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아니면 불행해진다는 식의 이인제 최고위원 발언은 정당민주주의 핵심을 심각하게 부정하는 것이다. 정당 안에서의 경쟁필요성을 원천부정하는, 당원과 국민에 대한 협박이라 아니할 수 없다.”
‘김근태 고문사건’으로 상징되듯 독재정권에 저항한 양심수의 대명사로서 민주당내 재야·개혁그룹의 상징처럼 돼 있는 자신이 동지와 지지자들에게 제대로 ‘이름값’을 못해낸 데 대한 죄스러움을 오랫동안 곱씹고 있는 듯했다. 사실 김최고위원은 재야운동 때 박힌 격렬하고 강성인 이미지를 의식, 되도록 부드러운 이미지를 보이는 데 역점을 둬온 측면이 많으나 이것이 최고위원 경선에서는 ‘너무 유약한 것 아니냐’는 이미지로 전환돼 많은 손해를 봤다. 이와 같은 ‘대중성의 빈곤’ 이미지는 특히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두고 있는 김최고위원 진영에 심각한 경보음을 울렸다.
김최고위원은 이런 모든 점을 감안, 그동안 대권을 노리는 일부 최고위원들이 특강이나 각종 행사참석 등을 통해 공개적 활동에 적극 나서는 와중에도 좀처럼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채 내실을 다지는 데 치중해왔다. 그러나 최근 이른바 ‘총체적 위기’로 지적되는 국정 혼란과 무기력증에 대한 당안팎의 우려가 높아지는 시점에 이루어진 이번 인터뷰에서 그는 흉중에 담아둔 우려와 생각을 직설적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김최고위원은 특히 차기 대선주자 문제와 관련, 최근 ‘국민지지도’를 내세워 당내 여론몰이를 시도하고 있는 이인제(李仁濟)최고위원을 정면으로 비판, 미묘한 주제인 차기논쟁에 적극 뛰어들었다. 아울러 그동안 금기시돼온 차기리더십 도출 절차와 논의의 투명화를 요구하고 나서 차기경쟁의 공론화를 둘러싼 당내논의가 가열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김최고위원은 또한 최근 일련의 경제 사회분야 개혁정책의 난맥상과 관련, ‘준비 안된 개혁’ ‘졸속개혁’ ‘구호개혁’의 한계라고 자기비판하고 무기력증을 보이고 있는 당정에 일대 개편 필요성을 제기하고 나서 여권 내에 적잖은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모두가 불행’발언은 정당정치 부정
─이인제 최고위원이 11월9일 국민정치연구회 특강에서 행한 발언, “(내가)국민의 지지가 있는데도 (대통령)후보가 안되면 모두가 불행해질 것이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원론적 언급이라는 게 이 최고측 해명이지만 당내에서는 이최고측이 이른바 ‘대세론’을 확산시키기 위한 시동을 걸고 있는 것이라는 해석들이 많은데….
“지난번에 이인제 최고위원이 얘기한 것은 조금 느닷없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떤 예비적 과정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니냐는 거죠. 우리 국민들이 모두 경제문제를 해결해야 된다, 이렇게 걱정하고 있는 상황에 권력의 다음 주자 후보 문제를 제기하면 사람들의 관심은 끌어당기는 데는 성공할지 모르지만 당과 자신에게 정치력을 모으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국민의 지지도가 높은 사람이 후보가 되지 않으면 모두에게 불행한 사태가 오게 될 것이다’라는 말 속에 방점은 아마 ‘모두에게 불행한 사태’에 있는 것 같은데 이 점이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는 동시에 불쾌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국민지지도가 높은 사람이 당의 대통령후보가 돼야 한다’는 취지에 방점을 찍어놓고 본다면 말은 맞는 말 아닌가요? 그래야 본선에서도 이길 가능성이 높은 거고. 김대중대통령도 10월10일 대전일보 창간 50주년 회견에서 “국가지도자의 문제는 국민이 판단하고 정하는 것으로 국민들의 평가가 지도자의 중요한 기반”이라고 언급했는데.
“일반적인 언급이라면 맞는 말일 수 있어요. 그러나 이것이 특정인의 선택과 관련되는 ‘불행한 사태’ 언급으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고 보면 부적절한 발언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선 이것은 정당정치에 대한 부인이에요. 정당이 후보를 선택하고 그 후보가 그 정당의 정강과 정책을 갖고 국민속에 나아가서 지지를 호소하고, 그래야 현대민주주의의 핵심인 정당정치가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벌써부터 ‘나 아니면 불행해진다’는 식의 인식을 갖고 있다면 정당민주주의의 핵심을 심각하게 부정하는 것이 될 수도 있어요.
