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시 행정부는 목하 고민중이다. 과연 1기의 대북 강경정책과 6자회담 전략을 유지해야 옳은가. 그간의 접근방식이 오히려 중국의 영향력과 위상만 강화해줬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향후 북·중·러 동맹의 출현 가능성마저 제기되는 상황. “할말은 하겠다”며 주도적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한국은 이 상황을 이용해 미국의 방향전환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2004년 6월23일 베이징에서 개최된 제3차 6자회담.
이를 뒷받침하듯 2004년 12월 초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국회 방미외교단은 “미국 내에서 중국의 역할에 대한 우려와 견제의 목소리가 높다”며 “이것이 한국의 주도적 역할론을 미국이 받아들인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이 6자회담에서 중재자 역할에 충실하기보다는 이를 자국의 외교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으며, 이에 따라 북핵 문제가 장기화하고 동북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는 우려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견제론’으로 요약될 이 같은 미국 내의 분위기는 이전부터 감지되었다. 대표적으로 미 의회의 초당적 기구인 ‘미중경제안보재검토위원회(UCESRC)’는 2004년 6월 중순 발표한 연례보고서를 통해 “(북핵 문제 해결과 관련해) 중국은 북한에 대해 갖고 있는 막대한 정치적·경제적 지렛대를 충분히 행사하지 않았다”고 불만을 토로하면서, “앞으로 북핵 문제에 대한 중국의 태도와 역할은 미중관계를 결정짓는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미국이 대중(對中)정책의 맥락에서 북핵 문제를 바라보고 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대북정책은 대중정책의 하위개념”
워싱턴에서 이러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대략 두 가지 상반된 맥락이 있다.
우선 살펴볼 것은 매파적 시각. 부시 1기 행정부의 강경한 대북(對北)정책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북한을 압박하는 데 중요한 열쇠를 쥔 중국이 미국 주도의 대북한 압박정책에 동참하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어왔다. 특히 이들 그룹은, 2004년 4월 딕 체니 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미국의 강경정책에 호응해줄 것을 요청한 것에 대해 중국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반면 그 직후 중국을 방문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는 파격적인 예우를 해주며 우호협력 관계를 과시한 것에 강한 불만을 토로한 바 있다.
다른 하나는 대북 포용정책의 맥락이다. 이들은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책으로 오히려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위상과 영향력이 확대됐음을 지적한다. 즉 부시 행정부가 북한과의 직접 대화를 거부하고 6자회담을 고집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이 회담의 주최자인 중국의 역할이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분석이다. 이러한 시각은 민주당 대통령후보이던 존 케리도 공유한 바 있다. 케리는 자신이 집권하면 북한과의 직접대화를 통해 핵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공약하기도 했다.
이처럼 대중정책의 맥락에서 대북정책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미국 내에서 높아가는 것과 달리, 중국은 이미 북한에 대한 전략적 입장을 정리하고 북한과의 관계강화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패권주의의 칼날이 결국 미국 자신을 겨냥할 것이라는 인식을 강화하면서 북한을 ‘완충지대(buffer zone)’로 삼으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북한의 핵무장을 방지하는 것도 중요한 목표이지만, 북한의 붕괴 방지를 더 상위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의 안보 전문가에게서 이러한 시각을 확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2004년 10월에 만난 외교관 출신의 한 전문가는 “북한이 핵무장을 하더라도 중국은 평화적 해결 원칙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북한의 핵무장을 저지하기 위해 무력사용도 고려할 수 있다는 미국의 방침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한반도, 특히 북한을 둘러싸고 미중 사이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서면서 북핵 문제는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미국 내에서는 중국의 역할에 대한 회의론이 부상하고 있고 중국 내에서는 미국의 대북한 비타협주의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지정학적으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에 놓인 한반도에, 이제 북핵 문제를 계기로 남북한을 자신의 영향권 아래에 두려는 미중간 원심력이 본격적으로 작용하게 된 형국이다.
