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호

일본인이 韓 일제강점기 문인 연구에 빠져든 까닭

[한일 수교 60주년] 정지용·고한용·한하운…한국 근대문학 연구자 요시카와 나기

  • 허문명 출판국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5-11-10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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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민지 시절 경성의 예술가, 문인에 주목하다

    • 한국에 빠져든 日 청년, 사표 내고 한국으로

    • 이국땅에서 우연히 시작된 신경림과 인연

    • “일본인이 왜?”…정지용 연구로 박사학위

    • 다다이스트 고한용, 한센병 시인 한하운 연구

    • 한국어 강사, 한국문학 번역가로 한일 교류 이어가

    우연한 기회에 한국어에 매료돼 안정된 직장까지 그만두고 한국행을 택했다는 요시카와 나기 씨. 한국근대문학 연구자이자 근대문인들 연구자인 그는 일본 내에서 ‘광장’ ‘토지’ 등 한국의 대표 문학작품을 번역한 번역가이기도 하다. 그가 요즘 연재하고 있는 한하운 시인의 평전이 실린 월간 ‘세계’를 소개하는 모습. 도쿄=허문명기자

    우연한 기회에 한국어에 매료돼 안정된 직장까지 그만두고 한국행을 택했다는 요시카와 나기 씨. 한국근대문학 연구자이자 근대문인들 연구자인 그는 일본 내에서 ‘광장’ ‘토지’ 등 한국의 대표 문학작품을 번역한 번역가이기도 하다. 그가 요즘 연재하고 있는 한하운 시인의 평전이 실린 월간 ‘세계’를 소개하는 모습. 도쿄=허문명기자

    한일 수교 60년을 맞아 동북아역재단과 함께하는 기획 시리즈 두 번째 주인공은 요시카와 나기 씨다. 그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한국 근대 문학 연구자이자 번역가이다. 최근에는 박경리의 토지 20권을 제1번역자로 번역했다. 2018년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으로 일본 내 ‘일본 번역 대상’을 받기도 했다. <편집자 주>

    아침저녁으로 기온이 뚝 떨어진 10월 22일 도쿄에는 가느다란 실비가 내리고 있었다. 기자는 도쿄 천황 거주지가 있는 황거 근처 다케바시역에 내려 도쿄국립근대미술관으로 향했다. ‘기억을 열고 기억을 잇다’는 제목으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군의 의뢰로 화가들이 제작한 작품 20점을 중심으로 한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전쟁기록화 153점을 보유한 근대미술관은 이번에 24점을 출품했는데 지금까지 열린 전시 중 최대 규모라고 한다.

    전쟁터를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니 군국주의로 치달았던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성과 폭력성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선전도구로 활용되긴 했지만 어떻게든 반전 메시지를 넣으려는 예술가들의 내적갈등을 보여준 작품도 있었다. 전시기획자 스즈키 쇼지 씨는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전쟁체험을 직접 들을 수 없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며 “전쟁을 미화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점으로 전쟁의 의미를 돌아볼 수 있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식민지 시절 경성의 예술가들에 주목하다

    종전 작가들이 그린 그림을 전시하고 있는 도쿄 국립근대미술관. 도쿄=허문명기자

    종전 작가들이 그린 그림을 전시하고 있는 도쿄 국립근대미술관. 도쿄=허문명기자

    전시를 둘러보면 패전에 대한 일본인의 트라우마를 불러내 “다시는 이런 시대가 오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느낌을 받는다. 동시에 “한국과 일본의 근대를 어떻게 하면 보다 입체적이면서도 밀도 있게 볼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도 생긴다. 

    그런 점에서 요시카와 나기 씨의 작업은 흥미로워 보인다. 그는 우리에게는 분노와 아픔으로 점철된 돌아보기 힘든 시간이었던 식민지 시절, 경성에서 살고 있었던 예술가와 문인들의 삶에 주목했다.



