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2월호

‘닥터위콤’으로 세계 어학실습기 시장 평정

  • 곽희자 자유기고가

    입력2006-12-27 11: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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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6년 첫 부도. 중소기업 최초의 법정관리. 10년 만에 법정관리 조기 졸업. 지난해 다시 부도 위기. 상처투성이 기업을 이끌면서도 그는 절망하지 않는다. 핵심기술이 변함없이 빛을 발하고 있는데다 시장 또한 활짝 열려 있기 때문이다.》
    여러 방면에 박식하기로 소문난 한 대학교수가 “내가 영어만 좀더 잘했더라면 훌륭한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었고, 세상도 더 많이 배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털어놓은 바 있다.

    IMF체제를 전후한 상황에, 그리고 저간의 여러 통상협상 자리에서 우리 대표들은 짧은 영어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거나 불이익을 당하곤 했다. 이런 우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 최근 정부 기관과 기업들은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을 요직에 앉히는 것은 물론, 신입사원을 뽑을 때도 어학능력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 지구촌의 장벽이 무너지는 21세기에는 커뮤니케이션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주)서부산업 윤만희(尹滿熙·56) 회장은 ‘외국어는 세계를 제패하는 무기’임을 일찍이 자각하고 한국의 어학실습기 시장을 개척한 인물. 그는 첨단 어학실습기 ‘위콤’(어학실용)과 ‘닥터위콤’(가정용)을 개발해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워냈다.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사용되던 어학실습기는 모두 일본 소니와 내셔널 제품이었다. 윤회장은 이를 순수 국산인 ‘위콤’으로 대체해왔다. 현재 ‘위콤’은 청와대를 비롯, 군부대와 학교, 학원 등 1만2000개의 어학실에 설치돼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300여개 교실), 미국(200여개 교실), 사우디아라비아(100여개 교실), 태국, 브라질 등 세계 30여개국에도 수출해 소니와 내셔널, 유럽의 텐버거와 함께 세계 4대 어학실습기 메이커로 위상을 굳혔다.

    2000년을 며칠 앞두고 서부산업을 찾았을 때 윤회장은 “‘중소기업인 성공학’을 취재하려면 ‘성공한 기업인’을 만나야지, 왜 나처럼 자격 없는 사람을 찾아왔느냐”며 쓴웃음을 지었다. “독자적인 발명품을 세계적 브랜드로 성장시켰고, 한 가지 사업을 20년 이상 지켜온 것만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니냐”고 되묻자 그는 “지금까지 그런 자존심과 긍지만으로 버텨왔는데, 이젠 회의에 빠져 힘에 부친다”고 했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져 현재 법원에 화의신청을 해놓은 상태라는 것.



    이대로 무너질 순 없다

    서부산업은 86년에 한 차례 부도를 내 중소기업으로는 최초로 법정관리를 받았는데, 당시 유예기간을 6년이나 남겨놓고 법정관리에서 벗어나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적이 있다. 그런 회사가 또다시 부도 위기에 놓였다니….

    “법원이 지난해 12월20일자로 화의절차 개시 결정을 내렸어요. 거래은행이 우리 계약조건만 수락해주면 이 난관은 충분히 헤쳐갈 수 있는데….”

    현재 100억원 정도의 부채를 안고 있는데, 윤회장은 이자를 3년 후에 지불하게 해주고, 이후 5년 동안 원금과 이자를 함께 갚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은행에 요구했다. 그러나 은행측은 아직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윤회장은 매일같이 은행을 설득하고 있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정보통신 분야의 벤처기업이 아니면 기업도 아니라는 인식이 퍼져 있어요. 언뜻 보기에 ‘국가 시책’에 부합되지 않을 듯한 업종의 기업들은 은행에서 말을 꺼내기조차 힘들어요.

    국가든 기업이든 지금까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눈여겨 봐야 하지 않을까요? 한 기업이 지금 당장 빛을 못 보고 있다고 해서, 형편이 좀 어렵다고 해서 숨통을 끊어서야 되겠습니까. 기업이 지금껏 쌓아온 기술력과 경영 노하우를 제대로 살펴보라는 겁니다.

