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은 새로운 세계질서 형성의 중심에 섰다. 집 짓기에 비유하자면 설계자와 현장감독을 겸했던 셈인데, 이후 미국은 대단한 야심과 비전으로 세계정치의 무대를 움직였다. 그 무렵 전세계에 미국의 영향력을 투사하고 각국 여론에 영향을 미쳤던 통로의 하나가 세계 주요지점에 설치된 미국 공보원이었다. 오늘날 표현대로라면 공공외교(public diplomacy)의 현장거점이었던 셈이다.
이 공보원마다 미국인의 무한한 자긍심을 상징하는 미국 독립선언서를 걸어 놓았다. 주지하다시피 미국 독립선언서에는 미국 탄생의 이념, 즉 ‘자결(自決)의 원칙에 따라 정부를 조직할 수 있는 권리’ ‘생명과 자유, 그리고 행복 추구의 권리’ ‘그러한 인간의 천부적 권리를 위반(violate)하는 정부가 있을 때, 그 정부를 변경(alter or abolish)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미국은 그렇게 혁명의 권리에 의해 탄생한 나라였고, 자결의 원칙을 실천하기 위해 만들어진 나라였다. 미국은 전후 외교정책을 통해 미국을 탄생시킨 위대한 신념과 가치를 전 세계에 확산시키고 싶어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미국은 전후 신생 독립국들에 대해 영향력을 확보하려 했지만, 그들 국가의 국민은 스스로 정치체제를 결정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바로 독립 시기의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가 하면 냉전 초기 미국이 후원하던 보수정권들에 대해 그들 나라의 국민적 저항이 거세졌을 때 저항세력들이 미국 독립정신을 원용하면서 혁명의 신념과 권리를 주장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미국 정부는 모든 미 공보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떼어내라고 지시하기에 이른다.
자유와 인권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의 가치, 혁명주의의 신념, 민족자결의 원칙 등은 미국 외교를 구성해왔던 핵심적 요소들이다. 그러나 냉전기 국제정치 역사에서 보듯 미국이 내세웠던 원칙들은 오히려 국익 추구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미국 외교의 현실주의적, 실용주의적 전통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권이나 민주주의는 별 실익이 없는 구호들인 셈이다. 세계의 주요 지역에서 시장을 확보하고 미국의 영향권하에 둬야 한다는 이익 최우선의 관점에서 보자면 분명 그렇다.
이렇듯 국익에 대한 전략적 판단과 외교정책을 통해 미국적 이상을 실현하려는 노력은 미국 외교사의 어떤 시대에도 양립적으로 존재한다. 미국 외교정책을 움직여온 두 개의 바퀴와 같다고도 할 수 있다. 통상 전략적 판단이라는 실용주의적 접근법이 이상을 압도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시대와 지역, 국가에 따라 반대의 경우도 존재했다. 이상과 현실, 국익과 가치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는 미국 내부에서 논쟁적 이슈가 되기도 하고, 국민의 정치적 선택에 따라 추진동력과 핵심 행위자도 다르게 구성된다. 요컨대 국익이라는 이름의 물질적 이익과 보편적 가치 추구는 미국 외교의 두 얼굴이며 어찌 보면 미국 외교 자체에 내재하는 일종의 패러독스이기도 하다.
갈팡질팡 외교의 이유
최근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불타오르고 있는 민주화 열망과 확산 추세를 바라보는 미국의 입장도 이와 다르지 않다. 2011년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에서 시작된 중동의 민주화 열기는 한편으로는 미국의 외교적 수사(修辭)를 더욱 화려하게 장식하게 만들었고, 다른 한편으로 미국의 전략적 고민을 더 깊게 만들고 있다.
민주주의와 자유의 확산이라는 ‘가치’ 중심적 시각에서 보면 미국 외교정책은 물 만난 고기 같아야 맞다. 전통적으로 인권, 자유 등 보편적 가치와 미국적 이상을 실현할 것을 강하게 주장해왔던 측은 민주당 정부다. 예컨대 민주주의, 인권, 분쟁의 평화적 해결 등을 외교정책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하려 했던 지도자로는 민주당 출신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인권외교를 맹렬하게 추진하려 했던 지미 카터 대통령이나 탈(脫)냉전기 미국의 세계전략 방향을 개입과 확산(engagement · enlargement)으로 잡았던 빌 클린턴 대통령도 모두 민주당 출신이었다. ‘확산’ 전략이 민주주의 가치의 세계적 확산을 의미하는 것임은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2011년 2월, 이집트 국민의 민주화 요구가 드세지면서 무바라크 대통령이 미국의 도움을 간절히 원했을 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내세웠던 원칙도 이전 민주당 정부의 전통을 지키고 있었고, 미국적 이상을 재천명하고 있다. 그는 이집트 사태에 대해 “폭력 사용에 대한 반대” “이집트 국민이 가져야 할 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 정보획득의 자유는 보편적 원칙이라는 점” “변화(민주화)의 필요성” 등을 강조했다. 힐러리 클린턴 장관을 비롯한 국무부 핵심요직의 정책결정자들도 중동 민주화 사태를 환영하면서 미국 외교가 민주주의를 갈구하는 아랍 지역 국민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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