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에게 건축은 삶의 시스템을 짜는 일이다. 인간을 바꾸는 행위다. 그에게 아름다운 집은 가족의 살냄새를 맡을 수 있고 사람을 궁리하게 하는 공간이다. 건축가 승효상. 고집스러운 몰두와 진지한 모색 끝에 그는 이미 살아숨쉬는 ‘건축의 교과서’로 승화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서울 종로구 동숭동 이로재(履露齊)는 ‘빈자의 미학’이라는 건축철학과 방법론을 실천하는 건축가 승효상의 집이다. 아래 두 층은 사무실, 위 두 층은 살림집, 맨 아래쪽 주차장에 잇닿은 반지하층은 그가 작업실로 쓰는 방이다. 나는 이로재에 두 번 갔고 갈 때마다 제법 꼼꼼하게 살폈지만 굽이와 계단이 많은 그 집의 평면을 머릿속에 다 그려낼 수는 없다.
대신 덤덤하나 따스하던 집의 외관만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언뜻 보면 소박하나 들여다보면 빼어나게 세련된 집이었다. 코르텐강(鋼)이라고 불리는 붉게 녹슨 철판은 그늘에서는 음전한 팥죽빛이지만 볕이 들면 아연 작약빛으로 화려해졌다. 그러나 승효상에게 집의 외양은 별 문제 아니라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건축의 외형이란 그 속에 삶의 시스템이 포장된 상태다. 따라서 외관이나 모양은 그 시스템을 정직하게 나타내는 것이 가장 좋다. 입면을 건축의 목적으로 잘못 판단해 건축을 시각적 상징과 기호로 취급하는 예가 숱하다. 더 가관인 것은 건축을 일종의 조형예술로 착각하는 일이다’를 밑줄 그어가며 읽은 후인데도 가로로 길게 뚫린, 혹은 야무진 사각 창틀의 수줍고 날렵한 비례에 나는 자꾸만 마음을 뺏겼다.
더 인상적인 것은 그의 방으로 들어가는 계단이었다. 콘크리트 위에 검은 냇돌이 박힌 바깥 계단을 올라 현관에 들어선 뒤 다시 아래로 내려가게 만들었는데 그 계단은 예상을 배반하면서 좁고 길고 가팔라 흡사 카타콤으로 통하듯 사람을 긴장시켰다. 예전 시골집 다락에서 안방으로 내려올 때나 만나던 기울기였다. 발끝에 절로 힘이 주어졌다.
계단을 다 내려서자 너른 방이 나오고 널찍한 작업대 앞에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처럼 둥그런 뿔테 안경을 낀 이로재 주인이 서 있었다. 아이 같은 순한 웃음이 얼굴에 가득하다. 아니다. 아이 같지만은 않다. 고집스러운 몰두와 진지한 모색 끝에 얻어졌을 무위의 흔적이 유순한 웃음에 적절히 섞였다.
“저 계단은 여기 들어오는 사람의 마음을 씻어주는 무슨 자동세차장치 같은 겁니까.”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좀 호들갑을 떨었다. 그는 양팔을 어깨 위로 올려 뒤통수에서 깍지끼는 커다란 동작을 하면서 하하 웃었다.
“예. 그거 의도한 거예요.”
좋은 건축가, 빼어난 글꾼
건축이 과연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려면 군말 필요없이 직접 그의 글을 읽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나는 건축이 우리 삶을 바꾼다고 믿는 자이다. 부부가 같이 오래 살면 닮는다는 것도 한 공간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까닭에 그들의 삶이 그 공간의 지배를 받아 같이 바뀐 결과라고 생각한다. 수도하는 이가 작고 검박한 공간을 찾아 나서는 것도 그 공간의 지배를 받기 위함이라고 여긴다.… (중략) 좋은 건축은 좋은 삶을 만들지만 나쁜 건축은 나쁜 삶을 만들 수밖에 없다. 물론 좋고 나쁨이 화려함과 초라함에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화려한 건축 속에서는 삶의 진실이 가려져 허황되고 거짓된 삶이 만들어지기 십상이며 초라한 건축에서 바르고 올곧은 심성이 길러지기가 더 쉽다. 비록 그 효과가 즉각적이지 않아 우리가 느끼기에 더딜 뿐이지 건축은 우리의 인격체를 형성하는 데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
그는 빼어난 글꾼이다. 승효상의 글을 읽으며 자꾸 무릎을 치는 것은 어휘의 풍성함이나 문장의 힘 때문이 아니다. 좋은 건축과 살아 있는 공간을 찾아내기 위한 그의 건축적 사색과 고뇌가, 위대한 건축가, 불후의 명작, 아름다운 전통을 찾아다니는 그의 열정과 좌절이 사람을 감동시키기 때문이다.
