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대 권력의 병든 과거, 반드시 실체 밝혀야
- 특검 한두 사람이 어떻게 방대한 도청사건 수사하겠나
- 검사의 자의적인 사건 처리 막는 위원회 시스템 필요
- ‘과감하게 기소하라’는 말은 거대 권력 염두에 둔 것
- 검·경 수사권, 두 기관이 조금씩 불만족스럽게 조정할 것
- 열린우리당, 경제·민생 관련정책 입법역량 미흡
- 나는 들꽃처럼 자란 ‘범생이’
천 장관은 기억력이 비상하다. 3년 전 필자가 사설을 쓰다 확인할 일이 생겨 통화한 적이 있다. 천 장관은 “4월 초파일, 절에 가던 길에 황 위원의 전화를 받았다”고 말했다. 필자도 통화한 기억은 나지만, 뇌의 메모리 칩 용량이 작은 탓인지 통화한 날짜까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력을 과시하려는 걸까. 인터뷰어를 감동시키려는 걸까.
수많은 사람을 만나는 국회의원에게 가장 곤혹스런 질문은 ‘저 누군지 기억하시죠?’라고 한다. 천 장관은 그런 면에서는 다른 국회의원보다 고통이 덜할 것 같다. 그는 필자의 첫 저서 ‘법에 사는 사람들’(이영근·김충식·황호택 공저)을 읽은 이야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천 장관은 세 번째 법무부 장관이다. 강금실 변호사와 국정원으로 자리를 옮겨 요즘 도청 문제로 곤욕을 치르는 김승규 원장이 전임이다. 노 대통령이 검찰을 개혁하기 위해 보수적인 김승규 장관을 국정원으로 빼고 천 장관을 등용했다는 시각이 있다. 천 장관은 발탁 배경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답하지 않고, “노 대통령이 명시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언젠가는 법무부 장관 시켜주리라는 느낌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저 스스로 ‘장관 시켜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린 적은 전혀 없습니다. 저는 내심 하고 싶어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성격이 못 되죠. 다만 평소에 법무부 장관 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해보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지요. 이심전심으로 통했다고 할까요. 노 대통령께서 임명 직전에 오퍼(제의)를 하셨습니다.”
도청 수사과정 투명하게 공개
마침 필자와 인터뷰하는 날, 국정원이 ‘김대중 정부에서도 도청이 있었고, 휴대전화도 도청했다’고 발표했다.
-김영삼 정부의 도청은 공소시효가 지났지만 김대중 정부의 도청은 공소시효가 남아 있습니다. 정치적·사회적 파장이 만만찮은 수사가 될 것 같은데요.
“정보기관이 권한을 남용해 개인의 사생활과 통신을 들여다보고 정치적 약점을 잡은 행위는 민주 법치국가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분노를 금할 수 없습니다. 이번만큼은 어떤 의혹도 남기지 않고 국민에게 진실을 알려야 합니다. 수사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해 국민의 신뢰를 얻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진실을 규명해 처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개선책도 함께 마련돼야 하겠죠.”
-김대중 전 대통령측에서는 남북정상회담 비자금 수사에 이어 ‘DJ 두 번 죽이기’라고 반발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그 점이 염려됩니다. 그러나 국정원 내부조사를 통해 드러난 일이라 숨길 방법도 없습니다. 은폐하려 하면 파장이 더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정치적 고려 없이 진실대로 가는 것이 옳은 길이라 생각합니다.”
-김영삼·김대중 정부 시절의 안기부장과 국정원장 소환 조사도 불가피하겠군요.
“법무부 장관이 답변할 사안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건의 성격으로 보아 성역 없이 수사해야 할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국정원에 대한 압수수색도 해야겠지요.”
-국정원 불법도청 테이프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검찰은 내용 수사는 안하고 불법도청과 테이프 유출 경위만 수사하겠다고 합니다. 천 장관은 간부회의에서 ‘과거의 낡고 병든 구조와 문화가 종합된 구태의 결정판이다. 거대 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권력, 언론, 자본, 그리고 검찰, 안기부가 포함돼 있어 충격적’이라고 말했는데요. 그렇다면 내용도 수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인지요.
“매우 어려운 문제예요. 장관 취임할 때부터 거대 권력의 남용을 철저히 차단하는 것이 검찰의 임무라고 말했어요. 검찰에서는 ‘거악(巨惡)’이란 말을 사용합니다. 저는 중립적인 표현으로 거대 권력이라고 했죠. 검찰은 거대 권력의 횡포에 맞서 국가 기강을 바로 세우고 국민의 이익을 지키라는 임무를 위임받은 권력기관입니다.