또한 이인제 최고위원 자신이야말로 지난날 신한국당 시절 경기도지사 후보로 나가고 그 정당의 후보로 경기도지사가 돼서 수도권에서 인지도를 넓혔고 그 다음에 신한국당의 대선후보로 나가서 경쟁력 있음을 평가받고 인지도를 넓히고 정치적 기반을 넓혔잖아요. 그 국민 지지가 하늘에서 별안간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당내에서의 경쟁을 통해서 획득한 것임을 본인이 더 잘 알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최고위원의 발언은 그런 자신의 경험과도 상충되는 겁니다. 이최고위원 식으로 하면 현재까지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국민의 인지도와 지지도를 넓힐 수 있겠습니까? 그런 기회나 필요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것 같은 이최고위원의 발언은 결과적으로 국민과 당원에 대한 협박으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것이 오랫동안 준비된 답변이라면 개인의 소신임이 분명하고 그 소신이 분명하다면 이것은 실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공정하게 또한 당선가능성이 높은 후보를 결정할 수 있다는 얘기인가요?
“사실 아직까지 그 문제에 대해서 적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본격적인 토론이나 의견교환이 없습니다. 각 개인을 중심으로 한 정치서클 내에서는 부분적으로 있는지 모르지만 말이죠. 중요한 문제는 정권재창출에 대한 위기감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좀 답답한 상황이지요. 특히 차기 주자를 모색하고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뭔가 예측가능한 과정과 절차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에 대한 답답함이 있습니다.”
─김최고위원이 강조하는 예측가능한 과정과 절차라는 건 무엇을 말하나요?
“예를 들어 지난번 최고위원을 뽑은 전당대회 때와 같은 대의원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더 확대해서 지역주의나 돈 선거가 덜 작용할, 더 확대된 대의원, 가령 10만명 등으로 확대된 선거로 할 것인지 아니면 아예 미국식의 개방적인 예비선거제도로 할 것인지, 이런 것을 토론했으면 좋겠다는 거죠. 이것을 토론할 수 있는 심리적·정치적 준비가 안 되어 있어요.
지금까지는 국민이 투표와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교체하는 게 민주화의 핵심이었다면 앞으로 남은 과제 중 하나는 정당을 민주화해서 각 정당 내부에서 당원과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후보를 어떻게 만들어 가고 또 그런 후보를 대선후보로 선출할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제도화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이 앞으로 우리 민주주의가 성취해야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민주당은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거죠.”
─이번 미국 대선에서도 선거결과를 놓고 치열한 정치적 법적 다툼이 있었는데요. 민주당도 진짜배기 대선후보 경선은 한 번도 치러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경선을 치른 뒤 일체의 분열 없이 본선에 합심한다는 보장이 가능할까요? 만일 불복하는 후보가 나온다면….
“정당 내부 문제니까 법적 강제를 할 수는 없고요, 정치적 신사협정이라고 할까, 정치적 신사선언이라고 할까, 이런 것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경선에 승복한다’는 선언 말입니다. 그런데 후보를 뽑는 당내 선거제도 절차가 아직 객관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서 유·불리가 발생하고 그 과정에 상당히 격렬한 논쟁이나 갈등이 발생할 요소가 있습니다.”
─당내 경선을 할 경우 지역주의와 파당주의가 일정부분 작용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호남출신이나 동교동계의 지지·지원을 받는 후보는 좀 유리하고 그렇지 못한 후보는 불리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인데.
“그게 민주당의 현 상황이기도 하고 발전적으로 극복해야 될 문제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건 민주당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나라당도 당면한 현실일 것입니다. 지난 8월 우리 전당대회 최고위원선거에서도 사실은 지역주의가 크게 작용했어요. 나와 정대철 최고위원같이 수도권 인사는 지역주의를 동원할 수도 없고 어려움이 많더라고. 그러나 지역주의 극복 문제는 호남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내 전체가 함께해야 할 문제입니다.”
─당내 일각에서 거론되는 이른바 ‘영남후보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민주당이 영남출신 후보를 대선에 내세우면 전체적인 선거구도를 가장 유리하게 만들 수 있다는 발상에 대해 말입니다.
