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7년 첫 책을 낸 후 8년 동안 27권의 역사서를 저술했다. 하루에 원고지 10매씩은 꼬박꼬박 써내려간 것이다. 우리 역사를 축소해 바라보는 실증주의 사관에 반기를 들었다는 이덕일 선생은 “인조반정은 잘못된 쿠데타이고, 이후 집권한 노론 세력이 나라를 망친 주범이며 친일파로 이어진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 역사를 제대로 복원하는 게 자신의 임무라는 그의 손가락은 한순간도 컴퓨터 키보드
- 위를 떠나지 않는다.
부드럽고 수더분한 인상이지만 기존 실증주의 사관을 비판할 때는 날카롭고 매섭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요즘은 학문을 많이 했다고 자연스럽게 녹이 들어오는 시대가 아니다. 박사학위를 따봤자 먹고 살길이 막막하다. 오늘날 한국에서 학문한다는 것은 연못 밖 맨땅에 내튕겨진 붕어 신세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나 문필가는 다르다. 연못 밖의 맨땅에 나와서도 먹고 살 수 있다. 따지고 보면 ‘가(家)’자가 붙는 또 다른 직업인 소설가도 범(汎)문필업에 속한다. 하지만 문필가와 소설가는 다르다. 한국의 소설가들은 ‘신춘문예’라는 일종의 ‘문예고시(文藝考試)’를 통과한 사람들이라서, 소설가라는 직함에는 어느 정도의 아우라가 따라다니고 사회적인 대접도 깔려 있다. 신문사도 소설가에겐 언제든지 문화면에 기본적인 지면을 할애해 준다. 작가협회도 있다. 하지만 문필가는 그런 것도 없다. 소설가는 창작을 하는 예술가지만, 문필가는 사실과 기록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추구하는 지향점도 약간 다르다. 한마디로 문필가는 소설가보다 외롭다.
‘학야녹재기중’과 ‘1인 기업가’
문필가라는 직업이 내포한 또 하나의 면은 ‘1인 기업가’라는 관점이다. 그 자신도 문필업으로 먹고 사는 공병호 박사가 몇 년 전 ‘1인 기업가로 홀로서기’라는 책을 내면서 한 말이다. 그렇다. 문필가는 철저히 1인 기업가다. 조직도 없고 상사도 없고 울타리도 없고 출근부도 없고 퇴직금도 없다.
외로운 만큼 자유롭다. 간섭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삶의 축복이 아니던가. 침 잘 놓는 침쟁이가 오직 침 한 통만 들고 천하를 표주(漂周)하듯, 사진작가가 카메라 한 대 둘러메고 명산대천을 방랑하듯, 사주쟁이가 만세력 한 권 달랑 보따리에 넣고 세상을 굴러다니듯, 문필가는 펜 하나 달랑 둘러메고 화택(火宅)과 같은 사바세계의 생업전선을 통과한다. 펜 하나 달랑 둘러메면 굶어 죽지 않는 직업. 명예퇴직도 없고 정리해고도 없다. 따지고 보면 이만한 직업도 없다. 문필가는 ‘학야녹재기중’과 ‘1인 기업가’의 두 가지 면이 결합된 직업이다. 이 두 가지 조건에 충실한 문필가 중 하나가 천고(遷固) 이덕일(李德一·44) 선생이다.
글을 쓸 관상과 사주
그의 집필실은 서울 수유리에 있다. 25평 남짓한 연립주택 안으로 들어가자 방마다 역사 분야에 관한 책들이 촘촘하게 꽂혀 있다. 어림잡아도 4000∼5000권은 될 것 같다. 집은 비록 허름하지만, 그 내부에는 고금을 관통하는 서적들이 빽빽하다. 권력자의 집에 가보면 냉기가 감돌고, 부잣집에 들어가 보면 윤기가 감돌고, 학자의 집에 가보면 서기묵향(書氣墨香)이 진하게 배어 있다. 그의 집필실에는 서기묵향이 충만해 있다.
