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영화 ‘버스데이 보이’의 한 장면.
여기서 굳이 ‘미국 아카데미상’이라고 지칭하는 이유는 ‘영국 아카데미상’도 있기 때문이다. 영국 아카데미는 그들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보다 먼저 열린다. 2월12일 열린 영국아카데미상에도 박세종 감독의 ‘버스데이 보이’가 최우수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했다. 역시 한국인 최초다.
11년 전 배낭여행 중 멜버른에서 만난 호주 여대생과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애틋한 사랑을 나누다가 7년 전 결혼해 호주에 정착한 가난한 미술가 박세종. 그는 힘든 이민생활에도 결코 꿈을 잃지 않았다.
동양의 서정이 담긴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는 그의 꿈은 아주 어려운 선택이었다. 편하게 살아갈 길이 없는 것도 아니었건만, 그는 고집스럽게 힘든 길을 선택했다. 애니메이션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의 작업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애니메이션의 세계는 첩첩산중이었다. 그는 가난을 견뎌야 했고, 주변의 무관심을 극복해야 했다.
9분 남짓한 짧은 시간에 6·25전쟁이라는 대서사와 동양의 정서를 고스란히 담아낸 ‘버스데이 보이’는 바로 그가 소망해온 꿈의 결정체다. 영화를 보면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을 자연스레 믿게 된다.
시드니의 잠 못 이루는 밤

박세종 감독이 소주로 기쁨의 축배를 들었다.
필자는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주로 심야시간을 이용했다. 밤늦도록 이어지는 박 감독의 숱한 인터뷰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고, 충분한 시간을 빌려 그의 ‘꿈’을 꼼꼼하게 해석해보고 싶어서였다.
인터뷰는 보통 밤 10시 이후에 시작되어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나마 밤 10시까지 박 감독을 물고 늘어지는 호주 기자들을 “그만하라”고 내보낸 다음에야 인터뷰가 가능했다. 시드니엔 서울처럼 심야영업을 하는 곳이 없어 인터뷰는 매번 레스토랑에서 시작돼 박 감독의 집에서 끝이 나곤 했다.
박세종 감독의 꿈을 해석하는 일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꿈의 해석’은 프로이트의 저서 타이틀이지만, 필자에겐 한 남자의 무서운 집념, 혹은 불굴의 의지를 해석하는 일이었다. ‘맨땅에 헤딩하기’도 유분수지, 한국도 아닌 호주에서 무일푼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니….
그는 이제 여러 언론사의 인터뷰 요청에 시달리는 유명 영화감독이다. 하긴 2004년 한 해 동안 35개의 각종 상을 챙겼으니 그리 이상할 건 없다.
호주 TV들은 1월26일 하루 종일 미국 주재 특파원을 연결해 박세종 감독의 쾌거를 전하면서 박 감독의 인터뷰와 영화 ‘버스데이 보이’의 주요 장면을 내보냈다. 그는 하루 동안 호주 국영 ABC TV를 포함, 무려 6개 TV와 인터뷰했고 ‘시드니 모닝헤럴드’ 등의 신문사와 10여 차례의 인터뷰를 가졌다.
‘시드니 모닝헤럴드’의 케이트 그라트 기자는 ‘생일을 맞은 소년(Birthday Boy)의 꿈 같은 선물’이라며 박 감독의 아카데미상 후보 선정 기사를 길게 썼다. 케이트 기자는 “열정이 넘치는 감독으로 소문난 한국계 박세종이 마침내 큰일을 해냈다”고 전했다. 박 감독은 그 인터뷰에서 ‘구름 위에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라는 말을 남겼다.
박 감독의 이메일 계정이 다운될 정도로 수많은 축하메일도 답지했다. 특히 호주 퀸즐랜드주 피터 비티 총리는 축하메일에 “2004년 브리스번 영화제의 폐막작품으로 ‘버스데이 보이’를 상영하도록 해준 박 감독에게 거듭 감사한다. 꼭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기를 기원하다”고 썼다.
1월26일은 마침 호주의 건국기념일이어서 박 감독의 경사는 더욱 빛났다. 그의 집 근처인 달링하버에선 불꽃놀이가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필자가 박 감독을 축하하기 위해 맥주로 건배를 제의하자 그는 “맥주를 즐기지 않는다”며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러나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헤어지려는 순간, 박 감독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소주는 아주 잘 마십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