    사업에서는 ‘중간평가’를 한다는 게 어렵습니다. 사업을 하는 도중에는 ‘성공했다’거나 ‘실패했다’고 쉽게 단정지을 수 없어요. 끝까지 가봐야 아는 것 아닙니까? 노름판에서도 판이 다 끝나봐야 누가 돈을 땄는지 알 수 있잖아요.”

    윤회장은 서부산업 수준의 자산과 기술력, 브랜드 인지도를 갖춘 벤처기업을 창업하려면 10년 이상 300억원을 투자해야 될 것이라고 했다.

    “솔직히 나도 이제 손놓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이건 누군가가 해야 될 일입니다. ‘위콤’이 설치된 1만2000여개 교실의 사후 관리도 책임을 져야 해요. 발명가로는 유일하게 대통령상과 금탑산업훈장을 받아 많은 발명인들에게 희망을 줬던 내가 여기에서 좌절하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발명가의 말로란 게 저렇구나’ ‘발명을 하면 뭐하나’고들 하겠죠. 이것 때문에라도 지금 주저앉을 수는 없습니다.”

    서부산업이 이렇듯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은 외환위기의 여파로 교육부가 예산을 줄이면서 ‘위콤’의 학교 납품이 중단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120억원 정도이던 연간 매출액이 절반 수준으로 급감했다. 윤회장은 남들처럼 구조조정을 하지도 못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주거래 은행인 S은행이 부실은행으로 지정되면서 금융지원도 제때 받을 수 없었다. 그 무렵 800만달러 규모의 미국 수출 기회가 있었지만 금융지원을 받지 못해 무산됐다.

    신제품 반응 좋아

    말이 좋아 구조조정이지, 지금껏 어려운 형편에도 묵묵히 함께 일해온 사람들더러 ‘회사가 망하게 됐으니 나가달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지난해 ‘닥터 위콤’의 광고 관계로 만났다가 경영전략 수립과 마케팅 업무까지 위임받고 이 회사 사장으로 영입된 이한우씨(47·방송인, 컨설턴트)는 윤회장에 대해 “성실하고 정직하며 국가관이 투철한 사람이다. 하지만 욕심이 없어 자기 것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성격은 기업인으로는 약점이 아닐 수 없다”고 평가했다.

    윤회장도 이를 인정한다. 하지만 이 사업을 통해 개인의 욕심을 충족시키기보다는 그의 기업이념처럼 교육공학을 구현하고 고용을 창출하며, 우리 상표를 붙인 어학실습기가 세계 속의 브랜드로 계속 성장하길 바랄 뿐이다. 회사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은행이 자신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면 3년 안에 회사를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다고 자신한다. 갈수록 외국어에 대한 수요가 늘 것이기 때문에 어학실습기 회사로는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한 서부산업의 성장 가능성이 높은데다, 현재 개발 중인 외국어 맞춤교육용 소프트웨어를 어학실습기와 접목시켜 학습효과를 높일 경우 수익을 낼 여지가 크다는 것.

    윤회장은 “최근 개발된 ‘닥터위콤 멀티프로’와 ‘닥터위콤 폰랩’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고 시장도 충분히 확보됐기 때문에 이번 위기만 넘기면 확고하게 자리잡을 수 있다”고 자신했다.

    ‘닥터위콤 멀티프로’는 기존 오디오 기능에 비디오 기능(CD롬 사용)을 보탠 것이다. 이 기계를 TV 모니터에 연결하면 시청각 멀티미디어 교육이 가능하다. 따라서 어학실습실에서 헤드폰을 끼고 하던 어학 공부를 일반 교실에서 영상을 통해 할 수 있게 된다.

    각급 학교의 어학실습실은 대개 48석 정도인데, 학교마다 1000∼2000명씩 되는 학생들이 이 공간에서 공부하다 보니 기껏해야 1주일에 1시간밖에 이용할 수 없다고 한다. ‘닥터위콤 멀티프로’는 이런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개발됐다. 전국의 초·중·고교 교실은 20만개. 이만하면 시장성이 충분하다는 얘기다.