첫인상은 수더분하고 부드럽다. 충청도 사람이라 그런지 말씨가 느리다. 말씨가 느리면 사람이 원만하다는 인상을 준다. 관상을 보니까 얼굴에 비해서 입이 작다. 입이 작은 사람은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말수가 적어지면 글은 많아지게 마련이다. 마치 모래시계와 같아서 말로 뱉어버리는 게 많으면 글은 반대로 적어진다. 그래서 자고로 문장가 치고 웅변가는 없고 눌변이 많은 법이다.
이덕일 선생도 그런 스타일이다. 대체로 상명불이(相命不二), 즉 관상과 사주는 둘이 아니라 했다. 관상에는 사주가 따라붙는다. 고수들은 그 사람의 관상을 보면 사주가 짐작되고, 사주를 보면 관상이 짐작된다고 한다.
명함을 받으면서 생년월시를 물어보니 신축(辛丑)년, 정유(丁酉)월, 계유(癸酉)일, 을묘(乙卯)시가 나온다. 태어난 날이 계유(癸酉)일이다. 계(癸)는 조용하게 내리는 가랑비다. 소리가 별로 나지 않는다. 부지런해서, 일이 있으면 미루지 않는다. 짐작건대 원고 마감을 넘기는 스타일이 아닐 것이다.
계(癸) 일간(日干)은 일명 ‘용각산 사주’다. 용각산은 흔들어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생기면 절대 소문내지 않고 조용조용하게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다. 이 사주는 가을의 물이라서, 물을 어느 정도 빼내야 한다. 그러려면 수생목(水生木)으로 목이 필요한데, 태어난 시가 을묘(乙卯)시로 목에 해당하는 시간대다. 더군다나 묘(卯)는 문창성(文昌星)이다. 문장이 빛난다는 별 아닌가. 자기를 표현하는 식신(食神)이 문창성과 겹쳐 있으면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날리는 법인데, 이 선생의 팔자가 바로 이런 사주다. 마치 누에고치가 똥구멍으로 실을 뽑아내듯이 문장을 뽑아내는 명조다.
유(酉)도 문곡성(文曲星)이다. 문곡성도 문창성과 마찬가지로 학문을 관장하는 별이다. 이 사주에는 문곡성이 2개나 들어 있다. 문창성이 생전에 학문으로 빛을 보는 별이라면, 문곡성은 죽은 이후 이름이 나는 별이다. 어찌 되었든 문장, 학문과 연관이 깊은 팔자인 것이다. 이런 정도 사주를 타고나려면 선대에 명당을 하나 썼어야 했다. 확률적으로 조부나 증조부 묘가 문필봉 앞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문장가를 만나면 그 집안의 조상 묘를 답사해보는 버릇이 있다. 명당이 아니면 그 집안의 친가나 외가 쪽 조상 가운데 문장에 능통했던 사람이 있을 확률이 높다. 후손은 조상의 ‘리바이벌’인 경우가 많다.
-이제까지 쓴 책이 총 몇 권이나 되는가.
“27권이다. 첫 책이 1997년에 나온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다. 이 때가 숭실대 사학과 대학원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던 해로 나이는 37세였다. 그 이후로 계속 썼다. ‘사도세자의 고백’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3권) ‘운부’(3권) ‘이회영과 젊은 그들’ ‘역사에게 길을 묻다’ ‘오국사기(五國史記)’(3권) ‘누가 왕을 죽였는가’ ‘여인열전’ ‘살아있는 한국사’(3권) 등이다. 최근에 낸 책이 2004년 5월에 나온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2권)이다.”
-8년 동안 27권을 저술했으니 1년에 평균 3권씩 쓴 셈이다. 1권의 원고지 평균매수를 1200매라 하면 1년에 3600매를 쓴 것이고 이것을 다시 365일로 나누면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원고지 10매씩은 썼다는 애기다. 대단한 중노동인데, 체력에는 문제가 없는가.