‘외교적 수혜자’와 ‘군사적 수혜자’
기실 6자회담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생각은 애초부터 달랐다.
일방주의로 무장한 부시 행정부는 북핵 문제와 관련해 다자회담을 들고 나왔을 때 핵문제를 ‘북한 대(對) 미국’이 아니라 ‘북한 대 국제사회’의 대결구도로 끌어감으로써 북한에 대해 국제적인 압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특히 북한에 대해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중국의 역할을 기대했다. 부시 행정부가 줄곧 “(북한을 제외한 6자회담 참가국들이) 통일 전선을 구축해야 한다”며 ‘중국역할론’을 강조한 것은 이러한 인식을 드러낸다.
그러나 중국의 생각은 달랐다.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북미간 협상이 중요하고 자신은 회담 주최자 혹은 중재자 이상의 역할을 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특히 중국은 핵문제는 북한의 안보적·경제적 우려가 함께 해소되는 맥락에서 해결돼야 한다는 방침을 고수함으로써 미국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대미관계도 중요하지만 대북관계도 소홀할 수 없다는 중국의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와 같은 미중간 동상이몽 속에 6자회담의 최대 ‘외교적 수혜자’는 중국이라고 볼 수 있다. 6자회담 주최자로서 회담이 열릴 때마다 국제사회의 이목이 베이징으로 모아졌고, 회담 중재자 및 촉진자로서 입지를 굳혀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6자회담을 나라 밖의 문제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종래의 ‘비간섭주의’에서 탈피해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발언권을 높이는 기회로 삼았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의 비판처럼 중국이 자신의 외교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북핵 문제 해결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성급한 감이 있다. 북핵 문제가 장기화하면 중국에도 적지 않은 부담이 따른다. 또한 중국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지렛대도 생각만큼 크지 않다.
북핵 문제의 장기화가 결코 중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은 북핵 문제의 최대 ‘군사적 수혜자’가 바로 미국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미국은 기존의 ‘북한 미사일 위협론’에 이어 북핵 문제가 불거지자 이를 미사일방어(MD)체제 구축 및 한미·미일동맹 재편의 최대 명분으로 내세웠고, 실제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반면 MD를 21세기에 자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최대요소로 보고 있으며, 한미·미일동맹의 재편에 촉각을 곤두세워온 중국으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북핵 문제가 장기화할수록 이를 구실로 MD구축 및 한미·미일동맹 강화에 가속도가 붙는 상황에서, 중국이 북핵 문제의 장기화를 바란다는 분석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아울러 중국이 북한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해서도 신중한 평가가 요구된다. 흔히 중국이 북한의 유일한 동맹국이고, 중국이 부강한 나라로 급부상한 데 비해 북한은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한 현실에 비추어 막연히 중국의 대북한 영향력이 막강할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이것이 곧 북한의 선(先) 핵 포기라는 전략적 결단을 이끌어낼 만큼 중국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판단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중국은 북핵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북한의 안보적·경제적 우려가 함께 해소되어야 한다는 ‘중립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북한이 먼저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대북지원을 중단하면 북한 붕괴 방지라는 중국의 전략적 마지노선이 흔들릴 수도 있다. 따라서 중국은 북한과 미국을 설득해 6자회담 틀에서 협상하도록 자리를 마련해주는 중재자 및 촉진자 역할 이상을 하기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기실 미국과 중국이 북핵 문제를 놓고 동상이몽을 꾸고 있는 것은 양국이 북핵 문제 이면에 깔아두고 있는 이해가 상충한 데서 비롯된다.
