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응접실에는 신 감독과 최씨가 인생의 고비 고비에서 찍은 사진들이 놓여 있었다. 70대 후반을 맞은 최씨의 얼굴에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에 나온 30대 초반 주연 여배우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장례 치른 지 한 달이 다 돼가는 데도 현실로 믿어지지 않아요. 서재에서 금방 문을 열고 나올 것 같아요. 장례식에서 공군 군악대가 ‘빨간 마후라’를 연주할 때 위로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신 감독을 회고하던 최씨의 눈가에는 간간이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사진을 찍는 동안 신 감독이 앓던 신병(身病)에 대해 설명했다.
“신 감독이 북한에서 탈출하다 붙잡혀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단식투쟁을 벌였더랍니다. 단식 8일째 의식을 잃었다는군요. 깨어보니 북한 의사가 수액을 놓아주고 있었대요. 북한의 의료기기는 위생상태가 열악합니다. 이때 C형 간염에 감염됐어요. 그동안 잠복해 있다가 20여 년 만에 발병해 두 번이나 간 이식수술을 받았지만 끝내 불귀(不歸)의 객이 됐습니다.”
이 인터뷰는 ‘최은희 신상옥 납북수기, 김정일 왕국’의 저자 김일수(동아일보 전 홍콩 특파원)씨의 도움으로 성사됐다. 최씨는 장례를 치른 후 신문, 잡지에서 인터뷰 요청이 숱하게 들어왔지만 일절 사절했다. 그러나 각별하게 지낸 김일수씨의 권유를 뿌리치지는 못했다. 김씨는 인터뷰에 동석해 최씨가 기억이 가물거릴 때마다 평소 신 감독에게 들은 이야기를 ‘리바이벌’하며 기억을 되살려줬다.
최씨의 딸 명희씨가 차와 과일을 내왔다. 부모가 북한에 납치됐을 때 고등학교 2학년이던 명희씨는 이 사건으로 인생의 행로가 바뀌었다. 그녀는 부모가 행방불명되는 바람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시골 총각과 연애 결혼해 1남 3녀를 뒀다. 신 감독이 첫 번째 간이식 수술을 받을 때 명희씨의 남편(서동엽)이 “아내를 곱게 잘 길러줘 너무 고맙다”며 장인에게 간을 제공했다. 서씨는 지방에서 인테리어 사업을 한다. 장례 이후 큰아들 정균(영화감독)씨와 명희씨가 번갈아가며 분당 집에 와 어머니의 수발을 들었다. 기른 자식이 낳은 자식보다 낫다.
“쟤들이 그때 당한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요. 둘이 한창 사춘기에 들어섰는데 어머니가 행방불명되고 아버지도 사라졌지요. 충격이 얼마나 컸겠어요. 다행히 나쁜 길로 안 빠지고 잘 살아줘 참 고맙게 생각해요.”
-신상옥 감독의 영화인생 60년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한마디로 영화 미치광이였죠. 영화에 살고 영화에 죽은 사람입니다. 가정생활 자체가 영화였으니까요. 우리에게 집필한 시나리오를 나눠주면서 화장실에서 한 챕터씩 보라고 하죠. 화장실에 앉아서도 책 보고, 앉으나 서나 영화 생각밖에 없었던 분입니다.”
신 감독은 세상 떠날 때까지 남북한과 미국 할리우드에서 100편에 가까운 영화를 찍었다. 그는 도쿄미술전문학교를 나와 미술감독으로 일하다 1952년 김광주 원작의 ‘양공주’를 각색한 ‘악야(惡夜)’로 데뷔했다. 마지막 작품은 2002년 ‘겨울 이야기’. 미개봉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