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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역 플랫폼의 가락국수 맛을 아십니까?”

“대전역 플랫폼의 가락국수 맛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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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진한 ‘어린 양’은 교회에 계속 나가기 위해서 고등학교 입학원서를 써놓고도 응시를 포기했다. 그래서 충남 연산중학교 졸업이 그의 최종 학력이다. 그는 “학교에 다니면서도 교회에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야 알았다”며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그러나 “요즘도 누군가 출신 학교 얘기를 꺼내면 주눅이 든다”고 고백한다.

대전에 계룡공고가 있었는데 그 학교에 철도운전과가 있었다. 그곳에서 1년간 교습 과정을 거쳐 철도청 기관조사(현 직급으로는 부기관사) 공채에 응시해 합격했다. 1966년, 그의 나이 열아홉 시절의 일이다. 이전에는 별다른 채용 절차 없이 철도 공무원의 소개로 아무나 들어가 대충 일했는데, 1965년부터 공채제도가 시행됐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기관조사 공채 2기인 셈이다.

처음 배치된 곳이 전라북도 익산이었다. 기관사나 기관조사의 직장은 ‘열차’다. 열차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혹은 서울에서 목포까지 달리는 것인데, 어디에 근무한다는 말이 성립될 수 있을까? 익산에서 근무하게 됐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가?

“가령 서울에서 목포까지 가는 열차가 있다고 합시다. 서울 승무원이 대전까지 기차를 끌고 오면, 이어 대전에 근무하는 승무원들이 열차를 인계받아서 목포까지 가는 것입니다. 대전에 온 서울 승무원은 목포나 부산에서 올라오는 열차를 인계받아 다시 서울로 돌아갑니다.”

火夫 노릇의 기관조사와 通票



신범철씨가 처음 기관조사로 몸담았던 기차가 바로 ‘칙칙폭폭’의 원조인 증기 기관차였다. 조개탄(석탄)을 때서 물을 끓이고 거기서 발생하는 수증기가 피스톤을 밀어서 동력을 만들었다. 이 동력으로 바퀴가 회전하면 거대한 견인력이 생겨, 객차나 화차를 끌게 되는 것이다.

이때 피스톤을 밀쳐준 과열 증기는 과열관 주위를 지나면서 포화증기로 바뀌어 굴뚝으로 나가는데, 이때 나는 소리가 ‘칙칙’이다. 반면 보일러 안의 연료(조개탄)이 타면서 생긴 가스가 굴뚝으로 빠져나갈 때 나는 소리는 ‘폭폭’이다.

기관조사란 직함은 그럴듯하지만 당시 그의 주임무는 보일러에 조개탄을 넣어 불을 때는 화부(火夫) 노릇이었다. 주요 역에는 연료를 만들어 공급하는 곳이 있었다. 주요 역 선로에는 석탄연료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크레인을 이용해 이 연료를 기관차에 싣는다. 기관차에는 탄수차(炭水車)가 연결돼 있어 연료와 물을 공급받는다.

기관조사의 주 임무는 탄수차의 연료를 삽으로 퍼서 불을 때는 것이었다. 연료를 퍼넣는 작업은 발차 역에서부터 종착 역까지 쉼없이 계속된다.

석탄을 불구덩이에 퍼넣는 작업이라고 해서 쉽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경사진 길을 올라갈 때에는 증기의 힘이 세야 하는데, 막상 오르막길을 만나 연료를 많이 퍼넣으면 안 된다. 기관차가 힘을 내려면 퍼넣은 연료가 제대로 타야 힘을 내는데, 오르막길을 만났다고 그제서야 연료를 많이 넣으면 미처 연료가 타지 못해 힘을 내지 못한다. 따라서 기관조사는 평탄한 길에서 부지런히 연료를 퍼넣었다가 오르막길에서 기관차가 힘을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

오르막길이 긴 곳에서 연료를 적절히 공급하지 못하면 중간에 열차가 멈춰서고 만다. 오르막 선로를 오르다가 아예 멈춘 열차를 다시 가동하여 움직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긴급히 지원을 요청하여 다른 기관차가 와서 밀어주거나, 아래쪽 평탄한 선로까지 후진해야 다시 가동할 수가 있다. 당시 이런 일은 심심찮게 발생하였다.

―앞에 가던 열차의 엔진이 꺼져서 미끄러져 후진하는 경우, 뒤에서 따라오는 열차와 추돌할 위험은 없었습니까? 요즘이야 무선전화기 등 통신체계가 발달했다지만, 그때는….

“무전기마저 없던 그 시절이 안전에 있어서는 오히려 완벽했다고 볼 수 있지요.”

무슨 얘길까?

눈썰미가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올 때 작은 훌라후프처럼 생긴 링을 걸어주고, 출발할 때비슷한 것을 다시 받아들고 가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 링은 열차 기관사가 이전 역에서 받았던 ‘통표(通票)’다. 통표는 그저 주고받는 상징이 아니다. 한 열차가 A역에서 B역으로 출발했을 경우, A역을 출발한 열차의 기관사가 통표를 B역에 갖다주기 전까지는, A역에서는 그 어떤 열차도 B역을 향해 출발시키지 않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A역과 B역 사이에는 단 한 개의 열차만 존재하게 된다.

