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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과 앙드레김, 유아독존의 로맨티스트

김종필과 앙드레김, 유아독존의 로맨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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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종필 자민련 명예총재와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김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지금의 직업과 연관을 맺은 시기가 비슷하다. 김종필은 1961년 35세의 나이로 5·16을 통해 정계에 데뷔했고, 앙드레김은 1962년 25세의 나이로 ‘살롱앙드레’라는 의상실을 오픈하면서 패션계에 데뷔했다. 두 사람은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쉽지 않은 일임에도 늘 정상자리에 있었다. 장수하는 직업인의 대표적인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또 자신의 직업세계에서 낭만주의를 근간으로 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김종필이 로맨티스트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앙드레김 역시 음악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소재로 낭만주의가 근간이 되는 작품을 추구하는 디자이너로 알려져 있다.

인간을 중시한다는 삶의 방식이나 직업관도 같다. 앙드레김은 무엇보다 인간을 가장 소중히 여긴다고 말한다. 인간의 아름다운 심성과 따뜻한 가슴을 울릴 수 있는 패션휴머니스트가 자신의 소망이라고 강조한다. 김종필 역시 누구보다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사람이다. 정치인이라는 직업이 ‘사람장사’이긴 하지만 김종필은 직업적 의미 이상으로 사람이라는 개념을 중시한다. 그들은 또 철저하게 대중을 상대로 하는 직업인이면서도 별반 대중을 의식하지 않는 특이한 사람들이다.

정말로 희한한 공통점은 두 사람이 디자이너와 정치가라는 전혀 다른 직업에 종사하면서도 국가와 민족을 인생의 화두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종필은 우리나라 정치인 가운데 국가와 민족을 가장 많이 거론하는 사람이다. 그의 모든 선택 기준은 국가와 민족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앙드레김은 예술계통에 종사하는 사람답지 않게 애국애족의 정신을 강조하며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다. 수십 년간 100% 국산옷감을 고집하고 있으며, 자신의 아들에게도 나라에 대한 애착을 가져야 가정의 행복도 있다고 말할 정도다.

그러나 직업적 성취도와는 무관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두 사람의 직업의식에는 큰 차이가 있다. 직업인으로서 김종필과 앙드레김의 삶을 한번 들여다보자.

김종필의 직업의식

김종필의 직업은 정치인이다. 70년대 초와 90년대 말, 두 번에 걸쳐 국무총리를 했고, 현재 9선의 국회의원인 그의 직업이 정치인이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5·16이라는 충격적이고 극적인 무대를 통해 데뷔한 그의 정치인생이 어느덧 40년이다. 한 사람이 40년을 한 직종에 종사했다는 건 결코 간단하게 보아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거의 예술의 경지라고 할 만한 직업적 노하우,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성실성이나 끈기 등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감히 넘보기조차 어려운 기록이다.

40년을 근속한 직장인에게는 100돈쭝의 황금열쇠를 선사해도 과하지 않으며, 데뷔 후 40년이 넘도록 왕성한 활동을 하는 예술가가 있다면 국민적 찬사를 보내야 한다. 그렇다면 40년의 정치경력을 자랑하는 김종필도 직업적 예찬론의 한 대상자가 되어야 마땅한데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왜 그럴까?

1980년 5월 초 당시 공화당 총재로 대권을 꿈꾸던 김종필에게 한 언론인이 대통령직이 직업일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대통령도 일을 하고 월급을 받으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이었다.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직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직업인이라고 봐서도 안 된다고 강조한다. 대통령은 국민의 뜻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어느 경우든 사심(私心)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게 대통령직 직업 불가론의 핵심이다.

직업의 사전적 의미는 ‘생계를 위하여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다. 김종필은 직업의 이러한 일반적 개념을 자신이 업으로 삼고 있는 정치에 적용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의아한 생각이 든다. 혹시 김종필의 마음속에는 직업의식이라는 틀이 원천적으로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 말이다. 어떤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그 순간부터 ‘자신의 생계를 위한 사심’으로 공정성이나 합리성을 상실한다고 믿는 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으로 인해 대단한 스트레스를 받고 살지만, 또 그 반대로 일을 통해서 직업적 보람이나 삶의 의미, 이타심을 충족시키면서 살아간다. 전문가란 결국 투철한 직업의식이나 최소한 직업윤리에 대한 인식의 틀이 확고한 사람에 다름 아니다.