“단행본 저술 외에 잡지나 신문에 기고한 원고까지 포함하면 하루 10매가 넘는다. 처음 시작할 때는 이렇게 쓰게 될 줄 몰랐다. 쓰다보니까 그렇게 된 것 같다. 많은 분량을 쓸 수 있었던 데는 컴퓨터의 효능이 뒷받침됐다. 옛날처럼 펜으로 종이 원고지에 직접 눌러쓰는 시스템으로는 이만한 분량을 쓰기 어렵다. 컴퓨터는 2대를 번갈아 사용한다. 집에서는 노트북을 사용하고 집필실에서는 데스크톱을 쓴다. 장시간 작업에는 노트북이 피로가 덜하다. 단시간에는 데스크 톱이 맞다.
체력관리는 등산으로 한다. 일주일에 1∼2회 서울 근교의 산을 오른다. 집필을 하려면 아무래도 앉아 있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하체 보강운동이 필요하다. 하체 보강과 기분전환에는 등산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1인 기업가인데, 출퇴근 시간은 어떻게 정해놓았나.
“보통 9시에는 상계동에 있는 집에서 나와 수유리 집필실에 도착한다. 전철로 40분 거리다. 퇴근시간은 일정하지 않다. 저녁에 술 약속이 있으면 6시이고 그렇지 않으면 8∼9시가 된다.”
-자기 마음대로 조정하는 출퇴근이라서 좋겠다. 얼마나 자유스러운가.
“마냥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자료에 갇혀 산다. 끊임없이 자료를 검토해야 한다. 원고매수와 마감시간에 갇혀 산다. 마감기일을 지키는 게 프로다. 인생사에서 제약을 완전히 벗어나는 삶은 불가능한 것 아닌가.”
-문필가에겐 결국 아이템이 관건일 텐데, 아이템 구상은 어떻게 하나.
“사관(史觀)이 가장 큰 아이템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소설가가 아니다. 그렇다고 철학자도 아니다. 문사철(文史哲) 가운데 사(史)를 가지고 책을 쓰는 직업이다. 역사에서 가장 큰 주제이자 골격은 역시 사관이다. 저술의 전체적인 방향은 물론이고 내가 설정한 사관에 바탕해 집필한다. 사관이야말로 나의 마르지 않는 아이템인 셈이다.”
역사 축소하는 실증주의 사관
-그렇다면 이 선생의 사관은 무엇인가. 기존의 사관과는 어떻게 다른가.
“이제까지 역사학계의 주류를 형성해온 사관은 실증주의 사관이다. 모든 역사를 실증할 수 있는 자료에 바탕을 둔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증은 역사학의 기본적인 방법론이지, 그 자체가 이념이나 주의, 즉 지향점이 될 수는 없다. 여기에 우리 역사학의 비극이 있다. 일제 식민주의 사학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서문에는 일제 식민사학을 벗어났다고 주장하지만 막상 서술한 것을 보면 식민사학의 아류인 책이 많다. 역사가에게 실증은 기본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실증에만 매달리면 한계에 봉착한다.
실증주의 사관에 기반한 식민사관이 지닌 문제점은 두 가지다. 첫째는 공간이 축소되는 문제고 둘째는 시간이 축소되는 문제다. 나는 이것을 돌파하고 싶다. 이런 도전이 곧 나의 사관이기도 하다.”
그가 주장하는 공간과 시간의 축소 문제를 설명하면 이렇다. 먼저 공간이 축소된다는 것은 우리 역사가 한반도 내에 한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민족의 본래 무대는 대륙이다. 식민사관은 이 대륙을 우리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한국의 고대사는 대륙과 해양을 아울러 보아야 한다. 만주대륙에서 일본열도까지 우리의 무대였으므로 이쪽까지 모두 포괄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의 축소는 무엇인가.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단군조선도 실증주의를 빙자한 식민사관의 관점에서 보면 인정될 수 없다. 단군조선이 부정되면 고조선은 사라지게 된다. 고조선에는 세 부분이 있다.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이 그것이다. 우리 학계에선 이 중 위만조선만을 받아들이는 상황이다. 위만조선만 인정한다면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이 맞다는 논리다. 동북공정의 논리에 의하면 북한도 중국의 역사가 된다. 북한 정권이 붕괴하면 중국에서 어용정권을 세워 북한을 접수하겠다는 복선을 깔아놓은 것이다. 그 논리가 바로 위만조선의 도읍지가 평양에 있었다는 점이다.