    그를 만난 첫 인상은 ‘오타쿠(특정 취미나 분야에 깊게 빠져 있는 사람)’였다. 말수도 적고 수줍음도 많아 질문을 던지고 답을 기다리느라 인내심을 가져야 할 정도였다. 

    요시카와 씨는 오사카에서 태어나 우연한 기회에 한국말을 접하고 회사를 그만두고 무작정 서울로 유학해 한국말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일본 속담에 ‘독약을 마시면 접시까지 먹어 버리겠다’는 말이 있는데 이왕 시작한 것, 깊게 들어가고 싶었다”고 했다. 

    그 말대로 연세어학당을 거쳐 인하대 국문과 대학원에 들어갔고 한국인도 힘든 근대문학 박사학위를 땄다. 주제는 ‘정지용 시(詩) 연구’. 이를 시작으로 ‘조선 최초의 다다이스트’ 고한용(1903~1983) 평전을 썼고 요즘은 한하운(1919~1975) 시인의 삶을 일본 잡지에 연재 중이다. 그는 어떻게 그리고 왜 한국 근대 문학과 문인들에 빠져들게 됐을까.

    요시카와 씨와의 인터뷰를 그의 시각에서 정리해보기로 했다.

    한국어에 빠져들어 사표 내고 서울로

    나는 원래 한국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중·고등학생 때 재일교포 친구가 있었지만 한국어를 할 줄 몰랐고 일본 학생들과 다름 없는 생활을 하고 있어서 그들을 통해 한국 문화를 접할 기회는 없었다. 제대로 된 한국 식당에 갈 기회도 없었고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한국에 대한 뉴스는 부정적인 것이 많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하며 독재하는 나라,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나라, 관광이라고 해봐야 일본 남자들의 기생관광이 대세인 나라…. 이런 이미지로 가득한 나라가 한국이었다. 나 뿐만 아니라 대부분 일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결정적으로 바뀐 계기가 88서울올림픽이다. 현대적이면서도 밝은 서울의 모습이 TV에 나오자 “가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본 방송국들도 간단한 한국어 회화를 가르쳐주는 프로그램들을 방영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 말을 배우고 싶어도 참고할 만한 교재가 별로 없었는데 그즈음부터 초급 학습자를 위한 한국어 교재, 여행에 도움이 되는 간단한 한국어 회화 책이나 관광 안내서가 많이 출간됐다.

    나는 대학에서 불어를 배웠고 대학원에서는 일본의 근대 시(詩)를 연구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오사카에서 직장을 다녔는데 일을 하면서도 늘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때마침 ‘한국어 배우기’ 분위기가 일면서 슬며시 호기심이 생겼다. 서점에 갔다가 가벼운 마음으로 입문서를 구입해 문자, 발음, 문법을 독학했는데 재미가 있었다. 다른 참고서와 NHK라디오 강좌도 듣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읽고 말도 할 수 있게 됐을 때 한국어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수업은 매주 토요일 90분 동안 진행됐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말을 배우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수업이 끝나고 한국인 선생님과 수강생들이 함께 점심을 먹으며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았다. 가끔 서울로 짧은 여행을 가기도 했는데 모든 것이 마냥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한국어를 평생의 업(業)으로 삼을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회사에 다니는 게 싫어졌다. 언제라도 사표를 쓰겠다는 심정으로 다니던 어느 날 ‘한국어를 제대로 하는 통역자나 번역자가 부족하다’는 내용의 짤막한 신문 기사를 읽었다. ‘한국어를 잘하면 먹고 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때 젊기도 했지만 새로운 언어를 배우겠다는 호기심이 가득한 때였다. 내가 전공한 불어는 일상 생활에서 사용할 기회가 없었고 유학을 가고 싶어도 비용이 많이 들었다. 설사 유창하게 불어를 구사한다 해도 그것으로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어를 배우면 괜찮을 것 같았다. 한국행 결심을 굳힌 어느 날, 사표를 내고 무조건 서울로 향했다. 1990년대 초의 일이다.

