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에서 가져간 흙과 유약으로 구워 ‘오로지 불만’ 일본 불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자기 ‘히바카리’.
- 400년이 흐른 뒤 선친의 유언을 따라 14대 심수관은 선조들의 고향 남원에서 불을 채화해 ‘오로지 불만’ 조선의 불로 도자기를 굽는다. 아들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에게 이어지는 조선 출신 도공들의 끝없는 예술혼, 그 두 번째 이야기.
400년 전 선조들이 조선으로부터 끌려와 처음 닿았던 사쓰마의 시마비라 해안에 서서 한국쪽을 바라보고 있는 14대 심수관.
나에시로가와(苗代川)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60리나 떨어진 가고시마 제2중학교에 입학하던 날이었다. 이 시골 중학교는 억센 아이들의 주먹자랑 때문에 학교폭력이 말도 못했다. 전국시대 시마즈(島津)번의 강병책(强兵策)이 남긴 영향인지, 아이들의 첫 학기는 싸움으로 시작해 학기가 끝날 무렵 강약 서열이 정해지고 나서야 잠잠해지곤 했다.
심수관의 학급에 몇 녀석이 들어와 말했다.
“이 반에 조선놈이 있지? 손 들어봐!”
신입생 명부에서 석 자짜리 조선 이름을 보고 온 것이었다. 열 명쯤 되는 아이들에게 붙잡혀 옥상으로 끌려갔다. 그러곤 실신할 때까지 얻어맞았다. 깨어났을 때는 혼자였다.
학교를 나와서 기차를 타고 구시키노를 지나 히가시이치키(東市來)역에서 내렸다. 2km 떨어진 집으로 터덜거리며 걸어가는데, 동구 밖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 있었다. 두 분은 사태를 예견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첫 날, 꼭 같은 이지메를 당했던 것이다.
소년은 우물가에서 얼굴을 씻었다. 눈물을 감추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아버지가 수건을 내밀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그래, 그럴 테지” 하고 달랬다.
소년은 학교에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집에서 공부하면 되지 않냐고. 그러자 아버지는 엄한 얼굴로 꾸짖었다.
“그런 소리 말아라. 그런 근성은 개에게나 주어라. 네 핏줄에는 조선의 피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
아버지의 훈계는 계속됐다. 선조 대대로 내려온 자긍심 이야기였다.
전라도 남원성에서 납치되어온 후 계속된 피눈물나는 고생, 나에시로가와에 정착해 번주로부터 가고시마에 나와 살라는 명령을 받고도 ‘민족반역자 주가전(朱可全)과 이웃해서 살 수 없다’며 거절한 용기, 죽음도 각오한 그 기백이 너의 핏줄에 흐르고 있지 않으냐!
“일등을 해라. 공부도 일등, 싸움도 일등. 그러면 상대도 달라진다. 그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아버지는 수재였다. 가고시마 일대에서 알아주는 명문인 제7고(일본 전체의 7대 명문고 가운데 하나)를 거쳐 교토대 법학부를 나왔다. 비록 도공으로 가업을 잇는 아버지지만, 소년은 아버지의 두뇌와 실력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렇다, ‘문무겸전(文武兼全)’이다. 싸움도 잘하는 거다. 소년은 결심했다.
그날 이후 소년은 싸움꾼이 되어, 좀 세다는 놈들을 찾아다니며 도전했다. 가고시마의 아이들은 마주 서서 오른쪽 어깨를 한번 치켜올리는 것으로 도전하겠다는 의사를 나타냈다. 일단 도전을 받으면 결투를 치러야 한다. 그런 일상적인 폭력에 빠져들면서 소년은 늘 조선 핏줄과 일본 핏줄에 대해 생각했다고 한다. 뼈가 부서지더라도 항복할 수 없다는 각오로 싸웠다 한다.