정치권력이나 자본, 기업, 언론, 검찰 자신 또는 국정원 같은 정보기관이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거대 권력이죠. MBC 가 보도한 이른바 X파일과 공운영 국정원 전 도청팀장(미림팀장) 집에서 압수된 테이프 274개는 구분해야 합니다. X파일 검증이 끝났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보도된 내용대로라면 모든 거대 권력이 여기에 개입돼 있기 때문에 중대한 사건입니다. 검찰이 최선을 다해 실체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 기본 방침입니다.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도청 테이프 274개도 공개 수사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습니다. 국민이 거대 권력의 남용과 횡포에 대한 분노와 우려를 가지고 있으며, 이 기회에 거대권력의 문제를 확실하게 청산하고 가야 한다는 열망의 표현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적법절차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습니다. 독수(毒樹)의 독과(毒果)라는 증거법 용어가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독수의 독과’ 이론은 독이 있는 나무는 열매에도 독이 있으니 불법적으로 채집된 증거는 범죄 입증의 도구로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독수·독과 이론은 증거능력에 관한 법 논리로 수사의 단서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이번 사건을 둘러싸고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철학에서 대립각이 드러나 걱정되는 측면이 있긴 합니다. 검찰로서는 최선을 다해 거대 권력의 횡포를 차단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무작정 공개하고 수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274개 테이프 내용 공개엔 부정적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이 진실위원회를 만들어 불법도청 테이프의 공개 여부와 처리 방향을 결정하자는 방안을 내놓았지요. 통신비밀보호법에 저촉되는 위법성을 무력화하기 위해 상위법인 특별법을 만들려는 것입니다.
여당 소속 율사 출신 의원들 사이에도 특별법 제정에 관해 찬성과 반대가 반반이더군요. 여당 내부에서도 폭넓은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불법도청 내용의 공개가 ‘이중(二重) 위헌’이라고 썼습니다. 통신비밀과 사생활을 침해받지 않을 권리는 헌법에 규정된 기본권입니다. 진실위라는 민간기구에 사법적 권한을 부여하는 것도 위헌이기 때문에 이중 위헌이라고 보는 헌법학자들이 있습니다.
“제가 여당 의원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월급도 법무부에서 받습니다. 예전에 정치만 할 때는 말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당장 기자실에 가거나 기자와 통화를 할 수 있었지요. 법무부에서 일하면서 답답함을 많이 느낍니다.
지금 말씀하신 여러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검찰은 현행법 테두리 안에서 적법절차를 지켜가면서 진실을 발견하고 거대 권력의 남용을 차단하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보여야 합니다. 검찰이 내부 토론도 하고, 지혜를 모아 여러 요소를 잘 조화시킬 것입니다.
저는 X파일과 274개 도청 테이프는 다른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X파일은 이유야 어쨌든 언론에 그 내용이 공개돼 국민이 알게 됐죠. 그런데 274개 테이프는 공표되기 전에 검찰이 확보한 것 아닙니까. 274개 테이프의 내용을 공개하느냐, 또는 공개 여부와 관계없이 그것을 기초로 수사를 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X파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부정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검찰은 통신비밀보호법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지 않습니까.
“분명히 그렇죠. 검찰이 수사에서 법을 지키는 것은 당연합니다. 불필요하게 정치적 고려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검찰은 그야말로 법이 부여한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할 것입니다. 특별법 제정은 정당이나 국회가 할 일이지요. 저희로서는 ‘검찰이 잘할 테니까 맡겨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싶지만 국회가 입법적 해결을 도모한다면 지켜볼 수밖에 없죠.”
천 장관은 도청사건 수사에 대해 고심을 거듭했다.
“법적 절차에 따라야죠. 일단 테이프가 증거물로 압수돼 있는 상태 아닙니까. 범죄행위에 제공된 물건이라던가, 범죄행위의 결과로 생긴 물건은 몰수하게 돼 있는데, 공운영씨가 기소된다면 몰수 대상이 됩니다.”
그는 여기서 “공부한 지 오래돼서…”라며 한명관 홍보관리관(부장검사)을 돌아보고 “그렇죠?”라고 동의를 구했다.
“몰수된다면 형 확정 후에 폐기하면 되겠지요. 공소시효가 지났다든지, 범죄가 성립 안 된다든지 해서 기소를 못하게 되면 문제가 생기죠. 공운영씨가 274개 테이프를 적극적으로 누설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집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는 범죄가 성립되지 않을 수도 있지요. 하여튼 몰수 요건이 안 될 때는 골치 아픈 문제가 생깁니다.
기소를 못할 때는 소유자한테 돌려줘야 합니다. 원본 테이프라면 국정원 소유지만 복사해놓은 것이라면 복잡한 법 해석이 필요합니다.”
한 관리관은 “수사가 진행돼야 그 처리 방향이 결정될 수 있다”고 보충 설명을 했다.
“수사도 정치처럼 생물입니다. 법적 결론은 법을 대전제로, 사실을 소전제로 해서 3단 논법에 의해 내리는 법적 판단입니다. 사실관계 규명과 동시에 법률적 검토가 진행되면서 최종적으로 결론이 나리라고 봅니다.”