부시 행정부를 포함해 미국 강경파세력은 북한의 핵 개발을 비롯한 대량살상무기 문제를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이를 구실로 삼아 MD 구축 등 군사 패권주의를 강화할 근거로 삼는 데 관심을 가져왔다. 또한 일부 네오콘은 북한을 붕괴시켜 한반도 전체를 친미(親美)질서로 재편해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반면 중국은 미국 강경파의 이 같은 ‘숨은 의도(hidden intention)’가 결국 자국을 겨냥한 것이라는 인식을 강화하면서 북한을 완충지대로 삼는 데 전략적 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 미국이 의도하든 않든, 미국의 대북강경책은 북한을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로 보는 중국의 인식을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 중국은 무엇인가
관심의 초점은 2기 부시 행정부가 중국을 억제 봉쇄하기 위해 대북정책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에 집중된다. 이는 2기 부시 행정부의 최대의 전략적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대북정책이 대중정책의 하위변수라는 진단이 적절하다면, 향후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분석함에 있어 상위에 있는 대중정책의 방향을 염두에 두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부시 행정부는 중국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할 만큼 성장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억제하는 것을 대외전략의 핵심으로 삼았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부시 행정부의 주요 전략보고서인 국가안보전략(NSS)과 핵태세 재검토(NPR)의 중국 부분이다. 2002년 9월 작성한 국가안보전략 보고서에는 “우리의 군사력은 잠재적인 적이 미국의 힘을 추월하거나 대등해지려는 희망을 좌절시킬 만큼 충분히 강해질 것”이라고 명시해 중국의 부상을 사전에 억제할 방침임을 밝혔다. 또한 핵태세 재검토 보고서에 미국이 선제 핵무기사용을 고려할 만한 ‘우발 상황(contingency)’으로 중국의 대만 공격을 명시함으로써, 대만 방어를 위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음을 내비쳤다.
2004년 11월12일 미국을 방문 중인 노무현 대통령이 WAC(국제문제협의회) LA지부 오찬에 참석해 북핵 문제에 대해 연설하고 있다. 이날의 연설은 ‘LA발언’이라 불리며 큰 파장을 낳았다.
‘지역적 역할’이라는 이름을 달고 진행중인 주한미군 재배치를 비롯한 한미동맹 재조정 역시 한미동맹의 기본적인 성격을 대북억제에서 대중견제로 바꾸는 작업이 그 핵심이다. 이와 관련해 ‘사실상의(virtual)’의 한미일 삼각동맹체 구축을 주창해온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가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아시아국장으로 내정된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중국 포위’와 한반도정책의 관계
다음으로 미국은 이러한 사실상의 한미일 군사동맹의 구체적 표현으로 한미일 삼각 미사일방어(MD) 체제를 건설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일본은 이미 보유하고 있고 한국도 한국형구축함사업(KDX-3)에 따라 도입이 결정된 이지스 전투체계를 기반으로 한 해상 MD체제는 이러한 계획에 기반한 것이라는 시각이다. 단기적으로는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 등 다양한 군사적 옵션을 선택할 수 있는 물리적 기반을 갖추겠다는 포석이며, 중장기적으로는 중국의 핵미사일 전력을 무력화시키는 예비조치의 성격이 담겨 있다고 할 것이다.
끝으로 미국은 중국이 러시아나 통일 한반도, 인도, 파키스탄 등 인접국과 동맹관계를 맺지 못하게 함으로써 지정학적으로 중국을 포위하는 전략을 추구한다. 이는 중국의 국력이 미국에 필적한 만한 수준에 도달하지 않더라도 인접국과 동맹관계를 맺으면 미국을 상대로 한 반(反)패권 동맹이 출현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즉 미국은 러시아, 인도, 파키스탄과의 관계를 강화해 이들 국가가 중국과 밀접해지는 것을 차단하고, 한미·미일동맹의 강화, 동아시아 해안대를 사활적 이해지역으로 설정하는 작업, 동남아 국가들과의 군사협력관계 복원, 아프가니스탄 점령 및 중앙아시아에서의 미군주둔 등을 실현해가며 중국에 대한 포위망을 형성하려 하는 형국이다.