그는 좋은 건축가라면 당연히 좋은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좋은 건축은 굳건한 논리구조를 가진 까닭에 설득력이 있으며 빛나는 영혼에 충만하여 작의에 불타오르므로 다른 건축과 다른 변별성으로 그 건축가의 오리지낼리티를 구축하니’ 그걸 옮기기만 하면 그대로 설득력 있는 글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겨우 집구경을 했을 뿐 건축에 대해 무지한 내가 승효상을 감히 ‘우리시대 최고의 건축가’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그가 지은 집보다 그가 쓴 책에서 설득당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좋지 않은 건축가가 논리적이고 창조적인 글을 쓰기는 그가 좋은 집을 짓는 것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어렵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시대 최고의 건축가’라는 말에 그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그런 국기기밀을 누설하면 처벌받을지 모릅니다”라고 웃으며 경고했다. 그러나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말을 쓰고야 만다.
그는 몇 달 전 베이징 차오웨이 소호에 지은 연건평 4만5000평 규모의 오피스텔 설계안 공모에 당선됐다. 공모에 당선됐기 때문에 최고의 건축가라는 게 아니다. 지금 천지개벽중인 베이징엔 세계의 내로라하는 건축가가 모여들고 있는데다 하루가 다르게 큼직한 집들이 들어서고 있다. 그런만큼 경쟁이 뜨겁고 온갖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 중국 고유한 삶의 방식과 공동체 의식을 존중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그의 작품에 현지인들은 깊이 감동하고 매혹되었다.
그 소호 앞에 한국 기업이 진출해 사옥을 짓고 있는데 공사를 맡은 이는 미국 건축가였다. 순진한 중국인들은 진심으로 “저 사람들은 한국에 당신이 있다는 것을 모르나요?” 하고 묻더란다. 베이징 한복판에 한국의 정신과 미를, 반영구적으로 우뚝 세울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 너무 애통해서 절로 그런 말이 나온 것이다.
그런 안타까움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도 없다. 각국 대사관 건물은 그 나라의 상징이다. 베를린에 한국대사관을 새로 짓는데 우리 정체성을 보여줘야 할 그 건물의 설계자로 선택된 이는 독일인이었다. 자국 건축가는 아예 그 마당에 끼여들지도 못하게 판이 짜여 있다 한다.
정직한 ‘시멘트 벽돌’의 힘
흥분을 거두고 다시 방 이야기를 좀더 해야겠다. 그의 방엔 시멘트 벽돌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천장도 시멘트 마감 그대로다. 이른바 내장이라는 것을 전혀 하지 않은 방이다. 문외한이 전문가로부터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그저 종횡무진, 좌충우돌 질문을 던지는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 내 경험이다.
“저런 마감은 너무 거친 게 아닌가요?”
“처음 보면 거칠기도 할 겁니다. 그러나 거칠다고 ‘뷰티풀’하지 않은 건 아니지요. 시멘트는 ‘스위트’하지는 않아도 ‘뷰티풀’한 재료입니다. 스위트한 건 금방 싫증나도 뷰티풀한 건 오래가거든요.”
무례한 질문으로 나는 많은 것을 얻어 듣는다. 그는 모든 걸 감춰버리는 페인트를 싫어하고 자재를 그대로 드러내는 정직을 좋아한다. 주렁주렁 매다는 장식을 싫어하고 화장기 없는 맨얼굴을 선호한다. 이로재의 살림집에 올라갔을 때 흔한 그림 하나 걸리지 않은 채 완벽하게 비워진 흰 벽을 봤다. 아마도 그는 음식의 단맛조차 싫어할 것이다.
“저 시멘트 블록은 가로 40, 세로 20으로 개수를 세기만 하면 벽의 사이즈가 정확하게 나와요. 정직하죠. 저렇게 블록을 그냥 드러내면 건축비도 훨씬 적게 듭니다.”
“녹슨 철판을 선호하는 이유는 뭡니까.”
“저건 원래 건축 재료가 아니었어요. 토목용이지요. 강이나 바다에 교량을 설치하면 페인트를 칠할 수 없으니까 남아있는 철을 영구보존하기 위해 특수 합금한 내후성 강판입니다. 시간이 가면서 산화하다 몇 년 지나면 암적색이 그대로 유지되어 주변 환경과 자연스럽게 어울려들어요. 쇠는 기본적으로 땅의 산물이고 산소와 결합해 자연스러운 색이 형성되거든요. 번쩍거리는 것을 싫어하는 내 구미에 맞고 금방 지어도 새 건물처럼 보이지 않는 이점이 있습니다.
