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이 슬픈 사랑의 얘기를….” 젊은 나이에 죽은 아내를 회상하는 영화 ‘러브 스토리’ 주제가의 시작 부분이다.
꽃다운 나이에 죽은 여동생을 추모하면서 쓴 시 ‘부용산(芙蓉山)’에 월북음악가 안성현이 곡을 붙이고, 그 노래를 빨치산들이 즐겨 불러서 일명 ‘빨치산의 노래’가 됐다는 이유로 한평생을 쫓기고, 얻어맞고, 천대받다가 끝내 이역만리 호주로 떠나와야 했던 박기동(朴璣東·84) 시인을 소개하기 위해서 필자 또한 비슷한 노래를 불러야할 것 같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이 슬픈 노(老)시인의 얘기를….”
상처없이 먼 길을 떠나지 않는다
상처받지 않은 사람은 먼 길을 떠나지 않는다고 했던가. 필시 그에게도 곡절이 있으리라. 먼 길 떠나와서 ‘시드니 박씨’, ‘멜버른 김씨’의 시조(始祖)가 되어 살아가는 숱한 호주 한인동포들처럼. 더구나 그가 모국을 떠나올 때가 76세의 고령이었으니 곡절도 이만저만한 곡절이 아니리라.
시드니의 겨울은 얼음조차 얼지 않는 아열대성 겨울이다. 더구나 금년 겨울은 80년 만의 이상 난동(暖冬)으로 따뜻하기 그지없는 겨울이었다. 그러나 먼 길을 떠나온 상처받은 사람들에겐 삭풍보다도 더 시린 고독감이 뼛속까지 저미는 겨울이었을지도 모른다.
겨울나기를 한 박기동 시인을 만나기 위해 시드니 서부의 리버우드를 찾아간 날은 봄볕이 아주 좋은 금요일이었다. 지구 반대쪽에 위치한 시드니에선 9월에 봄이 시작된다. 그가 사는 정부 임대 아파트 2층 계단에 1년생 화초가 심어진 화분 몇 개가 놓여 있었다. 봄볕을 쬐고 있는 화초들 옆에 앉아 함께 봄볕을 쬐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필자가 도착한 것도 모르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명상에 잠겨 있는 노인. 봄볕 아래서 화초들과 함께 졸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꽃과 노인, 노인과 꽃, 이미 한 몸 되어 사는 그의 얘기가 궁금했다.
적막강산이었다. 필자가 1년여 만에 찾아온 손님이라고 했다. 시집을 내기 위해서 하루빨리 시를 생산하고 싶지만 너무 적막해서 그런지 도무지 시가 써지지 않는다고 했다. 인터뷰를 위해서 그의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말이 아파트지 박시인을 위한 공간은 화장실만 분리된 6평 남짓한 원룸이었다. 낡은 침대와 책상 하나, 조그만 책장이 있을 뿐 손님을 위한 의자도 없었다. “손님은 1년에 한 명 올까 말까 합니다”라고 한 그의 말이 떠올랐다.
-정부 임대 아파트지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옹색한 것 같은데….
“이 정도면 나 혼자 살기엔 충분한 공간입니다. 난 이 안에서 하고 싶은 것을 다 합니다. 먹고, 자고, 원고 쓰고, 요가도 하고…. 한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면 물질의 노예가 될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나같은 노인에겐 인간의 향기가 필요하지 물질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 ‘물질을 적게 가져야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물신숭배사상에 빠진 현대인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복음입니다.”
-1917년생이니 우리 연세로 여든다섯이신데, 제겐 60대 중반쯤으로 보입니다. 건강비결이라도 있으신지요?
“31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2시간씩 계속해온 요가와 17년째 계속하는 생식 덕분인지 모르겠습니다. 요가는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되게 사는 것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6000년 동안 행법(行法)으로만 전수되고 있는 요가는 일종의 실천철학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31년 요가를 해온 나도 아직 문턱에다 발 한쪽을 들여놓고 ‘요게 요가인가’ 하고 느끼는 정도입니다. 특히 물구나무서기를 좋아하는데, 한 시간 정도 물구나무서기를 하면 정신이 맑아지고 기억력이 좋아집니다.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 중의 비결이지요. 정신이 흐려지면 백약이 무효니까요.”
시집 한 권 내는 게 평생 소원
-요가는 인도의 6개 정통철학 가운데 하나라고 들었습니다.
“요가는 만물이 평등하다는 평등철학에서 시작합니다. 벌레 한 마리도 나와 평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아부를 하지도 않고 아부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혼란스런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 정신을 똑바로 돌려받을 수만 있다면 남을 미워하는 마음도 없어지고 짜증도 없어집니다. 정신뿐만 아니라 몸까지 건강해질 수 있지요.”
-생식을 하실 뿐만 아니라 하루에 두 끼만 드신다고 하더군요.
“생식은 1985년부터 시작했습니다. 당시 내가 자연식 모임인 ‘한마음회’ 회장이었는데, 본격적으로 생식을 하기 위해 경주에 있는 생식마을 ‘초근목피연구원’에 들어가 4년을 지냈습니다. 그후로 단 한번도 잔병치레를 한 적이 없습니다. 주식으로 현미 등 13가지 정도의 분말에 꿀과 물을 적당히 배합해 개떡처럼 만들어 한 끼에 60g 가량씩, 하루 두 끼를 먹습니다. 부식으로는 감자, 당근 같은 뿌리 야채와 시금치, 미나리 등 푸른빛을 띤 야채를 강판에 갈아서 먹고 물은 생수만 마십니다. 호주의 수돗물은 거의 생수 수준이라서 하루쯤 둔 다음 그냥 마시지요. 오전 10시와 오후 6시에 식사를 하고 간식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생식을 하더라도 과식은 금물입니다.”
-그렇게 건강에 집착하시는 데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시 ‘부용산’ 중에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라는 조금 애상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게 스물네살에 죽은 누이의 운명을 쓴 것입니다만, 돌아보니 내 자신의 운명이 돼버렸습니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면서 늘 쫓기고 얻어맞고 천대받았습니다. 이런 비극적인 인생을 살아왔는데 내 평생의 소망인 시집 한 권을 내지 못하고 죽는다면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세 차례 정도 시집을 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가택수색 등으로 시작(詩作) 노트를 빼앗겼어요. 한국에선 더 이상 시를 쓸 수도, 시집을 낼 수도 없다는 절망감 때문에 호주로 떠나왔어요. 한평생을 시에 기대 살아왔는데 건강하지 못하면 시를 쓸 수도, 시집을 낼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요가를 하고 생식을 하는 겁니다.”
첫번째 인터뷰를 마치고 문을 나서면서 보니 벽에 써붙인 글들이 눈에 들어왔다. ‘몸은 건강하게/마음은 깨끗하게/생활은 검소하게’,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말자. 그건 너 스스로를 인간 쓰레기로 만드는 노예근성이니라. 또한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탓하지 말자. 모든 건 오로지 내 탓이어라’라는 글귀다. ‘3대 생활수칙’이란 것도 크게 써서 붙여놓았는데, ‘1.서두르지 말자. 2.욕심을 버려라. 3.매사에 감사하라’다.
그중에서도 ‘욕심을 버려라’는 대목이 목젖에 걸려왔다. 저 노시인에게도 스스로를 추스려야 할 욕심 같은 게 남아 있을까. 무소유의 전형 같은 시인의 집을 나오면서 문득 미당 서정주 시인의 ‘가난은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구가 떠오른 건 또 무슨 연유일까. 그가 물질 대신 큰 정신을 갖고 있다는 것을 엿보았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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