떡값 수수 의혹 검사 처리는 지켜봐야
-X파일에서 검찰 전현직 간부들이 삼성이 보낸 떡값을 받은 것으로 나왔는데요.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K1(경기고) 출신이 많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기자들 사이에 돌아다니는 명단을 입수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론된 해당 간부들이 실제 떡값을 받았는지에 관해 선입견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닙니다. 그래서 처리 방향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시기상조입니다.
다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검찰도 거대 권력입니다. 이번 기회에 새로운 각오로 검찰 권력이 남용되지 않도록 자정(自淨)하는 시스템을 확고하게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 장관은 전남 신안군 암태도(巖泰島) 출신이다. 목포 서쪽 25km 지점에 있는 암태도는 큰 바위와 암벽이 섬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주민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한다. 일제 강점기에 대표적인 소작쟁의가 일어났던 섬이다. 암태도 농민이 지주(문재철)에게 내는 소작료가 무려 7~8할에 이르렀다. 1923년 8월, 추수를 앞두고 600여 명의 농민이 목포경찰서와 법원 마당으로 몰려가 농성을 벌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농성장면을 이렇게 보도했다.
‘대지를 요로 삼고 창곡을 이불 삼아, 입은 옷에 흙이야 묻든지 말든지, 졸아드는 창자야 끊어지든지 말든지, 오직 하나 집을 떠날 때 작정한 마음으로 밤이슬을 맞으며 마른 정강이와 햇볕에 그을린 두 뺨을 인정 없는 모기에 물려가면서 그날 밤을 자는 둥 마는 둥 또다시 그 이틀 되는 초 9일을 당하게 되었다.’
소작 농민의 편에 섰던 ‘동아일보’의 잇단 보도는 이 사건을 전국적 차원으로 확대시켰고, 마침내 악질 지주와 그를 비호하던 일제 당국은 무릎을 꿇었다. 암태도에는 희성(稀姓)인 천(千)씨가 몇 집 있었는데 소설가 천승세씨(여류작가 박화성씨의 아들)는 천 장관과 9촌간이다. 아버지는 목포에서 공무원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암태도의 할아버지 밑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목포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비로소 부모와 한솥밥을 먹었다.
그가 목포에서 이름을 얻은 것은 목포고 3학년 때 치른 대입 예비고사에서 전국 2위를 하고 서울대 법대에 수석합격하면서다. 말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를 김대중 전 대통령, 프로기사 조훈현씨에 이어 목포가 낳은 3대 천재라고 불렀다.
그를 어린 시절부터 지켜본 이들은 천재라기보다는 ‘공부를 즐기는 타입’이라고 말한다. 목포고 동기생으로는 유선호 의원, 김성진 전 여성부 차관, 손정수 농촌진흥청장, 홍성무 서울고법 부장판사, 김충식 동아일보 논설위원 등이 있다.
천 장관은 검찰의 자정 이야기를 하다가 검사의 사건 처리에 관해 중요한 언급을 했다.
“한두 명의 검사가 자의적으로 사건 처리나 수사를 못하도록 하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예컨대 어느 경우 입건할 것인가, 입건한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사건 처리 기준이 명백해져야 합니다. 한 개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위원회 시스템으로 가야 합니다. 검찰 내부, 그리고 법무부 보고체계를 재점검해 검찰이 외부의 부당한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시스템을 반드시 만들려고 합니다.”
-검사 동일체의 원칙에 의해 중요 사건의 경우 부장검사, 지검장, 더 올라가 검찰총장 또는 법무부 장관의 지휘를 받지 않습니까.
“아까 거대 권력 이야기를 했는데 평범한 서민생활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조사할 때는 큰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런 사건에서 검찰이 위축될 리도 없고, 부당한 영향을 받은 일도 별로 없지 않습니까. X파일에 등장하는 검사들도 거대 권력이라고 부르는 자본력과 언론권력이 합쳐진 쪽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지요.
외부 거대 권력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지금도 그런 체계가 있긴 있어요. 각 청마다 공소심사위원회가 있습니다. 어떤 검찰청엔 내사에 착수할 때부터 심의하는 위원회도 있다고 합니다. 보고체계도 경우에 따라서는 간부가 부하 검사한테 부당한 영향력을 전달하는 통로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들을 차단하는 시스템이 필요하지요.”
한명관 관리관이 “대검에서 검찰정책자문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그 위원회는 외부 위원 중심으로 구성돼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공정한 장관직 수행 위해 민변 탈퇴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는 검찰이 청와대와 정보부, 안기부에만 자문했는데 지금은 외부인사들로 구성된 열린 자문을 하게 된다니 시대가 바뀌긴 바뀐 것 같다. 최근 정상명 대검 차장은 외부 정책자문위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안기부 도청 테이프 사건 처리에 관한 의견을 들었다.