이 선생의 사관은 우리 고대사의 주 무대가 만주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저술 아이템은 우리 역사의 무대를 만주와 일본까지 확대하자는 것이다. 우리 역사의 시간과 공간을 원래 크기대로 복원하는 것이 그의 사관이자 핵심적인 아이템이다.
“인조반정은 잘못된 쿠데타”
그의 사관 중 주목할 만한 한 가지는 조선 인조반정 이후의 체제에 대한 관점이다. 인조반정 이후 주도권을 잡은 세력이 조선이 망할 때까지 계속 집권했다. 무려 250년이었다. 그는 이 기간 동안의 주도세력을 부정적으로 본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서는 안 될, 잘못된 쿠데타였다는 것. 인조반정 이후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집권세력이 결국 나라를 망쳤다는 것이다.
노론 명문가에서 독립운동가가 나온 적이 없다고 한다. 독립운동은 남인과 소론이 했지, 노론은 하지 않았다. 갑신정변의 주도인물인 김옥균 등도 노론이기는 하지만 노론좌파에 해당하는 세력이었다. 주류인 노론우파가 아니었다. 그나마 개혁적이던 노론좌파마저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거세되자 이후로 노론은 현실 타협 쪽으로 나간다. 오히려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섰다는 것.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인조반정의 주도세력인 서인과 그 후신인 노론은 일제의 친일파와 연결된다. 이때의 친일파는 1910년 10월 총독부에서 수여한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들이다. 왕족과 이완용을 비롯한 76명이 작위를 받았는데, 90%가 노론이다. 우리가 친일파라고 할 때 그 핵심범위는 이들 작위를 받은 76명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단재 신채호, 백암 박은식, 창강 김택영, 중광 나철, 희산 김승학 등이 모두 독립운동가이면서 역사가였다. 이들의 사관이 바로 이덕일의 문제의식과 일치한다. 즉 공간과 시간을 원래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제시대 역사가는 두 부류였다. 하나는 단재, 백암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총독부 산하에 있던 ‘조선사편수회’인데, 8·15광복 이후 한국 사학계의 주류는 후자인 조선사편수회의 사관을 계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덕일의 아이템은 바로 이러한 부분을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식민사관에 대한 도전이 바로 그의 글쓰기 밑천이다.
-사관을 어떻게 갖냐에 따라 많은 얘깃거리가 개발될 것 같다. 어찌 보면 죽을 때까지 파도 다 파지 못할 광맥이 묻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걱정도 된다. 공격이 들어올 텐데, 그 공격을 어떻게 감당할 생각인가.
“자기가 선택한 길은 스스로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 정도 각오는 되어 있다. 각오가 없으면 글을 쓰기 어렵다.”
-어떤 조직의 보호도 없이 혼자 가는 길이다. 외롭지 않은가.
“외롭지 않다. 책 속에 길이 있다. 인문역사서를 저술하는 과정은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들과 대화하는 것이다. 당대에 가장 뛰어난 인물들이 역사서에 나온다. 이런 인물들과 매일 대화하니까 재미있다. 이런 유희를 누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조직의 보호도 그렇다. 조직에 속해서는 당대의 진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혼자 있을 때 잘 보인다. 한 인간의 원초적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런 자세를 견지하면 뜻하지 아니한 때와 장소에서 동지와 동조자들도 생긴다. 불교용어로 ‘도반’들이다.
나는 전업 문필가에겐 몇 가지 조건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매달 봉급이 없어야 한다. 이는 조직에 소속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조직에 소속되지 않아야 자유로운 사고가 나온다. 둘째, 광야에서 먹을거리를 구해야 한다. 먹을거리란 물론 자신의 밥이다. 단 독자도 먹을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공된 음식이 아니고 원재료를 사용해야 하고 새로움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셋째 조건인 전문성이자 넷째 조건인 대중성이다.”
