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 징병·징용 피해자, 한국정부에서라도 보상해야
- 새 한일어업협정, 독도가 울릉도 부속도서라는 해석근거 부정
- 독립운동 공적심사의 중요 자료는 ‘동아일보’
- 전봉준은 앙시앵 레짐 해체하고 일본의 보호국화 시도 파탄시킨 영웅
- 강경애의 김좌진 암살 모의說, 증거 없다
효창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김구 선생 묘소 바로 옆에 위용을 갖춘 백범기념관이 2002년에 들어섰다. 헌법 전문(前文)에는 우리나라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기돼 있지만, 선생이 세상을 뜬 지 50년이 넘도록 임시정부의 영원한 주석을 기리는 기념관 하나 없었다. 백범기념관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 정파를 초월한 국회의 예산 지원과 국민성금으로 완공됐다.
공군참모총장과 교통부 장관을 지낸 김신(金信·백범의 차남)씨가 백범기념관 관장과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신용하(愼鏞廈·68)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 협회의 부회장 겸 백범학술원 원장이다.
3·1운동 86주년을 앞두고 한국사회사 민족독립운동사 일제침략사 및 독도 연구에 평생을 바친 신 원장을 찾아갔다. 신 원장은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사회사’라는 저서와 3·1운동에 관한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
황소 같은 연구자
필자가 백범기념관을 찾은 아침 나절, 효창운동장 관람석은 텅 비어 있고 조기축구 회원 10여명이 공을 차고 있었다. 월드컵 경기를 치른 나라에서 효창운동장의 시설은 낡고 초라해 이 일대 경관을 해치는 흉물이 된 지 오래다. 정부는 효창운동장을 없애고 효창원을 민족공원으로 확장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자유당 정권은 1960년 약 15만 그루의 나무와 연못, 섬을 없애고 효창운동장을 조성하면서 당시 공군에 근무하던 김신 장군에게 백범 묘소를 교외로 이장하라는 압력을 넣었다. 참배객이 늘어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런 꾀를 냈지만 여론의 반대에 밀려 포기했다. 축구장과 애국선열 묘소의 기이한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백범학술원은 백범기념관 지하 1층에 있다. 신 원장의 용모와 풍채는 황소를 닮았다. 연구도 황소처럼 한다. 학문의 길에서 51권에 이르는 저술과 논문 260여편, 역·편서 14권의 연구 실적을 쌓았다. 출판 대기중인 저서가 6권.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한국 최고 기록이다.
사진기자가 촬영을 하는 동안 백범 살해의 배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신성모 국방장관과 김창룡 특무대장이 범인 안두희의 배후라는 것까지는 기록과 증언을 통해 확인됐죠. 민주사회당 국회의원을 지낸 고정훈씨는 광복 후 미국 정보기관 CIC의 통역겸 판단관으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고씨가 4·19 직후 ‘백범 암살의 최고 책임자는 신성모’라는 보고서를 봤다고 증언했죠. 이승만 대통령이 관련됐다는 물증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대통령의 심기를 헤아려 저지른 범죄일 수도 있죠.”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가 백범의 ‘비현실적인 정치노선’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내용은 이렇다.
‘냉엄한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한 백범의 비현실적 정치노선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6·25 남침으로 확인됐듯이 김일성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은 통일국가 수립은 애당초 불가능한 프로젝트였다. 그래서 나는 이승만의 단정(單政) 노선을 이해한다.’
신용하 원장은 광복 후 백범 노선에 대한 사회 일각의 비판적 견해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미국과 소련이 강제한 조국 분단의 극복은 민족적 과제였어요. 이승만 박사는 미국과 소련이 준 분단의 틀에 순응했기 때문에 권력을 장악하게 됐죠. 백범 김구 선생은 열강이 짠 틀을 넘어 통일을 이루려고 저항했기 때문에 정치적 권력에서 멀어졌습니다.
권력을 갖느냐 못 갖느냐로 현실 정치가의 역량을 평가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이는 실용주의적, 기능주의적 관점입니다. 그런 관점에서는 권력을 잡은 이 박사가 유능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죠.
그러나 진정한 민족지도자라면 열강의 틀을 극복해 통일을 지향하는 활동을 정치의 중심에 둬야 할 것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광복 후 민족지도자로서 소임을 다했습니다. 처음부터 권력 장악이 아니라 민족의 통일국가 수립을 지향했습니다. 백범은 민족지도자이면서 정치가였는데 반해 이 박사는 민족지도자는 못 되고 권력을 추구한 정치가였다고 봅니다. 권력 장악을 기준으로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를 따지는 것은 미국에서 발달한 행동주의(Behaviorism) 시각으로 고찰한 것이죠. 5000년 역사를 가진 문명 민족으로서 열강이 강제한 분단 구도에 대항해 민족통일을 위한 자긍심을 갖고 성실하게 분단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당연히 있었어야 합니다. 그것을 대표하는 인물이 백범 김구 선생입니다. 오늘날 누가 이승만 박사를 민족지도자로 생각합니까.”
이 박사와 김구 선생의 비교는 수많은 논문이 나올 수 있는 주제이지만 다음 질문을 위해 짧은 문답으로 끝냈다.
신용하 원장은 필자와 사진기자에게 2002년 백범학술원이 펴낸 ‘백범일지’를 한 권씩 선물로 주며 “동아일보 이야기가 나온다”고 말했다.
백범이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虹口) 공원 의거로 일제의 현상금이 붙어 도피 생활을 하는 동안 가족은 상하이(上海)에서 끼니를 제대로 못 잇는 고통을 겪었다. 백범의 모친은 밤이 이슥해지면 야채상의 쓰레기통을 뒤져 버려진 배추 겉대를 골라 찬거리로 삼았다. 중국에서 먹고살기가 어려워지자 모친은 손자(김신)를 데리고 인천항을 통해 귀국했다. 인천에서 여비가 떨어진 모친은 동아일보 인천지국에 찾아가 사정 이야기를 했다. 인천지국에서는 서울 갈 여비와 차표를 사드렸다. 서울 동아일보 본사를 찾아가자 황해도 사리원까지 보내드렸다(백범학술원 간행 ‘백범일지’ 370쪽).
동아일보는 당시 백범 모친과 아들이 귀국했다는 기사를 사진과 함께 실었다.
