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0월호

金日成 간담 서늘케 한 전설적 백색 테러리스트

白衣社 총사령 염동진

  • 안기석 <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daum@donga.com

    입력2005-01-11 15: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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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방 직후 좌우대립의 시대에 우익테러를 지령한 ‘맹인장군’ 염동진은 평양 출신으로 중국에 건너가 남의사 활동에 참여했다가 일제시대 관동군에 체포돼 고문을 당하기도 했는데…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한 한 우익테러리스트의 활동과 정체.
    최근 국사편찬위원회의 방선주박사와 정병준박사가 발굴한 자료는 광복 직후 좌우가 격심하게 대립했던 한국 현대사의 이면을 엿보게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 자료(향후 미군자료)에 나오는 사람중 가장 관심을 끄는 인물은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염동진이란 인물.

    중국의 남의사(藍衣社)를 본떠 만든 백의사(白衣社)의 총사령 염동진에 대한 증언자나 자료를 찾아본 결과 증언자는 직접 만나기 힘들었지만 염동진에 대한 자료와 증언 기록집은 이미 시중에 출판되거나 국사편찬위원회에 보관돼 있었다.

    백의사와 염동진에 대한 정보가 가장 광범위하고 자세하게 소개된 자료는 ‘이영신의 현대사 발굴, 비밀결사 白衣社’ 상·중·하(1993년 도서출판 알림문). 저자 이영신은 황해도 안악 출신으로 반소(反蘇) 운동에 가담했다가 1946년에 단신 월남, 1960년 9월 장면 총리의 비서로 잠깐 일하기도 했다. 그동안 ‘광복 20년’ ‘격동 30년’ 등 방송극을 집필했다. 그가 쓴 ‘백의사’는 현재 절판인데다 출판사도 문을 닫은 것으로 보여 시중에서 구하기는 힘들다. 아래에 소개하는 백의사와 염동진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이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외에 백의사와 염동진에 대한 부분적인 기록은 ‘사선을 넘어서(김인호 1984년 진흥문화사), ‘해공 신익희 일대기(유치송 1984년)’, ‘인간 김일성 그의 전부(이기봉 1989년 길한문화사)’ 등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백의사 단원이었던 백근옥, 선우길영, 최의호와 조재국씨 등이 1980년대에 증언한 기록을 보관하고 있다.



    학술적인 연구중에는 백범 연구의 전문가로 알려진 도진순 창원대 교수의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서울대학교출판사)’에 백의사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일제시대 때 자료로는 일본 동경에 있는 한국연구원장 최서면(崔書勉)씨가 이영신씨에게 보낸 자료 ‘京高特秘 第3210號 金九 一黨의 愛國團員 檢擧에 關한 件’이 있는데 염동진에 대한 기본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는 1935년 12월10일자로 경기도지사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경성지방법원장, 상해총영사, 남경총영사 등에게 보낸 극비정보 보고서로서 중국의 남경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반 사관후보생들의 인적 사항과 동태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낙양분교 제1기 졸업생으로서 ‘김구 일당의 애국단원’으로 체포된 엄창복(嚴昌福, 당시 24세)이 진술한 내용과 다른 경로로 입수한 자료를 토대로 작성한 것. 자료를 제공한 사람은 내부인으로 낙양분교 한인반 사관후보생 92명의 신상을 소상하게 보고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자유민주민족회의 의장인 이철승씨는 전화통화에서 “염동진을 한번도 보지는 못했지만 당시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맹인이라고 들었다. 백의사는 정치적인 운동과는 관계없는 자그마한 단체였다”고 회고했다. 백의사 단원으로 활동한 사람들중에서 상당수가 이미 사망했거나 노환이거나 해외로 이민한 것으로 알려진다. 앞에서 언급한 자료들중에서 염동진에 대한 의문을 풀만한 내용을 집중적으로 추려 소개한다.

    염동진은 중국의 남의사에 몸담고 있던 시절에 잠시 사용했던 가명이고 본명은 염응택(廉應澤). 백의사 단원들 중에는 ‘동진’을 호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1902년에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서울 선린상고에서 수학했다.