그는 조직에 소속되지 않아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어야만 전업 문필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먹고 사는 데 지장 없고, 기본 품위를 유지할 정도의 수입은 들어온다. 수입원은 4군데다. 가장 큰 부분이 인세다. 그 다음이 강연료, 원고료, 출연료다. 기업체에 강연을 나가면 1회에 50만∼60만원쯤 받는다. 요즘 대학생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직업이 1인 기업가라 한다. 간섭 없고 명퇴 없고 1년에 2∼3차례는 해외답사를 나간다. 게다가 나이를 먹을수록 더 대접받는다. 이만하면 그리 비관할 인생은 아니다.”
후세에 기록 남기는 삶
-나도 문필가이지만 대학이라는 조직에 한 발을 걸치고 있다. 최소한도의 안전장치랄까. 하지만 이 선생은 두 발을 다 강호에 딛고 있다. 배짱이 대단한 것 같다.
“얼마 전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을 출판하고 나서 ‘와우TV’에 출연해 대담을 나눈 적이 있다. 그때 사회자가 공병호 박사였다. 공 박사가 ‘하루하루 먹고 사는 문제에 긴장을 느껴야 그게 건강한 삶이다’라고 했는데, 그 말에 깊이 공감했다. 다만 경쟁에서 낙오되는 약자들이 재기할 때까지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장치가 먼저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먹고 사는 문제에 긴장을 느끼지 않으면 좋은 글이 나올 수 없다. 좋은 조건을 갖춰야 글이 잘 써질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매일매일 먹고 사는 문제에 긴장을 느끼는 일은 자기를 새롭게 가다듬는 일이기도 하다. 글이라는 게 긴장이 있어야 써진다. 문장을 다듬다 보면 마침표를 찍느냐, 콤마를 찍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세세한 분야에도 긴장이 요구되는 작업이 글쓰기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한세상 편하게만 살고 간 사람은 제대로 된 작품을 남기지 못한다. 고생하고 살아야만 무엇이든 남기고 간다. 대표적인 사례가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이 촌구석에서 18년 동안 고생하고 있을 때 조정에서 호의호식하던 고관대작들은 모두 역사에서 망각됐다. 하지만 강진과 흑산도에서 고생했던 다산 형제는 역사에 남았다. 이런 진리를 알아갈수록 ‘안분자족’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다. 20∼30대 혈기가 왕성할 때는 ‘맹자’가 좋지만 40대가 넘어가면서 ‘논어’가 좋아지는 심리와 비슷하다. 호흡을 길게 할 필요가 있다.
문필가의 강점은 기록을 남긴다는 것이다. 후세에 전하는 것은 벼슬이 아니라 기록과 작품이다. 그래서 기록과 작품을 남기는 사람이 역사에 남기 마련이다. 또 생전에 생사당(生祠堂)을 세워주는 것도 소설가를 포함한 문필가들에게나 그렇게 한다. 요즘 전국 각 지방자치단체별로 문학관을 많이 세우고 있다. 죽어서는 물론이고 생전에도 기념관을 세워주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문필가는 자위할 만하다.”
-역사를 주제로 대중서를 집필하려면 내공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어느 정도의 공부기간이 필요한가.
“최소한 5년 이상은 원자료를 섭렵해야 한다. 최소가 5년이고 전업 문필가의 길로 가려면 10년 이상의 섭렵이 필요하다. 그래야 어설프지 않다. 역사서뿐 아니라 다른 인문서를 집필하려고 해도 자료를 10년 이상 축적해야 한다. 인문서를 쓰다보면 결국 역사로 회귀하기 마련이다. 문사철의 귀결점이 역사가 아닌가 싶다. 역사만큼 자료와 사례가 풍부한 시장이 없다.”
문학과 역사의 결합이 숙제
-저술할 때 참고하는 1차 자료가 있으면 소개해달라.