-한나라당은 일부 검찰 간부들이 떡값을 받은 마당에 검찰에서 X파일을 조사할 순 없다며 특검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간부 한두 명이 그런 의심을 받고 있다고 해서 검찰 수사가 공정성을 확보할 수 없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특검이 아니더라도 검찰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오늘(8월5일) 국정원 발표를 보더라도 상당히 방대한 수사가 될 것 같습니다. 이런 수사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자원과 능력과 노하우를 갖춘 조직이 검찰입니다. 특검 한두 사람이 과연 이걸 해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천 장관은 19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에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1991년에는 민변 상임간사를 맡았을 만큼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신문에 천 장관이 민변을 탈퇴했다고 짤막하게 1단 기사로 났더군요. 강금실 변호사도 장관이 되고 나서 민변을 탈퇴했습니다만….
“아시다시피 민변은 그야말로 제 고향과 같은 존재죠. 어쨌든 민변은 변호사들 중에서도 일부 재야 법조인들이 모여 있는 조직이란 말이에요. 객관적·중립적이고 보다 공정한 입장에서 법무부 장관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탈퇴했습니다.”
천 장관은 노무현 대통령처럼 늦깎이 의식화 세례를 받았다. 대학시절까지는 공부만 하는 수석 인생이었다. 그저 밤을 새워 공부하는 것이 즐거운 모범생이었다.
그는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이듬해까지도 세상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 청춘을 내던질 마음은 없었다. 눈을 질끈 감고 책에 파묻혀 세월을 보냈다. 수원 전투비행단에서 공군 법무관으로 근무하던 그는 작가 황석영씨가 이동철(이철용 전 의원의 가명)씨의 경험을 토대로 정리한 르포 소설 ‘어둠의 자식들’을 읽고 뒤통수를 세차게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 즈음 한 군의관이 공안사건에 연루되는 일이 일어났다. 군 수사기관에서는 그 군의관이 지니고 있던 ‘페다고지’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 같은 금서(禁書)를 여러 권 압수했다. 천 장관은 운동권 학생이 대학 때 읽는 사회과학 서적을 뒤늦게 군 법무관 시절 압수서적으로 탐독했다.
책이 그의 생각을 바꾸어놓기 시작했다. 사법연수원을 3등으로 졸업해 판·검사를 골라갈 수 있었지만 변호사의 길을 선택했다. 그가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펴낸 선거용 책자 ‘꽁지머리를 묶은 인권변호사’에 따르면 “군사 쿠데타와 양민학살을 통해 권좌에 오른 대통령 명의로 된 임명장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판·검사를 지망하지 않았다(지금은 판사의 경우 대법원장이 임명장을 준다).
故 조영래 변호사가 사표(師表)
국제경제 업무로 이름이 높은 법률사무소 ‘김&장’에 들어간 그는 여기서 1970∼80년대 운동권의 전설 같은 인물 조영래를 운명적으로 만난다. 서울대 법대에 수석합격한 조영래는 65학번으로 그의 7년 선배다. 사회운동을 하다가 뒤늦게 고시 공부를 해 사법시험에 합격한 조영래는 사법연수원 재학 중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1971)으로 구속돼 1년6개월 동안 징역살이를 했다. 다시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돼 6년 동안 도피생활을 하다 1980년 ‘서울의 봄’ 때 사면복권되어 사법연수원에 복학했다. ‘65학번 수석합격자’와 ‘72학번 수석합격자’는 의기투합하기 시작했다.
“1981년 9월 김&장에 들어갔는데 조 선배는 사법연수원생 신분으로 아르바이트 리서처를 하고 있었어요. 이분은 여러 가지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조영래란 인물이 딱딱한 법률과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데 법률지식이 정말 탁월하더라고요. 이상주의적인 면과 더불어 사물을 현실적이고 합리적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조화를 이뤘습니다. 그리고 포용력 있는 태도에서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른바 운동권의 보통 사람들과는 인식이 많이 다른 것 같았습니다. 몰려다니면서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이야기를 그냥 그대로 전하는 사람이 아니었죠. 대인(大人)이었죠. 제가 사표(師表)로 삼은 인물입니다. 저도 김&장에 있으면서 단순히 비즈니스 변호사로 머물 수는 없으리라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연수원을 마치고 몇 달 동안 김&장에 그대로 있다가 1983년경 윤종현 변호사와 함께 시민공익법률상담소를 명륜동에 만들었습니다. 저는 1985년 10월 조 변호사와 서소문동에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를 차렸죠. 저는 조 선배만 졸졸 따라다니면 승리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일할 때마다 그가 문득문득 생각납니다. 그분이라면 이걸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생각해보는데 참 아쉽죠. 인생의 등대 같은 분이죠. 그분이 좀더 오랫동안 살았더라면 한국사회에 크게 기여했을 텐데….”
조 변호사는 권인숙양 성고문 사건 등 시국사건을 주로 맡아 법조 취재기자들의 주요 취재원이었다. 필자는 1980년대 초반 권양 사건 등을 취재하기 위해 그의 사무실을 자주 찾았다. 그때 조 변호사의 소개로 당시 천정배 변호사와 인사를 나눈 적이 있다.