아버지의 유언
작가 시바 료타로에 대한 심수관씨의 추억은 각별하다. 그도 그럴 것이 심수관 도자기, 나에시로가와의 도공 신화(!)를 소설로 써서 널리 알린 ‘연출가’가 바로 시바이기 때문이다. 시바는 이후로도 심씨에게 아이디어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1967년 2월12일 시바가 처음 와서 이것저것 묻고 돌아갔는데, 3월 중순께 부인과 함께 다시 왔어요. 보충 취재를 위해서였지요.”
시바의 취재 방식은 매우 독특했다고 한다. 수첩 대신 스케치북처럼 큰 지도를 들고 다니며, 그 여백에 지렁이 달려가듯 알아볼 수 없는 글씨로 조금씩 보충해 메모해 나가는 식이었다. 아닌게아니라 신기해보일 법도 하다.
다시 두어 달 지난 5월 하순에 시바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심수관씨, 다 썼습니다.”
“뭘 쓰셨다는 겁니까?”
“당신과 나에시로가와 얘기 말입니다.”
“예에?”
심씨의 부인은 웃었다. 당신과 이 동네가 어떻게 소설의 소재가 되겠냐고 빈정대며 킥킥거렸다.
‘문예춘추’에서 나온 시바의 책을 찾으러 가까운 서점에 갔더니 두 권이 진열되어 있었다. 심씨는 두 권을 다 샀다. 혹시 창피한 대목이라도 있을까 봐 남이 보지 못하게 ‘증거인멸’ 차원에서 그랬다고 한다. 책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 숨죽인 채 자신의 라이프 스토리를 눈물을 글썽이며 읽었다.
심수관 14대는 시바에게 자신의 인생 목표와 도공으로서의 사업적 진로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서도 물었다고 한다. 돌아가신 13대 심수관(14대의 부친. 1964년 4월1일 75세를 일기로 작고)의 유언을 소개하면서.
아버지가 임종하실 무렵 아들은 “다른 도예가들처럼 전람회를 열고 싶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평소 전람회 따위를 열어 예술가인 척하는 것은 의미도 없고 가풍에도 맞지 않다며 반대해왔다. 그러나 아들은 재차 건의했다.
아버지는 쇠약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심가 십수대의 예풍(藝風)이 미약하다면 모르겠다만….”
나와 네가 만든 것을 포함해, 언뜻 보기에는 조상 대대로 그냥 물려받은 것 같아도 흙이 다르고 솜씨가 달라 다 개성이 있다. 그 한 대, 한 대가 모두 산봉우리가 되어 집안이라는 산맥을 형성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 봉우리 하나로도 훌륭한 인생이 되지 않겠느냐…. 그런 의미였다.
아들은 이미 전람회 출품을 권유받은 상태였다. 뭔가 아버지대와는 다른 길을 걷고 싶은 충동도 있었다.
“그렇다면 아버지, 저라는 존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까.”
아버지, 모든 것을 가르치고 일깨우신 아버지, 저에게 삶의 빈 구석을 채울 길을 가르쳐주소서. 최후의 기도를 하는 심정으로 아들은 되물었다.
대답은 짧은 한마디였다.
“네 아들을 도공으로 만들어라. 내가 할일도 그것뿐이었고, 네가 할일도 그 것뿐이다.”
그가 시바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
그러자 시바는 아이디어를 줬다. 가업을 계승하라는 유언은 지키되, 전람회는 남과 함께 하지 말고 개인전을 개최해 활로를 열어야 한다는 충고였다. 이는 결코 아버지의 유언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며 새 시대의 조류에도 맞는 것이라는 취지였다.
“심 선생, 개인전을 여시오. 한 점에 샐러리맨의 한달 월급, 가령 30만엔쯤 되는 것을 만들어보시오. 그런 정도의 물건이 팔릴 만큼의 평판을 쌓으시오.”
그는 용기를 내어 후쿠오카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자 시바는 부부동반으로 찾아와 ‘선전부장’이 되어줬다. 백발의 대작가가 들렀다는 것만으로도 홍보효과는 대단했다. 시바로서는 개인전을 권유한 데 대해 약간의 책임을 느꼈을 법도 하다. TV 방송국에서 시바가 왔다고 취재해 방영하는 바람에 개인전은 대성공을 거뒀다. 원래는 7일 예정이었지만 사흘 만에 전시한 작품 50점이 매진됐다.