“1차 원자료로 재미있는 게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이다. 조선시대 의금부에서 반체제 사건을 수사 취조한 기록이다. 선조 때부터 조선 말기까지 약 300년 동안 작성한 수사기록이다. 30권 분량으로 영인이 되어 있는데,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내용은 순한문이지만 중간 중간에 이두가 섞여 있어서 별도로 이두 공부를 해야만 정확한 해독이 가능하다. 반체제 사건을 다뤘기에 내용이 아주 흥미롭다. 어느 사회든 반체제는 그 사회가 지닌 가장 모순된 부분과 맞물려 있어 당대 사회의 문제점을 실상 그대로 적나라하게 노출시킨다. 정사(正史)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세세한 내용들이 기술되어 있다. 요즘으로 따지면 안기부와 대검공안부의 합동수사기록에 해당한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을 집필하면서도 참고한 자료다.
조선후기 천주교도들은 반체제 사범으로 분류됐다. 이 자료에는 정약용, 정약전, 이가환 등이 수사받은 기록이 들어 있다. 왕조실록에는 그 경과와 처벌 결과만 간략히 나오지만 ‘추안급국안’에는 그 과정이 자세하게 나온다. 지금은 작고한 영남대 정석종 교수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이 자료를 많이 활용했다. 황석영이 ‘장길산’을 쓸 때도 정석종 교수가 여러 자료를 주면서 조언을 했던 것으로 안다.
내가 ‘운부(雲浮)’를 쓸 때도 이 자료를 참고했다. 운부는 금강산에서 활약했던 반체제 승려 세력인 당취(黨聚)의 우두머리 승려의 이름이다. ‘추안급국안’에 보면 이 사건에 관한 기록이 ‘이영창등추안(李榮昌等推案)’이라는 제목으로 서술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영창이라는 인물이 체포되면서 금강산에 운부라는 승려를 중심으로 한 반체제 승려 세력의 존재가 세상에 노출된다. 운부는 송나라 명신의 후예로 당시 70세였고 풍수지리에 달통했다. 이어서 세상을 구제할 진인(眞人)이 2명 나오는데, 정성(鄭姓)과 최성(崔姓)이 그들이다. 정성은 정몽주의 후손이고 최성은 최영의 후손인데, 정성이 먼저 조선의 왕이 되고 그 다음에 청나라를 공격하여 평정한 다음 최성을 왕으로 삼는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흥미로운 1차 자료가 많다. 독자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하려면 이러한 1차 자료에 대한 섭렵이 필수적이고 또 효율적이다.
역사가 갖는 장점은 바로 이런 것이다. 자료가 풍부하다. 뿐만 아니라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실만큼 독자를 끌어들이는 요소는 없다. 자료에 바탕을 두고 글쓰기를 할 수 있으니까 신뢰성이 있다. 단점은 자료의 제약을 받으니 상상력의 범위가 좁다는 것이다. 즉 보완해야 할 것이 바로 상상력이다. 따지고 보면 철(哲)은 사(史) 속에 어느 정도 들어가 있다. 역사를 읽다 보면 누구나 사색을 하고 통찰력을 얻는다.
문제는 문(文)이 지닌 상상력을 어떻게 끌어올 수 있느냐다. 사료와 사료 사이에 빈 공간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공간을 문이 지닌 상상력으로 메워야 한다. 그 상상력도 아무렇게나 하면 안 된다. 개연성을 확보해야 한다. 독자가 납득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논리를 깔아야 한다. 즉 상상력과 사료가 서로 아귀가 맞아야 하는 것이다. 결국 문학과 역사의 결합이 내 글쓰기의 숙제다. 문필가가 갖춰야 할 자질은 문학과 역사를 결합시키는 능력이다. 그래야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다.
10대에 소설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는데 이때 접한 소설에 대한 감각이 현재 역사대중서를 집필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물론 쉽게 썼다고 해서 대중역사서는 아니다. 전문적인 내용을 쉽게 써야 진정한 대중역사서다. 결국 전문적인 내용을 소화하는 능력이 관건이다.”
