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림 압둘 자바와의 만남
우든은 지도자가 된 후 16년 만인 1964년 NCAA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가 미국 대학농구계에 UCLA 왕조를 본격적으로 건설한 건 한 해 뒤 한 선수와 조우하면서부터다. 바로 1960~ 70년대 미국 농구계의 전설 카림 압둘 자바다. 그가 보유한 특별한 기술, 즉 긴 팔과 큰 키를 이용해 하늘에서 사뿐히 공을 던지는 ‘스카이 훅 슛(Sky Hook Shoot)’은 상대 팀이 알면서도 못 막는 무서운 무기였다.
우든과 압둘 자바라, 농구계의 두 전설은 어떻게 만나게 됐을까. 1965년 5월4일 뉴욕 맨해튼에서는 미국 전역의 이목을 모으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뉴욕 파워메모리얼고교에 재학 중이던 촉망 받는 고교 농구선수 페르디난드 루이스 앨신더 주니어(카림 압둘 자바의 본명)가 자신의 진로를 밝히는 회견이었다. 당시 18세임에도 신장이 무려 219㎝에 달했던 그는 모교의 71연승을 이끈 괴물이자 고등학교 3년 동안 통산 2067득점, 2002리바운드의 성적으로 뉴욕시 기록을 갈아치운 주인공이었다. 미국 전역의 수많은 대학이 그에게 농구 장학생 자격을 제의했지만 뉴욕으로부터 5000㎞ 가까이 떨어진 로스앤젤레스(LA)로 건너가 UCLA대학에 입학할 예정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그가 UCLA를 택한 이유는 우든이 선수의 피부색을 차별하지 않는 감독이라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선수가 흑인인지 백인인지, 정치적 성향이 어떤지는 그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1947년 우든이 인디애나주립대 코치를 맡고 있을 때만 해도 미국 농구계는 흑인 선수들을 심하게 차별했다. 백인 대학생들을 위한 대학 농구 토너먼트에서 흑인 선수는 뛸 수 없었다. 하지만 우든은 이를 개의치 않았다. 그는 주전이 아니었던 흑인 선수 클레어런스 워커를 종종 기용했다. 다른 팀이 이를 문제 삼자 정규시즌 후 유명 대학 농구팀들끼리 벌이는 플레이오프 이벤트에 참가하지도 않았다. 우든이 지도하는 인디애나주립대 팀은 1948년 정규시즌 27승7패라는 훌륭한 성적을 냈다. 결국 당시 대학 농구 스포츠연맹은 인종차별 방침을 포기하고 인디애나주립대를 플레이오프 이벤트에 초대했다. 클레어런스 워커는 여기서 뛴 최초의 흑인 선수가 됐다.
선수의 피부색을 차별하지 않는 우든 감독을 택한 앨신더 주니어의 선택은 탁월했다. UCLA에 입학한 그는 우든의 꼼꼼한 지도를 받은 후 미국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센터로 성장했다. 앨신더 주니어가 대학 1학년이었을 때만 해도 당시 1학년 농구 선수들은 대학 농구팀의 정규 경기에 나설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1학년 선수들만을 이끌고 선배들로 구성된 UCLA 정규 팀과 연습경기를 가져 당당히 승리를 거뒀다. 그는 2학년이 되던 해에 UCLA의 30전 전승을 이끌었다. UCLA는 1967∼69년 NCAA에서 3연패했다.
1969년 100만달러라는 당시로선 천문학적 금액으로 프로팀 밀워키 벅스에 입단한 앨신더 주니어는 바로 신인왕을 수상했다. 이듬해 1970년에는 경기당 평균 31.7득점을 기록하며 소속팀 밀워키를 창단 첫 미국 프로농구리그(NBA) 우승으로 이끌고 자신도 MVP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1968년부터 이슬람교에 심취한 그는 1971년 영어식 이름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이후 앨신더 주니어라는 이름은 잊히고 ‘카림 압둘 자바’가 새롭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이 바뀌었지만 타고난 실력은 변함이 없었다. 1975년 LA 레이커스로 이적한 카림 압둘 자바는 이후 14년간 그곳에서 활약하며 5차례나 NBA 우승트로피를 LA시에 안겼다.

1975년 10번째 우승을 달성한 우든은 은퇴를 결심했다. 이미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였고 더 이룰 것도 없었다. 처음 NACC 우승을 한 1963년부터 1975년까지 12년간 그는 335승 22패, 승률 0.938 이라는 무시무시한 기록을 세웠다. 그는 여생을 가족에게 좀 더 충실하겠다고 다짐했다.
우든은 16살이던 1926년 부인이 된 넬리 라일리를 처음 만났다. 우든이 퍼듀대를 졸업하던 1932년 결혼한 그들은 아들 휴와 딸 낸시 앤을 뒀다. 은퇴 후 우든은 2명의 자녀, 7명의 손자, 10명의 증손자와 함께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1985년 3월21일 아내 넬리가 암으로 사망하면서 우든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25년간 우든은 매달 21일이면 아내가 묻힌 LA의 포레스트 론 공동묘지를 찾았다. 집으로 돌아와선 “넬리, 정말 보고 싶어. 이승에서의 삶이 빨리 끝나야 당신을 만날 텐데. 사랑해, 넬리”라고 쓴 연서를 죽은 아내에게 띄워 보냈다. 25년간 단 한 번도 거르지 않은 일과였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우든의 체력은 급속히 약화됐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우든은 100세 생일을 넉 달 남겨둔 2010년 6월4일 눈을 감았다. 그의 타계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 전역은 큰 슬픔에 빠졌다. UCLA는 우든을 기리기 위해 홈코트의 이름을 ‘넬리 · 존 우든 코트’로 명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