    ‘닥터위콤 폰랩’은 한정된 교육공간을 넘어 원격 어학실습실 개념을 구현했다. 윤회장은 이 기계를 사는 사람에게 외국어 교재를 주고 공부하게 한 뒤 교사들이 전화로 학습과정을 체크, ‘사후 관리’를 맡도록 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우선 올해 100여명의 교사를 양성할 예정.

    이와 함께 전국에서 100여명의 주주 대리점 업자를 모집, 1인당 1억원씩 출자하게 해 대리점을 독립채산 형태로 직접 경영(학생 관리)하게 하고, 회사 전체 이익금으로는 주식을 배당한다는 구상이다.

    최근 ‘닥터위콤 폰랩’은 TV홈쇼핑 프로그램에 소개되어 한 시간에 400여대가 팔리는 개가를 올렸다. 한국어 영어 독어 불어 등 여러 외국어에 능통한 이한우 사장은 “외국어를 혼자 공부하는 데는 ‘닥터위콤 폰랩’만큼 훌륭한 학습장비도 드물다”고 치켜세웠다.

    서부산업은 소유 부동산을 처분하면 부채를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지만, 팔려고 해도 적정 가격에 사겠다는 원매자가 나서지 않아 은행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고 한다. 윤회장은 “기업이 거래은행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 적어도 채무자가 주장하는 대로 기업이 운영되고 있는지, 어떤 제품을 만들고 있는지, 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은 어떤지 정도는 은행측이 현장 조사를 해보고 결정을 내렸으면 좋겠다”며 아쉬워했다.

    서부산업은 20여종의 어학실습기를 생산한다. 어학실습실에 설치되는 주장치에서 좌석에 부착되는 녹음기, 헤드세트, 기타 주변장치에 이르는 모든 제품을 자체 생산해 납품한다.

    윤만희 회장이 어학실습기 사업에 뛰어든 것은 24년 전인 1976년. 그 무렵 정부는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추진하면서 외국어 능력 습득에 지대한 관심과 비중을 두고 있었다. 당시 윤회장은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무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하루는 사무실에 들른 친구가 ‘이젠 외국어를 잘해야 기를 펴는 시대니 어학실습 장비를 만들어 팔면 재미가 좋을 것 같다’고 해요. 다른 사업도 아니고, ‘외국어를 공부하는 데 필요한 교육기기’라는 소리를 들으니 돈 버는 것을 떠나 마음이 끌리더군요. 나 자신 많이 배우지 못해 한이 많았던 터였으니까. 그때부터 이곳저곳 돌아보기 시작했죠.”

    ‘전자(電子)’의 ‘전’자도 몰랐다는 그는 1년여 동안 세계 각국의 관련 전시회를 돌아다니며 연구를 계속했다. 당시의 어학실습기는 녹음기에 주장치와 통신을 연결한 시스템이었는데, 자기 음성을 동시 녹음해서 교재의 음성과 비교해 보는 기능이 일반 녹음기와 다른 점이었다.

    어학실의 주장치 앞에 앉은 교사가 주변장치(카세트, 전축 등)를 통해 프로그램을 내보내는데, 시작하기 전에 카운터를 0으로 맞춰 놓고 숫자를 봐가면서 재생과 정지, 반복을 거듭했다. 교사가 한 번 읽어주고는 학생들로 하여금 따라 읽게 하거나 속도를 보통으로, 혹은 느리게 해서 들려주는 게 주된 기능이었다.

    윤회장은 기능은 그대로 만들되 그 과정을 자동화하면 상품성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디어를 들고 KAIST와 전자통신연구소를 찾아갔다. “이런 물건을 만들려는데 가능하겠느냐”고 물었더니 가능하다는 대답이 나왔다. 그래서 76년 서부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7명의 연구인력을 고용, 본격적으로 제품 개발에 들어갔다.

    3년 만인 79년, 첫 작품 ‘위콤’이 탄생했다. 디자인은 투박했지만 기능에 대해서는 많은 전문가들이 감탄했다. 하지만 일반 소비자들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위콤’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당시 정부예산회계법에는 학교에 장비를 납품하려면 납품 실적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돼 있었다. 서부산업에 이런 실적이 있을 리 없으니 가는 곳마다 문전박대를 당했다.