게다가 값도 싸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요즈음은 하도 많이 써서 값이 잔뜩 올랐어요. 재료마다 물성이 다 다릅니다. 그 성질을 파악해 정직하게 드러내는 일이 흥미진진합니다. 요즘은 다시 돌의 물성을 들여다보는 중입니다.”
그의 작업실 한켠은 첩첩한 서가다. “도서관 규모의 책이로군요” 감탄하자 “저 안에 바(bar)도 있습니다”며 천진한 웃음을 짓는다. 그는 소문난 술꾼이기도 하다. 좋은 일 있으면 일쑤 진탕 마시고 울분과 갈등도 술로 희석할 때가 많다.
작업대 맞은편엔 지금은 문화재청장이 된 유홍준이 학동 수졸당을 지어준 보답으로 넘겨줬다는 ‘이로재’ 현판이 걸렸다. 경남 산청 어딘가의 고가가 헐리면서 인연 따라 여기까지 흘러온 현판인데 고졸하고 온화하게 주인을 건너다보고 있다.
“장자에 나오는 구절로 (가난한 선비가) 새벽이슬을 맞는다는 뜻이랍니다. 직원들이 만날 야근하는 우리 연구소에 딱 맞는 이름이라고들 말하죠.”
건축가 승효상의 방은 시멘트 벽돌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서재에서 집필 작업중인 승효상씨.
“하하, 난 이 집 수위예요. 주차관리! (장지문 밖이 주차장이다. 다시 서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도서관리!”
이렇게 소탈하게 굴 때 승효상에게선 거장의 면모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본인이 암만 민망해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 건축에 미쳐 밥 먹듯 밤을 새우던 한 시절을 거쳐 맹렬한 독서와 탐구를 체질화했으며 최고의 스승 아래서 건축하는 방법과 태도를 단련한 후 피나는 자기질문의 시기를 지나 끝내는 그 틀을 깨고 나왔다.
근본주의자라는 별칭에 걸맞게 건축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엄정한 눈을 잃은 적 없고 불멸의 건축물 앞에 수시로 달려가 숱한 전율과 각성을 얻은 후 마침내 자신만의 문법과 어휘를 만들어냈다. 그런 이 사람과 이 사람의 건축을 지금 세계가 주목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2002년 미국 건축가협회로부터 명예 펠로 수여, 같은해 건축가로는 최초로 국립현대미술관이 주관하는 ‘올해의 작가’ 선정,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 초청 대표작가, 올해 계획된 독일 및 유럽을 순회할 ‘건축가 승효상전’, 홍콩 건축상 심사위원, 베이징 수이관의 클럽하우스, 차오웨이 소호의 오피스텔 설계 공모 당선 등은 자연스럽게 따라온 결과일 뿐이다.
“그림은 그만 그리고 책을 읽어”
그는 전쟁 중 부산에서 태어났다. 평북 정주에서 피란 내려오신 부모님은 부산에 정착했다. 정주에는 남쪽에선 희성인 승씨들이 터잡고 사는 집성촌이 있다고 들었다. 귀한 성씨를 가진 덕에 누가 이름을 물으면 아예 글자를 써서 보여주는 게 버릇이 됐다. ‘승’이라고 말하면 대개 ‘송’이나 ‘성’이라고 바꿔 듣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건축가가 되겠다고 미리 꿈꾼 적은 없었다. 장남이고 성적이 좋았으니 부모님은 은근히 법대에 가길 바랐지만 자신은 그림을 그리거나 성직자가 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의 정신에 관여하는, 이끌고 치유하고 계도하는 신부나 목사가 근사해 보였다.
건축과를 권한 것은 손위 누이였다. 대개의 사람이 그러했듯 누이도 그림을 잘 그리는 남자가 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71학번인 그에게 서울대 건축과는 실망이었다. 2학년 1학기 첫 전공수업이 시작될 때 그는 목욕재계하고 수업에 참석했다. 그만큼 기대가 하늘을 찔렀건만 미국에서 갓 돌아온 교수는 “제도기는 12품짜리를 쓸 것이며 국산은 품질이 좋지 않고…” 식의 강의로 그를 다시 우울의 우물통 속에 빠뜨렸다.