    염응택은 선린상고 재학중에 이미 검은 띠를 땄을 정도로 유도 솜씨가 뛰어났다고 한다.

    선린상고를 졸업한 뒤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1934년에 장개석 지도아래 있던 남경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에 입교했다. 낙양분교에 한국 독립군의 양성을 위해 한인반이 설치된 것은 1933년 12월이므로 염응택은 제1기 입교생이었다. 철기 이범석 장군은 낙양분교 1기생 생도대표였다.

    낙양분교 입교 자격은 보통학교 이상의 학력자로서 만 15세 이상 35세까지 독립투쟁에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했지만 심사는 엄격했다. 당시 심사는 김구 이청천(李靑天) 김원봉(金元鳳) 3인이 했다. 염응택은 신익희의 추천으로 이청천의 심사를 거쳐 입교했다. 신익희는 이청천과 정치적 노선을 같이 했던 사이다. 입교생들은 추천자와 심사한 사람들에 의해 김구파 이청천파 김원봉파 등으로 갈렸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통해 한인반 사관 후보생들에게 매달 11원씩을 지급해줬는데 이 과정에서 의혹이 있어 학생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염응택도 이 폭동에 가담했다가 남경에 있던 신익희에게 피신했다. 신익희는 염응택의 이름을 요춘택이라는 중국이름으로 변성명하게 한 뒤 중국군의 남경 헌병사령부 우편물 검사처의 일자리를 얻어주었다.

    여기서 얼마동안 일하다가 염응택은 장개석 직속의 특무기관인 남의사로 자리를 옮겼다.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정보수집과 양동작전을 담당했던 기구)에는 남의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염응택은 이 조사통계국 소속으로 첩보공작을 위해 만주에 밀파됐다가 일본군 관동군 헌병대에 체포됐다. 이 사실은 이영신씨가 백의사 단원들로부터 들은 증언에 따른 것인데 관련 자료는 없다. 미군자료에는 염응택이 중국 공산당에 체포되어 고문 당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영신씨는 위 책에서 “분명한 것은 관동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고 그후 관동군 정보기관의 첩보원이 되어 있었다”고 기술했다. 이영신씨는 위 책에서 염응택은 해방 후 서울역 앞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던 관동군 헌병대 소속 아라가와 다께조 군조를 만난 적이 있는데 염응택을 고문한 당사자였다고 한다.

    염응택이 시력을 잃게 된 것은 고문의 후유증 때문인데 고문 직후 바로 시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서서히 악화되기 시작해 1948년 말에 완전히 시력을 잃은 것으로 알려진다. 다만 평소에 감정의 변화를 바깥으로 표현하지 않고 늘 검은 안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염응택을 시각장애자로 보기 쉬웠을 것이다.

    관동군 헌병대에서의 고문 후유증으로 점차 시력을 잃어가던 염응택은 치료를 위해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염응택은 평양에서 돌아온 지 얼마 뒤 중매결혼을 했는데 신부 최성률(崔成律)은 일본 나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서문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최성률씨는 해방후 정치인 암살 1호인 현준혁 암살과 관련, 남편인 염응택이 연행되자 소련민정군 사령관 로마넨코 부인을 찾아가 무고하다며 탄원해 남편을 석방시키기도 했다. 염응택이 남하 후에도 최성률은 평양에 남아 있다가 염응택의 측근인 백관옥의 인도로 1946년 3월 서울에서 염응택과 상봉했다. 최성률은 서평양경찰서에서 구타당한 뒤 유산한 이후로 염응택과의 사이에 자식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녀는 1960년대 후반까지 종로구 내수동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지지만 그후로는 행방이 묘연하다.

    한편 일제시대 때 만주에서 평양으로 돌아온 염응택은 평양 기림리 공설운동장 뒷편에 있던 영명사(永明寺)에 자주 드나들었다. 이 절에는 민족주의자들과 일부 사회주의적 성향을 지닌 인사들이 모이곤 했다. 영명사의 주지는 박고봉이었는데 3·1운동 직후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에도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귀국후 스님이 된 인물.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박찬익씨의 동생이라고 백근옥씨는 증언한 바 있다.

