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데 우연치고는 묘하게도 당초 이날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현재와 미래의 위협과 문제’라는 주제로 부시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에 대해 연설할 예정이었다. 당일 대형테러가 발생하는 바람에 지하 벙커에 몸을 숨겨야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라이스가 이날 연설에서 말하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4월1일, ‘워싱턴포스트’는 라이스의 연설문 일부를 입수해 1면 머릿기사로 실었다. 보도에 따르면 이 연설문에는 테러위협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는 반면, 탄도미사일을 미국이 직면한 최대 위협이라고 규정하고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을 미국 안보의 최우선 과제로 발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미국에게 가공할 공포와 피해를 안겨준 위협의 실체는 부시 행정부가 그토록 강조했던 탄도미사일이 아니라 칼로 무장한 테러리스트가 납치한 민간 여객기였다. 위협에 잘못 대응했던 부시 행정부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9·11 테러 직후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의 유력 언론과 민주당은 부시 행정부가 안보의 최우선 순위를 잘못 선정했다며 MD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쏟아냈다.
잘못된 우선순위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사상 초유의 국가안보 위기를 전면에 부각시키면서 두 가지 발 빠른 조치를 취했다. 하나는 “여객기로 공격한 테러집단이 대량살상무기(WMD)와 탄도미사일을 사용하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며 MD를 정당화시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과 알 카에다의 연계를 주장해 이라크 침공의 명분을 쌓아가는 것이었다.
이는 MD와 이라크 점령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열망을 반영한 것이었으나 MD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전문가들은 국가안보를 절대시하는 당시 분위기에 눌려 일제히 입을 닫아야 했다. 결국 부시 행정부는 9·11 테러를 WMD 위협을 부각시켜 MD와 이라크 침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정권의 위기’를 ‘제국주의의 기회’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순조로워 보였던 부시 행정부의 ‘제국을 향한 행진’은 최근 들어 커다란 벽에 부딪히고 있다. 이라크에서의 미군 사망자가 2003년 5월1일 부시 대통령의 종전선언 이후 오히려 늘어나면서 미국인들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데다, 침공의 명분으로 삼았던 후세인과 알 카에다의 연계나 WMD는 이라크가 아닌 ‘부시의 마음’ 속에 있었던 것이 속속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점령과 MD 계획에만 집중한 나머지 테러위협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미국을 더 위태롭게 만들었다는 문제제기도 힘을 얻고 있는 추세다.
MD, 미 대선 핵심쟁점 되나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부시 행정부는 거꾸로 MD 구축을 가속화하는 것으로 돌파구를 마련하려 하고 있다. 실제적인 작동 여부와 관계없이 탄도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미국 안팎에 배치하게 되면, ‘절대안보’를 실현한 지도자 이미지를 미국 국민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다는 계산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계산 역시 제대로 맞아떨어지지 않고 있다. 대선을 앞둔 시점에 부시 행정부가 MD 구축을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그 동안 침묵해왔던 미국 언론과 민주당이 비판의 포문을 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막대한 예산낭비, 미사일 위협의 적실성, 기술적인 결함, 생산·배치 이전에 면밀한 실험평가를 거치도록 되어 있는 의회법 등을 제시하면서 MD에 대한 공세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전직 합참의장과 해군제독 등이 포함된 49명의 미국 퇴역장성들까지 가세해 부시 행정부의 MD 구상에 비판을 쏟아냈다. ‘뉴욕타임스’ 역시 4월1일자 사설을 통해 ‘펜타곤이 2004년 대선을 앞두고 2000년 부시 후보의 MD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바보같이 돌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부시 행정부가 대선을 앞두고 무리하게 MD를 강행하면 할수록 이에 대한 반발도 커지고 이에 따라 11월 대선의 핵심쟁점 가운데 하나로 MD가 부상할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