한일협정 비밀문서 완전 공개해야
-정부가 30년을 훨씬 넘겨 묻어두고 있던 한일협정 관련 외교문서를 공개했습니다. 정부는 재판에서 질 수밖에 없으니까 공개했다고 하지만, ‘박정희 때리기’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한일협정 문서를 완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한일협정은 원래 미국이 동북아시아 지역에 중국·소련에 대항하는 반공의 띠를 두르기 위해 추진한 프로그램이었어요. 미국은 30년이 지난 1996년 1월1일자로 한일협정 관련 문서를 공개했어요.
미국 CIA 도쿄지부 책임자가 미국 대통령과 CIA 국장에게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한국측 대표가 일본 11개 재벌로부터 6600만달러의 기부금을 받았습니다. 한국은 그 돈을 주로 공화당 정치자금으로 사용했습니다. CIA 보고서에 이 뇌물 때문에 한일협정이 일본측 주장대로 체결된 것처럼 돼 있어요.
한·일간 기본조약을 체결하면서 대표단이 일본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은 심각한 잘못입니다. 국익을 훼손하는 협정을 체결하는 일이 다시 없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대외협정 때 상대국에서 뇌물을 받는 부패행위를 근절하기 위해 한일협정 비밀문서들은 완전 공개돼야 합니다.”
-일본군위안부는 정부가 1993년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생활안정지원법’을 만들어 보상하고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에 대해서도 국가보훈처에서 보상하고 있지요. 그러나 징병·징용 피해자의 경우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포괄적으로 배상금을 받아 떼어먹었다는 논리도 성립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한일 기본조약엔 한국정부가 포괄적 배상을 받은 범주로 징용·징병만 기록돼 있습니다. 협정문에 원폭 피해자와 일본군위안부는 빠져 있어요. 일본정부는 협약문에 없는 건 다 배상해줄 의무가 있습니다.
징병·징용 피해자들에겐 일본정부가 안 해주면 한국정부에서라도 보상을 해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무상으로 받은 3억달러는 경제협력 자금으로 포장됐는데 이번에 공개된 협정문을 보니까 징용·징병자 중 사망자와 부상자들에 대한 배상금이었어요.
정부가 떼어먹은 것이라기보다는 처음부터 징용·징병자를 찾아 배상해줄 의도가 없이 받아온 것입니다. 3억달러는 1966∼75년 10년 분할로 약 3000만달러씩, 그것도 현금이 아니라 일본 제품으로 받았습니다. 수리하는 부속품도 일본제를 사 가는 조건으로 들여온 것이에요. 포항제철과 고속도로 건설에 썼다고 하는 것은 상징적인 표현이고, 실제로는 거기에 물자가 조금씩 들어갔을 뿐입니다. 포항제철은 배상금이 아니라 대부분 차관과 내자로 건설됐습니다.”
1996년 독도연구보존협회 창립
-일본 외무성 아시아 국장이 협상과정에서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다. 폭파시켜 없애버리면 차라리 문제가 없을 것이다”고 발언했는데요.
“한일협정 이전에는 평화선이 존재했어요. 평화선은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전제에서 독도와 일본 오키시마(隱岐島) 중간에 그어졌어요. 독도를 폭파해버리면 울릉도와 오키시마의 중간에 선이 그어져야죠.
1999년 한일 어업협정 때는 한국정부가 배타적 경제수역(EEZ)의 기점을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로 잡았어요. 그리고 독도를 한일 공동관리 수역이라고 하는 중간수역 안에 포함시키는 우를 범했죠. 한국이 후퇴한 겁니다. 이제 일본은 ‘독도를 폭파하자’는 소극적 입장을 버리고 독도를 뺏으려는 적극적 공세로 나오고 있습니다.”
1994년 유엔에서 자국 영토를 기점으로 200해리까지의 수역을 EEZ로 규정하는 신해양법이 공포됐다. 일본은 1996년 2월 내각회의에서 독도를 일본 EEZ의 기점이라 발표하고 울릉도와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명)의 중간선을 한일 양국의 EEZ 구획선으로 하자고 한국에 제안했다.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는 외교 공세에 놀라 독도수호를 표방한 단체가 여럿 생겨났다.
평생을 민족문제 연구에 천착해온 신용하 백범학술원장.
-1999년 한일 어업협정에서 독도를 중간수역에 넣은 것에 대해 비판이 나오니까 정부와 자문학자들이 영토·영해 문제가 아니고 어업만 다룬 것이라고 변명했는데요.
“국민을 속였다고 할 수 있어요. 새 어업협정 제1조에 ‘대한민국과 일본의 EEZ에 적용한다’고 돼 있어요. 표제는 어업협정인데 내용은 EEZ를 규정했습니다. EEZ는 자기 영토를 기점으로 양쪽이 합의하는 중간선을 택하는 것인데 우리는 울릉도가 기점으로 돼 있고 일본은 오키시마가 기점입니다. 오키시마에서 35해리, 울릉도에서 35해리를 넘는 지역을 한국은 중간수역이라고 부르고, 일본은 한일공동관리수역이라고 합니다. 독도는 그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입니다. 1951년 연합국과 일본이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는 독도 명칭은 없고 울릉도만 있어요. 그럼에도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이기 때문에 당연히 한국 영토가 되는 거죠. 새 어업협정에서 울릉도는 한국 EEZ 수역에, 독도는 중간수역(한일공동관리수역)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라고 하는 해석의 근거를 새 어업협정을 통해 부정한 측면이 있습니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가끔 이상한 고지도를 들이대지요. 대마도(對馬島)가 우리 영토라고 주장할 근거가 되는 고문서와 고지도도 많지 않습니까.
“신라 실성왕 때 대마도에 해적이 발호하니까 일본이 군대 주둔을 허용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어요.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쓴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나오죠. 일본 군영을 근거로 차츰 일본인이 늘어나 일본 땅으로 돼 갔어요.
세종대왕 때 이종무 장군을 보내 영토 회복을 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어요. 대마도에 일본인만 살고 있고 저항이 심해 망설이다가 그냥 철군했습니다. 고려 말, 조선왕조 초에는 일본 사람들이 이주해 뿌리를 깊이 내렸습니다. 대마도가 한국 영토라는 증거도 나오고, 일본 것이라는 증거도 나옵니다. 그러나 독도는 일본 영토라는 증거가 고문헌에 한 건도 안 나오죠. 고문헌이 150∼200건 발굴됐는데 모두 한국영토임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신 회장은 최근 김학준(金學俊) 동아일보 사장에게 독도연구보존협회 회장직을 넘겨줬다. 김 사장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저서를 펴냈고 일본어 번역판도 나왔다.