    연세대 한국어학당에 들어갔다. 의외로 나처럼 회사 잘 다니다가 그만두고 한국어 배우겠다고 온 20대 일본인 여성들이 적지 않아 놀랐다. 어학당 과정은 1급~6급으로 졸업까지 1년 반이 걸리는 과정이었다. 나는 이미 공부해 놓은 것이 있었던 터라 3급으로 들어가 4급을 월반하고 9개월 만에 졸업했다. 그리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국 땅에서 우연히 시작된 신경림 시인과의 인연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해결했는데, 한국어를 좀 더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날로 간절해졌다. 마침 한국의 대학원 과정에 연구생으로 등록하면 유학 비자가 나온다는 것을 알게 돼 다시 서울 행을 계획했다. 이번에는 언어도 언어이지만 한국 사회를 제대로 알고 싶어 사회학 계통의 학과를 골랐다. 한국사회를 아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잘못한 선택이었다. 한국사회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수업은 영어 논문을 읽고 미국의 최신 이론을 배우는 식으로 진행됐다. 학생들은 영어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로서는 별 재미가 없었다. 

    그때 누군가로부터 서울 강남 쪽에 김정환이라는 시인이 세운 ‘한국문학학교’라는 게 있다는 걸 들었다. 한국의 유명 소설가와 시인, 평론가가 직장인들에게 문학 강의를 한다고 했다. 신경림, 정호승, 강은교, 김원일, 이문구, 임헌영 선생 등이 강사라고 했는데 나로서는 전혀 모르는 분들이었다. 

    무조건 학교를 찾아가 등록했다. 석사 때 근대시를 전공해 일본 근대문학의 성립 과정에 관심이 있어서 한국의 근대문학이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 하는 호기심도 있었다. 누군가 “신경림 시인 강의가 재미있다”고 해서 신청했다.

    수업은 한국의 명시(名詩)를 함께 읽고 토론하고 숙제로 각자가 써온 작품들을 돌려가며 의견을 나누는 식으로 진행됐다.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작품을 함께 읽으며 서로 다른 시각을 나누는 것도 좋았고, 한국인이나 일본인이나 문학 작품을 보고 느끼는 것에 별 차이가 없다는 것도 느꼈다.

    당시 나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나의 운명을 바꿨다. 신경림 선생님으로부터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나를 제자처럼 많이 아껴주고 챙겨주셨다. 내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도 한국을 방문할 때면 인사동에서 같이 점심을 먹고 차를 마셨다. 길을 걷다 보면 아는 사람들이 다가와 인사를 했고 곧장 함께 식당으로 데려가서 선생님과 내게 밥이나 술을 사줬다. 시인, 소설가, 화가 등 다양했다.

    당시 선생님은 민족문학작가회 회장이었던 만큼 관련 모임의 뒷자리도 많이 따라간 것 같다. 나는 불청객이었지만 선생님이 데려 오는 손님이라 환대를 받았다. 당시 유명한 사람들을 많이 봤을 텐데 누가 누군지 잘 몰랐다. 1990년대 후반이었다. 

    민주화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한국의 예술가들은 술을 마시며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감옥살이했던 이야기를 농담처럼 이야기했다. 그런 자리를 통해 직접 경험하진 못한 한국 민주화 운동의 향기를 맡고 피부 감각으로 이해했다. 

    한국과 일본에서 문학인들이 차지하는 위상이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일본에서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사회 밖 사람들’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다른 공간에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민주화 투쟁도 하고,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면 사회가 즉각 반응했다. 사회와 동떨어진 사람들이 아니라 역사의 격변기 한가운데 서 있는 무게감이 있는 지식인들이었다.