    이 고봉 스님이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에 대응할만한 조직을 만들 것을 권유해서 염응택은 1944년 8월 대동단을 만들었다. 박고봉은 백관옥과 선우봉을 염응택에게 소개했고 이들은 대동단에 입단했다. 단원 포섭은 염응택이 주로 했는데 중학생들도 포섭대상이었다. 그러나 대동단이 일제에 대항해 독립투쟁했다는 기록이나 증언은 없다,

    대동단은 해방후 제2독립운동으로 반공산주의 운동을 할 것을 결정하고 백관옥 등 주요 단원들은 평남도당 위원장이던 현준혁씨를 1945년 9월 평양 거리에서 암살했다. 이들이 먼저 서울로 피신한 뒤 교사 혐의로 체포됐다가 부인의 노력으로석방된 염응택도 박고봉의 권유로 1945년 11월말 서울로 남하했다.

    서울에서 한동안 지내던 염응택은 다시 평양으로 잠입해서 대동단 모임을 소집했다. 단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염응택은 각자 월남 하기로 하고 본부는 서울로 옮긴 뒤 결사대를 파북하겠다고 밝혔다.

    서울로 돌아온 염응택은 백관옥 선우봉 등을 만나 대동단을 백의사로 개칭하겠다고 밝혔다. 백의사라는 이름은 염응택이 오랫동안 구상해온 것으로 중국의 남의사와 같은 방법으로 조직을 운용하되 우리 고유의 복색인 흰옷을 상징했다.

    서울 서린동의 갑부였던 오동진은 궁정동 일본인 집을 구해 백의사 본부로 쓰게 해주었다. 이영신씨가 추적한 바에 따르면 이 본부는 6·25전쟁 때까지는 백의사의 소유였다가 환도후 법무장관을 역임했던 이인(李仁)의 손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5·16 후에는 중앙정보부가 이 집을 사들여 소위 ‘궁정동 안가’로 사용했는데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 쓰러진 곳이기도 하다.

    염응택은 비밀결사 백의사를 정식으로 출범시킨 뒤 궁정동에 머무르기 시작했다. 개별적으로 월남해온 대동단원들과 오동진, 신익희의 측근이었던 조중서 등이 만나 백의사의 근간과 활동 방향을 정했다.

    궁정동 새 본부가 정비된 뒤 염응택은 백관옥이나 선우봉에게 누구를 만나는지 언제 돌아오는지 알리지 않고 항상 혼자 외출했고, 방문하는 사람도 항상 혼자 오도록 했다. 가령 ‘김아무개라는 분이 찾아오셨는데요’하고 전하면 일언반구도 없이 손님을 모시고 밀실로 들어가 몇 시간이고 얘기를 나눈 뒤 돌려보내곤 했다.

    백의사가 설립된 뒤 염응택은 주로 염사장으로 불렸지만 공식 직함은 아니었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은 염응택이 백의사 단원들을 영입하는 은밀한 과정이었다. 단원들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염응택 혼자서 철저하게 점조직으로 얽어매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백의사 단원의 수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3만여명에 이르렀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할 길은 없다.

    백의사 본부내에는 이중으로 자물쇠가 채워진 밀실이 있었는데 여기서 백의사 단원 가입의식이 거행됐다. 신입 단원들은 먼저 염응택과 맞절하고 무릎을 끓은 채 마주앉아 오른손을 펴들었다.

    “나는 백의사 단원으로 입단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약한다.

    하나, 나는 조국의 자주적인 정부수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한다.

    하나, 나는 목숨을 걸고 백의사의 명령에 복종한다.

    하나,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조국과 백의사를 배반하지 않는다.”

    그런 다음 자기 손가락을 베어 준비된 서약서에 그 피로 수결을 찍었다.

    염응택은 단원의 수결이 찍힌 서약서를 따로 밀봉했다고 한다.