“이론적 가정으로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것이겠지요. 우리당이 영남 출신을 내세우면 호남은 어차피 다 지지하고 영남표도 상당수 가져오고 수도권에서도 불리하지 않다, 그러니까 영남후보를 내세우면 정권재창출이 가능하다, 이런 정치공학적 계산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미래에 대한 비전은 없이 지역주의에 질질 끌려 간다면 좀 서글프고 천박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천박한 정치공학에 의해서 국민들의 표를 얻으려 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이냐, 이런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아직 이른 감은 있습니다마는, 벌써부터 경선을 의식한 참모 조언그룹 조직 책임자 이런 것을 서로 영입하는 일종의 세확장경쟁이 일부 보이는데요, 김최고위원도 그런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내 나름대로는 민주화운동을 30년 동안 했고 또 실천적으로는 두 가지를 추구해왔어요. 수평적 정권교체와 한반도에서 평화를 제도화하고 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내 몫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과정에 현실정치에 참여해서 6년이 갔는데, 제가 정치적으로 큰 일을 할 수 있는 리더십으로 발전하도록 노력하고 싶고 노력할 생각입니다.”
─경선 출마하신다는 거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준비 안된 졸속개혁, 구호개혁 한계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에 대한 국민적 축하 분위기가 벌써 언제적 일이었던가 싶을 정도로 최근 민심이 나쁜 것 같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노벨평화상의 역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민심이 모아지지 않아 안타까워요. 그 원인에는 북한에 끌려다닌다든지 퍼준다든지 또는 경제가 위기라든지 이런 인식들이 국민 일각에 자리잡아가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정치파행과 경제위기말고도 교육 의료 등 사회분야까지 그야말로 총체적으로 뭔가 제대로 되는 게 없다는 게 시중의 지적입니다. 이런 상황을 초래한 정권내부적 요인은 없을까요?
“종국적으로 국민통합에 기초해서 정책을 입안해야 강력하게 집행해나갈 수 있는데 이 국민적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강력한 정부가 형성되지 못해요. 정치세력이 먼저 주도권을 갖고 강력한 정부가 여기 있다, 이렇게 입증해 보이는 지도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권교체를 이뤘지만 충돌하는 각 이해집단의 이해관계를 조정·타협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 같아요. 다시 말해 정권교체 이후를 담당하는 민주적 리더십에 공백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김대통령은 개혁작업을 추진하면서 민주적 리더십을 많이 강조해왔습니다. 충분한 토론과 합의를 거쳐 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라 강력히 집행한다는 것인데, 현실은 충분한 의견수렴 과정도 없고 필요한 결단과 그에 따른 확고한 추진은 더더욱 찾아보기 힘들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이 때문에 개혁피로감이 오고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은데….
“개혁하고 투명하게 가는 사람이나 집단에는 인센티브를 주고 그러지 못하는 사람과 부문에 대해서는 일정한 손해와 페널티를 가해야 합니다. 이를 제도화해야 하는데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는데서 피로하고 혼란을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또 의약분업 과정에 초래된 엄청난 의료대란으로 국민들이 겪은 불편함과 고통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를 통해 국민들이 느끼는 것은 ‘이 정권은 준비도 안 한 채 시행을 하고, 의사들이 자기들의 이해관계에만 집착해서 자기들 주장을 밀어붙이려는 것에 대해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무책임·무능정권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이런 게 민심을 불안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고 정치권력이 준비 안 된 채로 졸속개혁, 그리고 구호개혁을 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시중에는 이렇게 준비안된 정권인줄 알았더라면 (표를) 찍어주지 말걸 그랬다는 말로 실망감을 표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동아시아에서 국민이 대통령을 선거로 교체한 나라는 한국과 대만 두 나라뿐입니다. 그런데 이 두 나라가 민주화를 하면서 경제에 상당한 부담과 교란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제도화하고 뿌리 내리는 과정에서 우리가 지불해야 되는 대가이고 비용이다, 이런 것을 우리 지식인들과 여론 주도층이 받아들여줬으면 좋겠습니다.
일반 국민들이 좌절하고 분노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거기에 지식인들이 동조하게 되면 위험한 상황이 올 것입니다. 지금 미국 등 세계경제가 불안한 상황이고 한국 금융시장과 수출시장은 이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이렇게 되면 정말 경제에 위기적 상황이 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때 대중의 분노가 더욱 격렬해질 거예요. 그때 우리가 가야 될 길이 어디냐?
저는 박정희신드롬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개발시대로 돌아가서는, 규모도 커졌고 세계경제와 연관되고 통합된 이 상황을 우리가 뚫고 나갈 수가 없는데도 국가주의적 선동이 먹혀들고 파스시트적 사회심리가 형성되는 쪽으로 간다면 결국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경제도 회복되지 않고요.”
─김대중대통령이 박정희 기념관 건립추진위 명예회장을 맡고 국고에서 예산까지 지원한다는 데 대해 논란이 있습니다. 김최고위원은 어떤 생각이신지.