“동아일보는 새 어업협정 체결과정에 민족적 시각으로 기사를 썼습니다. 또 작년에 ‘우리 땅 우리 혼(魂) 영토분쟁 현장을 가다’라는 시리즈에서 독도를 특집으로 다뤘습니다. 독도 문제에 큰 업적을 갖고 있는 동아일보사와 김학준 사장에게 민족 영토를 지키는 중대한 업무를 맡겨 드리게 된 거죠. 김 사장은 독도에 관한 저술뿐 아니라 논문도 여러 편 썼어요.
독도연구보존협회가 새 어업협정에서 독도가 중간수역에 들어가는 걸 맹렬히 반대해 정부 탄압을 받았어요. 일개 학자보다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권익과 얼을 지켜온 동아일보사의 사장이 맡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친일파 토지는 ‘매국의 장물’
-친일파 후손들의 땅 찾기 소송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가끔 승소 사례도 나옵니다. 이런 판결에 고무돼 새로 소송을 내는 사람도 있고…. 국민감정으론 용납하기 어렵죠. 신 원장께선 ‘친일파의 토지는 매국(賣國)의 장물(贓物)’이라고 규정하던데요.
“일본은 1905년(을사늑약)부터 1910년(한일강제합방)까지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정치자금을 엄청나게 뿌려 친일파를 양성하고 매수했습니다. 이완용, 송병준은 본래 재산이 없던 사람입니다. 이완용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양자로 들어가 집 한 칸밖에 없었어요. 송병준은 헌병 보조원이었습니다.
병탄(倂呑)에 협력한 사람들에게 일본 작위와 은사금을 주겠다는 조항이 1910년 강제합방 조약에 들어 있어요. 이에 따라 체결 직후 대대적으로 은사금을 뿌렸어요. 지금 개념으로 보면 정치자금이죠. 1912년에 2차로 또 뿌렸습니다. 막대한 자금이었어요.
일제는 1910∼18년 토지조사사업을 벌였습니다. 관청에 문서가 없는 토지는 전부 조선총독부 소유지로 만들었어요. 국토의 절반이 넘습니다. 이것을 은사금을 받은 사람들에게 저렴하게 불하했습니다.
조선의 토지를 빼앗아 친일파들에게 팔아 정치자금으로 뿌린 은사금을 회수한 거죠. 친일세력은 전부 대토지 소유자가 된 것입니다. 조상 때부터 내려온 대지주와는 다르죠.
은사금이 뭡니까, 매국의 대가 아닙니까. 1948년 반민특위 때 1급부터 5급까지 처벌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친일파 1급 대상자의 재산은 전부 국가가 몰수하도록 했어요. 이완용, 송병준 같은 1급 친일파의 토지는 반민법이 그대로 집행됐더라면 그때 환수됐을 겁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49년 반민특위를 해산하는 바람에 법이 집행되지 않은 거예요.
오늘의 관점에서 친일 진상규명을 다시 해 특별법을 만들고 1급 친일파들이 일제로부터 받은 땅을 국가가 환수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다시는 매국의 대가로 자산을 축적하는 매국사상이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죠.
친일파 대지주는 국가 재산을 도둑질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후손들은 그런 부끄러운 재산을 국가에 돌려주고 새 출발해야 합니다. 다시는 민족반역 자금이 손자나 증손자에게 상속돼 세세손손 부귀영화를 누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법과 제도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반민특위법 취지 계승
소설가 복거일씨는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라는 책에서 친일파들을 변호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조선총독부로부터 식민통치정책에 협조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사람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일본의 식민통치는 조선에서 특히 무자비하고 철저했다.’ 결국 당시 조선인은 대부분 ‘친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극악한 몇몇 외에는 덮어두자는 것이다. 신 원장의 반론을 들어보자.
“친일 진상규명은 자발적, 적극적으로 일제에 협조한 사람들 중 악질적인 사람만 골라 하자는 것입니다. 반민특위법에 나온 취지대로 하는 거예요. 반민특위 위원장과 구성원 대부분이 독립운동가였음에도 적극적인 악질 친일파만 단죄하고 개인의 구명(救命)이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마지못해 끌려다닌 사람은 친일파가 아니라고 규정했어요. 창씨개명도 강요당한 것이기 때문에 친일행위가 아니라고 규정했습니다.
친일파가 다수 생존해 있는 상황에서 1000명 정도만 처벌하려 했습니다. 1000명을 뽑아 분류해보니 약 300명이 타계했고 700명 정도가 남아 있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고문한 형사와 헌병보조원처럼 악질적인 사람들만 골라내 당시 3000만 국민 가운데 700명만 처벌하려고 했으니까 극소수인 거죠.
복씨도 제대로 알고 나면 찬성할 거예요. 극소수의 적극적인 친일파만 처벌하자는 것은 같은 뜻이죠.”
‘식민지 근대화론’은 어불성설
-반민특위 당시 생존했던 700명 친일파도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떴습니다. 아버지의 죄를 아들에게 물어서는 안 되는 것이 근대법의 정신입니다. 할아버지나 증조부가 저지른 죄과 때문에 후손이 연좌제 성격의 피해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친일 진상규명은 1948년의 700명에 한해 역사적으로 못다 정리한 걸 50년 후 다시 정리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악질적인 친일파 본인에 한정되는 거죠. 연좌제와 관련 없어요. 친일파 조상을 거꾸로 애국자로 만들려고만 않으면 돼요. 가까운 역사이고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에 애국자인지 친일파인지는 바로 드러납니다.
700명 친일파의 후손도 자신의 책임과 무관한 조상의 일이니 그냥 당당하게 살면 됩니다. 스스로 연좌제에 묶여 없는 사실을 날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친일파 이름으로 남아 있는 자산을 환수해야 하는데, 법이 없어요. 조사활동을 마치고 특별법을 제정해 국가가 환수해야 합니다. 그러더라도 자손에게 피해가 없어요. 지금도 자손이 권리행사를 못하고 여러 형태로 묶여 있으니까요.”
일제가 후진 조선사회의 경제를 발전시키고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일본과 미국 학계에 뿌리내리고 있다. 한국에도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지하는 사람이 간간이 있다. 복거일씨도 식민지 조선의 인구가 1910년부터 1942년까지 94.4% 늘어난 사실을 거론하며 “식민통치의 본질적 제약과 폐해에도 불구하고 식민통치 아래서 조선 사람들은 상당히 잘살았다”고 주장했다.