스무 살 승효상은 분연히 손을 들고 일어서서 “지금 그 강의가 우리에게 적절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일갈하고는 교실을 나와버렸다. 다시는 교실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다행히(?) 다음날부터 휴교령이 내려 출석하지 않아도 되었다. 가끔 “박정희 정권이 날 졸업시켰어”라고 말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데모도 열심히 했다. 경남고 선배이고 당시 건축과 3학년이던 김성호가 “데모는 내가 할 테니 너는 공부만 하라!”고 말려 그쪽에서 손뗐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국회의원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공부는 혼자 했다. 주한미대사관 홍보처(USIS)나 범한서적에 가서 외국책을 구해 읽었고 지금은 모교 교수가 된, ‘엄청나게 모범생’이던 김장현과 ‘철저하게 불량학생’이던 그가 머리를 맞대고 건축 스터디를 ‘엄청나게 철저하게’ 했다.
당시 서울대엔 김국영이란 기인에 가까운 조교가 있었는데, 그는 승효상에게 다가와 몇 마디 툭툭 던졌다.
“그림은 그만 그리고 책을 읽어, 글을 쓰고 생각을 해. 브리태니커 사전에서 아키텍처를 찾아봐. 르 코르뷔지에 칸의 도면을 트레이싱해.”
까만 양복만 차려입던 그 괴짜 김국영 선생을 ‘내가 만난 첫 번째 선생님’이라고 승효상은 그리워했지만 웬일인지 그는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공간’에 있을 때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 “아직 김수근 밑에 있어? 너 바보 됐겠다. 요즘은 무슨 책 읽어?” 물은 이후 영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학교 시절 그의 별명은 ‘데프’였다.
“귀머거리가 아니라 학점이 DEF밖에 없다는 뜻이죠.”
그래도 본질을 볼 줄 아는 이의 눈에는 승효상 학생이 두드러졌던 모양이다.
4학년 2학기 김희춘 선생의 마지막 수업에 ‘기념으로’ 한번 들어가봤다.
“돌아가며 한 명씩 졸업 후 진로를 물어요. 그런데 나만 쏙 빼놓고 물어보지 않는 겁니다. 어찌나 자존심이 상하던지…. 그런데 수업을 마치고 나가시면서 ‘승효상 군은 내 방으로 와!’ 하시는 거예요. 따라 내려갔더니 김수근 선생께 당장 전화를 걸어 ‘학생 하나를 보낼 테니 가르쳐보라’고 하시는 겁니다.”
김수근 선생과 싸우고, 신념과 싸우고
감격이었다. 눈물이 덜렁 떨어질 지경이었다. 미국으로 갈까 막연히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졸업도 하기 전에 ‘공간’에 출근하게 됐고 김수근 선생 곁에서 ‘놀라움과 새로움과 간절함’으로 건축을 다시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처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건축에 탐닉한다. 김수근 선생은 청년 승효상에게 연필 대신 매직을 쥐어줬다. 6~7년 경험을 쌓아야 맡을 수 있는 프로젝트 아키텍트 노릇을 감당케 했다.
‘공간’에 들어간 지 2년 만에 마산성당 설계를 맡았다. 작업실에서 먹고 잤다. 건축만이 인생의 전부였다. 세상은 둘로 간단명료하게 구분됐다. 건축하는 사람과 건축하지 않는 사람으로! 그 종교공동체에 대한 정의. 그들을 위한 공간모색과 조직, 그들을 꿰는 방식, 그곳에 흐르게 될 빛과 소리의 조절, 이 모든 것을 싸안는 표정을 고민했다. 수많은 밤을 새우며 그는 자신과 싸우고 김수근 선생과 싸우고 자신의 신념과 싸웠다.
‘20대 후반, 원서동 골방에서 선생의 가르침과 싸우던 내 모습은 광기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밤을 새웠고 수없는 도판을 그렸다. 또 그린 후 혼자서 동료들과 도시의 길바닥에 통음하며 건축을 부둥켜안고 살았다.’
마산성당 하나로 몇 년 공부할 것을 전부 배웠다. 이 열정적인 작업을 통해 그는 김수근 건축으로 조련되고 김수근 어휘로 무장되었다. 하지만 마산성당을 착공할 무렵 그는 김수근 선생의 만류를 뿌리치고 ‘공간’을 떠난다. 어느 글에서 쓴 것처럼 ‘떠나지 않으면 육체와 정신을 다 뺏기며 치른 이 치열한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아물지 않을까봐’ 겁이 났는지도 모른다.