사료의 공백 메워주는 현장답사
사료와 사료 사이의 공백을 어떻게 메웠는지 궁금했다. 사례를 들려달라고 하자 그는 연개소문에 대해 이야기했다. 연개소문은 그 명성에 비해 자료가 너무 빈약하다. ‘삼국사기’에 겨우 몇 줄 나와 있는 정도다. 현장답사에서 얻은 정보가 그 공백을 메워줬다. 그는 중국 베이징에 ‘고려진(高麗鎭)’이라는 행정구역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간 적이 있다. 고려진은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추적해서 베이징까지 온 증거로 삼을 수 있다. 중국인들이 즐겨보는 경극(京劇)에는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추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이야말로 문헌자료가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그 공백을 채워줄 수 있는 살아 있는 현장자료다.
어떤 인물에 대한 평전을 쓰거나 어떤 역사적 사건을 자세하게 파고드는 책을 쓰고 나면 이와 관련된 특별한 선몽을 꿀 수 있다. 책을 쓰기 전이나 책을 출간할 무렵, 또는 자료조사 과정에서도 꿀 수 있다. 꿈에 특별한 역사적 건물이나 사건 장면이 나타나거나 당사자가 나타나거나 하는 식이다. 이런 선몽이 있던 책은 출간 후 잘 팔린다. 만약 출간 전후에 특별한 꿈이 없으면 별로 팔리지 않는다.
필자도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를 쓰기 시작할 무렵 특별한 꿈을 꾸었다. 수염이 허옇게 난 노인 수십 명이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한가운데서 필자가 엄청난 크기의 붓을 노인으로부터 전해 받는 꿈이었다. 하도 신기해서 필자는 이 꿈을 책의 서문에 집어넣기도 하였다. 과연 이 꿈이 있고 난 뒤로 책이 많이 팔렸다. 나만 그런가 해서 주변의 아는 작가들에게 경험을 물어보았더니 몇몇은 필자처럼 독특한 선몽을 받은 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덕일 선생에게도 책을 내기 전 꿈을 꾸었던 적이 있는지 물었다.
“1998년 ‘사도세자의 고백’을 집필하는 중 이상한 꿈을 꿨다. 꿈에 경종이 자객에게 쫓겨 도망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자 자객이 칼로 찌르는 장면이 보였다. 이 순간에 경종이 ‘내가 왕이다’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나는 그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사도세자가 내게 와서 ‘나는 정신병자가 아니다. 억울하게 죽었다’고 하는 게 아닌가. 하도 이상한 꿈이라 지금도 기억한다. 이 책을 쓸 때는 이야기 전개가 술술 풀려나갔다. 하루에 원고지 100매까지 쓴 날도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꿈을 꾸고 나서 허리가 아팠다는 사실이다. 원인도 모르게 허리가 아파 여러 달 병원을 다니면서 고생했다. 아마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나를 방해한 것이 아닌가 상상해 본다. 홍씨는 사도세자를 죽인 가해자 중 한 사람이다.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가 변명한 책이다. 자기들이 죽인 것이 아니라고 구구하게 변명하고 있다.
꿈에서 만난 경종과 사도세자
경종은 장희빈의 아들이다. 소론과 남인이 경종을 지지했으므로 노론과는 반대노선의 지지를 업고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경종은 독살당했다. 당시 여론은 노론이 경종을 독살했다는 것이었다. 주목할 부분은 어릴 적 사도세자를 키운 궁녀들이 바로 경종을 모신 궁녀들이라는 사실이다. 즉 사도세자는 노론에 의해서 경종이 부당하게 독살당했다는 이야기를 궁녀들로부터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도세자는 어릴 때부터 노론에 대해 반감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인 홍봉한은 당시 노론의 영수였다. 영조는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노론을 지지했고, 그 핵심에 홍봉한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정치적 이해가 다르니까 아버지와 장인이 연합해서 사도세자를 죽인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경종과 사도세자의 죽음은 서로 연관이 있다. 사도세자 죽음의 원인은 경종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 사건은 인조반정과도 관련이 있다. 당시 인조반정의 주도세력들 간에 묵계한 내용이 있다. 바로 국혼물실(國婚勿失), 즉 노론 집안에서 대대로 왕비를 배출한다는 약속이다. 즉 노론이 왕실을 장악하겠다는 말인데, 장희빈은 남인의 작업으로 왕실에 들어갔다. 노론의 국혼물실 관례를 깬 셈이다. 그래서 장희빈은 노론의 집중사격을 받았고 그 소생인 경종도 무사할 수 없었다.