“식민지 인구가 늘었으니 잘살았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입니다. 과거 총독부가 만든 홍보자료를 근거로 그런 주장이 나오지요. 한일협정 이후 일본과 국교가 수립된 다음 일본 연구비가 국내로 흘러들어왔어요. 그 돈을 받아 연구비로 쓴 일제 강점기 논문이 꽤 있어요.
객관적으로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들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극심하게 수탈당했어요. 농업생산이 20% 증가하면 일본으로 가져가는 건 30∼40%로 늘어났기 때문에 조선 백성은 농업생산이 늘수록 배를 곯았죠. 1945년 한국인 1인당 미곡 소비량은 1910년에 비해 거의 50∼60%로 떨어졌습니다. 착취당했다는 증거죠.
그런데 왜 인구는 늘어났는가. 서양의학의 도입 때문이죠. 19세기 정조시대에 조선의 인구가 약 800만명 정도였습니다. 강제합방 때 약 1700만명 정도였어요.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난 거죠. 갑오개혁을 통해 서양의학이 도입되고 종두법이 실시됐습니다. 서양의학 덕분에 유아 사망률이 크게 줄어 1894∼1910년의 짧은 기간에 인구가 비약적으로 늘었어요. 일제 강점기에도 이 추세가 지속됐죠.
일제가 수탈을 안 해 인구가 증가한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좀 지났다고 총독부 홍보자료를 일본 우익의 선전대로 해석하는 것은 과학적인 연구태도가 아닙니다. 사실과는 크게 다른 주장입니다. 일제 강점 36년 동안 한국은 수탈당했고 국가발전이 근본적으로 저지당했어요. 한국이 1910년 일제 식민지가 되지 않고 독립국가로 1945년까지 갔다면 5배, 10배는 더 잘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 할아버지로부터 일제 때 공출을 당해 초근목피로 연명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란 세대에게는 복씨의 주장이 다소 황당하게 들린다. 70, 80대 노인 중에는 일제의 공출을 피하기 위해 벼 가마니를 땅속에 파묻어 파랗게 싹이 난 벼를 도정한 밥을 먹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도 있다.
‘식민지 수탈’을 몸으로 겪은 세대가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 정신대로 끌려가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할머니들이 생존해 있는데 ‘일본국이 동원한 정신대는 없었다’는 것은 일본 우익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신용하 원장은 짙푸른 바다가 보이는 제주시 화북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두 달 만인 1945년 6월 일본 오키나와에 진주한 미군이 곧 제주도에 상륙하면 격전지대가 될 것이라며 주민소개령이 내려졌다. 신 원장 부친은 식솔을 데리고 전북 남원군 운봉면으로 이사했다. 지리산 노고단 아래 깊은 산골이었다. 정감록 비결(鄭鑑錄 秘訣)에 재난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十勝之地)라고 기록된 고장이다.
용하 소년은 냇가에서 가재를 잡다가 면사무소에 다녀오던 어른들로부터 광복이 됐다는 첫 소식을 들었다. 광복을 기뻐하며 마을 사람들이 호미씻이 농악을 하는 모습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나중에 농촌공동체 연구 자료가 됐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아버지는 실의에 빠져 소년가장 노릇을 했다. 중학교에 1등으로 합격했지만 가난과 전쟁 때문에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6·25전쟁이 터지자 십승지지라는 운봉도 빨치산과 토벌대의 치열한 전장이 됐다. 아버지는 또 다른 십승지지인 논산군 두마면 신도안 계룡산 자락으로 이사했다. 배우고 싶은 열망을 억누를 수 없던 소년은 1955년 가출해 전국 각처를 돌다 제주상고에 편입한 뒤 서울대에 진학했다.
“소년기에 전쟁의 참상을 아주 생생하게 목격하고서 의문이 평생 떠나지 않았어요. 왜 우리 민족은 동족끼리 살육을 하는가. 대학에 가면 이걸 꼭 공부해보리라고 결심했죠. 그래서 민족문제를 전공하게 된 거죠. 민족은 사회학의 연구주제입니다.”
관심주제는 시종일관 민족문제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사회학과 대학원에 진학했으나 1년 수료하고 경제학과 대학원에 재입학했다. 지도교수이던 최문환 전 서울대 총장의 영향이었다. 1965년 28세에 경제학과 전임강사가 됐다. 1968년 하버드대 문리과대학원 동아시아학과(박사과정)에 들어가 역사학 경제학 사회학을 폭넓게 공부했다. 9년 동안 경제학과 교수를 하다가 1975년 서울대가 관악산으로 이전할 때 대학시절 전공인 사회학과로 돌아왔다.
“최문환, 이상백 두 교수님이 큰 영향을 주셨죠. 최문환 교수님은 약소국에서는 민족문제가 민족주의와 결합돼 있으니까 민족주의 공부를 동시에 하는 것이 좋다고 하셨죠.
이상백 교수님은 사회학자이자 역사학의 대가이셨습니다. 심층 연구는 반드시 원인을 캐야 하고 원인을 캐려면 역사적 고찰을 해야 합니다. 6·25전쟁이 왜 일어났는가. 남북분단 때문이다. 왜 분단이 됐는가.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해 연합국에 식민지를 전리품으로 줬기 때문에 분단이 된 것이다. 왜 일제에 강점당했는가. 우리나라가 19세기에 일제침략을 막아낼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19세기까지 민족문제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민족통일로 가는 길을 사회학적으로 공부하려 했어요.
19세기 민족과 일제 강점기 그리고 광복 후 민족문제를 평생 연구주제로 정했습니다. 그 결과 19세기는 주로 민족운동사, 일제시대는 자연히 일제침략사와 독립운동사를 연구하게 됐습니다. 광복 후 연구는 논문만 몇 편 써놓고 그만 정년이 돼 버렸어요. 민족문제를 연구하다가 독도자료를 발견했습니다. 어쨌든 학문분류상으로 사회학 경제학 역사학 세 분야를 포괄하게 됐지만 관심의 주제는 시종일관 민족문제였어요.”
신 원장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초대 소장을 역임했고, 1994년부터 3년 임기의 국사편찬위원을 세 차례 지냈다. 금성출판사가 출간한 교과서가 좌편향이라는 지적이 제기돼 서울대 박효종 교수를 위원장으로 하는 교과서 포럼이 발족됐다. 신 원장은 현대사 바로쓰기 운동을 함께하고 있다.
