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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초에 걸린 대양해군 건설

한국은 ‘해군 삼국지’에서 촉한(蜀漢)이 될 것인가

암초에 걸린 대양해군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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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鄭和 원정 이후 최대 해군력 파병한 중국 해군
  • ● 중국 의식해 파병한 일본, 일본에 지기 싫어 파병한 한국
  • ● SM-3 탑재 못한 세종대왕함, 그러나 3,4번함에는…
  • ● 헬기가 없어 사실상 빈 배로 다니는 독도함의 비애
  • ● 비밀 병기 ‘해군용 현무-3’, 북한 전역을 사정권에 넣는다
암초에 걸린 대양해군 건설

아시아 최대 상륙함으로 만들어졌으나 작전할 헬기가 없어 사실상 빈 배로 다니는 독도함.

2003년 ‘대양해군’(동아일보사 간행)을 펴낸 기자의 요즘 감회는 남다르다. 최근 대양해군의 꿈이 현실화하는 모습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좋은 사례가 창군 이래 최초의 전투함 파병으로, 3월13일 4500해리 떨어진 소말리아 아덴만으로 출항한 청해부대의 활약이다. KD-Ⅱ급 구축함인 문무대왕함을 모체로 한 청해부대는 5월4일 해적의 추적을 받는 북한 상선 다박솔호를 구해주는 등 성과를 올리고 있다.

동아시아 국가 가운데 소말리아 해역에 함정을 파견한 나라는 한중일 세 나라뿐이다. 그런데 세 나라 사이에 상대를 의식해 파병한 듯한 묘한 ‘기싸움’의 양상이 보인다. 가장 먼저 파병한 쪽은 자원 확보를 위해 아프리카 진출을 확대해온 중국이다.

‘제2의 鄭和 원정 ’추진한 중국 해군

중국은 소말리아 해적이 번번이 중국 선박을 나포해 거액을 요구하자 바로 행동에 나섰다. 중국은 남해함대에서 중국산 구축함인 ‘우한(武漢)함’과 ‘하이커우(海口)함’을 빼내고 보급을 담당하는 군수지원함 ‘웨이산후(微山湖)함’을 붙인 전단을 지난해 12월26일 출항시킨 것.

중국은 명나라 때인 1405년 환관인 정화(鄭和·1377~1433)로 하여금 217척의 배를 이끌고 동남아와 서남아, 그리고 아프리카 동쪽까지 항해하게 했다. 정화는 1433년까지 인도양을 가로지르는 대 항해를 일곱 차례나 성공시켰다. 그러나 7차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자 명나라 선덕제가 “나는 이제 다른 나라의 것에 관심이 없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더 이상 출항하지 못했다.



이 시기 명나라는 왜구의 침입에 시달렸기에, 왜구의 은신처인 유인도를 없애기 위해 자국민이 섬으로 나가 사는 것을 금하는 ‘해금(海禁)정책’을 취했다. 정화 함대의 출항 금지와 해금 정책으로 중국은 바다를 향한 출구를 닫았다.

이런 해양 경시 풍조는 중국 해군의 탄생 과정에도 투영됐다. 본래 중국 인민해방군에는 해군이 없었다. 그러다 국공(國共)내전 말기인 1949년 4월23일 화둥(華東)군구가 장쑤(江蘇)성 타이저우(泰州)에서 처음으로 해군사령부를 설치했다. 해군사령원(사령관)은 화둥군구 부사령원인 장아이핑(張愛萍)이 맡았고 병력은 644명이었다. 화둥군구는 장제스(蔣介石)군이 완전히 대만으로 이동한 다음에도 ‘대만 정복’을 제일의 임무로 삼았기에 다른 군구와 달리 해군을 육성했다.

화둥군구(지금의 난징군구)라는 ‘지역 육군’의 한 조직으로 시작한 해군이 올해 4월23일 설립 60주년을 맞자 중국 해군은 두 가지 행사를 준비했다. 하나는 정화의 원정 이후 최초로 전투함을 인도양 너머로 파병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국제 관함식을 거행한 것이다.

이러한 중국 해군의 약진에 라이벌인 일본의 해상자위대가 자극을 받았다. 해상자위대는 일본 상선이 소말리아 해적에게 위협받자 파병을 검토했으나 선뜻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다 중국 해군이 파병하자 구축함인 ‘사자나미(漣)함’과 ‘사미다레(五月雨)함’을 3월14일 출항시키고 군수지원함은 추후 보낸다는 결정을 했다.

이런 일본의 선택이 한국 정부를 자극했다. 한국 정부도 한국 상선 3척이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된 적이 있어 파병을 검토했으나 북핵 문제와 대포동 2호 발사 문제 때문에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다 일본이 파병 결정을 하자 문무대왕함을 차출해 일본보다 하루 앞선 3월13일 소말리아로 출항시켰다.

한중일, 한미일 해군 삼국지

소말리아 해적 퇴치작전은 미 해군이 중심이 된 다국적군 지휘체인 CTF(Com-

bined Task Force)-151이 주도한다. 한국은 문무대왕함 지휘권을 CTF-151에 맡겼다. 그러나 중국은 “미 해군의 지휘를 받지 못하겠다”는 명분으로, 일본은 “동맹을 금지한 평화헌법 때문에 동맹체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이유로 단독작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는 외견상의 차이일 뿐이고, 실제로는 모두 CTF-151의 통제를 받는다. 3국 함정은 CTF-151이 할당해준 수역에서 CTF-151이 의뢰한 상선 보호 작전을 펼치고 있다.

그로 인해 한중일 각 함정은 국가 자존심을 걸고 경쟁하는 ‘아덴만의 해군 삼국지’를 벌이게 됐다. 그러나 한국 해군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약해 보인다. ‘소말리아 3국지’에 참여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해왔지만, ‘유비의 촉한(蜀漢)’에 머물러 있는 것이 한국 해군의 현실이다.

한국 해군이 대양작전 능력을 보여준 또 하나의 사례로는 4월5일 북한이 대포동 2호(북한 이름은 ‘은하 2호’)를 쏘았을 때를 꼽을 수 있다. 한국은 미국 일본에 이어 이지스 구축함을 보유한 ‘유삼(唯三)’한 나라다. 소말리아 파병 경쟁이 ‘한중일 삼국지’라면, 대포동 2호 추적을 놓고 벌인 동해 경쟁은 ‘한미일 삼국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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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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