예술적 완성 이룬 12대
심수관가(家)의 기예적 완성은 12대 할아버지가 이룬 것이라고 한다. 그의 도예 솜씨와 경영수완은 대단했다.
메이지 유신이란 천황 중심주의, 국가주의로 무장하는 일이었다. 이 회오리바람 속에 나에시로가와 마을은 미야마(美山)로 이름이 바뀌고, 일본 제일주의에 발맞춰 조선 전통에도 제한이 가해진다. 폐번치현(廢藩置縣·번을 없애고 현을 설치한 조치)에 따라 번이 몰락하자 번의 보호를 받던 도공들은 시린 세상에 내던져졌다.
그 와중에 12대 심수관은 번에서 운영하는 도자기 공장(藩營陶瓷器處)의 주재자가 되어 기술적으로 완성의 경지를 개척했다. 특히 도자기에 아름답고 미세한 구멍을 뚫어 굽는 투조(透彫), 표면 그림을 입체화하는 부조(浮彫) 등의 기법을 개발했다. 이런 공적이 인정되어 상공장관의 공로상을 받고 황실에 그릇을 납품하기에 이른다.
1873년에는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에 역작 대화병 한 쌍을 출품해 절찬을 받았다. 일본 국보인 높이 1m55cm의 이 대화병은 사면에 새겨진 사계절 그림이 너무나 정교하고 화려해 보는 이의 찬탄을 자아낸다. 12대의 타고난 창조성과 유연한 예술적 응용력이 배어 있는 작품이다.
그는 메이지 시대에 들어온 서양 사진에서 고층건물이나 교회를 보고 놀랐다. 기껏해야 2층 목조가 고작이던 일본에 비해 유럽의 건축양식은 그 높이와 크기가 경이롭기만 했다. 이처럼 커다란 건물 속에 놓인 도자기가 키가 작으면 주목도가 떨어진다. 도자기의 높이를 키워야 한다. 그러자니 김칫독이나 된장독을 만드는 항아리 기법을 응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왔다.
14대 심수관의 아들 15대. 본명은 심일휘다.
“항아리처럼 말아올려 높고 크게 만드는 기법은 한국에도 남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이 기법을 일상용품을 만드는 데 쓰지, 미술품을 만드는 데 쓰는 것을 터부시해 왔다. 한국 도예가들이 까닭 모를 터부 때문에 스스로 손발을 묶고 있다가 머리가 유연하고 사고의 폭이 넓은 그에게 기선을 제압당한 셈이다.”
12대의 성공은 잇달아 오스트레일리아, 러시아, 미국 등지로 수출길을 트고, 세계적으로 사쓰마 도자기를 브랜드화하는 데 이바지했다.
1875년 번영도자기처가 폐지되자 12대는 사재를 털어 그 가마를 고스란히 인수, 나에시로가와 도자기의 부흥에 모든 것을 걸었다. 이처럼 전환기에 사쓰마 도자기의 명맥을 잇기 위해 몸부림친 그는 이제 ‘중흥의 조(祖)’로 받들어지고 있다.
혼불 되어 나타난 단군신령
나에시로가와에는 단군을 모시는 옥산궁이라는 사당이 있다. 1673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1598년 피랍되어 끌려왔지만 그릇 굽고 먹고살기 팍팍했던 까닭에 그렇듯 늦어진 것이리라.
이 단군사당에는 ‘혼불’ 전설이 깃들여 있다. 그 옛날 도공 70여 명이 표착한 직후의 일이다.
어느 날 밤 바다 저편에서 혼불이 날아와 산꼭대기에 머문 채 며칠 동안이나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점을 칠 줄 아는 이가 있어 점을 쳐보니 단군의 신령이 혼불이 되어 가엾은 일행을 보살피기 위해 백두산에서 여기까지 날아왔노라는 괘가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바로 그 혼불이 머문 자리에 사당을 지었다는 것이다.