“나는 비판적입니다. 그 심정은 이해해요. 지역주의가 하도 격렬하고 정권교체 된 이후에 김대중대통령이 너무 개혁적이지 않으냐, 그래서 김대중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았던 표들이 멀리 가는 것 아니냐 하는 우려 때문에, 또 정권교체를 한 다음에 과거의 경쟁자를 포용해야 된다, 이런 조언에 따라서 ‘박정희와 화해’를 했다고 생각돼요.
그러나 이것은 원칙의 혼란이라고 볼 수밖에 없어요. 가령 미국에서도 국고지원으로 대통령기념관을 세운 대통령은 200년 미국역사 속에서 네댓명 밖에 안 됩니다. 민간이 모금해서 기념관을 짓는 것이라면 시비할 게 없지요. 그것은 그분들이 알아서 하면 되는데 국민의 돈으로 또 현직대통령이 이를 맡아서 한다는 건 문제입니다. 김대통령이 개인적으로 대통령직을 떠난 다음에 한다는 것은 납득할 수 있어요. 그러나 대통령은 국민 전체의 리더십입니다. 아직 역사적인 평가와 결론을 내리지 않은 과거의 독재자에 대해 국민 전체의 공식대표가 그렇게 해서는 곤란한 것 아닙니까? (박정희 전대통령이) 근대화 하는 데서 기여했다는 평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원칙의 혼란이라고 생각해요.”
DJ개혁노선 매개 세력 없어
─무능한 가신그룹, 소신없는 관료세력, 부패한 보수세력이 대통령과 국민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김영호(金泳鎬) 전산업자원부 장관의 최근 동아일보 인터뷰 내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신랄하지만 경청할 부분이 있어요. 그분은 잘 알다시피 이른바 대구경북 지역의 지식인으로서 정치노선에서 김대중대통령과 늘 함께 했고 실제 정치적으로도 함께 했기 때문에 이 정권에 참여해 어떤 비전을 실현하려다 좌절했지요. 그래서 그 좌절에 대한 분노가 상당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지적의 핵심은 무엇이냐 하면 대통령과 국민 사이에, 민심에 기초해 정책을 입안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일종의 확산적·매개적 주체세력이 제대로 형성돼 있지 않다는 겁니다.
정부와 민간 또는 시민사회에 있어서 김대중노선을 동의하고 지지하는 세력 상호간의 통합과 내부경쟁이 발생해야 하는데 이를 담당할 세력이 없습니다. 당과 정부의 관계도 당정협의회가 있긴 하지만 실제로 대통령을 통해서 정부로 가고, 정부의 장·차관들의 견해도 주로 대통령을 통해서 당으로 올 뿐입니다. 그래서 장·차관들은 인사권자인 대통령의 눈치는 보지만 당과 어떻게 정책조정을 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신경을 별로 안써요. 따로 노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 부하량이 모두 대통령한테 가는 것입니다.”
─인사권자인 대통령 자신의 용인술이나 스타일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요? 흔히 ‘1인 통치’ 스타일의 한계와 협애한 야당식 인재풀의 한계를 지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 무엇보다 우리의 준비부족 때문이에요. 역사적 정권교체 경험도 없었고 양식있고 전문성이 있는 지식인집단, 정치에 개입하고 참여하는 지식인집단이 우리 사회에 자리잡을 수 있는 여건이 돼있지 않았기 때문에 찾아도 잘 없어요. 따라서 나는 이 시점에 정치인 출신이 정부 각 부서의 책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당과 정부 사이에 통합이 이루어질 수가 있고, 책임정치가 발생하면서 대부분의 과제를 장관들 수준에서 또 그것을 정치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당 수준에서 해결될 수 있다고 봐요.”
─야당에서 주장하는 대통령의 당적이탈과 중립내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대중대통령이 야당후보 때 끊임없이 주장하던 것을 이회창 총재가 주장하는 것이어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공정성과 정치게임의 신뢰성에 이의를 제기해서 주장하셨는데 지금은 그것이 꼭 적절한 것이냐 하는 의문점은 있겠죠. 다만 한나라당과 자민련, 민주당 이렇게 3당이 경제에 관해서는 정책연합 또는 정치연합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상황이 악화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경제에 관해서는, 최악의 경우에는 타협을 통한 틀린 결정이라도 타이밍을 맞추어서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정부의 경제영역에 관한 한 한나라당의 참여를 정치적으로 모색하고 타결해 보는 것이 어떤가 이런 의견을 갖고 있어요. 여야가 경제에 관해서는 경쟁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내각이 경제에 관해서는 3당이 함께 장관을 입각시켜서 경제문제를 공동으로 운용하고 3당간에는 경제정책협의체를 가동시키는 것입니다.”
