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달수는 일본 속의 조선문화를 찾아 20여 년간 답사여행을 하고, 그것을 글로 남겼다. 취재 당시 신라 쪽을 바라보고 있는 한 절을 찾아 절 관계자에게 설명을 듣고 있다.
1914년 평양 태생의 김사량은 평양에서 중학을 마치고 19세 때 일본 규슈의 사가(佐賀)고교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독문과에 진학했다. 김사량은 1939년 소설 ‘빛 속으로’가 아쿠타가와상 후보로 선정되면서 이름을 떨쳤다. 1945년에는 중국의 조선군 학도병을 위문한다는 구실로 대륙으로 건너가 팔로군 항일부대로 탈출을 꾀했다. 이어 화북(華北) 조선독립동맹 소속의 조선의용군에 투신했다. 가히 극적인 인생이다. 김사량과 김달수는 죽이 맞았다. 김달수의 글 ‘나의 아리랑 노래’에 이런 대목이 있다.
“김사량은 ‘벌레’라는 작품을 ‘신조(新潮)’에 쓴 바 있다. 이것은 도쿄의 시바우라(芝浦)에서 부두노동자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를 묘사한 작품이다. 거기에 ‘지기미(제기랄, 빌어먹을, 분하다는 의미)’라는 별명의 노인이 나온다. 그는 어딜 가도 사람들의 발길에 차이고, 침 세례를 받는 등 벌레같이 취급당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존재를 초월해 동포, 즉 민족을 사랑해 마지않는다. 한국인이 바다에서 돌아오면, ‘그들을 맞이하여 기뻐 날뛰는 지기미의 모습은 석양을 업고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이슬람교도처럼 아름다웠다’고 작품을 끝맺는다. 당시 일본에 살던 우리 한국인들의 민족적인 행동과 사랑은 외형상으로는 이와 같이 ‘기괴’한 방식을 빌리지 않고는 표현할 수 없었다. 아니 이렇게 밖에 쓸 길이 없었다.”
김사량이 가마쿠라나 요코스카에서 글쓰기에 몰두할 무렵, 김달수는 다섯 살 위의 그를 형처럼 따르며 어울렸다. 민족에 대한 의식도, 저항적인 기질도 비슷했다. 김사량은 늘 김달수에게 “너라면 쓸 수 있어” 하고 자신감을 심어줬다. 김달수는 그에 힘입어 ‘쓰레기’라는 작품을 ‘문예수도’에 발표했다. 그리고 ‘곱추 두목’을 ‘신조’에 냈다. 김사량은 김달수의 문학인생에 길잡이가 됐다.
1941년 12월8일 일본이 미국 하와이를 기습 폭격, 태평양전쟁에 돌입했다. 일본에서는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었다. 그동안 특고가 축적해둔 정보 파일을 근거로 김달수가 사는 가나가와현에서만 일본인을 포함해 ‘불온분자’ 200여 명이 잡혀들어갔다. 전쟁을 효율적으로 치르기 위한 내부 단속이었다.
이때 김사량과 김달수의 형 김성수도 끌려갔다. 김사량은 글에 드러난 저항적 성향 때문이었고, 김달수의 형은 한국 빈민 노동자에게 집을 내줘 불평불만을 떠들게 했다는 게 이유였다. 한국인들이 모여 ‘폭동을 일으키지 않으면…’ ‘반란이라도 해야만…’ 같은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이다. 김성수는 불온분자로 몰려 1년 넘게 감옥살이를 했다.
“같은 일본인 아닌가요?”
김달수는 일본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을 못했다. 형의 옥바라지를 하느라 요코스카 경찰서에 드나들던 그는 우연히 경찰서 옆에 있는 가나가와 일일신문사를 보고 지원서를 냈다. “한국인이지만 열심히 해보겠다”며 사장 앞으로 편지를 쓰고, 대학 지도교수의 추천서도 첨부했다. 며칠 뒤 신문사에서 한번 만나보자는 전갈이 왔다. 알고 보니 히구치 다쿠산로(?口宅三郞) 사장도 독학을 한 터였다. 히구치 사장은 입사를 허락하며 김달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는 은행 지점장 중에 ‘리노이에(李家)’라는 성을 가진 이가 있는데, 그 사람은 자기가 한반도의 자손이라는 것을 당당히 밝히고 다닌다네. 자네도 한국인이라고 해서 주눅들지 말고, 열심히 일이나 하게.”
김달수가 입사한 뒤 곧바로 전시 언론통폐합으로 1현1지(1縣1紙) 작업이 이루어졌다. 가나가와 일일신문은 요코하마의 ‘가나가와현 신문’과 합쳐져 ‘가나가와 신문’이 됐다.
김달수가 기자가 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 김사량이 풀려났다. 일본인 문인 작가들의 호소가 효력을 발휘한 것이다. 김사량은 김달수에게 옥중에서 들은 ‘희망적인 얘기’를 전했다.
“나랑 같이 구속되어 있던 일본인 경제학자가 하는 말이, 전쟁 초반에는 일본의 기세가 좋지만 반드시 미국한테 지고 만다고 해. 생산력에서 미국을 따라갈 수가 없으니 이 전쟁은 종국에 일본이 패배한다더군.”
기자는 나쁘지 않은 직업이었다. 전철회사에서 무료 전차탑승권이 나오고, 영화관에도 아무 때나 무료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리며 당시 세무서에 근무하던 일본 처녀 아리야마 미도리(有山綠)와 연애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화의 차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김달수가 그에게 대학 졸업년도를 물었을 때다.
“아, 그건 기원 2600년!”
서기 1940년이건만, 미도리는 ‘일본서기’의 허무맹랑한 기록을 근거로 한 황국사관에 따라 그렇게 대답했다. 군국주의 사회에서 자란 그를 탓할 순 없지만 김달수는 자신의 글 ‘내 아리랑의 노래’에 표현했듯 “본능적으로 등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김달수가 1년여의 열애 끝에 이별을 선언하자, 미도리가 “이젠 같은 일본인 아닌가요?” 하고 반문했다. 김달수는 그때 결코 일본인일 수 없는 자신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서울행을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