취재를 가면 조 변호사는 사건 설명을 하며 줄담배를 피웠다. 집에서 나올 때 담뱃불을 하나 붙여오면 라이터가 필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체인 스모커였다. 조 변호사는 1990년 12월12일 폐암으로 세상을 떴다. 수많은 사람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필자는 담배를 태우며 조 변호사의 오비튜어리(부음기사)를 쓰다가 담뱃갑을 꺼내 쓰레기통에 던지고 하루에 두 갑씩 태우던 담배를 끊었다. 그날 필자가 쓴 오비튜어리는 조 변호사의 유고집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둘 수는 없습니다’(창비)에 실려 있다. 천 장관은 그날이 생일이었다고 한다. 조 변호사의 기일(忌日)이 생일인 사람과 그날 담배를 끊은 사람이 만나 인터뷰하는 것도 얽히고설킨 인연의 한 오라기일까.
한때 정치입문 거절
천 장관은 김&장에서 서양식 변호사의 윤리와 프로페셔널리즘을 체득했다. 거기서 배운 변호사의 직무는 클라이언트(고객)의 처지에서 유리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언제인가 김&장의 대표 김영무 변호사와 한국은행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명망 높은 변호사가 한국은행에 들어가 높은 사람을 만나지 않고 여상을 갓 졸업한 듯한 창구 직원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어 문의했다. 그는 김영무 변호사에게서 겸손을 배웠다.
그는 조 변호사가 1990년 세상을 뜬 뒤 재야의 김근태(현 보건복지부 장관)씨에게서 희망을 발견한다.
“제 관심은 좁은 의미의 정치보다도 한국사회 전체의 인권 신장, 사회정의, 민주주의의 발전, 보다 넓은 의미의 민주개혁에 있었지요. 1990년 이전에는 조 변호사와 일을 함께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조 변호사가 돌아가신 뒤 제가 보기에는 범(汎)재야에 있는 분 중에서 김근태 선배가 가장 올바른 노선을 가고 있고, 탁월한 역량을 갖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1990년대 김 선배가 감옥에 있을 때였죠. 한번 만나자는 연락이 와서 접견을 했습니다. 그 뒤로 힘닿는 데까지 그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정치를 하려는 뜻은 별로 없었어요. 민변 활동을 통해 인권 옹호와 사회정의 신장에 기여하는 변호사가 되려고 했어요. 사실은 훨씬 전부터 주변의 권유도 받고 출마하면 당선되기 쉬운 지역 공천을 받을 뻔했는데 거절한 적이 있습니다.”
민변 활동을 하던 천정배 변호사는 1994년 김근태씨가 주도하던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에 참여해 이 단체의 사무총장을 맡았다. 1995년 2월 김근태 의장이 방용석(근로복지공단 이사장)·김영환(전 의원)·김희선(현 의원)씨와 함께 민주당에 들어갈 때도 그 대열에 합류하지 않았다.
천 장관은 목포가 고향이어서 김대중씨 주변 인물과 자연스럽게 알고 지냈다. 고교 및 대학 선배인 한화갑 의원과는 한때 강남 삼호가든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살았다. 김대중씨가 1995년 8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정치를 해보자고 권유했을 때,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와 개혁의 진전을 위한 관건이라는 단순한 생각에서 정치에 입문했지요.”
그는 1992년 민변 상임간사를 마치고 변호사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민변 회원 가운데 마음에 맞는 임종인(현 의원)·이덕우(민주노동당 인권위원장) 변호사와 사무실을 차렸다. 한글 이름 보급 활동을 하는 배우리씨가 ‘해마루’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1993년 초 노무현 변호사가 ‘꼬마’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에 당선되면서 사무실을 부산에서 서울로 옮기려고 했다. 부산에서 문재인(현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관) 변호사와 사무실을 함께 운영하던 노 변호사는 서울로 올라와 해마루에 들어왔다. 해마루는 공증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전해철(현 청와대 민정비서관) 변호사와 박세경·장완익 변호사를 더 불러들였다. 민변 변호사들이 만든 해마루가 참여정부에서는 권력의 산실이 됐다.
권력의 산실, ‘해마루’
-김승규 전 법무부 장관은 중요 사건에서 무죄가 나왔거나 무죄율이 높은 검사는 인사조치하겠다고 강조했는데요. 천 장관은 ‘검사가 무죄 판결을 두려워해 반드시 처벌돼야 할 사람이 법망을 빠져나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무죄율에 연연하지 말고 좀더 과감하게 기소하고 법원의 판단을 받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던데요.