이러한 미국의 동북아 청사진과 한반도정책을 연결시켜 살펴보면, 1기 부시 행정부가 강도 높게 유지해온 대북 강경정책의 배경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만약 부시 행정부가 클린턴 행정부 때의 성과를 계승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지속했다면 위와 같은 청사진이 과연 가능했을까. 부시 행정부가 집권 초기에 북한과의 미사일협상을 마무리했다면 한미일 삼각체제에 기반을 둔 동북아 MD가 제대로 추진될 수 있었을까. 2002년 10월 북한 핵문제가 불거진 직후 직접협상을 통해 조기에 평화적으로 핵문제를 해결했다면 유사법제 제정과 미국과의 MD협력 강화 등 일본의 군사대국화 조짐이 이렇듯 빨리 달성될 수 있었을까. 한반도 평화체제가 실질적인 구축단계에 접어들고 북미·북일 수교가 현실화되는 상황이었다면 한미·미일동맹 강화노선이 쉽게 이뤄질 수 있었을까.
대북 강경노선의 ‘부작용’
그러나 역설적으로 최근의 동북아 상황은 2기 부시 행정부가 1기 때처럼 대중정책의 일환으로 대북 강경책을 유지할 것인지 확신할 수 없게 만든다.
우선 1기 부시 행정부는 중국을 염두에 둔 군사력증강을 합리화하기 위해 ‘북한 위협론’에 집착한 면이 있지만 2기 때에도 이러한 관성이 그대로 유지될 지는 불확실하다. 이미 MD구축이 본궤도에 올랐고, 한미·미일동맹도 원하는 방향으로 틀을 짜는데 성공해 한국과 일본에 미군이 장기주둔할 근거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2기 부시 행정부는 북한 위협론의 효용가치가 1기 시절에 비해 떨어졌다고 판단할 개연성이 있다. 이렇게 되면 미국의 대북정책은 보다 유연해질 가능성도 있다.
둘째, 부시의 대북 강경책이 한국, 일본 등 주요 동맹국과의 관계를 해치는 요인이 되었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한국과 일본은 침체에 빠진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바탕으로 유라시아로 경제영역을 확대하려는 데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시 행정부가 2기에도 대북 강경책으로 일관한다면 한국과 일본 내에서 반발이 심해질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이는 동북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셋째, 미국은 중국이 북한 정권교체 전략에 동의하기는커녕, 오히려 미국의 대북 강경책이 북중동맹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는 북중동맹뿐 아니라 중국-러시아, 중국-이란,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중국-EU 관계를 강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특히 냉전시대 구도와 유사한 북중러 동맹의 출현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는 중국이 다른 국가들과 동맹우호관계를 강화해 자국에 도전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미국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따라서 강압적인 방식으로 북한을 굴복시키거나 붕괴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할 경우 2기 부시 행정부가 대북정책을 극적으로 바꿀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970년대 초 닉슨 행정부가 소련을 견제·봉쇄하기 위해 중국과의 관계정상화에 나선 것처럼, 부시 행정부도 21세기의 전략적 경쟁자로 규정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북한과의 관계정상화에 나설 수 있다는 논리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영역’이다. 이에 반대되는 논거도 만만치 않다. 1기 부시 행정부가 ‘북한 위협론’을 앞세워 짭짤한 재미를 본 것은 사실이지만, MD구축과 한미·미일동맹의 재편은 아직 완료되지 않은 ‘진행형’이다. 이는 부시 행정부가 ‘북한 위협론’이라는 꽃놀이패를 단시일 내에 포기할 가능성이 낮음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 2004년 12월15일 실시한 미사일방어(MD)체제 실험이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MD에 대한 비판여론이 비등하자, 부시 행정부가 “북한이 미국 본토까지 공격할 수 있는 대포동 2호 미사일을 언제든 발사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북한위협론’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집착을 보여준 사례이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은 중국이 경제성장과 대만문제 등 핵심적인 국익과 관련해 미국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2기 부시 행정부가 중국의 취약성을 지렛대로 활용해 대북강경책에 동참해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아울러 한국과 일본의 독자적인 대북접근도 한계가 있다. 따라서 북한위협론의 활용가치가 떨어지고 대북강경책이 중국의 영향력 및 북중관계를 강화시키고 있다고 해서 미국의 대북정책방향이 변화할 것이라는 전망은 아직까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다.