“좌파의 강점은 홍보이고 우파는 자금이 우세해요. 연구나 교과서는 실증적이고 과학적이어야 합니다. 제대로 된 학자가 썼다면 그렇게 안 썼겠죠. 운동세력이 쓴 교과서는 채택률이 낮아질 겁니다. 과학적·실증적으로 쓴 연구결과에 밀리게 돼 있어요. 심각하게 걱정할 필요 없어요. 검인정 교과서 채택제도가 얼마 안 됐거든요. 시간이 지나면 교정됩니다. 교과서 포럼이 나왔다는 것도 교정하려는 움직임이 아니겠어요.”
신 원장은 보훈처 자문기구인 독립유공자공적심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좌우 대립의 비극적 역사 때문에 독립운동사 한쪽은 일부러 묻힌 측면이 있다”고 언급한 이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공적심사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독립유공자공적심사위원회는 1차 심의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키로 했다.
-우리 사회의 이념적 대립이 격화되고 있습니다. 8·15 행사도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 치르는 실정이죠. 좌파 계열에 포상을 하면 강성 우파 쪽에서 대한민국의 근본을 부정하는 일이라고 반발하지 않을까요.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한 공산주의자는 포상이 안 됩니다. 6·25전쟁 때 북한에 협력한 공산주의자들은 독립운동 경력이 있더라도 포상에서 제외됩니다. 북한에서 혁명열사로 포상한 분들도 제외합니다. 여기서는 북한에서 포상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로서 일제시대 또는 광복 직후 타계하신 분들이 포상을 받게 됩니다. 기준이 합리적입니다. 독립운동 공적이 뚜렷하고 대한민국의 건국과 발전을 방해하지 않은 조건을 충족시켜야 포상이 됩니다.”
자칫 역사의 뒤안에 묻힐 뻔했던 의사 열사들이 일제 강점기의 동아일보 기사로 그 공이 밝혀져 서훈을 받은 일이 많다. 신 원장은 2003년 ‘의병과 독립군의 무장독립운동’이란 저서를 펴냈다. 신 원장은 한 인터뷰에서 “동아일보는 독립운동사 연구에서 가장 기본적인 자료다. 1920년대 무장독립운동에 대해서는 동아일보가 가장 착실하게 보도한 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교과서는 실증적, 과학적이어야
“동아일보가 1920년 4월1일 창간됐는데, 그 무렵에 무장독립운동이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발했어요. 무장독립운동에 관해서 동아일보만 상세히 보도했어요. 동아일보는 민족지로 창간됐고, 다른 한 신문은 대정친목회라는 친일 상공인들이 만들었죠. 또 다른 한 신문인 시대일보는 일본이 친일파들을 시켜서 만든 거예요. 1920년대 청산리 독립전쟁 같은 무장독립운동 기사가 동아일보에만 실렸어요. 당연히 동아일보가 독립운동 공적심사의 중요한 자료가 되죠.
1924년경엔 조선일보도 민족지화합니다. 그때부터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다함께 중요 자료가 됩니다. 시대일보도 중앙일보로 이름이 바뀌면서 민족지가 돼요. 무장독립운동과 독립운동의 국내진입 작전이 격렬하던 시기에는 동아일보가 독립운동을 가장 많이 보도하고 대변했어요.
1920년 10월부터 일본군이 독립군을 무력으로 토벌하려고 간도 침입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동아일보를 그대로 두면 군사작전 사항이 전부 신문보도를 통해 알려질 것이기 때문에 무기정간 조치를 취합니다. 같은 해 9월25일 ‘제사(祭祀)문제를 재론하노라’라는 사설에서 일본 황실의 상징인 ‘거울(鏡)’ ‘옥구슬(珠玉)’ ‘칼(劍)’ 등 3종 신기(神器)를 모독했다는 트집을 잡았죠. 일본군 자료를 보면 그것은 순전히 구실이고 간도의 독립군 토벌을 위해 동아일보 보도를 막은 것입니다. 그 작전이 끝난 다음에 복간시켰죠.”
동아일보 호외와 김일성
북한의 보천보 전투기념관엔 동아일보 1937년 6월5일자 호외가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전시돼 있다. ‘함남 보천보를 습격, 우편소 면소에 충화(방화), 어젯밤 200여명 내습, 김일성 일파로 판명’이라는 큰 제목이 붙은 호외다. 작가 이호철씨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 북한 안내원이 “그 시기에 상당히 용기 있는 보도였다”고 설명해줬다고 한다.
“1936년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조선총독으로 부임해 황국신민화정책이라는 이름으로 한국민족말살정책을 강화했습니다. 신문 잡지에 대한 통제가 강화됐죠. 독립군도 상당히 퇴조해 한국 민족이 의기소침하던 때였어요.
이 시기에 동아일보가 동북 항일연군 소속 김일성부대 보천보 주재소 습격사건을 호외로 보도했죠. 연속으로 서너 차례 후속보도를 했어요. 다들 놀랐죠. 우리 국민은 김일성이 20대 청년인 줄 모르고 홍범도 장군이나 이청천 장군 같이 나이 든 장군인 줄 알고 온갖 루머가 퍼졌습니다. 동아일보가 김일성이란 이름을 처음으로 큰 활자를 사용해 호외 제목으로 뽑아놓았으니까.
광복 후 북한에서 김일성이 떠오르는 과정에서 1937년 6월5, 6, 7일자 동아일보 보도가 큰 역할을 했어요.”
-그때는 독립운동을 좌우 구분 없이 하나의 틀로 볼 때가 아니었습니까.
“동아일보는 독립운동을 고취하고 의기소침해진 한국 민족을 격려하기 위해 용감하게 보도한 것이죠.”
신 원장은 “김일성 이야기는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극우세력이 공격하면 귀찮다는 것이었다.
신용하 원장은 젊은 시절부터 밤 11시 이전에 연구실을 나서본 적이 없을 만큼 연구에 진력해왔다.
동아일보는 1936년 8월23일자에 베를린올림픽 우승자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실어 편집국장과 기자들이 구속되고 무기정간을 당했다. 다음해 6월2일 복간된 지 이틀 만에 또 보천보 사건 호외로 ‘대형사고’를 친 것이다.
신 원장은 동아일보의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살 사건에 관해 “총독부가 소설과 시까지 검열하는 상황에서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게재한 것은 큰 의미가 있는 저항운동”이라고 말했다.