거액의 연봉을 약속받고 국제 엔지니어링 회사에 취직한다.
“내 인생에서 돈이 가장 많은 때가 그때였어요. 아무 주머니나 뒤져도 10만원짜리 수표가 막 나왔죠.”
그렇게 일 년을 흥청망청 살았다. 자신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스스로 탕아기질이 있다고 고백하지만 엄격한 기독교 가정에서 절제를 중시하는 칼비니슴의 세례를 받고 자란 그는 체질상 균형감각을 금방 회복하고야 만다. 결국 일 년 만에 ‘공간’으로 복귀했다.
돌아온 그에게 김수근 선생은 경동교회의 설계를 맡겼다. ‘멀티 메타포를 갖도록 할 것’이란 지침과 함께. 이번엔 마산성당 때처럼 고뇌할 필요가 없었다. 숙달된 손으로 매너리즘에 빠져 능란하게 그림을 그려 나갔다. 다 만들어진 도상을 두고 누구는 기도하는 모습이라고 하고 누구는 손가락이라고 했지만 그는 속으로 실소할 뿐이었다.
종교건축에서 상징성은 얼마나 중요한가. 어느 정도까지 허용되나. 숱한 의문이 솟아올랐다. 1980년 봄 광주사태가 발생했다. 이 나라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지나치게 몰두하여 소진된 정신, 매너리즘에 빠진 작업에 대한 의혹, 질식할 것 같은 정치상황에서 다 도망치고 싶었다. 마침 마산성당의 요셉 플라트 신부가 빈의 한 수도원을 소개해줬다. 돌아오지 않을 작정도 했다. 모든 인연을 끊고 싶었다.
출발하기 일주일 전 버스정류장에서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났다. 아는 여자였다. 처음엔 차나 한잔 하려고 했는데 술을 한잔 하게 됐고 이 여자와 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청혼하기에 이른다.
“그 사람은 김수근 선생님 비서였어요. 몇 사람이 구애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나야 뭐 언감생심이었죠. 하지만 세상일이란 참 마음먹은 대로 굴러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때 또 깨달았죠. 다 버리고 간다는 사람이 서둘러 약혼을 하고 떠났으니까요.”
빈은 멀었다. 북극을 거쳐 파리를 지나 1980년 당시만 해도 23시간을 비행해 도착한 낯선 도시. 요셉 신부님이 소개한 수도원을 찾아갔다.
“먼 길 왔다고 커다란 소시지를 두 개 내놓는데 잘 보여야 하니까 일단 다 먹었죠. 그랬더니 이쁘다고 하나를 더 주는 겁니다. 도저히 더는 먹을 수가 없어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는 수도원을 나왔어요. 그러고는 서울에 있는 약혼자를 불렀지요.”
둘은 눈 오는 날 리히텐슈타인 성에서 꿈 같은 결혼식을 올린다.
“모두가 꿈꾸는 결혼식을 올리긴 했는데 신랑이 첫날밤부터 술 먹고 뻗어서 문제였죠, 하하.”
빈 공대 건축학부에 등록했으나 아기가 생기는 바람에 중도 포기한다. 그 나라에선 낙태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대신 거기서 난생 처음 들어보는 건축가 아돌프 로스를 만난다. 빈의 중심지, 합스부르크가의 궁전이 있는 미카엘 광장 건너편의 로스 하우스! 충격이었다. 온갖 화려한 장식으로 둘러싸인 궁전 건너편에 궁전에 대한 모독처럼 아무런 장식 없이, 격자창으로 무심히 뻥 뚫려, 빼어난 침묵의 수사를 뱉고 있는 집!
로스는 이 건물로 쓸데없는 장식이란 죄악이며 건축의 원형인 고전형식으로 순수하게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폭탄선언을 한다. ‘눈썹 없는 집’이니 ‘맨홀 뚜껑 같다’느니 하며 비난을 퍼붓던 빈 시민들도 결국 로스가 선언한 침묵의 아름다움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간의 혼돈, 문화적 퇴행, 여러 파편적 허식을 극복해 새로운 문화인 모더니즘 쪽으로 한걸음 내딛기 시작한다.
건축가 승효상이 로스 하우스에서 받았을 감명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빈에서 로스 하우스를 만난 것으로 그는 배울 것을 다 배운 셈이었다. ‘왜 잘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잘살아보자고 질주해온 오늘, 천민자본이 득세하여 도시는 이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그러진 건축물들로 어지럽고 국적불명, 정체불명의 난잡한 몰취미와 말초적 유희가 도시 건축을 파편화하고 결국 우리 삶을 일그러뜨리는 서울의 현주소를 고통스럽게 떠올리며 그는 ‘저 미궁을 건져 올릴 새로운 시대정신’을 찾아나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것이 바로 정직한 노출 콘크리트였고 나아가 ‘빈자의 미학’이었다.
