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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과 KGB 女스파이의 ‘10년 밀애’

“당신 말대로 소련 영사를 만나고 왔소… 사랑의 키스를 전하오”

아인슈타인과 KGB 女스파이의 ‘10년 밀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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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과 KGB 女스파이의 ‘10년 밀애’

물리학자 존 로버트 오펜하이머.

마가리타 코넨코바가 남편과 함께 뉴욕에 처음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13년 전인 1923년. 뉴욕에서 열린 소련 미술 전시회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에 왔다가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이내 뉴욕 상류층 사교계의 주요 멤버가 됐다. 그녀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한 러시아 여성은 그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가리타가 순식간에 호사스러운 미국의 귀부인으로 변신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뉴욕의 사교계를 엿보자마자 그녀는 러시아에서 입던 옷들을 당장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고 했다. 볼셰비키 문화에서는 증오의 대상에 불과한 은빛 망사스타킹이 미국에서는 경탄의 대상이었으니까. 그 스타킹은 이내 그녀의 매끈한 다리를 부드럽게 타고 올랐고, 그녀의 손톱은 진줏빛 매니큐어로 빛났으며, 그녀의 온몸을 치장한 화려한 보석들은 보는 이의 눈을 부시게 했다.”

이후 그들은 20년 이상 미국에 머물렀는데, 이미 모스크바에 있을 때부터 집시를 연상케 할 정도로 방탕했던 두 사람의 생활방식은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들이 즐겨 열던 파티는 이름 있는 예술가들이 모이는 사랑방으로 유명했다. 전설적인 성악가 페오도르 샬리아핀이 이들과 함께 독주를 벌컥벌컥 들이켰고, 세계적인 무용가 이사도라 던컨은 이들이 연 파티에서 고삐 풀린 말처럼 거침없이 춤을 췄다.

원래 시골 출신인 마가리타는 수줍음이 많은 여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 생활하던 무렵 그녀는 이미 ‘팜 파탈(Femme fatale)’로 변신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또한 그녀의 매력에 사로잡힌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연회가 한참 진행중일 때 마가리타는 아무 거리낌없이 그의 손을 잡고 침실로 사라지기도 했다. 그녀의 남편이 얼마나 상심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상처 입은 그가 흐느끼면서 침실문을 두드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질 정도다.

아인슈타인과 KGB 女스파이의 ‘10년 밀애’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그렇지만 남편은 이내 아내의 자유분방한 삶을 인정하고 거기에 자신을 맞추게 된 듯하다. 그녀는 남편이 가장 즐겨 그리는 모델이었다.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술 취한 여인’ ‘나비’ 같은 조각 작품의 모델이 되었고, 이들 작품은 거부할 수 없는 마력으로 수많은 남성을 매혹하곤 했다. 그녀가 프린스턴의 핵물리학자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러한 이력이 작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라낙 호수의 별장

아인슈타인이 이 ‘유난히 호기심 많은 연인’을 처음 만난 1935년 무렵, 그는 두 번째 부인인 엘자와 결혼한 상태였다. 그러나 1년 후 엘자가 세상을 떠나자 마가리타는 자주 프린스턴대로 아인슈타인을 찾아왔다. 당시 이들을 지켜본 사람들은 “그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애완동물인 쥐를 데리고 나타났다”고 회상한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않고 대신 애완동물을 키웠는데, 그녀의 주변 인물들은 그녀가 “출산으로 인해 몸매가 망가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첫 만남으로부터 4년의 시간이 지난 1939년 어느 날 아인슈타인이 그녀의 남편에게 쓴 한 통의 편지가 남아 있다. 그때까지 남편 세르게이는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채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인슈타인은 마가리타의 건강을 걱정하는 한편, 평소 자신이 잘 알고 지내던 의사의 소견서 한 통을 첨부했다. 그녀가 공기가 맑은 사라낙 호숫가에서 잠시 요양을 취하는 것이 좋겠다는 권고였다. 사라낙 호수는 아인슈타인의 요트가 정박한 곳이고, 인근에는 그가 빌려놓은 별장도 있었다.

두말할 것 없이 편지는 남편의 눈을 피해 그녀와 밀애를 즐기고 싶은 아인슈타인의 의도를 담고 있었다. 빡빡한 물리학 논문에 가려져 있던 노벨상 수상자의 또 다른 면모다. 이 편지는 효과가 있었고 사라낙 호수의 별장은 곧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은신처가 됐다.

1941년 마가리타는 미국에 거주하는 러시아 이민자들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히틀러의 나치독일이 소련을 기습적으로 공격한 것에 격분한 사람들은 ‘재미 러시아 협력모임(American Society for Russian Relief)’를 조직하게 되는데, 이 모임에는 라흐마니노프나 바이올리니스트 야샤 하이페츠 같은 저명인사가 다수 참여했다. 남편 세르게이는 이 단체의 중앙위원이었으며, 마가리타는 회장으로 선출됐다. 그녀의 사진은 연일 신문을 장식했고, 덕분에 마가리타는 미국 정·재계의 영향력 있는 최고위층과 쉽게 접촉할 수 있었다. 이 무렵 그녀가 교유한 이들의 명단에는 엘리너 루스벨트 영부인도 포함되어 있다.

이 무렵만 해도 미국과 소련에는 독일이라는 공통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원폭실험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2차 세계대전이 마무리되던 1945년에 이르러 상황은 달라진다. 종전이 가까워옴에 따라 미국과 소련의 패권경쟁이 가속화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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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정리 안윤기 주간동아 베를린 통신원 friedensstift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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