    “일본인이 왜?”…정지용 연구로 박사학위

    1년이 지나 대학원 연구원생 비자가 만료되면서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고 있는데 선생님으로부터 “인천에 인하대라는 곳이 있는데 해외 우수유학생 선발 지원 프로그램이 있다니 한번 지원해보라”는 연락을 받았다. 

    “지원해 보겠다”고 했더니 홍정선 국문과 교수님로부터 메일이 왔다. ‘마침 교토에서 열릴 심포지움에 참석할 일이 있으니 보자’고 하는 거였다. 일종의 면접이었다. 나는 이렇게 다시 한국으로 가게 됐다. 1997년 3월 인하대 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홍 교수님 밑에서 한국 근대문학을 전공했는데 공부는 당연히 쉽지 않았다. 외국인이니 당연한 거였겠지만 ‘사전이나 자료를 열심히 찾아도 모르는 것은 한국 학생들 역시 모르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기도 했었다.

    공부할 때 일본 근대 문학에 관한 지식이 도움이 됐다. 식민지 시대 조선에서 일본으로 유학 간 한국 문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쓴 글을 읽다 보면 메이지, 다이쇼, 쇼와 시대 등 일본 사회나 문학을 모르면 이해할 수 없는 대목들이 있었다.

    박사 논문 주제는 ‘정지용 시인의 삶과 시’로 정했다. 정지용은 한국이 낳은 위대한 시인이었지만 월북 작가라는 낙인이 찍혔었다. 1988년에 발매 금지 조치가 해제됐지만 그의 작품은 여전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지용은 교토에서 유학을 하는 등 일본 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기타하라 하쿠슈라는 시인에 심취해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내용의 편지 형식 에세이를 발표했을 정도였다.

    학위 논문 발표회 때 한 교수님이 “정지용 시인이 일본 문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내용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 참석한 교수들과 학생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다른 교수님들이 모두 발표자의 의견에 찬성한다고 발언해 긴장된 분위기를 풀어 줬다. 나중에 열린 논문 심사회에서 문제없이 통과됐고, 2001년 3월에 학위를 받았다. 대부분의 한국 학생들은 더 오랜 시간을 들여 박사논문을 썼지만 나는 비자 기한이 있어서 빨리 써야 했던 것도 동력이 됐다.

    ‘한국 문학을 연구하는 일본인’을 대하는 한국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반가워하고 격려해 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일본인이 공부하는 것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는 이도 있었다. 어떤 학생은 처음 만난 자리에서 대뜸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쳤다. 나는 웃음으로 답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사람은 마음이 상했을 것이다. 

    학회에 참석해서도 차가운 시선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그런데 박사 논문이 통과되고 몇 년 후 서울대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토론자로 참석한 분이 내게 다가와 “당신 논문이 한국 근대시 전공자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해 보람을 느꼈다. 무엇이든 남에게 보여줄 것이 없으면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박사과정에 있을 때만 해도 한국의 문학 연구는 실증적인 면이 부족해 보였다. 명확하지 않은 개념들이 논문에 등장했고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들도 있었다. 정지용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현장을 다니며 그의 삶을 실증하고 싶었다. 

    예를 들어 정지용은 본래 기독교 신자였는데, 나중에 천주교 신자가 된 사연은 알려지지 않았었다. 나는 그가 다녔던 도시샤 대학 안의 기독교 교회와 교토 가와라마치의 성당을 찾아 양쪽에서 세례를 받은 기록을 확인했다. 여타 자료도 함께 분석해 당시 상황을 밝히면서 그가 기독교에서 천주교로 전환한 이유를 고찰해 한국의 잡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다다이스트 고한용, 시인 한하운 연구

    잊힌근대인물 다다이스트 고한용 평전. 이마

    잊힌근대인물 다다이스트 고한용 평전. 이마

    고한용이란 이름은 한국에 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1920년대 일본의 다다이스트였던 다카하시 신키치, 쓰지 준의 글에서 그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가령 훗날 시인으로 유명해지는 다카하시가 청년 시절 쓴 글에 ‘고한용을 만나고 교류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걸 보는 순간 ‘식민지 시대 조선청년 중에도 다다이스트가 있었구나’ 하는 호기심이 급발동했다. 

