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세장을 상징하는 뉴욕 월가의 황소상.
그러던 중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국을 덮치자 K씨는 상상 이상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상업용 건물이나 땅 같은 부동산가격의 하락은 큰 빚이 없었기 때문에 오를 때를 기다리면 됐지만, 100억원 이상 들어간 펀드가 문제였다. 특히 50억원 이상을 투자한 일본과 중국펀드는 환헤지로 이중 손해를 보고 있었다. 일본펀드는 80% 손실이 발생했고, 중국펀드는 환헤지 연장을 위해 오히려 자금을 더 부어야 하는 기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금융자산은 많았지만 펀드로 거의 모든 자산이 묶였고, 임대료는 잘 들어오지 않아 여유자금은 바닥났다. 기업의 흑자부도 위기가 사업을 거의 접은 자산가에게 닥친 셈이다. 후진양성을 위해 시작한 장학사업도 중단 내지 연기를 고려해야 했다. 지금은 주식가격이 조금 회복돼 자산 일부를 정리해 유동자금을 확보하면서 숨을 돌렸지만, 지난 6개월은 K씨에게 너무나 엄청난 시련의 세월이었다. 상당수 부자가 규모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K씨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여유자산만 있으면 위기를 기회로 활용해 돈을 벌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이는 한국 사람 누구나가 아는 경제상식이 됐을 정도다. 그런데 외환위기가 일반인에게 충격을 줬다면,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는 거액자산가에게 큰 아픔을 주었다. 물론 일반 개인도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 담보대출로 구입한 주택가격의 하락, 대출받아 투자했던 펀드가격의 하락, 실직 등으로 중산층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위기에 빠졌다. 그런데 부자들도 그동안 쌓아온 부가 하루아침에 날아가 ‘일반인’으로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외환위기 당시에는 자금이 충분했고 위기는 곧 기회라는 ‘그들만의 투자상식’이 있었지만, 이번 경제위기는 달랐다. 우선은 여유자산이 부동산과 펀드에 잠기면서 자금이 메말랐다. 그리고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투자상식이 재테크 바람과 인터넷의 확산으로 이제는 ‘만인의 상식’이 됐다. 이 때문에 언론은 부자들이 어떻게 하는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런 상황에서도 보통 사람이 모르는 또 다른 방식으로 과거와 같이 당당한 승자로 거듭날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이다. 하나은행 재테크팀장으로 있는 필자에게도 기자들의 취재요청이 이어졌다. 이 때문에 필자도 조금 더 고민해야 했다.
외환위기 당시 경험을 돌이켜보면 부자들은 실질금리가 상승하면 금리 확정 채권상품에 가입하고, 금리가 내리면 채권을 팔아 주식에 투자하고, 다음에 부동산에 투자하는 절차를 밟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외환위기 때와는 달리 국내 금리는 생각만큼 크게 오르지 않았고, 환율도 2000원대까지 치솟지도 않았다. 그것은 정보가 공개돼 추가수익 확보의 기회가 적어지고, 외환위기 경험을 가진 정부의 대응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때는 땅 짚고 헤엄치기 식의 투자가 가능했지만 이제는 펀드와 부동산에 갇힌 유동성을 되찾기 위해 손절매와 같은 고통스러운 결정을 해야 했다. 필자가 본 부자들의 대응방식은 나이나 자산구성 등에 따라 달라 획일적으로 나누기는 쉽지 않지만 투자성향에 따라 분류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는 손실난 펀드를 과감히 손절매한 뒤 국내 주식 직접투자로 급선회한 적극적 투자자들이다. 이들 중 일부는 손실의 많은 부분을 회복했다. 이들은 투자성향이 원래 적극적이기도 하지만 급격한 하락 후에는 급속도의 반등이 있을 거라는 V자형 반등의 외환위기 경험을 충실히 따른 부류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상황을 보면 이들이 승자다. 최근 주식시장 흐름은 외환위기 후와 유사하다. 대형주보다 중소형주가 많이 오르고, 공모주와 같은 무위험 투자가 유행하는 것은 정말 비슷하다. 주식가격이 단기에 급등하자 이들은 다시 고민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정보통신(IT)버블과 같은 위기가 와서 주가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다.
주식 직접투자로 손실 회수
이 정도에서 만족하고 주식 비중을 줄여야 할지, 아니면 좀 더 가능성이 있다는 중국 주식시장 같은 곳으로 돌려야 할지 고민 중이다. 부자들은 먼저 움직이기 때문에 이들의 움직임은 향후 주식시장의 바로미터가 된다. 국내 주식시장은 국내 큰손보다는 외국인의 움직임에 의해 영향을 더 받지만, 이들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둘째는 부동산투자를 다시 늘려가는 부자들이다. 외환위기 이후 부동산가격이 크게 오른 뒤 펀드열풍이 불자 과거 부동산에만 투자하던 부자들이 부동산에서 자금을 빼서 펀드 투자로 옮긴 사례가 제법 있었다. 이들은 부동산으로 2배 이상 수익을 얻고, 다시 펀드에서 30~40% 이상 고수익을 얻어 좋아하다가 글로벌 금융위기로 오히려 큰 손해를 입었다. 이들은 “상업용 부동산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으면 이 정도 손해까지는 입지 않았을 것”이라며 크게 후회하는 사람들이다. 실제로 펀드투자가 활성화됐던 2005년 이후에도 중심지역의 상업용 부동산은 펀드 못지않게 올랐고,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도 하락폭은 주식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들은 경제위기가 터지자 평소 구매하고 싶었지만 높은 가격에 엄두를 못 냈던 강남 3구의 핵심요지 상업용 건물가격이 자신들의 목표금액대까지 떨어진 것을 오히려 기회로 판단, 상업용 건물을 사들였다.
부동산을 선호하는 부자들의 이런 움직임과 환차익을 보고 들어온 교포 및 일본계 자금 덕분에 상업용 건물 가격은 높아지는 공실률에도 불구하고 다른 자산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부동산에 투자한 부자들도 한국의 부동산가격이 현재 낮은 수준이 아니며 향후 가격이 급등하리라고는 보지 않는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전의 유가파동을 겪은 전통 부자들은 이런 종류의 경제위기 이후에는 인플레이션이 오게 마련이고 화폐가치가 하락하기 때문에 결국 실물인 부동산가격이 올랐다는 경험을 믿는 것이다. 또 설사 부동산가격이 크게 오르지 않더라도 부동산은 펀드처럼 50% 이상 마이너스 수익률을 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도 부동산투자에 일조하고 있다.
중소기업을 정리하고 부동산 임대업을 하는 L씨 사례다. 건물 2채로 임대업을 하면서 소일하던 그는 2006년 펀드 바람이 불자 건물을 한 채 팔아 2007년부터 펀드 투자를 시작했다. 대부분 중국을 비롯한 이머징시장의 해외펀드에 투자했는데 어림잡아 100억~150억원쯤 투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0억원에 산 건물을 15년이 지나 200억원 정도에 매각하고, 그중 많은 부분을 펀드에 투자했다. 그런데 글로벌 금융위기로 펀드가 반토막 나자 그는 몹시 후회하면서 손실이 적은 펀드를 환매해 여유자산을 국채에 투자했다. 금리가 내리자 국채를 팔아 공모주 같은 무위험 자산에 투자하면서 강남권에 재건축이 가능한 건물을 구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