심수관요(窯)의 전무격인 다카하마 아키노부(高濱昌信)씨의 안내를 받아 사당으로 향했다. 사당은 이미 일본풍 신사로 변해 있었다. 이름도 ‘옥산신사’로 바뀌었다. 입구에는 커다란 도리이(鳥居·신사 입구의 장식)가 서 있다.
2월이니 아직 겨울이건만, 짙푸른 아열대성 수목이 건물 주변에 들어서 있어 사당 안은 아무것도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컴컴했다. 시바의 소설에는 ‘멀리 하늘이 그대로 넓게 열려 기리시마(霧島)의 산줄기가 보인다’고 묘사돼 있지만, 이후 4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무숲이 우거져 시야를 가렸다.
해마다 음력 8월15일, 한반도의 추석 때 도공들은 여기서 제사를 올렸다. 그들은 한복으로 차려입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오늘이 오늘(제삿날)이라제물(祭物)도 차려놓았다오늘이 오늘이구나 모두 함께 노세오는 날 오는 날의 하루하루가오늘 이날과 무엇이 다르리해가 지고 해가 뜬다 오늘은 오늘한세상 어느 때나 꼭 같은 그날고수레 고수레 자나깨나 잊지 않으리라
1975년, 훗날 국회의원을 지낸 조일제 당시 오사카 총영사가 이 제사에 초대된 적이 있다고 한다. 조씨는 내게 “도공들의 제사는 일본식 마쓰리(축제)도 겸한 것이어서 400년 전 정유재란 때 굴비두릅처럼 엮이어 끌려오는 장면을 재연하는 춤도 있는데, 어찌나 실감나든지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했다”고 말했다.
단군을 모시는 이 신사는 마을 도공들이 먼 여행을 떠날 때 반드시 들르는 코스였다고 한다. 여정의 변고를 피하기 위해 미리 단군 할아버지께 빌고 떠났던 것이다.
심씨가 처음으로 고국 방문길에 오른 것은 1974년이다. 서울대, 고려대, 부산대 미술사 연구자들의 초청에 따른 것이었다. 청와대에도 초대받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만찬을 대접받았다. 아마도 정치인이 아닌, 일반 ‘일본 국적자’가 일대일로 대통령 박정희를 만난 유일한 사람이 아닐까.
박 대통령은 몇 장의 지도를 펼쳐보이며 심씨 선조들이 피랍될 당시의 전투에 대해 들려줬다. 마치 육군대학에서 전술강의를 하듯 남원성 전투의 치열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심씨는 궁금한 것 한 가지를 물었다.
“한국의 박물관에 가니 창이나 칼 같은 무기를 구경할 수 없습니다. 일본 박물관에는 무기가 많은데 왜 한국에서는 무기를 전시하지 않습니까?”
박 대통령은 대답했다.
“아무리 훌륭한 무기라도 사람을 살상하는 도구일 뿐 결코 예술품이 될 수는 없는 거지.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닌가. 꼭 보고 싶다면 육군사관학교 전시장에 가서 보게나.”
만찬이 끝나고 박 대통령이 막걸리를 마시냐고 물었다.
“네. 저도 막걸리를 좋아합니다.”
박 대통령은 흡사 형님 같은 말투로 “막걸리를 잘못 마시면 배탈이 나니 조심하라”며 술잔을 건넸다. 심씨는 넉살 좋게 받아넘겼다.
술이 거나해지자 심씨는 혈기가 발동했다. 이야기 끝에 노래가 화제가 되자 한 곡조 부르겠노라고 나선 것이다. 심씨는 만주군 출신인 박정희의 추억을 꿰뚫어보았다. 태평양전쟁 당시 ‘애창곡’이라고 할 군가 ‘보리와 병정’을 목청껏 불렀다.