    다다이즘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0년대 유럽에서 다다이스트로 불리는 젊은 예술가들이 중심이 된 예술운동이다. 지속 기간은 짧았지만 세계 예술사에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 1920~1930년대 경성에는 새로운 문화 조류가 많이 들어왔고, 한일 젊은이들은 미지의 세계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정지용, 박팔양, 오장환, 임화, 이상 등 당대 주요 시인들이 모두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나는 남들이 모르는 것을 찾아내 수수께끼 풀 듯 퍼즐을 맞추는 것을 좋아한다.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다니며 고한용의 흔적들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고한용은 도쿄에서 유학하며 다다이즘을 접했다. 1924년 잡지 ‘개벽’에 ‘다다이슴’이란 제목의 글을 발표한 데 이어 ‘고따따’라는 필명으로 신문과 잡지에도 몇 편의 글을 남겼다. 그가 다카하시나 쓰지를 경성으로 초대해 조선 청년 예술가들에게 소개하고 함께 즐거운 시절을 보냈다는 기록도 찾아냈다. 

    하지만 활동 기간이 2년에 불과해 그의 활동은 해방 후 남한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나는 잊힌 그의 삶을 추적해 ‘경성의 다다, 동경의 다다(부제: 다다이스트 고한용과 친구들)’라는 책을 써서 한국과 일본에서 출간했다. 고한용을 통해 당시를 살았던 한국과 일본 청년 예술가들의 교류와 궤적을 그리려고 했다.

    유족과의 만남도 뜻깊은 경험이었다. 고한용 평전 작업은 잡지 연재를 시작으로 이뤄졌는데 우연히 인터넷에서 내 글을 발견한 고인의 외손녀가 “가족도 전혀 몰랐던 할아버지의 생애를 알려줘 고맙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내왔다. 너무나 반가웠다. 이를 계기로 유족을 만나 고한용의 후반부 삶의 발자취도 기록할 수 있었다.

    요시카와 씨가 쓰고 있는 한하운 평전의 일부. 요시카와 나기

    요시카와 씨가 쓰고 있는 한하운 평전의 일부. 요시카와 나기

    내가 요즘 연구하는 인물은 한하운 시인(1919~1975)이다. 함경남도에서 대지주의 장남으로 태어난 한시인은 흔히 ‘문둥병’ ‘나병’으로 불렸던 한센병을 앓았다. 해방 후 반동 분자로 찍혀 빈손으로 월남했고, 서울의 길거리를 방랑하는 역경 속에서도 시집과 자서전을 내 유명해졌다. 1949년 말 경기도 부평에 정착한 후 한센병 환자의 복지를 위해 헌신하기도 했다.

    서정시 ‘보리피리’ ‘파랑새’ 등이 국어 교과서에 실린 덕분에 한하운이라는 이름은 널리 알려졌지만 시인의 삶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2017년에 경기도 부평역사박물관은 부평에서 마지막 생을 보낸 고인의 삶을 재조명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박물관 측으로부터 “한하운이 자서전에서 ‘식민지 시절 일본 부유층이 다니는 명문 학교인 도쿄 세이케이고를 2년간 다녔다’고 적고 있는데 그의 행적을 찾아 글을 써 달라”는 청탁이 왔다. 나는 세이케이 학원 사료관을 방문해 학예원들의 도움을 받아 학적부를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본명과 필명은 물론 창씨 개명한 일본 이름도 없었다. 결국 허위 학력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해 나는 부평에서 열린 심포지움에서 이런 내용을 발표했다. 일부 사람들이 “한 시인의 삶을 진실되고 입체적으로 보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해줬다.

