업무를 볼 수 있도록 했다. 업무에 따라 은행 상담원과 화상 상담 연결도 할 수 있다.
10월 27일 오픈한 신한은행의 편의점 혁신점포도 마찬가지다. 체크카드나 보안카드를 발급할 수 있고 화상 상담을 통해 펀드나 신탁, 대출 등의 업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했다.
‘CU마천파크×하나은행’ 정문 앞에 계좌개설, 화상상담, 바이오등록, ATM업무라는 글귀가 보인다. [뉴스1]
지난해 문 닫은 은행 점포 304개
국내 주요 은행들이 앞다퉈 ‘편의점 점포’를 만드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오프라인 점포를 줄이는 대신 온라인 사업을 강화하는 ‘디지털 전환’의 일환이다. 특히 편의점 점포는 은행발(發) ‘디지털 전환’의 여러 단면을 보여준다.과거 은행은 소비자들이 편의점 내 ATM을 불편함 없이 이용할 수 있게 해주면 됐다. 이제는 다르다. 은행들은 공격적으로 점포를 없애고 있다. 이를 대신할 대안이 필요했다. 여전히 고령층은 모바일 앱 등에 익숙하지 않은 터라 은행 창구를 무작정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금융 당국 역시 지난해 말 은행에 점포 폐쇄 속도를 늦추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점을 해결할 수 있는 묘수가 바로 ‘편의점 점포’다. 편의점은 은행 점포를 대신할 만한 장점을 갖췄다. 골목골목 자리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24시간 문을 열고 있어 소비자의 접근성이 뛰어났다. 은행 입장에서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점포를 만들면서 비용을 확 줄일 수 있는 대안이 됐다.
국내 주요 은행의 점포 폐쇄 속도는 최근 급격하게 빨라졌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기준 국내 은행 점포는 6326개로 2015년 말(7281개)에 비해 955개 줄었다. 문을 닫은 점포는 2018년 23개에 이어 2019년 57개, 지난해 304개로 급증하는 추세다. 올해 역시 200여 곳이 폐쇄될 것으로 추산된다. 이에 따라 편의점 점포 등 이런 급격한 변화에 따른 ‘공백’을 대신할 수 있는 대책이 계속 나올 전망이다.
편의점 점포는 국내 은행권의 ‘디지털화’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이기도 하다. 기존에는 온라인으로만 진행할 수 있는 업무가 많지 않았다. 기술적으로 한계가 있었고, 제도적으로도 막혀 있는 경우가 많았던 탓이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통장을 만들려면 무조건 은행 점포에 찾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카카오뱅크와 케이뱅크 등 점포가 없는 은행이 출범하면서 이런 규제가 줄줄이 완화됐다. 이와 함께 은행권 전반의 기술 진화도 이뤄졌다.
시중은행들은 다양한 형태의 ‘디지털 점포’를 시험하고 있다. 신한은행의 경우 이미 55개 영업점과 2개 무인형 점포에 ‘디지털데스크’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디지털데스크는 은행 영업점 외부에서도 대면 상담을 통해 은행 업무를 볼 수 있게 한 기기다. 국민은행 역시 지난해 11월 서울 성북구 돈암동 지점에 ‘디지털셀프점 플러스’를 열어 소비자가 은행 업무를 스스로 처리할 수 있도록 한 바 있다. 우리은행은 올해 안에 디지털 무인점포를 개점할 계획이다.
인력 축소 따른 반발에도 과감해져
그간 은행들은 점포를 줄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수많은 일자리를 줄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적도 견고한 터라 ‘조직 슬림화’를 단행할 명분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빅테크의 등장으로 환경이 급변하면서 은행의 행보는 과감해지고 있다.물론 반발도 있다.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은 10월 25일 금융감독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최근 은행들이 금융산업의 공공성을 외면한 채 비대면 거래 증가와 디지털 전환을 이유로 경쟁적으로 영업점을 폐쇄하고 있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금융 당국 역시 은행들에 폐점 속도를 늦추라고 한 만큼 은행들이 속도 조절에 나설 수는 있다. 다만 시대 흐름을 고려하면 ‘편의점 점포’와 ‘무인점포’가 기존 은행 지점을 대체하는 작업은 지속할 전망이다. 한 대형 은행 관계자는 “국내 시중은행의 ‘디지털화’는 그간 여러 이유로 늦춰져 왔지만, 인터넷 은행이 출범하고 빅테크가 금융업에 진출하면서 변화가 절실한 환경에 맞닥뜨리게 됐다”고 했다. 이어 “동네 요지에 은행 점포가 자리하고 있던 시절은 과거의 추억이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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