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쌀농사는 대풍이다. 초여름 가뭄과 일부 지방의 장마 피해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평년작을 웃돌고 있다. 그렇지만 쌀농가가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쌀농사는 풍년인데 쌀농가의 소득은 별로 증가할 기미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쌀 생산증가로 쌀 재고량이 늘어가기 때문에 정부는 정부대로 재정압박의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쌀농가는 쌀농가대로 소득보전을 위한 특단의 대책을 촉구하고 있지만 양자를 다 충족시킬 수 있는 별다른 묘책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쌀은 가격탄력성과 소득탄력성이 낮다
먹고 살기가 어려웠을 때 쌀 증산정책은 주곡(主穀)을 자급자족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처럼 쌀이 남아도는 상황에서 쌀 풍작은 정부 재정을 압박하고, 쌀농가의 소득에도 별다르게 기여하지 못한다. 물론 부족한 것보다는 남아도는 편이 더 낫다. 그러나 이에 따른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꼭 낫다고만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쌀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쌀이라는 상품의 특성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쌀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농산물과 농산물에 근거한 농가소득 문제는 모두 농산물에 대한 수요 특성에서 연유한다. 첫째, 쌀을 비롯한 대부분의 농산물에 대한 수요는 가격 비(非)탄력적이다. 즉, 쌀 수요량은 가격변화에 그다지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쌀 가격이 10% 내린다면, 쌀 수요량은 10% 미만으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또 쌀값이 2배 오를 경우 쌀 수요량이 절반 미만으로 줄어들지도 않는다. 쌀값이 2배로 올랐다고 해서 사람들이 하루 세끼 먹던 밥을 한끼나 한끼 반으로 줄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수요가 가격 비탄력적이기 때문에 쌀 생산이 늘어나 가격이 내려가면 쌀농가의 총수입은 오히려 감소한다. 가격 하락으로 인한 총수입 감소효과가 수요량 증가에 따른 총수입 증가효과보다 더 크기 때문에 농가의 총수입이 줄어드는 것이다. 따라서 영농기술이 발달하고 기후 조건이 좋아 풍작이 되면, 쌀 가격이 내려감과 동시에 쌀농가의 총수입도 감소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다 자란 벼를 갈아엎는 이유
동일한 문제를 무 경작 농가에서도 찾을 수 있다. 무도 풍작이면 경작 농가가 다 자란 무를 수확하지 않고 갈아 엎는다는 보도가 나올 때가 있다. 이러한 행동은 무 가격이 하락한 데 대한 농민들의 분노가 표출된 것이다. 그러나 그 저변에는 무 공급을 줄여 가격하락을 방지해, 농가소득이 감소하는 것을 막아보려는 의지가 깔려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둘째, 쌀 수요에 대한 소득탄력성도 낮다. 즉, 소득이 10% 증가했을 때 쌀에 대한 수요는 10% 미만으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득이 예전보다 10% 더 증가했다고 해서 쌀을 예전보다 10% 더 먹지는 않는다.
소득이 증가하면 음식 소비패턴이 변화해 기존 쌀의 소비는 오히려 감소할 수도 있다. 같은 쌀이더라도 저공해 쌀이나 품질이 좋은 쌀, 특수 기능성 쌀을 선호할 것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90년에는 농가와 비농가의 1인당 쌀 소비량이 각각 160.5kg과 112.1kg이었으나, 2000년에는 각각 139.9kg과 89.2kg으로 줄어들었다. 은 연도별 1인당 쌀 소비량을 나타낸 것이다. 전가구와 비농가의 1인당 쌀 소비량은 1970년대 초반까지 증가하다가 그 이후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1970년 말경에 약간 증가하였다가 그후 다시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소득수준이 낮은 상태에서는 소득증가와 함께 쌀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나 소득수준이 더 높아지면 오히려 쌀 수요가 감소하는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느 수준 이상의 소득에서는 쌀은 소득증가에 따라 그 수요가 증가하는 정상재(正常財)가 아니라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1970년대 말에 쌀 소비가 증가한 현상은 2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소득 감소가 그 원인의 하나라고 판단된다.
식량안보론 재고해야
한편 농가의 쌀 소비량은 전반적으로 전가구나 비농가에 비해 많으나, 역시 1990년까지 증가하다가 그후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비농가에 비해 농가의 쌀 소비량이 많은 것은 쌀이 자가(自家) 생산품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쌀문제의 원천은 영농방법 개선 등으로 쌀 공급은 증가하는 반면에 소비증가는 그에 미치지 못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부가 가격 지지(支持) 정책을 실시하지 않으면 쌀의 시장가격은 내려가고 쌀농가 소득은 감소하게 된다. 물론 쌀을 비롯한 농산물 문제는 한국만이 아니라 모든 나라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다.
얼마전 중국과의 무역마찰로 마늘문제가 대두된 적이 있다. 그러나 여타 농산물보다 쌀문제가 더 심각하게 대두되는 이유는, 쌀은 한국민의 주곡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쌀은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국민정서가 형성돼 있다. 이에 따라 정치적인 이유로 쌀농가에 대한 소득보조 정책 등이 행해져 왔다.
주곡만은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논리의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식량안보를 지켜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깔려 있다. 일반 상품과 같이 외국에서 수입할 수도 있지만 국제 쌀시장을 독점하거나 국제관계가 악화되면, 쌀 가격이 올라가고 식량이 무기가 되는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이러한 우려의 기본이다.
그러나 소설가이자 경제평론가인 복거일씨는 일찍이 식량은 무기가 되기 어렵다는 점을 명백히 밝힌 바 있다. 첫째, 쌀을 비롯한 국제 농산물시장은 경쟁적이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국가가 독과점의 위치를 점하기 어렵다.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과정에서 농업부문의 타결이 가장 힘들었던 것은, 사실 각국이 자국의 잉여농산물 처리를 유리하게 하려는 기도 때문이지 식량안보 때문은 아니다. 이는 국제 농산물시장이 경쟁적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둘째, 잉여농산물 생산국은 대부분 서방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다. 따라서 이들 나라가 식량을 무기화하면, 그 나라는 비도덕적이라는 비난을 받음과 동시에 정권유지가 어렵게 된다. 셋째, 공업은 그 기반이 파괴되었을 때 다시 건설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농업은 훨씬 빨리 복구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놓고보면, 주곡인 쌀만은 자급자족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기는 어렵다. 혹자는 전쟁시에 식량이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전쟁시에 적국에 대해서는 모든 가능한 수단이 무기가 되므로 굳이 식량 무기화만 논할 필요가 없다. 전쟁이 일어났는데 적국에 보급품을 제공하면서 전쟁을 수행하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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