산동(山東·중국의 산둥성)으로 인마(人馬)가 간다산동은 있기 좋을까 살기 좋을까멋진 한마디에 뒤로 돌아보니너의 고향은 니가타(사도가시마)로군(깎지 않은) 수염이 미소 짓는 보리밭
전우를 뒤로하고 길 없는 길을 가면전장(戰場)에는 밤비 내리고전진 마라, 가지 마라, 등 뒤로 들려도바보소리 하지 말라며 다시 전진병사 진군의 믿음직스러움
심씨는 조선 핏줄의 어리광삼아, 형님 앞에서 재롱 피듯, 그렇게 일본군가를 불렀다. 박 대통령은 사연 있는 ‘가수’의 한 곡조이기에 그저 미소로 경청했다. 심씨는 관저를 떠나면서 기분에 취해 너무 큰소리로 부른 게 아니었나 싶어 미안해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을 만나던 날 낮엔 서울대 에서 연설도 했다. 대학생들에게서 일제 36년 지배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고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한국에 와서 여러 차례 그 질문을 받았다. 지당한 얘기이고 과연 질문대로 (일본이 저지른 죄가 큰 것)이기는 하나, 거기에만 얽매일 경우 젊은 한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맞는 말도 지나치면 후퇴가 시작된다. 새로운 국가는 전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덧붙였다.
“여러분이 36년을 말한다면, 나는 370년을 말해야 하지 않겠나!”
그 말에 청중은 박수 대신 노래를 합창했다.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였다. 노랫말 중 ‘어쩐지 나는 좋아’가 젊은 학생들의 답사였을 것이다.
후일담이지만 이 노래는 일본에서도 한국인의 애창곡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80년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한국을 방문해 전두환 대통령과 만날 때 부른 노래가 바로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였다. 나카소네는 차 안에 테이프를 넣고 다니며 애써 노래를 익혔고, 그 한 곡으로 좌중을 감동시켰다는 것이다.
심수관 14대가 필생의 사업으로 추진한 일이 하나 있다. 1998년, 납치 400년을 기념해 이른바 400년제(祭)를 연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유언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15대에게도 가업을 잇게 하라는 당부와 함께 조상과 후손들이 400년간 지켜온 도예기술과 업적을 세상에 알리는 400년제를 열어달라는 뜻을 남겼다.
유언을 지키기 위해 14대는 두 갈래 이벤트를 기획했다. 하나는 심수관가의 역대 작품을 모아 한국에서 전시회를 갖는 것, 다른 하나는 한국 남원의 불을 채화해다가 도자기를 굽는 것이었다.
400년 만의 귀향
“막상 기획을 해보니 결국 돈문제로 귀착되고 말았습니다. 얼추 계산해보니 7000만~8000만엔(7억~8억원)이 드는 것이었어요. 소중한 도자기를 포장해 비행기로 보내려면 수송비와 보험료가 이만저만이 아니고, ‘남원의 불’ 채화도 인건비가 적지 않게 소요되는 행사였습니다. 여기저기 말을 건넸지만 문전박대만 당했지요. 그래서 솔직히 집어치울까도 생각했습니다.
한데 집사람(1999년 작고)이 180도 다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왜 당신 선조 일을 하는 데 남의 돈 쓸 생각을 하냐, 우리 돈으로 해야지. 혼자서 하라’는 거였죠.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났습니다.”
그때를 회고하는 순간 심씨의 눈가가 촉촉히 젖었다. 아내가 ‘조상과 가문의 일에 재산을 몽땅 털어넣어도 된다’고 치고 나오니 너무나 고마웠다는 것이다.
1998년 4월 한국도자기 일본 전래 400년을 맞아 전북 남원에서 채취한 ‘조선의 불씨’가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 가고시마현 구시키노시 시마비라 해안에 도착했다.
이씨는 대전 엑스포 홍보를 위해 일본에 갔다가 재일 상공인들의 소개로 심수관씨를 만났고, 가고시마의 수관도원을 방문하게 된다. 거기서 선조들의 갓과 망건까지 정갈하게 보전하는 14대 심씨의 정성에 감동을 받았다.