“김 전 장관과 제가 한 말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무죄에 연연하지 말고 과감하게 기소하라는 말은 사실 거대 권력을 염두에 두고 했습니다. 거대 권력의 눈치를 보거나 영향을 받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이목을 끌고 중요한 이슈에서 법률적으로 유죄 같기도 하고, 무죄 같기도 할 때는 설령 결과적으로 무죄가 된다 하더라도 대법원의 판결을 받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검사가 가혹행위를 하거나 적법절차를 어겨가면서 수사하고 무리하게 기소해 무죄 판결이 나도 괜찮다는 뜻은 아닙니다.”
-박주선 전 의원은 세 번 기소돼 세 번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검사 출신에 청와대 법무비서관과 국회의원까지 지낸 사람이 이렇게 억울한 꼴을 당할 지경이면 일반 서민은 검찰 권력에 공포를 느끼게 되죠.
“박주선 전 의원은 16대 국회에서 같은 당 의원이어서 잘 압니다. 그분이 세 번씩이나 고초를 겪은 데 대해 저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사건 자체를 제가 논평하기는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하여튼 밖의 여론까지 포함해 외부의 부당한 영향을 받아서 수사나 사건 조사에서 소신과 달리 부당하게 처리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시스템을 개혁하려고 합니다.
검찰이 수사관 내지 소추관으로 일하다 보니까 적극적으로 진실을 발견하고 범죄를 처단하기 위해 피의자 또는 피고인의 방어권에 대한 고려를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우리가 경계해야 합니다.
피고인의 방어권 신장은 법무부와 검찰의 고유 업무입니다. 그런 문제에 대해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태도로 임해야 합니다. 자백 위주의 수사 관행도 획기적으로 바꿔 과학적인 증거 수집을 통해 진실을 발견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수사의 기법·체계·문화를 정착시켜야 합니다.”
최근 검찰과 경찰이 수사권 조정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직접 토론에 참여해서라도 결론을 낼 필요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경찰의 수사권 독립은 노 대통령의 선거 공약이다. 검·경 수사권 조정 자문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김일수 고려대 교수(법학)는 “교통사범, 절도 같은 민생사범에 관해서는 경찰이 독자적으로 수사할 수 있도록 양 기관이 합의해가는 듯하다가 다시 틀어져 원점으로 되돌아갔다”고 말했다.
-새 법무부 장관이 수사권 조정에 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을지, 검·경이 주목하고 있는데요.
“수사권 조정은 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 때문에 우리 정부의 중요한 정책과제죠. 어떤 식으로든 조속히 해결돼야 합니다. 저는 한쪽 편을 들 생각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국민 편에서 바라보며 어느 것이 편리하고, 범죄를 척결하고 인권을 옹호하는 수사가 될지 토론해야 합니다. 법무부 장관이니까 검찰 편이라고 볼지 모르지만 저는 중립적인 조정자 구실을 하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의 현실과 두 기관의 처지를 고려해 서로 충분히 납득하고 만족할 수 있는, 반대로 말하면 두 기관이 조금씩 불만족스러운 조정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초기에 두 기관이 수사권 조정 문제에 관해 공개 토론을 벌여 국민에게 불안감을 줬습니다. 합리적 조정이 이뤄질 때까지는 현행 제도의 테두리 내에서 검찰이든 경찰이든 치안과 범죄 수사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인터뷰 중인 천정배 장관(왼쪽).
천 장관은 원내대표로 있던 2004년 6월 고위공직자 비리조사처(고비처)에 독립된 수사권뿐만 아니라 기소권까지 주는 것이 옳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고비처는 검찰이라는 거대 권력도 견제해야 하는데, 기소권 없이 검찰의 수사 지휘를 받게 해서는 곤란하다는 뜻이었다.
“고위공직자 비리조사처는 검찰과의 관계에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는 기관이 돼야 하기 때문에 기소권을 줘야 한다고 오래 전부터 주장했습니다. 거대 권력의 남용을 막을 수 있는 견제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그런 주장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검찰의 지휘를 받는 수사기관을 하나 더 만드는 제도로는 고비처의 상설 취지를 살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던 것입니다.
당정 협의를 거쳐 나온 고비처 안은 수사상 독립적인 위치에서 검찰의 수사 지휘를 안 받게 돼 있죠. 다른 수사기관에 비해 검찰로부터 상당한 독립성이 확보돼 있습니다. 고비처에서 송치한 사건을 검찰이 불기소할 때는 재정신청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야당 때부터 해오던 구상에 못 미칠지는 모르지만, 제가 원내대표 할 때 당과 정부의 협의를 거쳐 만든 안입니다. 국회 입법 절차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런 정도면 수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광복 60주년을 맞아 대사면이 이뤄지는데요. 대통령이 자신의 당선을 위해 불법선거운동을 벌인 사람들을 직접 사면하는 것은 사면권의 공정한 행사라고 보기 어렵지 않습니까.