가족이 생겼으니 그곳 설계사무소에 취업했다. 한국을 광주사태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던 빈 건축가들의 경탄을 한 몸에 받으며 일당백의 일을 해냈지만 테크닉을 파는 일은 곧 회의를 가져왔다.
그 무렵 자신이 설계해놓고 떠나온 경동교회의 준공된 사진이 엽서로 배달됐다. 귀국하고 싶은 마음을 누를 길이 없었다. 2년간의 베를린 생활을 접고 서울로 돌아온 이튿날 그는 새벽같이 경동교회로 달려간다.
이전 마산성당 준공 일주년 때 그는 한 어린 처녀가 괴로운 얼굴로 기도하러 왔다가 자신의 설계대로 창문을 통해 흘러 들어온 빛을 받으며 엎드리더니 얼마 후 평화를 가득 안고 돌아가는 모습을 훔쳐본 적이 있었다. 그때 경험한 건축가로서의 희열이 되살아났다.
다시 ‘공간’으로 돌아갔다. 김수근 선생은 곤경에 처해 있었다. 전두환 정부가 구악을 일소한다며 문화예술계 대표로 선생을 지목해 괴롭히는 중이었다. ‘공간’이란 것이 알려지면 어떤 관급공사도 맡을 수 없을 때 전혀 ‘공간’ 같지 않은 공간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서초동 법원 청사의 공사를 따내기도 했다.
돌아온 ‘공간’, 남겨진 빚
그가 돌아온 4년 뒤 김수근 선생은 건축사무소 ‘공간’을 승효상과 장세항에게 맡긴다는 유언과 함께 30억의 빚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55세의 짧은 일기였다. 막 독립을 꿈꾸던 그는 꼼짝없이 발목을 잡혔다. 설계를 고민하는 대신 ‘공간’의 대표이사가 되어 빚독촉을 연기하느라 은행 지점장을 만나고 담당공무원을 만나느라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이 흘러갔다. 도무지 하기 싫은 일로만 꽉 짜인 스케줄이었다.
‘선생을 존경하고 사숙한 업보치고는 지독한 것이었다. (중략) 선생이 살아계실 때 나의 클라이언트는 언제나 선생이었고 내가 그린 도면으로 나의 한계 밖에 서 계신 선생을 설득하고자 노력했었다. 선생이 한 장을 그리라면 열 장을 그렸고 선생이 스케치를 보이면 그보다 더 많은 내용을 담은 스케치를 보여드리곤 했다. 그러나 되돌아올 수 없는 도면을 가질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나는 철저히 선생의 건축을 흉내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모순되고 공허한 사실에 반기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1989년 말, 승효상은 우여곡절 끝에 ‘공간’의 벽을 빠져나온다. 독립된 스튜디오를 만들고 ‘이로재’ 간판을 내건다. 1952년 생인 그의 30대가 끝나가는 무렵이었다. 그는 김수근 선생에게 건축하는 자세와 방법과 클라이언트를 대하는 태도를 배웠다.
“선생님은 클라이언트를 대할 때 늘 매소부(賣笑婦)는 될지언정 매춘부는 되지 말라고 하셨어요. 건축가들 사이에 통용되는 오래된 농담이 하나 있는데 건축가라는 직업이 매춘부와 비슷하다는 것이죠. 일이 손님을 받아야 이루어지고 주로 밤에 일을 하며 종이를 많이 쓴다는 거예요.
건축주에게 잘 보여 고진감래 끝에 일이 생겨도 갈고 닦은 건축 철학은 건축주의 간섭으로 상처 받고, 애걸복걸해 살려놓은 개념은 같이 일하는 동료들의 무지로 다시 훼손당하기 일쑤죠. 또 황당한 건축법규와 관련 공무원으로부터 형편없이 난도질당하고 돈 계산에 바쁜 시공자들은 수많은 밤을 새워가며 만든 개념마저 변질시키니 한 건물이 완성될 때쯤 건축가는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 되는 게 보통이에요.
그래서 많은 건축가가 냉소적이고, 통음이 습관처럼 돼 있어요. 서양 건축가 중에는 자신의 대표작을 70~80대에 짓는 사람이 많아요. 김수근 선생이 55세에 돌아가시고 장세항 선배가 50세를 넘기지 못한 건 돌이킬 수 없는 우리나라의 문화 손실입니다.”