분명한 것은 2기 부시 행정부는 1기에 비해 훨씬 복잡한 전략적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이 범위에 대북정책도 포함되리라는 점이다. 1기 때에는 대북한 비타협주의를 고수할 동기가 비교적 분명했으나 앞으로는 보다 더 많은 전략적 고려가 불가피하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2기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예측하기 어렵다. 2기 부시 행정부의 외교안보팀이 기존의 정책을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요소를 얼마나 고려할 것인지가 향후 미국의 대북정책 향방을 가늠할 핵심변수가 될 것이다.
이는 한국의 대외정책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미국과 중국 등 주변 강대국들이 한반도에 대해 이해득실을 어떻게 계산하고 있으며, 어떤 전략적 가치판단을 내렸는지 확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한국의 대외정책은 주변강대국의 입장을 기초로 수립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향후 미중간 전략적 이해관계가 엇갈리며 발생하는 긴장을 한국의 이익을 위해 적절히 활용해야 할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주도적 역할’, 이상과 현실 사이
지난 2년 동안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엄중한 과제 앞에서 갈팡질팡했던 노무현 정부는,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자 “할말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천명했다. 한반도 비핵화와 이에 따른 북핵 불용(不容) 방침을 분명히 하면서 북핵 문제는 철저히 대화와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부시 행정부 안팎에서 끊임없이 거론돼온 대북 무력 사용은 물론이고 봉쇄를 통한 북한 붕괴 유도에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방향설정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2기 부시 행정부가 처한 상황을 감안할 때 일단 적절한 면이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판단할 때 한국이 북핵 문제 해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란 쉽지 않다. 북한의 전략적 결단을 이끌어낼 만큼 남북한 사이에 신뢰가 구축된 상황도 아니고, 남한이 행사할 수 있는 지레도 매우 제한되어 있다. 또한 지난 4년간 보았듯이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천명했을 때 전문가들이 의아해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한미일 공조를 중심으로 6자회담의 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겠다”고 밝힌 이상 당분간 외교안보팀은 그러한 ‘방향’을 현실화할 방안과 전략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작업에 열중할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2기 부시 행정부는 대북 강경자세와 6자회담이라는 그간의 정책을 두고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국 정부는 미국의 대북정책 재검토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정부 차원의 의견교환뿐 아니라 민간전문가와 NGO의 역할분담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년 동안 노무현 정부는 부시 행정부를 설득하기 위해 한미공조에 ‘올인’했다. 대선 공약이었던 한미행정협정(SOFA) 협상을 뒤로 미뤘고, 세계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이라크에 파병했으며, 미국의 필요에 따라 이뤄지고 있는 주한미군 재배치 비용을 상당부분 부담하기로 했다.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면 미국도 우리의 입장과 요구를 이해해주지 않을까’라는 기대심리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북핵 문제의 그간 추이와 미국의 정책방향 흐름을 복기해보면 이를 성공적인 전략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정부가 앞서의 한계를 극복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변화의 필요성’을 설득하려면 대북 강경책이 미국의 국익과 전략적 이익에 더 이상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대북 강경책에 따른 북중동맹의 강화와 북중러 동맹의 출현 가능성, 6자회담을 통한 중국의 역내 위상강화, 이미 궤도에 오른 한미·미일동맹 재편 등, 앞서 살펴본 미중간 전략적 이해관계 상의 판도변화 과정에 우리측이 활용할 논리적 ‘카드’가 들어 있다.
미국이 가슴속 깊숙이 품고 있는 ‘중국에 대한 두려움’이 역설적으로 한반도에 평화를 촉진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의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