이씨는 심씨에게 피랍 도공들의 후예들이 만든 도자기 작품을 대전 엑스포에 전시해줄 것을 권했다. 그렇게 해서 아리타야키(有田燒), 사쓰마야키(薩摩燒) 등 규슈 일대 도자기 명가들이 대전에 작품을 내놓았다. 이 무렵 심씨는 아버지의 유언과 400년제의 꿈을 이씨에게 넌지시 털어놓았다.
‘400년 만의 귀향 - 일본 속에 꽃 피운 심수관가 도예전’.
1998년 8월 일민미술관 전시회의 타이틀이다. 심씨는 이 전시회를 ‘귀국 보고전’이라 명했다. 140점이 전시되는 행사 첫날 한국 대통령이 참석했다.
“테이프 커팅을 하는데 김대중 대통령이 오셨습니다. 나로서는 상상도 못한 영광이었어요. 특히 김 대통령이 각별히 옆자리에 서게 하고 가위도 잡게 해 더욱 잊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분 말씀이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세계에 이름을 떨친 사쓰마 도자기는 한국 핏줄이 만들고 일본인이 키워서 여기까지 왔다. 얼마나 멋진 결합인가. 두 나라가 이 결합처럼 서로 힘을 보태고 윈윈 전략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면 반드시 성공하고 말 것이다.’ 짧지만 대단히 멋진 연설이었습니다.”
심씨는 “그런 김 대통령이니까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와 함께 ‘21세기를 향한 한일 파트너십 선언’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 아니냐”고 말했다.
남원의 불씨를 옮기는 행사는 그해 10월에 치러졌다. 당시 선조들은 납치되면서도 조국의 흙과 유약을 가지고 갔다. 나중에 다 떨어지자 도토(陶土)를 구하기 위해 가고시마 천지를 헤매게 된다. 그때 가지고 간 흙과 유약으로 구워낸, 일본 것이라고는 오로지 불만 써서 만든 도자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이름하여 ‘히바카리’(‘오로지 불만’이라는 뜻) 다완이다.
이제 흙과 유약은 일본 것을 쓰고, 불만 한국 불로 굽는 400년제.
남원에서 시작하는 이벤트이므로 전라북도의 협력이 관건이었다. 황인성 지사가 앞장서서 도와주고 추진위원장을 맡아주었다. 물론 그 뒤에서 이대순씨와 이연택씨(전 대한체육회장)가 지원했다.
심씨도 이미 유명인사가 되었다. 일민미술관 전시회에 대통령이 참석하고 일본의 주요 언론사와 한국 신문들이 크게 소개했기 때문이었다. 일은 순조롭게 진척되는 듯했다.
그러다 뜻하지 않은 난관에 봉착했다. 남원의 유림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불은 그야말로 우리의 혼인데 거저 줄 수 있는가. 왜놈들이 이 땅에서 전란을 일으켰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도공과 농민을 납치해간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사죄의 말 한마디 없이 불을 건네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놈들은 이 땅의 무고한 백성들의 귀와 코를 베어 전공(戰功)의 징표로 삼기 위해 이총(耳塚·귀무덤), 비총(鼻塚·코무덤)을 만든 자들 아닌가.”
“사죄 없이는 불씨도 없다”
유림의 주장엔 한치도 틀린 게 없었다. 아무리 심수관이라는 도공 후손의 갸륵한 정성이 담긴 이벤트라 할지라도 일본측의 사과나 사죄의 말 한마디도 없이 공식적으로 불씨를 주는 행사는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부랴부랴 일본의 사죄 사절로 미야마의 자치단체 의회의장과 여성대표가 나섰다. 이들이 남원 향교동 만인의총에 배례하고 납치를 사죄하는 절차가 끝난 뒤에야 채화 봉송이 이뤄지게 됐다.
