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녀를 쇠고기나 돼지고기 같은 식재료와 동일선상에서 거론하는 경제학자들의 비인간적인 면모에 놀랄 수 있지만, 사실 우리도 일상적으로 자녀를 그런 수준에서 대하곤 한다. “결혼했나요?” “자녀는 있으신가요?” “몇 명인데요?” 하는 질문에는 상대방에 대한 경제력 테스트 의도가 숨어 있다. 특히 자녀가 몇 명이냐는 것은 경제력에 대한 간접적인 질문에 해당한다. “아들 둘에 딸 하나예요”란 대답에 거의 자동적으로 “부자시네요!”라고 반응한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현재 대한민국에서 자녀는 정상재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런데 특기할 건 가계소득이 수십 년 전보다 분명 늘었음에도 출산율은 점차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잘 알 듯 초등학교 입학 후부터 부담해야 할 천문학적인 교육비 때문이다. 교육비는 우리 국민의 종족번식 욕구마저 힘없이 꺾어버려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과학고 사교육비 月 수백만 원?

내가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는 “자네도 자식 크면 장담 못해” 하며 너무 놀라지 말라는 눈치를 줬다. 과학고의 장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학교에 왕따 문제도 없고, 재학생 대부분이 명문대나 의대에 진학해 장래 사회적 네트워크까지 탄탄해진다며 일장연설이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그는 “노후 대비 용도로 마련한 연금이며 저축을 모조리 해지해야 할 판”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그를 보며 요즘 유행하는 ‘에듀푸어(Edu Poor)’란 말이 떠올랐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가계적자에 시달리는 ‘에듀푸어’가 80만 가구가 넘는다고 한다.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에듀푸어 가장(家長)의 전형적 유형이,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중산층의 평균소득에 약간 못 미치는 40대 대졸자’라는 점이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일종의 한(恨)을 자녀교육을 통해 풀고자 하고, 자녀에게 높은 ‘스펙’을 물려주는 것을 부모의 도리로 여기는 계층이다. ‘말은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옛말이 있듯, 우리 민족의 높은 자녀 교육열이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된 것을 부인할 수 없긴 하다.
문제는 이들의 노후다. 이제 ‘100세 시대’가 됐다. 버는 시간보다 쓰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돈을 많이 버는 시기에 저축하지 못하고 자녀 교육비로 몽땅 ‘탕진’하는 것은 엄청난 도박이다. 온갖 정성을 들여 자식에게 투자했지만 남는 게 하나도 없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노후 대책 없는 부모는 자녀에게 원망을 사는 세상이다. 부모가 이렇게나 희생했는데 설마 자녀가 모른 척하겠나 하는 생각은 위험천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