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의 정의를 규명한 자료들을 보면 테러가 뭔지 한마디로 정의하려는 것 자체가 섣부른 일임을 깨닫게 된다. 네덜란드 정치학자 알렉스 슈미트는 700쪽에 이르는 저서 ‘정치 테러리즘’(1999년판)에서 테러에 대해 무려 100가지가 넘는 정의를 내렸다. 슈미트는 1992년 유엔 범죄분과위 패널에 낸 한 보고서에서 테러에 대한 개념규정에 전쟁범죄에 적용되는 규정을 원용하자는 제안을 했다. 1949년에 만들어진 제네바협정을 기본으로 삼는 국제법의 ‘전쟁범죄’란 비전투원(민간인)에 대한 의도적 공격, 민간인을 인질로 삼는 행위, 그리고 포로를 죽이는 행위 등이다. 슈미트는 이 같은 전쟁범죄 개념에 바탕을 두고 테러리즘을 ‘평화시의 전쟁범죄’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 규정도 모호한 구석을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테러리스트’ 당사자는 전시상황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스스로를 전투원으로 여긴다.
제네바협정을 비롯한 여러 국제법에 따라 전쟁 당사국들은 특정 종류의 무기(예를 들어 생화학무기)와 전술을 사용할 수 없고, 비전투원(민간인)을 공격하거나 포로를 죽이지 못하도록 돼 있다. 이를 어길 경우 ‘전쟁범죄’로 비난받게 된다. 그렇지만 테러리스트들은 흔히 비전투원과 인질을 죽이곤 했다. 그런 살상행위는 일반적으로 전투행위라기보다 테러행위로 여겨진다.
그러나 당사자인 테러리스트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행위의 결과(민간인을 비롯한 테러대상자들의 죽음)보다는 정치적 동기를 강조한다. ‘테러’라 일컬어지는 데도 거부반응을 보인다. 또 당국에 붙잡혔을 경우 일반 범죄자와 달리 ‘정치범’ 또는 ‘양심수’로 대우해주길 바라며 더 나아가 ‘전쟁포로(POW)’로 다뤄주길 요구한다.
그 한 사례가 북아일랜드에서 영국 지배세력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여온 아이레공화군(IRA) 소속 죄수들이다. 그들은 1981년 영국정부가 그 전까지 IRA 소속 죄수들에게 적용해온 ‘특수신분(정치범)’ 대우를 없애려 하자 “우리들은 일반 범죄자가 아닌 전쟁포로”라며 무기한 단식투쟁을 벌였다. 이 일로 보비 샌즈(당시 26세, 66일간 단식), 프란시스 휴즈(당시 25세, 59일 단식) 등 모두 10명이 끝내 숨을 거뒀다.
테러는 ‘약자의 무기’인가
2002년 1월부터 쿠바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 안에 억류돼 있는 600여명의 ‘테러 용의자’들을 ‘전쟁포로’로 대우해야 하는가 또한 논란거리다. 부시 행정부는 “아프간에서 붙잡힌 그들은 테러리스트 또는 ‘적 전투원(enemy combatant)’이라서 1949년 국제사회가 맺은 제네바협약에 따른 전쟁포로 대우를 받을 수 없다”는 주장을 펴왔다. 그래서 지금껏 재판 없이 장기간 그들을 구금해왔다.
관타나모 수용자 가운데는 오사마 빈 라덴의 경호원 출신도 있지만, 600여명 모두를 ‘테러리스트’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국의 아프간 침공 당시 파키스탄을 비롯한 이슬람권의 젊은이 다수가 ‘대미 지하드’(성전)를 벌이는 데 동참하겠다며 아프간으로 갔었다. 관타나모 수용자들 가운데는 그런 젊은이들도 끼여 있다. 국제 인권단체들은 수용자 가운데 다수는 단순 가담자일 것으로 본다. 2003년 12월 미 샌프란시스코 항소법원의 한 판사는 “국가 비상사태라도 미국 헌법의 가치를 지키고 행정부의 기본권 유린을 막는 게 사법부의 의무”라며 관타나모 수감자들이 재판받을 권리가 있다고 밝혀, 수감자들에게 작은 희망의 빛을 비춰주었다.
대다수 테러 분석가들은 테러가 ‘정치적 폭력’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각자 서 있는 자리에 따라 다른 평가를 내린다. ‘테러와의 전쟁’이란 용어 자체도 미국(대(對)이슬람 과격파), 영국(대IRA), 이스라엘(대팔레스타인), 러시아(대체첸 분리주의) 쪽의 용어다. 그 반대편에 선 세력의 시각에선 ‘민족독립투쟁’이자 자유를 위한 투쟁이다. 흔히 테러는 ‘약자의 무기(weapon of the weak)’라 일컬어진다. 테러리스트는 ‘테러’말고는 마땅한 저항수단이 없다고 주장한다. “무장력에서 압도적인 국가조직(정규군과 경찰)에 맞서려면 테러는 불가피한 폭력”이라는 논리다. 결국 테러리즘이란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담긴 상대적 용어다.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투쟁에 큰 동력이 되었던 ‘부천서 성고문사건’은 당사자인 문귀동 경장과 전두환 정권에게 있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름이었다. 그저 ‘부천서 사건’ 또는 ‘부천서 권양 사건’이 적당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렇듯 같은 현상이라도 어떻게 이름 짓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진다.
테러를 둘러싼 명칭 논쟁도 마찬가지다. 공격을 받은 자의 눈에는 분명히 ‘테러’지만, 죽음을 마다 않고 자살폭탄 공격을 하는 무장세력의 시각에서 보면, 그들의 투쟁은 정치적 존립을 위한 ‘성전(聖戰)’이고, 그 와중에 죽은 사람은 ‘순교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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