“원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모든 법적 절차가 끝났음에도 그 결과가 구체적 타당성을 결여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단 말이에요. 법 자체가 가혹해 처벌 당시에는 당연했을지 모르지만 사회 환경이 변해 지금 관점에서 보면 지나친 처벌이 될 수 있죠. 어쨌든 법에 마련된 모든 수단을 다 써봤는데도 구체적 타당성을 결여하고 있을 때 그것을 시정할 수 있는 최종적인 권한이 대통령의 사면권입니다.
파란만장한 현대사로 인해 과거 군사정권 시절부터 양심수, 형평성 시비, 정치 보복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사면이 일상화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 측면을 균형 있게 고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당이 지난 대선 때 공식 직함을 가졌던 사람들을 사면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사면이 남용돼서는 안 된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대통령의 사면권을 근본적으로 박탈하거나 제한하지 않는 한도에서 자문기구의 형태로 위원회를 두어 사면권 행사의 객관성을 도모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사형제도는 나라마다 다르고 찬반 논란도 뜨겁다. 한국은 사형제도를 존치하는 대신 김대중 정부 때부터 집행은 하지 않고 있다.
미국 버펄로대 아이작 에리히 교수는 계량경제학을 이용해 사형의 효과를 연구한 선구자다. 그는 1975년 발표한 논문에서 ‘미국에서 1960년대에 집행된 사형 1건당 대략 8건의 살인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분석했다. 극단적인 찬반 입장으로 기울어지지만 않는다면 대다수 계량경제학 연구자는 사형이 상당한 범죄예방 효과를 지닌다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범죄자들은 자신의 행동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조차 인센티브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실험적 증거들도 있다. 오랫동안 인권운동가로 활동한 천 장관은 사형제도에 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사형 폐지는 글로벌 스탠더드
“사형제도의 존폐 문제는 대표적인 인권 이슈입니다. 과연 사형제도가 선량한 시민을 보호하는 효과가 있느냐에 관해 논란이 많습니다. 미국 계량경제학자는 그렇게 계산했다고 하지만, 어떤 연구에 따르면 사형제도가 범죄를 예방하고 사회를 방위하는 데 별 효과가 없다고 합니다. 유엔이 주도해서 만든 인권규약 제2 부속의정서에는 사형폐지가 담겨 있습니다. 한국은 아직 거기에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글로벌 스탠더드는 사형을 폐지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 그러나 사형의 존폐를 함부로 결정하기는 어렵죠.”
화제를 정치 쪽으로 돌렸다.
-2005년 6월 “조선 중기 이후 집권세력이었지만 당쟁에 매달리면서 민생을 외면해 국가를 위기에 처하게 했던 사림(士林)파의 과오에 교훈을 얻어야 한다. 중산층과 서민이 잘사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창당 정신과 초심을 되새겨야 한다”고 말했던데요. 이 발언의 의미를 좀더 쉽게 설명해주면 좋겠습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사림세력이 오랜 박해를 이기고 넘어서 국가의 주도세력이 됐습니다. 훈구파의 전횡과 부패가 심했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사림세력이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죠. 개혁세력이 고초를 오랫동안 겪으면서 이 나라 정치를 주도하는 세력이 됐다는 점을 사림파에 빗대어볼 수 있습니다. 과거 개혁의 실패를 교훈 삼아 제대로 잘해보자는 뜻입니다.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개혁정당이 우리당의 노선입니다. 우리 사회가 양극화로 치달아 서민 대중과 취약계층의 삶이 매우 어려워졌지 않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 우리 당이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대통령 탄핵 바람에 열린우리당 소속 386 운동권이 대거 여의도에 들어왔는데요. 상대적으로 국회에서 경륜이 풍부하고 합리적이고 온건한 쪽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실용과 민생보다는 포퓰리즘적인 경제정책으로 흐르고 통합보다는 분열을 확대재생산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우리 당엔 과거 정치인들에 비해 진보적인 젊은 초선의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낡은 정치에 대한 국민의 물갈이 요구가 강하지 않았습니까. 정치적 이해관계만 생각하는 구태 정치인들이 물러가고 새롭게 공적 책임을 지고, 뭔가 국가 사회를 위해 사심 없이 봉사할 수 있는 신진세력이 나와 정치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물갈이 요구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는 기대를 합니다.
지난해 원내대표를 했던 사람으로서 우리 당이 국회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자평합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 경제를 회복시키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필요한 뒷받침을 그런 대로 했다고 생각합니다. 자화자찬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다만 국민적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 당이 국회의 의석을 과반수까지 얻는 새로운 세력으로 급성장했음에도 국회 활동을 통해 경제를 살리고 민생을 살찌우는 데 필요한 정책 입법을 뒷받침할 만한 역량이 충분치 못했다는 것을 자인합니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국회나 정당의 정책 역량이 오래 전부터 취약했습니다. 원내대표 휘하에 정책전문위원이 불과 30~40명입니다. 그중에서도 10명쯤은 행정부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이고요.