내가 꿈에서 경종과 사도세자를 동시에 본 이유도 아마 이러한 역사적 맥락이 압축되어서 한 장면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싶다. 꿈이 다 맞는 것은 아니라지만 어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24시간 골똘하게 생각하다 보면 의외로 꿈에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얻는 수가 있다. ‘사지사지귀신통지(思之思之鬼神通知·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귀신과 통해서 알게 된다)’라는 말이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 같다.”
-‘오국사기(五國史記)’(3권)를 관심있게 읽었다. 우리들의 시각이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국한되어 있는데, 그 통념을 벗어나게 해준 책이 ‘오국사기’ 같다.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우리 역사를 온전히 복원하려면 대륙성과 해양성을 모두 포괄하는 역사서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조들의 웅혼한 기상을 되살리려면 대륙과 해양으로 나가야 한다. 구상에만 5∼6년이 걸렸다. 왜 중국의 삼국지만 보는가. 중국의 삼국지보다 훨씬 스케일이 크고 재미있는 책을 쓰고 싶었다. 삼국지보다 무대가 큰 세계를 오국사기에 담아보려 했다. 기본 골격은 동이족이 한 팀이고, 화하족(華夏族)이 한 팀이다. 두 팀이 각축하는 것이 오국사기다. 일본열도와 만주는 동이족에 포함되고 수나라, 당나라는 화하족에 들어간다.”
대륙성·해양성 포괄하는 역사서
-우리나라 명문가들을 연구하다 보니 그 집안들이 직간접으로 당쟁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쟁을 모르고서는 한 집안을 깊이 이해하기 어렵다. 당쟁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당쟁은 나쁘다, 당쟁으로 망했다는 것 역시 식민사관이 전파한 기존 통설이다. 우리 역사를 비하하는 도구가 당쟁이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이것은 일종의 정당정치다. 정당정치가 일찍부터 발달했다. 공존의 틀 속에서 당쟁을 전개할 때는 역사의 순기능으로 작용했지만, 공존의 틀이 붕괴되고 독존을 추구하면서 역기능으로 작용했다.
순기능에서 역기능으로 접어드는 분기점이 언제인가 하면 숙종 때의 예송논쟁(禮訟論爭)이다. 예송논쟁을 거치면서 공존의 틀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노론의 독존으로 역사가 흘러갔다. 조선 초기에 발생한 무오, 갑자, 기묘, 을사라는 4대 사화는 사림파가 훈구파와 싸우는 과정이었다. 이 사화를 거쳐서 사림파가 결과적으로 정권을 장악한다.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곧바로 당쟁에 돌입한다. 그 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성리학은 끝났다. 이후 새로운 대안세력이 나와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숙종 때 운부를 비롯한 승려 세력이 대안 세력으로 나오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운부를 비롯한 승려세력은 사대부를 대신해서 농민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송논쟁 이후 새로운 이념도출에 실패했다는 것이 조선사회를 보는 아쉬움이다.”
10시간이 넘게 이야기해도 싫증나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문필가들이다. 문필가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의 스토리텔러로 살아간다. 그중에서도 이덕일 선생과 같은 역사서 전문 집필가야말로 석 달 열흘은 이야기할 만한 상대다. 군자는 적어도 석 달 열흘을 이끌고 갈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래야 인생을 좀 안다고 할 수 있다는 것. 그와 한나절 이야기하고 나니 담선(談禪)을 한 것 같이 뿌듯하다. 그가 건강관리에 유념해 장수하는 문필가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