1989년 말 승효상은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 독립 스튜디오 ‘이로재’를 열었다.
4.3그룹의 탄생
이로재를 열자 그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친 것은 “도대체 승효상 건축을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빈에서 만난 아돌프 로스가 떠올랐다. 여러 가지 암중모색 끝에 1990년 4월3일 비슷한 연배의 건축가 14명이 모여 함께 토론하고 여행하고 전시회도 하고 책도 만들면서 놀고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날짜를 따서 4.3그룹이라 이름 지었다.
“이전까지 건축가는 학연을 중심으로 모였어요. 4.3그룹을 만들면서 남들은 건축에 대해 어떤 고뇌를 하는지 처음으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김수근 디자인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고 그 동안 내가 불편했던 이유도 알게 됐지요.”
4.3그룹과의 스터디를 통해 그는 비로소 스승의 틀을 깨는 실마리를 찾아낸다. 자신의 건축적 명제를 마산성당을 설계하기 이전으로 고통스럽게 되돌릴 수 있었다.
1992년 4.3그룹 전시회에서 승효상은 자신의 건축철학으로 ‘빈자의 미학’을 처음 선언한다.
“처음엔 그저 선언적 단어였지만 13년 동안 보강을 많이 했죠. ‘어번 보이드(urban void)’나 ‘컬처 스케이프(culture scape)’ 같은 새로운 단어도 생겨나고 비슷한 단어를 쓰는 사람도 많아졌어요. 가정을 세우고 의문을 갖고 모색하던 것들이 이젠 구체화되고 풍부해졌습니다.
빈자의 미학은 ‘반기능의 기능성, 무용공간의 생명력, 침묵과 절제의 형태’ 등 건축과 도시의 각 부분을 위한 구체적 실천방안이고 내 건축의 원칙과 세부항입니다.”
빈자의 미학을 선언하고 처음 지은 집이 그의 대표작이 되다시피한 유홍준의 수졸당(1992)이다.
“집이 삶의 시스템을 짜서 사람을 바꾼다는 말이 참이라면 10년 넘게 수졸당에서 산 유홍준의 삶은 승효상 선생이 일정부분 바꿔놓았다는 말이겠군요?” 넘겨 짚었더니 “드나들기 불편한 별채를 하나 만들어놨더니 거기 틀어박혀 책을 쓴 거 아닐까요” 되묻는다.
개인의 삶에 개입하는 일이 부담스러워 살림집 설계는 웬만하면 맡지 않는다. 그러나 설계의 기본 치수가 살림집에 다 들어 있으니 2~3년에 한 번씩은 짓는다. 그에게 아름다운 집은 사람을 사유하게 하는 집이다. 동선이 길어 좀 걸어야 하고 대문도 나가서 열어줘야 하고 빗자루로 쓸고 걸레로 훔치며 가족의 살냄새를 맡을 수 있는 집이라야 궁리를 만들고 생각을 키워 삶을 관조하게 한다고 믿는다.
헌집을 싹 허물고 새로 짓는 재개발사업에 환영 플래카드가 나붙는 현실이 그는 쓸쓸하기만 하다.
“에게해를 여행할 때 산토리니라는 마을에 갔어요.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그곳이 서울의 달동네와 너무도 흡사한 겁니다. 달동네에 눈이 내리면 딱 그런 풍경이 될 거예요. 집이 서로 기대서 있고 경사진 언덕을 이용한 공간구조도 똑같고. 이제 사람향기 물씬 나는 달동네가 중계본동 한 군데 빼고는 다 사라져버렸어요.
물론 재개발은 해야겠지만 새집 짓지 말고 헌집 고쳐 쓰며 모여서 살고 나눠서 살고 덧대고 이어서 살자는 게 제 주장입니다. 그래야 집에 담긴 기억을 살릴 수 있거든요. 능률과 편리만 추구하는 건축은 결국 우리를 소모시킬 뿐입니다. 반기능적인 도시가 우리 삶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줘요.”