    백의사는 단원을 문책할 때 ‘동지 재판’을 통해 두가지 형벌을 가했다고 한다. 하나는 과오가 무거운 사람을 ‘출당’하는 것이었다. 출당을 당한 단원은 행동의 제약을 받았다. 항상 미행이 붙어 감시하면서 조금이라도 백의사 기밀을 누설할 우려가 있다 싶으면 원로회의의 결정을 거쳐 암암리에 처형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보다 가벼운 형벌은 ‘앉은뱅이 형벌’이었다. 본부안에 마련되어 있는 독방에서 열흘 또는 한달간의 기간을 정해 근신해야 했다.

    백의사는 첩보원들을 훈련시켜 북한에 보내기도 했는데 북한의 토지개혁과 관련, 반대하는 선동을 했고 소작농들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첩보원들의 보고는 38도선이 강화되면서 중단됐고 보고된 내용도 염응택의 머릿속에만 있을 뿐 남긴 것이 없다. 다만 CIC에 정보를 제공했다면 간접적인 기록이 남아있을 법하다.

    따라서 북한의 유격대 활동은 백의사 첩보원들과 연계돼 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할 뿐이다. 염응택은 백의사 단원들을 경찰이나 국방경비대에 입대시키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노동총연맹 등 노동계에도 백의사 단원들을 가입시켰다.

    백의사 활동중 일반적으로 소개된 것은 주요 정치인 암살과 관련된 것이다. 현준혁 암살 외에는 김일성 암살과 강양욱 암살은 미수에 그쳤고, 이영신씨의 책에는 여운형 암살에도 염응택이 관계된 것으로 묘사돼 있으나 하수인은 백의사 단원이 아닌 외부인사였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정치깡패’였던 김두한의 배후에 염응택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영신씨에 따르면 김두한의 우익테러 행위는 모두 염응택이 지시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염응택과 김두한은 어떻게 알게 됐을까.

    1945년 11월 말 서울로 내려온 염응택은 남선전기주식회사 사원이던 인척 이봉렬의 집에 머물면서 백관옥과 선우봉을 접촉해서 당시 조선공산당 전위대장으로 포섭돼 있던 김두한을 납치했다. 염응택은 오동진의 집에서 김두한의 부친인 김좌진 장군은 공산주의자에 의해 살해됐다며 김두한을 설득해 우익으로 전향시켰다. 그후 김두한이 테러와 관련해서 구속되자 염응택은 미군정 등에 있는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서 석방시켰다고 한다.

    염응택은 정치인들과도 일정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낙양분교 입학 때 추천서를 써준 신익희는 환국 후 염응택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주도하는 대한정치공작대 구상을 알리며 합류를 권유했지만 염응택은 정치적 성향의 조직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신익희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야당 정치인으로 오랫동안 활동했던 유진산은 염응택과 자주 만나 대한민주청년동맹 등 우익 청년단체들의 통합을 논의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신익희와 유진산과의 관계는 도진순 교수의 책에도 언급되어 있다. 이 책에 의하면 백의사와 연계된 정치공작대의 중앙본부장은 신익희였으며 행동대장 조중서, 사령에 염응택, 부사령 박경구, 총무부장 유진산, 청년부장 조용진 등이었다는 것.

    김구와 관련해서는 복잡한 사연이 있다. 이번 미군자료는 안두희가 염응택에게 백범암살 지령을 받은 것처럼 냄새를 풍기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사정이 다르다. 앞에서 거론된 책이나 증언에도 백의사 단원이나 염응택이 백범 김구 암살에 관여했다는 암시는 없다.

    다만 낙양분교 폭동사건 때 김구는 폭동에 가담했던 염응택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환국 후 염응택이 신익희와 함께 김구를 방문해 눈물을 흘리며 큰절을 올렸으나 김구는 아는 체도 하지 않고 냉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과 접한 중국지역에 우익군대를 세우는 계획서를 염응택이 작성해서 신익희 등이 이를 김구에게 보여주자 김구는 화를 풀고 중국 총통 장개석과 부총통 이종인에게 보내는 사신(私信)을 써주었다고 한다. 이 계획은 장개석 군대의 패배로 실패하고 만다.