    윤회장은 자동차에 ‘위콤’을 싣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꺼내놓고 기능 하나하나를 설명했다. 성능을 알리기 위해 무료로 장비를 설치해 주기도 했다. 이처럼 적극적인 홍보로 제품 인지도가 높아지자 80년에는 4억여원을 들여 경기도 곤지암에 560평의 대지를 마련하고 새마을공장을 지었다.

    무리한 개발비 투자로 부도

    지속적인 기술 개발에 힘입어 82년에는 중소기업진흥공단으로부터 ‘중소기업 우량업체’로 지정되기도 했다. 85년에는 기존 어학실습기 기능에 8비트 컴퓨터와 카세트 기능을 결합한 신제품을 만들어냈다. 이 제품은 선택한 문장을 원하는 횟수만큼 자동으로 반복해 들려주도록 설계됐다.

    그런가 하면 시작점과 끝점을 정해 구간 반복이 가능케 했으며, 학습자가 따라 읽어야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도록 함으로써 기계가 사람 역할을 대신하게 했다.

    윤회장은 이 기술로 발명특허를 내고 이 기술을 적용한 신형 ‘위콤’과 ‘닥터 위콤’을 선보였다. 그러나 그 동안의 무리한 개발비 투자로 이듬해인 86년 첫 부도 위기를 맞게 된다.

    그는 부도만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위콤’과 관련 자료를 들고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던 사공일씨 집으로 무작정 찾아갔다. 자정이 넘어 귀가한 사공수석을 붙들고 사정을 호소했지만, 그는 “중소기업 경영하는 게 어려운 줄은 잘 알지만, 돈 문제라면 은행으로 가야지 나한테 오면 어떡하느냐”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는 매일같이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때마다 사공수석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일주일째 되던 날, 집 앞에서 사공수석을 기다리던 윤회장은 새벽 두 시가 되도록 그가 나타나지 않자 자신이 왔다 갔다는 흔적이라도 남겨두려고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뜻밖에 사공수석이 나타났다. 몸이 아파 일찍 귀가해 쉬고 있던 그는 윤회장을 보자 “밤늦게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냐”며 핀잔을 주고는 “밝은 날 사무실에서 얘기나 한번 들어보자”며 다음날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 결국 부도가 나고 말았다. 윤회장은 사방에서 돈을 빌려 우선 급한 어음부터 막아놓고 청와대로 전화를 걸었다. 청와대에선 벌써 윤회장에 대해 조사를 마친 상태였다. 청와대는 서부산업이 독자적인 기술을 가진 중소기업인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부도처리를 취소함과 동시에 8억원의 신규 대출까지 주선해줬다.

    하지만 이 돈으로 30억원대의 부도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86년 8월, 서부산업은 마침내 최종 부도를 맞고 말았다.

    “사람들은 부도가 나면 죽는 줄로 아는데, 쥔 걸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칠 때가 힘들지, 모든 걸 놓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요.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속 편했을 때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맨손으로 서울에 올라왔을 때와 부도를 냈을 때였습니다. 반대로 가장 고통스러웠을 때는 그 동안 번 돈이 내 돈이라고 착각하고 그걸 안 빼앗기려고 허우적거릴 때였어요.”

    부도를 낸 뒤로는 돈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고 한다. 돈이란 잠시 내가 관리하고 있는 것이지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

    부도 후 그는 집을 처분하고 가족과 함께 가재도구를 챙겨 아예 공장으로 이사했다. 그리고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법정관리는 위기를 맞은 기업이 규모가 아주 크거나 중요한 업종이어서 그 기업의 파산이 사회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될 때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기업의 부채 상환을 유예해주는 일종의 특혜다. 30억원의 ‘푼돈’을 막지 못해 무너진 서부산업 같은 기업의 법정관리 신청을 받아줄 리 만무했다.

    윤회장은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변호사 사무장 시절의 솜씨를 발휘, 직접 신청서를 써서 담당 판사를 찾아갔다. 그는 판사 앞에서 “우수한 기술을 갖췄고 회생 가능성이 높은 기업이라면 규모에 상관없이 기회를 줘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판사는 “일리 있는 얘기지만, 당신이 낸 신청서를 받아줬다간 망한 중소기업들이 모두 법정관리를 받겠다고 몰려들 게 아니냐”며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이번에도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귀찮을 만큼 판사를 설득하는 한편, 당시 대법원 기획실장이던 한 대법관의 집으로 ‘위콤’을 들고 찾아가 밤늦게 귀가하는 그에게 큰절을 하며 눈물로 호소했다.