40년 경력의 직업적 정치인 김종필이 오너로 있는 정당의 지지율이 겨우 3%대에 머물고 있으며, 그가 정계에서 은퇴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60%에 달한다는 건(금년 2월 총선시민연대 조사자료), 어떻게 보면 김종필의 애매한 직업관에서 비롯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한 가정을 전제로 ‘인간 김종필’과 ‘직업인 김종필’과의 함수관계를 통해서 김종필이라는 인물을 분석해보는 것도 그렇게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기회주의, 애매모호, 2인자…

작년 이맘때 한 잡지사에서 한국 정치학회와 공동으로 국회의원과 정치학자 280명을 대상으로 유력 정치인 몇 명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다. 조사 결과 김종필의 정치스타일에 대한 불만으로는 기회주의·변신·편법·생존적 처세 등의 단어가 1위(17.9%)로 꼽혔다. 다음으로는 애매모호함·어물쩍·의뭉·선문답식(10.7%), 현실안주·미온적·2인자 처세(9.6%), 구시대·수구적(7.5%) 등의 순서로 지적됐다. 아마 일반 국민들을 대상으로 이미지 조사를 해도 거의 비슷한 대답이 나올 것이다.

기회주의적 처신과 애매모호한 말과 행동, 그게 김종필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다. 인식이라는 게 반드시 실체와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연관성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김종필은 40년의 정치인생 중 20여 년은 박정희라는 절대권력자 밑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2인자로 지냈고, 80년 이후에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2인자의 위치에서 20년을 살아왔다. 표면적으로는 같아도 질적으로는 굉장한 차이가 있을 수 있는 2인자의 위치였지만, 희한하게도 김종필의 행보에서는 내용상 아무런 차이가 발견되지 않는다.

5·16과 관련된 자료를 살펴보면 김종필은 박정희의 참모들 중 혁명이 성공한 뒤 권력구조를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에 대해 정리된 구상을 갖고 있던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공화당 사전조직의 실무 지휘자가 되는 강성원은 “당시 김종필을 대면만 해도 국가 개조에 대한 열기를 느낄 수 있었고, 그는 사심없이 국사에 몰두하고 있었다. 엄청난 결정들을 담담하고 또 대담하게 내려가면서 상황을 끌고 나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패기만만한 혁명아의 한 전형이었다”고 전한다.

62년 김종필의 중앙정보부는 단순한 정보기관이 아니라 “정부 안의 또 다른 정부”였다. 그 때문에 실세 김종필은 박정희의 냉혹한 견제를 받기 시작한다. 그는 63년 공화당 사전 창당작업 시비를 빌미로 외유를 강요당한다. 그때 유럽으로 간 김종필은 자동차를 직접 몰고 다니면서 공산권이 아닌 나라는 모두 다녀봤다고 한다. 외유 8개월간 자동차로 달린 거리가 무려 9800km나 되었단다.

혁명 직후 2년간 권력의 한복판에서 경험한 무소불위의 권력과 살벌한 견제 그리고 자의 반 타의 반이라는 말을 남기고 도망치듯 유럽으로 날아온 김종필의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너무 일찍 권력의 단맛과 쓴맛을 모두 알아버린 30대 후반의 사내에게 8개월간의 유럽여행은 남다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1차 외유에서 돌아온 이후 그는 권력자 앞에서 자신의 뜻을 세우는 일을 중단하게 된다. 일부 정치평론가들은 권력의 비정한 속성을 일찌감치 터득한 김종필의 예기 불안 심리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김종필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알아서 긴다는 것이다. 확실히 자기보다 막강한 힘을 가진 대상에 대한 그의 공포심이나 고개숙임은 상식선에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지나치다.

80년 5월 초 동아방송의 대담프로에서 사회자로부터 중앙정보부의 월권행위에 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의 대답은 이렇다.

“내가 중정을 창설했을 때 생각했던 것과는 많은 변질이 있었어요. 최근 전두환장군이 정보부장서리가 되면서 정보부가 본연의 기능에 맞는 운영을 해나가고 있는 것을 퍽 고무적으로 봅니다. 우리 국가를 위해서도 아주 좋다는 생각을 해요.”

실제로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지만 이미 혁명군의 실세로 떠오른 전두환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한 발언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100만 당원을 가진 정당의 총재로서, 또 당시 유력한 대권후보 중의 한 사람으로 거론되던 김종필의 무게를 감안한다면 지나치게 비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5월17일, 그는 보안사에 연행돼 46일 동안 감금되었다. 그는 그곳에 끌려간 모든 사람들이 지금도 몸서리를 치며 기억하는 보안사의 소위 ‘서빙고호텔’ 시절을 회상하면서도 담담하다. 46일 동안 별로 큰일없이 독서를 하면서 비교적 조용한 시간들을 보냈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차피 모든 것은 혁명하는 사람들의 뜻대로 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뭐든지 요구하는 대로 다 승인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때의 조서를 토대로 발표된 권력형 부정축재자 순위에서 자신이 1위로 발표된 사실에 대해서는 두고두고 분통을 터뜨린다. 신군부가 정권을 탈취하자 그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 기간 동안 그가 했다는 말은 “젊은이들이 잘해주기를 바란다”는 딱 한마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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