    미군자료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문은 염응택과 미군 방첩대(CIC)와의 관계이다. 이 정보보고서를 작성한 실리는 당시 내부 정보 유출문제로 가명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염응택은 신익희의 부름으로 낙산장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미군 정보국에 몸담고 있는 이순용을 소개받았다. 이순용은 재미교포로 미군에 입대하여 2차대전에 참여했던 CIC소속 중사. 그후 한국 정계에 들어와 이승만 정권 아래서 내무부장관에 기용된 바 있다.

    이순용은 하지 장군이 신익희의 대한정치공작대를 해체하라고 하는데 대북 정보를 제공하면 해체를 재검토할 수 있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에 신익희가 화를 내고 나가버리자 측근인 조중서가 그 역할을 백의사가 맡도록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그후 백의사와 CIC와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염응택의 주 채널은 당시 이순용의 상사였던 CIC 서울지구 대장인 미 육군 소령 위테커. 그는 궁정동 백의사 본부를 찾아와 대북 관련 정보를 제공하면 백의사 활동을 비호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위테커는 염응택과의 약속에 따라 북한에 파견할 첩보원 훈련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다. 훈련장소는 위테커의 도움으로 마련한 정릉 골짜기의 외딴집이었다. 일본인 부호의 별장으로 쓰이던 그 저택은 이후 백의사의 한 아지트로 이용된다. 저택 주변이 울창한 송림으로 둘러싸여 있어 은밀한 활동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이 집은 9·28 수복후 국군 HID 유격대의 비밀훈련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염응택은 각 산하단체 청년 가운데 열명을 선발했다. 선발기준은 매우 엄격했다. 각 지역에 파견되어 활동하는데 조금도 차질이 없도록 정확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이 조건에 따라 각도 출신자 중에서 2명씩 선발됐다. 강인한 체력과 정신무장도 요구됐다. 대동단 대원이었던 박현영(朴玄英)이 훈련 책임자였다.

    백의사 단원으로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맡은 바 소임을 완수하겠다는 정신무장을 철저히 시킨 뒤 체력 훈련과 무술, 각종 무기를 다루는 기술을 반복하여 훈련시켰다. 폭파술, 적진 침투와 탈출방법, 산악돌파에 이르기까지 고도의 유격 훈련이 뒤따랐다. 소련제 각종 무기에 대한 식별법과 조작법도 가르쳤다. CIC 교관들이 비밀리에 파견되어 훈련을 도와주었다.

    1946년 5월초순 첩보대가 이북으로 잠입했다. 2인 1조의 첩보대는 군사적인 첩보가 주임무였다. 각 지역별로 주둔 부대의 배치 상황과 병력수, 그리고 각 부대별 화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귀환하라는 명령이었다. 소련으로부터의 무기 반입 현황을 알아내는 것도 주요 임무였다. 위테커가 염응택에게 직접 부탁한 내용이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좌우대립의 시대도 끝나자 백의사의 역할은 점차 축소됐다. 더 이상 사설단체의 음성적 역할이 필요없게 된 것이다.

    정부수립 후에는 직업이 있던 단원들은 직장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100여명의 단원들은 갈 곳이 없었는데 한 단원이 육군본부 첩보과장에 취임하면서 이들중 상당수를 데려가기도 했다.

    1949년 2월에는 한 인사가 염응택을 찾아와 맥아더 사령부 윌로비 소장으로부터 북한에 대한 정보를 확보하라는 극비명령을 받았다며 협조를 요청했다. 그 결과 49년 6월1일 맥아더 사령부의 한국연락사무소(Korean Liaison Office, 약칭 KLO)가 설치됐다.

    백의사 잔존 단원 전원은 모두 여기에 들어가 6·25전쟁 기간동안 첩보활동을 벌였다. 고위 공직자 중에는 여기에 소속된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염응택은 6·25 전쟁 중에 납북도중 죽은 것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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