-36년 일제 강점기에 김구 선생처럼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거나 만주나 연해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국내에 남아서 소극적으로 저항하며 독립의 기틀을 다지는 운동을 한 사람들도 있죠.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거나 문맹퇴치 같은 문화운동을 편 사람들의 공과가 제대로 평가돼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물론입니다. 일제는 서양 제국주의와는 다른 식민지 정책을 폈어요. 서양 제국주의는 식민지에서 사회경제적 수탈만 할 뿐 그 민족을 동화시키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처음부터 한국인의 민족적 특성을 소멸시켜 일본인화한 다음에 차별받는 2등, 3등 국민으로 만들려고 했어요.
초기에는 동화정책, 다음에는 내선일체(內鮮一體), 그 다음엔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이라는 구호로 민족말살정책을 폈습니다. 민족의 문화, 언어, 한국식 성명, 한국 역사, 민족의식을 말살하려는 기도가 식민지 정책의 골간을 이루죠.
예컨대 조선어학회처럼 한국말과 글을 연구하는 운동, 농촌진흥운동, 민족문화를 지키려고 하는 운동, 한국말로 소설과 시를 쓰고 예술작품을 만드는 운동, 한국말로 신문을 발행하고 계몽하는 언론운동, 실력양성운동, 교육기관 설립 운영 등은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에 저항한 민족운동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독립운동의 한 유형입니다.
서양 식민지와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국내에서 벌인 이러한 운동이 아주 중요한 독립운동입니다. 일제 강점기를 제대로 연구한 학자들은 이것이 얼마나 귀중한 독립운동인지 잘 알고 있어요. 때문에 일본도 끝까지 동화시키지 못 했습니다. 일제는 이러한 국내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을 조작해 학자들까지 감옥에 넣었죠.”
민족사 떠난 세계사는 추상사
한양대 임지현 교수는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라는 책에서 민족주의 사학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민족주의 사학이 민족의 형식을 강조한 나머지 민족을 초역사적인 자연적 실체로 부당 전제함으로써 역사 연구의 인식론적 가치를 훼손하고 역사학을 신화의 영역으로 끌고 갔다. 연구자들의 인식 지평을 고정된 민족적 형식에 가둠으로써 현재와 미래에 열려 있는 건강한 실천적 지향을 굴절시켰다.’(서문)
‘민족사의 특수한 경험을 토대로 보편사적 전망을 획득하는 길은 바로 세계사적 관점과 민족사적 관점을 접목시키는 데 있다. 지금까지 한국의 역사학계에서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이러한 과제는….’(58쪽)
“그런 주장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945년까지의 세계 역사는 민족사로 존재했습니다. 민족과 국가를 경계로 하면서 교류하는 역사예요. 경제사, 사회사는 세계사적으로 사물을 보는 건데 그런 것들은 추상화된 역사였어요. 역사의 본질은 민족사와 민족사의 교류와 합침이고 점차 세계사적 측면이 강화되는 추세죠.
1970∼80년대의 역사는 어떠한 역사인가. 민족사가 실체이고 민족과 국가의 발전을 추구하면서 세계평화를 실현하려는 노력이 주류가 되는 역사지요. 역사학자들이 다루는 세계사는 민족사를 떠나서는 추상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임지현 교수가 민족사에 대해 비판한 대로 미래 언젠가는 그렇게 될는지 혹시 모르겠는데 적어도 오늘날까지는 맞지 않아요. 제가 사회사, 경제사, 사회경제사, 사상사를 해봤기 때문에 잘 인식하고 있어요.”
신 원장의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연구’(1993년)는 동학혁명을 앙시앵 레짐(구체제)의 해체라는 시각에서 조망한 역작이다. 신 원장은 실증적 자료를 발굴해 1차 농민전쟁이 고부(古阜)가 아니라 무장(茂長)에서 시작됐고 2차 농민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1895년 2월 대둔산 전투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신 원장이 찾아낸 대둔산 전투 이야기는 대하소설의 마지막 장면처럼 처절하고 감동적이다.
-전봉준이란 인물을 어떻게 평가해야 합니까.
“전봉준 장군은 근대 한국이 낳은 영웅입니다. 당시 조선을 자주적으로 근대화하려면 프랑스처럼 앙시앵 레짐을 해체하고 신체제를 수립할 필요가 있었어요. 그런데 프랑스와 달리 공화국으로 나아갈 시민세력이 없었죠. 시민세력과 유사한 시민의식을 가진 지식인 세력은 개화세력이었죠. 1894년경에는 개화세력이 취약했어요. 기껏 100여명 정도였습니다.
앙시앵 레짐의 불합리하고 낡은 관행, 국가 발전 저해 작용, 농민수탈이 심해졌습니다. 농민들이 전 장군을 추대했습니다. 그는 서당 훈장으로 지식인이었죠. 결국 제1차 농민혁민운동을 일으켜 앙시앵 레짐을 붕괴시켰습니다.
개화파는 힘이 없어 단독으로는 근대로 가는 길을 닦을 수 없었습니다.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한 동학농민군이 1차 농민운동을 통해 구체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어요. 그걸 구실로 청군과 일본군이 상륙해 청일전쟁을 하는 틈새에서 민비 정권이라는 앙시앵 레짐의 마지막 정권이 무너지게 됩니다.
서울에서는 온건 개화파인 김홍집 일파가 정권을 장악해 근대식 개혁을 지속적으로 단행합니다. 우리나라 근대화의 개혁은 서양처럼 부르주아 혁명, 시민혁명에 의해 단선적으로 되지 않고 비교적 힘이 강했던 동학농민세력이 구체제를 해체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힘이 부족해 전라도에 지방정권을 만들었죠. 서울에서 시민세력을 대표하는 개화세력은 자기들의 근대지식을 가지고 갑오경장을 단행했습니다. 분업 분담을 하여 전근대 체제로부터 근대체제로 가는 대개혁을 완성했어요. 이 대개혁의 절반은 전봉준이 해낸 것이죠. 부수지 않으면 새로운 걸 만들 수가 없어요.
1894년 청일전쟁 기간에 일본 내각회의에서 우리나라를 보호국화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래서 1905년 을사늑약 10년 전인 1894년 가을쯤 반(半)식민지 보호조약이 이루어질 뻔했어요. 이러한 상황을 정확히 관찰하고 우리나라가 속국화되는 걸 막기 위해 일어난 것이 2차 농민전쟁이에요. 1차 농민전쟁 때는 희생이 없었지만 2차 농민전쟁에서 20만명의 동학군이 희생당했어요. 이 희생 때문에 일본군이 조선을 보호국화하지 못하고 1905년 러일전쟁까지 간 것이죠.