1998년 10월19일, 남원 교룡산 산신단에서 일곱 명의 선녀가 부싯돌로 ‘조국의 불’을 채화했다. 도공의 한을 달래는 무용에 이어 제사를 올리고 나서 최진영 남원시장이 ‘조국의 불’이 담긴 항아리를 심씨에게 건넸다. 항아리에는 ‘남원 도혼 신화로(薪火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신화로는 도공들이 끌려갔던 길을 따라 전남 구례와 광양, 경남 마산과 진주를 거쳐 부산으로 릴레이 되었다. 부산에서는 해양대 실습선 ‘한나라호’에 실렸다. ‘씩씩한 대한 건아들이 조국의 불을 운반하는 데 앞장서주었으면 한다’는 심씨의 희망에 따른 것이었다.
불씨를 실은 배가 가고시마의 구시키노항에 도착한 것은 사흘 뒤인 21일 오후 6시경. NHK를 비롯한 방송·신문사 기자 30여 명이 열띤 취재경쟁을 벌였다. 한복 차림의 심씨 14대, 15대 부자가 실습선에서 불씨를 내려 나룻배에 옮겨 탔다. 석양을 배경으로 400년 전의 역사를 재현하는 풍경은 보는 이를 숙연케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궂은 날씨는 어느덧 개어 있었다. 덕분에 미야마의 도원까지 순조롭게 불을 옮길 수 있었다.
“단군 할아버지가 도와주셨다!”
15대 심수관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아버지 14대가 이대순씨에게 말했다.
“나는 선대의 유언을 지켰습니다. 내 아들 입에서 ‘단군’이라는 말이 나왔어요.”
14대는 울먹이고 있었다.
이 마을에서 그해 11월19일 한일 양국 각료간담회가 열려 김종필 국무총리와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가 ‘사쓰마 도자기 전래 400주년’ 행사를 참관하고 소나무와 벚나무를 기념으로 심었다.
“가고시마 역사에 없는 국가간 각료간담회가 저희 마을에서 열렸지요. 양국 외무장관을 비롯해 장관 수십명이 우리집 뒤편의 팔각정에 올라 차를 마시고 사진을 찍는 광경을 보면서 감회가 깊었어요. 역사란 무엇이며 문화란 무엇인가 새삼 생각해봤지요.”
심씨의 어조는 선대가 부여한 사명을 어느 정도 해냈다는 자부심에 가득찬 것이었다.
“이제 나에시로가와 사람들은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옛날에는 도쿄의 긴자 거리에서 고향사람을 마주치면 도망치듯 피하는 게 보통이었지요. 너무 깊은 시골 마을 출신인 걸 남들이 알까봐 창피해한 거죠. 지금은 반대입니다. 내가 도쿄 긴자에서 개인전을 열면 동향 출신 사장이 직원들을 데리고 와서 고향 사람 심수관이라고 자랑합니다.”
“도자기는 정치를 반영한다”
심수관가의 도자기는 일본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일본화에 흔히 나타나는 금색화와 채색화, 지극히 정치(精緻)하고 섬세한 조각과 투각(透刻)기술은 한국적이라고 하기에는 조선백자의 전통과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실은 필자도 그것이 알고 싶어 묻고 말았다. “왜 한국 핏줄이면서 일본적인 도자기를 굽는가.”
“도자기든 뭐든 모든 문화유산은 주어진 환경의 산물입니다. 도자기 역시 도토와 가마, 사람의 기술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합쳐져서 만들어지죠. 한국처럼 도토가 흔치 않은 가고시마 화산지대에 떨어져 주어진 흙을 살리는 방식을 쓸 수밖에 없었죠. 조선백자처럼 멋지고 하얀 도자기는 구울 수 없게 된 겁니다.”
그는 ‘일본인의 취향에 맞춰 상품화하다보니 일본화했다’고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일본의 번주를 상대로, 일본인 고객을 상대로 팔다보니 일본화한 것 아니냐’고 묻고도 싶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너무 잔혹한 질문 같아서 물을 수 없었다. 다만 이렇게 물었다.