    지성이면 감천이었다. 며칠 후 법원 조사단은 그의 공장을 둘러보고 법정관리를 결정했다. 중소기업으로는 처음 있는 법정관리였다. 윤회장은 “그때 3가지 기록을 세웠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그때껏 법정관리를 받은 회사 중 가장 규모가 작았다는 것, 부도를 낸 사주가 법정관리인을 맡았다는 것, 법원이 정한 기간보다 6년이나 앞서 법정관리에서 벗어났다는 게 그것.

    부도가 난 후 그는 30여명의 직원들과 함께 공장에서 생활하며, 눈만 뜨면 일을 했다. 그렇게 일하는 것이 즐거웠다고 한다. 그는 “기술로 먹고 사는 사업은 하루 세 끼 밥 먹는 것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지, 일에서 해방돼 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그런 사업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이렇듯 일을 일로 여기지 않는 자세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체득한 것이다. 그는 1944년 충남 서천에서 4남 6녀의 셋째로 태어났다. 중농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거들어야 했다.

    “아침 동이 트면 창호지 위로 햇살이 살짝 비쳐요. 그러면 아버지는 헛기침을 하시죠. ‘얼른 일어나라’는 사인이죠.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서 나오면 곧장 들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새벽장이 열리면 한 손에는 책가방을, 다른 손엔 시장에 내다 팔 물건을 들고 학교를 가기도 했죠. 일이 싫다거나 좋다거나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요. 그저 당연한 일과였으니까.”

    그는 땀 흘려 일하는 일상을 통해 뿌듯한 성취감을 맛봤다.

    “오뉴월 뜨거운 땡볕이 내리쬘 때 2000평쯤 되는 보리밭 앞에 서면 막막해요. 언제 저걸 다 베나 싶어서. 그런데 낫을 들고 베 나가다 보면 온몸에 땀이 쫙 흐르면서 그 넓은 보리밭이 어느새 다 베어지죠. 그때 기분이 얼마나 짜릿하던지… 그런 쾌감 때문에 아직도 일을 지겨워하지 않는 것 같아요.”

    어린 시절 보리를 베듯 그저 앞만 보고 묵묵히 일한 덕에 그는 10년 만인 96년, 법정관리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법정관리가 끝나던 바로 그날 금탑산업훈장을 받아 기쁨은 더 컸다.

    법정관리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88년 서울올림픽과 그 후 일련의 국제행사에서 활동할 외국어 통역가이드들을 ‘닥터위콤’으로 교육시키면서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기술력을 인정받아 수출의 길이 트였기 때문이다.

    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을 유치한 중국도 대회를 앞두고 통역가이드 교육을 위해 ‘닥터위콤’을 대량 수입해갔다. ‘위콤’이라는 상표가 세계적으로 인지도를 높이는 계기가 됐다.

    “그 무렵 미국 UCLA 어학실에 기기를 설치했는데, 오프닝 행사에 오라고 연락이 왔어요. 가서 보니 절반쯤이 동양 학생들이고 그중에 3분의 1은 한국 학생들이더군요. 그 아이들더러 ‘여러분은 이곳에 미국말을 배우러 왔지만, 미국말을 가르치는 기계는 한국산이니 긍지를 가지고 배우라’고 했습니다. 뜨거운 박수가 터져나왔어요. 가슴이 뿌듯해지더군요. 사업하는 보람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어요.”