전봉준은 자기희생을 통해 앙시앵 레짐을 해체하고 일본의 보호국화 시도를 정면으로 공격해 파탄시킨 영웅입니다. 1894년 가장 어려울 때 단독으로 이걸 때린 사람은 전봉준뿐이었어요.”
구한말 개혁의 절반은 동학의 ‘작품’
-1차 농민전쟁이 왜 전국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전라도에서 주저앉게 됐습니까.
“동학이 다 일어선 게 아닙니다. 전봉준 지휘체계에 들어간 남접(南接)만 일어섰고 북접(北接)의 최시형은 오히려 반대했어요.
중앙정부의 재정 보급은 대부분 호남이 했어요. 다른 지방은 잉여 물산이 없어 겨우 자급자족했고, 호남 곡물이 배를 타고 서울로 들어와 재정을 움직였습니다. 호남에서 재정이 올라오지 않으니까 서울도 무너진 거죠. 전봉준은 기민하게 움직여 집강소 정권을 세우고 위로부터 개혁을 단행하죠. 집강소 개혁하고 서울 개혁을 보면 비슷한 게 꽤 많아요.”
백범 김구 선생도 18세 때 빈부귀천 차별이 없다는 동학 교리에 감동받아 동학에 입도해 해월 최시형으로부터 직접 접주(接主) 첩지를 받았다. 2차 농민전쟁 때는 선봉장이 되어 관군과 일군이 지키고 있던 해주성을 공격했다.
-곡창지대인 호남에 잉여생산물이 많았다는 이야기와 연결되는 질문인데요. 만석 이상 거두는 대지주가 호남지방에 가장 많았다죠.
“당연히 그렇죠.”
-호남지방 지주를 연구한 사람에게서 호남 지주에 두 부류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봉건적 사고에 빠져 주색잡기나 즐기다가 영락의 길로 들어선 지주와 시대의 흐름에 일찍 눈을 떠 산업자본화하고 애국운동을 벌인 지주로 말이죠.
“호남지방의 계몽 지주들은 국가에 기여한 바가 큽니다. 계몽 지주들은 한말부터 애국계몽운동에 자금을 많이 댑니다. 일제 말기까지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가장 많은 자금지원을 합니다.
반면 친일지주도 있죠. 친일지주들은 대개 주색잡기에 빠져요. 살아가는 재미를 거기서 찾는 거죠. 호남 지주는 계몽 지주와 친일 지주로 구분됩니다. 인촌(仁村)은 계몽 지주로 공헌이 많았죠.
호남지방은 생산력이 높아 잉여생산물이 많았고 그 여력으로 음악, 미술, 서도 같은 각종 예술을 꽃피웠습니다. 다른 지역은 잉여자본과 잉여경제가 부족해 예술을 뒷받침할 능력이 없었어요. 심지어 음식도 잉여생산물과 지주가 많은 호남에서 가장 발전했어요. 궁중 음식 다음에는 호남 음식이지요.
호남지방은 우리나라에서 보물과 같은 지대였어요. 부(富)의 원천이 호남과 직결돼 있고 또 모든 수탈의 손길이 호남으로 와요. 거기 가야 뺏을 게 많으니까. 그래서 호남에서 훌륭한 인물도 많이 났지만 끝없이 시달려야 했죠.”
-2차 농민전쟁의 승패를 가른 공주 우금치 전투에 전봉준 군대 1만명과 손병희 군대 1만명이 참여했는데 전봉준은 나중에 체포돼 사형을 당했죠. 그런데 손병희는 어떻게 살아남아 1919년 3·1 독립선언에서 33인 민족대표까지 될 수 있었습니까.
“손병희 부대는 북쪽 군대고 전봉준 부대는 남쪽 군대입니다. 남쪽 군대가 2개 부대로 나뉘어 하나는 전봉준이 지휘하고 다른 하나는 김개남이 지휘했어요. 각각 1만명 정도씩 거느리고 올라갔는데 김개남은 우금치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청주를 공격했어요. 손병희 부대도 우금치에서 열심히 싸웠지만 일본군 화력에 밀려 패전했습니다.
일본군은 포병과 보병을 합한 혼성부대였죠. 일본군은 토벌작전을 통해 동학군을 호남 남해안으로 몰아 몰살시키려 했어요. 일본이 조선을 병탄한 뒤에 동학군이 독립군 저항부대가 될 테니까 발본색원하려는 것이었죠.
전봉준은 금구까지 내려가 여러 차례 반격하다 실패하고 동학도가 꾸리던 전북 순창 어느 주막으로 숨어들었어요. 호남에는 동학군도 강했지만 지주세력도 강했어요. 민보군이라는, 머슴과 소작인들로 구성된 반혁명 군대가 있었습니다. 동학군이 우금치에서 패전하자 이 사람들이 나서 동학군 색출작업을 합니다.
술집 주인은 어느 시대에나 권력의 동향에 기민하거든요. 자기는 동학의 연락망인데 동학시대가 끝났으니 큰일났단 말예요. 자기가 살려고 민보군에게 연락을 했어요. 전봉준을 일본군이 잡은 게 아닙니다. 민보군이 총 들고 와서 포위해 잡으려고 하니까 뒷문으로 빠져나가다 잡혔어요. 민보군이 도망갈까봐 총 개머리판으로 전봉준의 발등 양쪽을 찍어 망가뜨렸어요. 전봉준 장군 사진을 보면 항상 들것에 타고 있는데, 이는 발이 상해 못 걸었기 때문이지요. 호남의 격렬한 계급분화 때문에 농민군이 편성돼 혁명운동의 주력부대를 만들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반혁명군도 막강해 전봉준이 잡힌 거죠.
손병희는 일본군에 밀려 내려가다 자신의 기반인 충청도로 유턴해서 올라갔어요. 충청도에 와서는 동학 지하조직이 있는 지역에서 해산을 했어요. 그래서 살아남았죠.”
인촌은 ‘계몽 지주’, 공헌 많았다
조선 후기 역사와 일제 강점기를 연구하자면 한문과 일본어는 필수 도구다. 신 원장이 대학에 다니던 시절엔 휴강이 잦았다.
한국어로 된 책이 많지 않을 때였다. 일본어를 익혀 전공을 불문하고 사서 읽었다. 동숭동 시절 서울대 앞 동대문과 종로 5가 일대에는 값싸고 알찬 일본 헌책이 많았다. 한문은 전임강사 시절에 한학자 조규철 선생을 모셔다가 사서(四書)와 역사서를 읽으며 공부했다.