그의 지속적 화두인 ‘빈자의 미학’의 큰 틀은 결국 우리 전통 건축에서 나왔다. 마당과 뒤란과 봉당이 다 무위의 공간이었다. 아무리 좁은 집도 마당만은 넓었다. 평소에는 텅 비어 있다가도 사람들이 모여들면 당장 일터로 쉼터로 놀이터로 변했다. 생각하면 지금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곳도 그런 애매한 공간이다. 어둑한 다락과 흙바닥이 허물어진 부엌 뒤켠과 석류나무만 싱겁게 서 있던 안마당 같은. 그러므로 집을 지을 때 건물을 세울 곳보다 비워둘 곳을 먼저 생각하자는 그의 ‘어번 보이드’에 나는 열광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보다 ‘왜’
“건축이 물리적 집을 짓는 게 아니라 삶의 방식을 만드는 것이라면 대학에서 건축과는 공대나 예술대에 있어서는 안 되죠. 기술도 예술도 아닌 삶의 목적과 방식을 고민하는 인문학 분야, 철학이나 심리학 인근이 건축과의 제자리일 겁니다.”
빈자의 미학은 결국 ‘건축은 왜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고 대답이다. 승효상은 서울대와 한국건축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언제나 ‘왜’라는 본질을 놓치고 ‘어떻게’라는 테크닉에만 몰두하면 가짜가 될 위험이 크다고 강조한다.
얼마 전엔 지금껏 자신이 살았던 집들을 일부러 찾아다녀봤다. 가장 좋은 집으로 기억하는 건 세 살 터울의 동생이 태어난 부산 서대신동의 집이었다. 피란민촌의 산비탈에 있던 6가구가 모여 살던 ‘마당 깊은 집’이었는데 물론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다. ‘빈자의 미학’의 뿌리는 바로 그곳일지도 모르겠다.
IMF 경제위기로 상황이 어렵고 피로가 몰리자 혼자 북런던대에 적을 두고 일년간 살다 왔다. 거기서 영국 건축가들이 패러다임 변화를 위해 사용한다는 단어가 자신에게 아주 친숙한 데 놀랐다.
“비움, 불확정성, 틈, 부정성 같은 단어는 원래 우리에게 체질화된 것인데 개발연대를 지나면서 잊도록 세뇌된 말들 아닙니까. 그들은 그걸 새로운 가치로 발견해내고 있더라고요.”
그가 지금 가장 좋아하는 곳은 종묘다. 공간의 프로토타입(prototype·원형)이 거기 있어 건축에 관한 상상력이 꽉 막힐 때는 종묘 월대 위에 혼자 선다. 특히 안개 낀 아침의 종묘는 절묘하다.
“종묘를 한 일본 건축가가 동양의 파르테논이라고 했지요. 우리에겐 사실 광장이나 녹지가 중요한 건 아니었어요. 그저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 필요했고 그 빈 공간의 원형이 종묘에 가면 보입니다.”
조금 멀리 갈 땐 경북 안동의 의성 김씨 종가에 들른다. 며칠 전에도 그 집을 보러 갔다.
“기품 있는 선비 같은 절제된 긴장이 흐르는 집이죠. 내부의 크기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위풍당당해요. 성리학의 엄격한 이상세계가 그 집에 나타난 것을 읽으면 온몸이 짜릿해지곤 합니다.”
비움, 불확정성, 틈, 부정성
수졸당 이후 그는 대학로 문화공간(1993) 웰컴 사옥(1995) 수백당(1998), 당진성당 돌마루 공소(1995) 같은 집을 짓고 자신의 건축적 사유를 담은 책도 여러 권 냈다. 그의 작업대 위엔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몽당연필이 가득 차 있다. 건축가는 4H연필을 쓴다고 학교에서 배웠건만 거기 놓인 건 2B연필이다. 그러고 보니 승효상은 학교에서 배운 상식을 다 지우는 건축가다. 아름다운 몽당연필을 자꾸 만들어내며 사유를 기록해 마침내 스스로 학교가 된 건축가다. 아들 지담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건축공부를 하니 대를 잇는 건축가가 될 것이다.
위층 이로재에는 런던에서 그림공부를 하는 맏딸 지후를 빼고 늦둥이 막내딸 지원과 그를 느닷없는 사랑에 빠뜨렸던 부인이 노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살고 있다. 자신이 지은 집 중 어디가 가장 마음에 드냐고 묻자 그는 손을 내젓는다.
“지금도 내가 가장 가기 싫어하는 곳이 준공식이에요. 골조가 올라갈 때야 가슴이 두근두근하죠. 그러나 마감이 시작되면 그때부터 실망도 시작입니다.”
건축가 승효상은 저런 치열함으로 ‘지혜의 집’을 지어 끊임없이 우리에게 지혜로운 삶을 제안할 것이다. 마치 아돌프 로스가 빈 시민들에게 그렇게 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