─한나라당의 김용갑(金容甲)의원이 어제 본회의장에서 “민주당은 조선노동당의 2중대” 라는 발언을 해서 파장을 일으켰는데….
“우선 김용갑의원 발언은 충격적입니다. 정치적으로 경쟁하는 세력을 적으로 규정해서는 안 되죠. 경쟁하고 대립하는 세력 또는 개인에게 비판적 발언을 하고 대안을 제출하는 것은 의무이기도 하고 정치인의 권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적으로 규정하면 타도 대상이 됩니다. 정치적 경쟁자는 그런 관계가 돼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은 보장돼야 하지만 거기에는 책임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회주의를 유린하는 것이고 의회주의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의원이 어떤 배경에서 그런 발언을 했다고 보십니까?
“김의원은 지난 군사정권 아래에서 민주화와 대통령직선제를 요구하는 국민과 야당을 적으로 규정하고 탄압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희생과 손실이 있었는지를 되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이회창 총재는 대법관으로 있던 92년 3월 대법원재판에서 “국가보안법 운영에 위헌요소가 있고 인권침해 가능성이 있다”는 소수의견을 냈었는데 김의원이 소속된 한나라당의 이회창총재는 지금 어떤 견해인지 묻고 싶어요. 김영삼 전대통령과 함께 정치를 했던 과거의 통일민주당 출신 정치인들도 지금 한나라당에 꽤 많이 있는데 그때 그분들의 주장은 국가보안법 폐지였습니다. 그러면 이분들은 지금 몇 중대인가요? 그리고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분들 중에서 한나라당에 참여한 분도 적지 않은데 이분들도 대체로 국가보안법 폐지나 개정을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또 뭐가 되는 겁니까?
정치인은 상황에 따라서 말을 바꿀 수도 있지만 말을 바꿀 때는 그 필연성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되는 것 아니겠어요?”
─요즘 대북화해협력정책도 우리가 너무 준비가 안 된 상태로 끌려가는 게 아니냐, 오히려 그보다는 내치 특히 경제문제를 더 다져서 국민적 공감대를 튼튼히 한 토대 위에서 지속적인 추진력을 얻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지적도 나오는 것 같은데요.
“이른바 ‘속도조절론’이 국민 속에서 일정한 호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나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속도조절을 하고 싶은 것은 북한측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전 2차 이산가족 상봉과 관련하여 북한에서 상봉가족에게 전달할 돈을 제한하자고 요구해온 것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남한의 이산가족을 만나는 일이 여러번 발생하면 북한사회로서는 내부통제력을 잃어버리게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남한 내부에서 경제가 좀 어렵다는 등의 이유로 속도조절론을 내세우면 북한으로부터 정말 속도조절을 할 수 있는 근거와 계기를 제공하고 이로 인해 남북간 대화와 교류협력은 상당히 난관에 봉착하리라고 봅니다.”
당정 일대 쇄신 있어야
─여러 가지 국정운영의 어려움을 국민에게 호소하고 이해를 구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 이전에 집권세력이 먼저 스스로 개혁하고 심기일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여권의 인사 또는 국정운영 방식을 쇄신할 필요는 없을까요?
“지난 8월 전당대회 직후 국민의 기대도 그랬고 당내 초재선의원들도 당에 일대 쇄신이 필요하다, 이런 분위기가 형성됐고 나도 그런 의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정기국회에서 경제문제를 잘 대처해야 되는데 라인업을 바꾸게 되면 혼선이 오지 않겠는가 하는 게 대통령의 우려와 판단이었어요. 정기국회가 끝난 직후 당정에 일대 쇄신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2001년도에 접어들면서부터 새로운 각오로 하겠다는 자세를 국민에게 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고위원제가 시행됐지만, 최고위원들이 ‘이름값’을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은 것 아시죠?
“전당대회에서 직접 대의원 투표를 통해서 뽑은 최고위원들이 ‘최고’로 무기력하다, 이런 야유와 비난이 들어오고 있고 또 사실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실제적인 역할과 기여를 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할 필요가 있어요.
우선 지금의 협의기구에서 심의기구로 바꾸는 겁니다. 당의 모든 사안이 여기서 심의되고 그런 다음에 총재한테 보고되도록 함으로써 실질적인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는 거죠. 둘째는 총재가 주재하는 최고위원회의가 정기적으로 열려서 민심과 정치적인 방향, 정책방향을 전면적으로 토의하고 결정하는 시스템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