얼마 전 사흘 동안 교육부총리를 한 이기준씨가 서울대 총장을 할 당시 신 원장은 교수협의회 회장이었다.
-이 총장이 사외이사 겸직, 판공비 과다 사용으로 물의를 빚다 교수협의회 이사들의 투표로 물러난 적이 있지요.
“이기준 총장의 판공비 과다 지출을 학생들이 문제삼자 이 총장이 교수협의회 의견을 들어 거취를 결정하겠다고 나왔죠. 교수협의회 이사들이 투표로 결의한 것이죠.”
신 원장은 눈이 부리부리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강의하듯 말한다. 역사적 사실을 말할 때는 연도 인명 지명 같은 고유명사가 많이 나오는데 ‘거 뭐더라’ 하고 더듬는 일 없이 줄줄 꿰었다. 기억력이 좋아 보였다.
친일행적 평가는 과학적 증거 있어야
-문화관광부가 ‘3월의 문화인물’로 일제 강점기의 여성소설가 강경애씨를 선정했는데요. ‘월간조선’이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범인의 내연녀로서 암살을 공모했다고 주장하는 기사를 썼어요. 이강훈 전 광복회장의 자서전에도 그러한 내용이 나오더군요.
“구소련에서 나온 자료에 따르면 적기단(赤旗團) 간부회의에서 민족주의 청년세력을 공산주의자로 만드는 데 김좌진, 이범석 장군이 방해가 된다고 보고 암살을 결의했습니다. 이범석 장군은 피신하고 김좌진 장군은 암살당했죠.
김좌진 장군 암살에 관여한 김봉환이 만주 일본 경찰에 체포됐을 때 강경애는 김봉환과 동거하고 있었습니다. 애인을 빼내기 위해 강경애가 위장 전향을 했을 가능성은 있어요. 여자는 애인이나 남편이 잡혀가면 물불 안 가리고 빼내려고 하니까.
강경애가 김좌진 장군 암살 모의에 가담했다는 것은 사료에 전혀 나오지 않아요. 김좌진 장군이 원체 거물이라, 일본 경찰은 김좌진이 변절해 영사관 경찰의 밀정이 되었다는 식의 루머를 조직적으로 퍼뜨립니다. 임시정부가 독립신문에 광고를 낸 적도 있어요. 김좌진 장군이 일제 경찰의 밀정이라는 소문은 독립운동 진영을 사분오열시키기 위한 일본 경찰의 모략 전술이니 속지 말라는 내용이었죠. 김좌진 장군은 죽는 날까지 독립운동을 했어요.
김좌진 장군에 관련된 부분은 소문에 근거해 글을 쓰면 안 됩니다. 강경애가 김봉환의 배후에 있었다는 것은 만주에서 떠돌던 소문입니다. 이강훈 선생 책에만 기록돼 있어요. 이강훈 선생은 당시 신민부 산하 초등학교 교사를 했어요. 독립군 세력의 핵심에서 일어난 일이나 공산당 비밀회의 내용을 잘 모르고 소문만 들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죠.
강경애가 김좌진 장군 별세 후에 친일행적을 보였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활동을 했는데 카프 맹원이 강경애의 밀고로 체포되거나 탄압당한 일이 없어요. 계속 카프활동을 했어요. 소문 듣고 쓴 걸 가지고 단정하면 안 됩니다.
역사에 이름을 올릴 만큼 뛰어난 재주를 가진 여성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돼요. 친일 행적을 평가할 때는 과학적 증거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 강경애에게 김좌진 장군의 암살 음모자라는 어마어마한 죄를 뒤집어씌우려면 명확한 증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4·3사건 재평가는 DJ의 업적
신 원장은 국무총리가 위원장인 제주도 4·3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민간위원으로 활동했다.
-제주가 고향인데 4·3사건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약 4개월 전에 남로당 제주도당이 중심세력이 돼서 일으킨 사건이에요. 단정 수립에 반대한 것이라 할지라도 무장봉기를 한 것은 잘못이죠. 그런데 군경이 과잉진압을 했어요. 가혹하게 재판도 없이 즉결처분을 통해 너무 많은 살육을 저질렀죠. 미군 자료에도 납득할 수 없는 과잉진압이라는 지적이 나와요.
경비대와 경찰만 동원한 것이 아니고 민간단체인 서북청년단을 투입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북한에서 당한 원한과 분노를 다 쏟아부었죠. 참혹했어요.
국민화합 차원에서 양측의 잘못을 모두 비판했습니다. 남로당원도 아니고 무장 빨치산도 아닌 민간인으로서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들, 부득이하게 밥을 지어주거나 식량을 제공한 사람들은 전부 명예회복을 시켜주는 법을 국회에서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어요.
억울한 죽음의 명예를 회복시킨 것입니다. 평화공원을 조성해 기념탑을 세워줍니다. 대한민국의 안정적 발전에 걸림돌이던 문제를 적절하게 처리했다고 생각해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으로 남을 겁니다.
4·3사건뿐 아니라 거창사건도 같은 방식으로 해결했고, 대구사건도 조사하고 있습니다. 건국 전에 일어난 일은 반국가행위로 볼 수 없어요. 건국 후에 일어난 일들도 억울한 양민은 전부 명예회복 시켜줘야죠.”
신 원장은 요즘 하루 한 시간 가량 걷기 운동을 하며 건강을 관리한다. 서울대 교수들의 평균수명인 86세(서울대병원 조사)까지 살아 민족과 관련한 몇 가지 주제를 선택해 연구를 계속하고 싶다고 말한다.
서울대 박명규 교수는 “1970∼80년대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공부하던 사회과학도와 역사학도들에게 6동 4층 신용하 교수 연구실에서 밤늦게까지 새어나오는 불빛은 학자의 자부심을 밝히는 등불이자 자신의 나태함을 일깨우는 채찍질이었다”고 회고한다.
신 원장은 젊은 시절부터 매일 아침 7시에 연구실로 출근해 밤 11시를 넘겨서 귀가했다. 지금은 자녀들이 출가하고 분가해 쓸쓸하게 집을 지킬 부인을 생각해 귀가시간을 저녁 7시로 당겼다. 동숭동 서울문리대 시절 학교 앞 찻집에서 이화여대 2학년이던 부인을 처음 만났다.
필자가 김구 선생 묘소와 기념관 전시실을 둘러보고 나서 깜박 두고 온 트렌치코트를 찾으러 갔을 때도 신 원장은 학술원 직원들을 퇴근시키고 혼자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