    해외에서는 이렇게 인정을 받았지만, 국내에서는 국산 제품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외면당하기도 했다. 지방의 한 고등학교에 어학실을 설치했더니 시설을 둘러본 교장이 “야, 이 기계 참 좋다”며 감탄했다. 그래서 “내가 이 기계 만들면서 엄청나게 힘들었다”고 했더니 교장은 깜짝 놀라면서 서무과장에게 “누가 국산 사라고 했느냐”며 듣기 민망할 만큼 역정을 냈다. 그는 설비를 뜯어갈 생각으로 “교장선생님 아들은 미제입니까, 일제입니까” 하고 내뱉었다. 그 말에 교장은 입을 다물었지만, 돈을 받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특허 기술은 생존의 전제

    ‘닥터위콤’의 명성이 알려지자 대기업이 유사 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 전자회사는 OEM으로 계약을 하자며 접근했다가 기술만 가로채고는 “가격이 안 맞는다” “기술을 신뢰할 수 없다”며 계약을 파기했다. 그리고는 유사 제품을 만들어 팔았다. 윤회장은 특허침해라고 따졌지만, 이 회사는 막무가내였다.

    그는 이 회사에 전화를 걸어 “우리가 당신네를 상대로 싸워봐야 질 게 뻔하다. 아예 우리 회사를 줄 테니 다 가져가라. 대신 나는 중앙청이 바라보이는 우리 회사 앞에 ‘○○전자가 망해야 중소기업이 산다’는 플래카드를 써붙이겠다”고 했다. 그러자 이 회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생산을 중단했다.

    서부산업 총판을 하던 사람과 공장장이 ‘닥터위콤’의 기술을 도용, 자기들끼리 제품을 만들어 판 적도 있다. 윤회장은 이들을 특허침해로 고소했는데, 최근 이들의 기술 도용 사실이 인정돼 승소했다. 그는 “특허를 침해해서 만든 제품은 절대로 원래 제품보다 성능이 좋을 수 없다. 특허기술을 피해서 만들려다 보니 물건이 조잡해지고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

    “이렇게 남의 기술을 도용해 만든 제품을 정부와 소비자들이 사주면 누가 애써 발명을 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스스로 우리 기술의 싹을 잘라버리는 자살행위예요. 우리가 우리 기술을 보호해줘야 해외에 나가서도 우리 특허가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중소기업인에게는 불굴의 기업가 정신도 필요하지만, 특허기술이 있어야 성장할 수 있거든요.”

    발명문화재단 설립하고파

    윤만희 회장은 앞으로 ‘닥터위콤’을 이용한 외국어 교육사업을 펼 계획이다. 이제는 중국어 수요가 영어에 못지않게 늘어날 것이라는 판단 아래 95년 서울 고척동에 5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북경어언문화대학 한국사무소를 설립, 중국어를 가르쳐 왔다.

    이곳에서 1년간 공부한 학생들은 중국의 랭귀지 스쿨인 북경어언문화대학 2학년생으로 편입할 수 있는데, 그동안 200여명이 편입했다.

    올해부터는 ‘닥터위콤 폰랩’을 통한 영어 교육사업도 벌일 생각이다. 그러나 계획은 그저 계획일 뿐, 그 실천 여부는 거래은행의 결정에 달려 있다.

    윤회장은 “한국에서 중소기업을 한다는 것은 사막에서 농사를 짓는 것과 같다”며 향후 회사를 확고한 위치에 올려놓기만 하면 기꺼이 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했다. 그는 그 시점을 3년 후쯤으로 보고 있다. 그 후에는 그간 일에만 매달리느라 한 번도 오붓한 시간을 함께 갖지 못한 아내의 손을 잡고 여행을 떠나려 한다.

    아들이 회사를 경영할 능력이 있고 본인도 원한다면 물려주겠지만, 둘 중 어느 한 조건이라도 맞지 않으면 물려줄 생각이 없다. 사업이란 게 너무 힘든데다 많은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다. 발명문화재단을 설립해, 재능은 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발명가들을 지원하겠다는 포부도 있다.

    이한우 사장은 “그 동안 서부산업은 제품을 개발하고 회사를 키우는 데만 주력했지, 수익성을 높이는 데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며 “앞으로 광고와 홍보를 통해 소비자들에게 다가가는 창구를 마련하고 적극적으로 판촉활동을 전개하면 회생은 물론, 괄목할 만한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양심대로 살면 법이 필요없다’는 좌우명으로 평생 우직하게 일만 하며 살아온 윤회장의 재기는 수많은 중소기업인과 가난한 발명가들에게 힘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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