    한하운은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내면이 정말 복잡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흥미가 생겼다. 그는 한센병 환자 요양시설 성혜원(成蹊園)이나 환자 자녀들을 위한 신명보육원(新明保育院)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등 한센병 환자를 위해 헌신한 성자적인 이미지 한 켠에 학력을 위조했고 인간관계가 복잡했으며 욕심도 많았고 허풍쟁이적 성격도 있었다. 

    나는 ‘한센병 시인 한하운의 맨 얼굴’ 이라는 제목의 글을 아와나미 서점이 내는 잡지 ‘세카이(世界)’에 3회 계획으로 연재하고 있다. 그를 중심으로 한 당시 사회상황도 나의 관심사인데 한센병 연구의 권위자이며 환자들의 자립을 위한 정착촌을 만드는 데에 중심적 역할을 한 유준 박사, 명동에서 ‘시인의 집’을 운영해 유명했던 시인 박거영 등 주변 인물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한국문학 번역가로 한일 교류 이어가

    신경림 시인과 일본 문학계의 거장 다니카와 슌타로의 대담집. 예담

    신경림 시인과 일본 문학계의 거장 다니카와 슌타로의 대담집. 예담

    2001년 박사 학위를 따고 귀국했지만 일자리를 찾지 못해 할 일 없이 지내고 있었다. 마침 한국 드라마와 영화가 일본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제 2외국어로 한국어를 택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본의 한 대학에서 ‘한국어 강사’를 해달라고 해 10여 년 간 강의했고, 한국 문화도 함께 가르쳤다. 지금은 다 그만뒀다.

    번역 일은 김승복 대표가 도쿄 진보초에 만든 출판사 ‘쿠온’이 한국문학의 번역서를 내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맡았다. ‘광장’(최인훈), ‘마당 깊은 집’(김원일), ‘소문의 벽’(이청준)과 정지용의 시 선집을 비롯해 신경림, 김혜순, 김영하, 정세랑 작가의 작품들을 번역했다. 2024년에는 시미즈 치사코 씨와 함께한 토지(박경리) 일본어판 번역 작업을 8년 만에 끝냈다. 최근에는 한국의 시를 번역하고 있다.

    한류가 한국 문학에까지 영향을 미친 건 최근이다. 한국 관련 서적은 일본 출판계에서 별로 관심이 없었고 문학은 특히 인지도가 낮았다. 아무리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문학 작품을 번역해도 일본에서는 빛을 보지 못했다. 요즘엔 외국 문학 출판이 부진한 일본 출판계에서 한국 문학이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문학을 내는 출판사도 늘었다. 이러다 보니 문학을 통한 교류도 많이 이뤄지고 있다.

    2012년 신경림 선생의 시 선집을 번역한 적이 있는데 선생님과 일본의 원로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 시인의 대담과 두 시인이 번갈아 쓴 짧은 시를 한편의 긴 시로 엮는 대시(對詩) 행사도 도쿄와 경기 파주에서 진행한 적이 있다. 한일 관계가 별로 좋지 않던 시절이었지만 좋은 추억이었다. 두 시인의 대담 및 대시는 ‘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라는 제목으로 한국과 일본에 동시 간행됐다.

    지금 한국과 일본의 작가들은 대산문화재단이나 한국문학번역원이 주최하는 큰 행사만이 아니라 크고 작은 서점이 하는 토크 이벤트 등에서 만날 기회가 많아지고 있다. 그런 모임은 규모는 작아도 깊고 따뜻하다. 이런 교류를 곁에서 돕는 기회가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

    한국 사람들도 잘 모르는 근현대 인물들을 발굴하고 이들의 삶을 파고드는 것은 나로서는 퍽 흥미있는 일이다. 한국 근대문학은 관련 연구가 많지 않아 새롭게 발굴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처럼 그런 일을 하고 있다.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다면 계속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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