통표 내부에는 원형이나 사각형·삼각형·마름모 등 각기 다른 모양의 쇠붙이가 내장되어 있다. A역과 B역 사이의 통표가 원형이라면, B역과 C역 사이의 통표는 삼각형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전 역에서 사용한 통표를 다음역 통과용으로는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제 모양의 통표가 들어가야 역 사이의 전화가 통화되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어떤 열차가 A역과 B역 사이에서 기관 고장으로 멈춰섰다고 하자. 이 열차는 B역에 통표를 전달하지 못했으므로 후속 열차는 A역을 출발하지 못한다. 고장난 열차가 기관을 수리한 후 B역에 도착해 통표를 제출해야, B역에서 A역으로 전화가 통화되고 A역에서는 후속 열차를 출발시키게 되는 것이다. 아주 원시적인 체제처럼 보이지만, 이 통표야말로 열차 추돌을 막는 최고의 안전 시스템이었다.

대전발 0시50분은 군용열차

그런데 요즘은 통표 대신 무선 전화를 사용하기 때문에, 효율 면에서는 앞설지 모르나 안전성에서는 옛 통표 활용 시절보다 못 하다는 것이다.

“지금은 무선 전화기도 있고 무전기도 있으니까 금방 연락이 되지만 예전에는 그런 통신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운행 도중에 고장나면, 출발했던 역까지 후진을 합니다. 후진하더라도 통표 제도 때문에 뒤따라오는 열차가 없어,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당시 기관조사의 월급은 얼마나 됐습니까?

“5000원이었어요. 쌀 네 가마 반을 살 수 있는 돈이었으니까, 다른 업종에 비해서 많은 편이었지요.”

―기관사와 기관조사의 업무는 어떻게 분장돼 있었습니까?

“한마디로 열차 운전은 기관사가 하고, 기관조사는 불을 때는 일이 주업무였어요. 초기에는 기관조사가 두 명이었습니다. 신입 기관조사를 ‘보조’라 하고, 고참 기관조사를 ‘본무’라고 했는데, 본무는 경사진 오르막 선로 같은 어려운 구간에서만 불때는 일을 했어요. 그런 구간에서는 노련하게 연료를 넣어야 기관차가 지속적으로 힘을 낼 수 있거든요.”

기관사나 기관조사의 급여가 타 직종에 비해 높았던 것은 이유가 있다. 작업환경이 지극히 열악했기 때문이다. 석탄이라는 연료로 물을 끓이고 끓는 물에서 나온 증기의 힘으로 열차를 움직이는 시스템을 유지하는 한 작업환경은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여름철 같은 경우 그냥 들어갔다간 온몸을 다 데요. 수건을 물에 흠뻑 적셔서 얼굴을 감싸고 들어가지 않으면 화상을 입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옆에 가만히 있으면 숨이 막힙니다. 따라서 수건으로 얼굴을 감싸고 되도록 자세를 낮춰서 일을 해야 합니다. 탄수차와 기관 사이가 상당히 떨어져 있는데 그 사이를 철판으로 이어놨거든요. 그런데 열차가 심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고 철판을 왕래하는 것은 참 어려웠습니다. 그 시절의 기관조사들, 고생이 참 많았지요.”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기관조사로 채용된 사람들 중 도중에 포기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요즘 젊은이들 같았으면 견뎌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당시 신씨가 일했던 열차는 익산-전주, 익산-군산, 혹은 익산-연무 구간을 운행하는 지선(支線)이었다. 승객들은 대개 열무나 고추, 콩 등속을 보따리에 바리바리 싸서 팔러가는 보따리장수들이었다.

지금은 열차를 이용하는 승객들의 모양새도 다르고 기관사나 부기관사의 근무여건도 크게 달라졌다. 하지만 신범철 기관사는 그래도 ‘칙칙폭폭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쉽게 떨치지 못한다.

“굉장히 좋아졌지요. 60년대만 해도 사람들이 열차 지붕 위에도 매달려 가고, 원래는 들어올 수 없게 돼 있는 기관실에까지 꽉 찼거든요. 그때에는 모두 가난했지만 사람 사는 맛이 났어요. 그런데 선로를 대대적으로 직선으로 만들면서부터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열차가 동네 어귀나 산모퉁이를 칙칙폭폭하며 비잉 돌아나오는 그런 정취 있는 모습은 구경할 수가 없게 됐지요.”

그뿐일까? 추석이나 설 명절 때면 선물 꾸러미를 양손에 나눠 들고(가족에게 줄 옷가지라면 내용물을 꺼내 가방에 챙겨 담았으면 더 간편했을 텐데, 당시엔 왜 모두 와이셔츠를 악착같이 종이상자에 넣은 채로 들고 다녔는지 모르겠다) 완행열차의 유리창으로 기어드는 모습은 이제 ‘그 때 그 시절’ 얘기가 되어버렸다. 신씨는 그런 낭만과 운치가 사라져버려 못내 서운하다고 했다. ‘빠르고 안전하고 쾌적한 철도여행’을 지향하는 철도청장이 들으면 영 섭섭해 할 소리다.

―유행가 ‘대전 블루스’에 나오는 대전발 0시50분발 열차가 실제로 있었습니까?

“0시50분에 대전을 출발하는 열차가 있었습니다. 예전 그 열차는 군용열차였습니다. 물론 지금은 없어졌지요.”

―옛 완행열차 시절에 기차를 타보면 대전역에서 유독 정차 시간이 길던데, 경부선과 호남선이 갈라지는 곳이어서 그랬습니까? 아니면 역 구내의 가락국수 장수들하고 철도청이 ‘작당’을 하고….

“완행열차가 워낙 속도가 느리지 않습니까? 대전에는 몇 시까지 도착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는데, 늦게 도착해서 차질을 빚는 것보다, 차라리 미리 도착해서 기다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서 서둘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전역에서는 20분이나 30분씩 정차하게 되었지요. 지금은 기껏해야 2분 정도밖에 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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