“남원 도자기는 수백년 지나 쇠퇴했는데, 어째서 사쓰마야키는 세계적인 상표가 되었을까요.”
“일본이라는 나라는 한국과 다릅니다. 나라 전체가 번으로 나뉘어 다이묘(大名·번주)가 지배하는 봉건체제였지요. 번은 국경을 둔 개별적인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재료와 환경이 제한적이고, 그 번에서 얻을 수 있는 흙과 도토에 맞추어 기술을 집어넣어야 도자기가 됩니다. 태생적 비극성이라고 할까요.
그러면서도 번끼리의 경쟁이 대단했어요. 전쟁도 하고 국력경쟁도 하고 다이묘간 자존심 경쟁도 치열했고요. 도공들은 그런 환경에서 정성을 불태우며 자기를 굽고 살았습니다. 번(국가)끼리 균형을 이루는 안정사회의 다양한 경쟁이 빚어낸 경쟁력, 그것이 사쓰마야키건 아리타야키건 가라쓰야키건 살아남게 만든 원동력 아닐까요.”
심씨는 중앙집권의 전통이 강한 한국에선 자기도 왕조 단위로 바뀐다고 본다. 고려청자가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조선백자로 바뀌는 것을 한반도 정치의 특성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아버지(14대)의 생각을 이어받은 것일까. 아들 15대 심수관도 한 인터뷰에서 같은 취지로 이렇게 말했다.
“도자기는 정치를 반영합니다. 한국 도자기는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처럼 시대구분이 분명합니다. 과거를 강하게 부정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패턴입니다. 그러나 일본 도자기는 다릅니다. 그런 경향이 없습니다. 에도시대 번의 영향을 반영해 지역별로 특화해서 발전해가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보기에 한국 도자기는 힘이 넘치고 속도감이 있지만 다양성이 모자랍니다. 하지만 반대로 일본 도자기는 다양하지만 힘이 떨어지는 느낌입니다.”
아들 15대는 1959년생으로 와세다대 교육학과를 나왔다. 가업을 잇기 위해 대학졸업 후 교토 도공(陶工) 고등기술전문학교를 다시 마쳤다. 이탈리아에도 건너가 3년간 머물며 국립미술도예학교(Gaetano Balladini)를 졸업했다. 이탈리아에서 귀국한 지 2년 뒤에는 경기도 김일만(金一萬) 토기공장에 들어가 김칫독 만드는 공부를 한 적도 있다.
서른 살이 되던 1999년 1월15일, 그는 제15대 심수관 이름을 얻는 습명(襲名) 절차를 밟았다. 25명의 수관도원 가족을 먹여 살리는 한편 가업을 승계해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무거운 책무를 지게 된 것이다.
직원수 ‘25명 정원’은 12대 때 정착된 것으로 더 번창하더라도 늘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14대는 말한다.
“12대 할아버지가 발견하고 체득한 분업의 적정선(適正線)이 25명이었지요. 인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생산이야 늘고 쉬워지겠지요. 하지만 품질을 철저히 관리해가며 그릇 하나하나에 심수관 도장을 찍어 넣을 만큼의 신뢰를 손상시키지 않으려면 더는 늘릴 수 없다고 봅니다.”
아들 15대도 벌써 프로의 체취를 물씬 풍긴다.
“도자기는 보는 이와 만드는 사람의 거리감을 고려해 만들어야 합니다. 만드는 사람은 30cm 앞에서 만들지만 보는 사람은 1m 앞에서 관람하지요. 따라서 도공 자신의 거리감과 눈높이에 집착하지 말고 1m 너머에서 감상하는 관람객을 생각하며 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나에시로가와를 뒤로하면서 생각한다.
수관도원과 심수관의 이름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납치당한 지 800년이 되는 30대 심수관에 이르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
그 미래에도 도자기는 예술로 존재할 수 있을까.
쌩뚱맞지만 14대에게 물어볼 걸.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