초선의원이 많다 보니까 경험이 부족하고 의원들의 정책 역량이 만족할 만큼 쌓여 있는 것도 아니죠.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국민이 바라는 만큼 민생 개혁정치를 이뤄내지 못했습니다. 우리 당은 과거처럼 행정부가 주도하는 정책을 뒷받침해주는 종속적 역할에 머무르지 말고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정책 역량을 개발해야 합니다.”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서민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경기침체가 오래 지속되다 보니 실업률도 계속 상승세입니다. 각종 여론조사기관의 조사결과를 보더라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인기가 낮습니다. 천 장관이 말하는 대로 민생개혁 정치로 가서 이런 상황이 바뀐다면 몰라도 현재의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내년 지방선거에서도 여당이 참패하리라고 예상됩니다. 경제가 나빠서 여당이 선거에 이긴 사례가 없지 않습니까. 새천년민주당이 천년 간다고 했지만 김대중 대통령 임기 끝나고 분당돼 소수당으로 전락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열린우리당도 결국 ‘노무현 대통령당’으로 운명을 마칠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거든요. 기분 나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한 관리관이 걱정스러운 듯, “너무 곤란한 질문을 던지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필자가 “답변 안해도 괜찮다”고 하자 천 장관은 정치인 출신답게 “답변 못할 것도 없습니다”라며 말을 이었다.
내년 지방선거는 또 한번의 기회
“열린우리당과 참여정부에 대한 국민 여론과 평가가 좋지 않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죠. 객관적 사실입니다. 어떻게 이 어려움을 이겨내고 국민의 지지와 신뢰를 다시 얻을까 저도 늘 고민하고 있어요.
열린우리당은 이러한 현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그 원인을 찾아내 고침으로써 국민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고 봅니다. 현재 여러 사정이 어려움에도 저는 아직도 우리 국민의 개혁 열망이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민생개혁정치라고, 굳이 민생을 붙여본 것은 개혁이 민생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국민이 바라는 세상은 경제적 어려움 없이 잘 먹고 잘살고, 끊임없이 경제가 성장하고,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가 만들어져서 분배 면에서도 어느 정도 양호한 상태가 지속되는 사회입니다. 저는 이런 사회를 만드는 것이 개혁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종 평가는 국민이 선거를 통해 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직도 우리에게 많은 기회가 있다고 봅니다. 지방선거하려면 아직도 열 달 가까이 남아 있죠. 내년 지방선거일까지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천 장관은 민주당 경선에서 이인제 후보가 가장 유력시되던 2001년 7월 부산에 내려가 강연하면서 현역의원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무현 후보 지지 선언을 했다. 당시 언론은 ‘지지 선언하기에 너무 이르다.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나고 말 것’이라고 보도했다. 사실 이번 법무부 장관 임명도 그에 따른 보답의 성격임을 완전히 부인하기 어렵다.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노 후보의 전망이 밝지 않을 때 지지 선언을 한 속뜻이 궁금하군요.
“두 가지 이유였죠. 첫째 대통령 적임자였습니다. 그분이 대통령이 되면 한국 사회의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째, 저는 현실 정치인으로서 당선 가능성을 늘 생각합니다. 확신할 순 없었지만 적어도 그 당시 우리 진영이 내보낼 수 있는 최강의 후보라고 생각했습니다. 수도권에서 안정적인 표를 얻을 수 있고, 영남 출신 후보로서 영남 표를 상당 부분 흡인할 수 있고, 젊은 세대의 호응이 높은 점을 평가했습니다.”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 활동을 함께한 김근태 후보와의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았나요.
“경선에 일곱 분이 나왔습니다. 이인제·유종근·김중권씨는 저와 크게 인적 관련이 없던 분이죠. 한화갑·정동영·김근태·노무현 후보는 개인적으로 가까운 분들입니다. 개인 사업을 한다면 가장 가까운 분과 해야겠지만 한국을 책임지고 나가야 할 지도자를 뽑는 일이지 않습니까.”
두 딸 모두 고시 합격
천 장관의 가족. 두 딸은 각각 사법시험과 외무고시에 합격했다.
-아이들 공부를 어떻게 시켰는지, 그 비결을 알려주면 수험생을 둔 학부모들에게 유익한 정보가 될 텐데요.
“1980년대 이후에 워낙 바쁘게 살다 보니 가정을 아예 도외시하다시피 했습니다. 특별히 한 것은 없고요. 어렸을 때부터 두 가지를 강조했습니다. ‘친구들하고 잘 지내라.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고 존엄한 존재이고, 인생은 결국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데 행복이 있는 것이다. 남하고 경쟁하지 말아라. 자신의 능력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이런 이야기만 늘 했는데 애들이 그런대로 공부는 잘한 것 같아요. 제 공은 아니죠. 저는 시골에서 혼자 야생마처럼 컸지만 우리 애들은 어쨌든 서울에서 유복하게 자랐죠.”
-질문과 전혀 핀트가 안 맞는 답변을 했어요. 딸들이 어떻게 공부를 잘하게 됐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공부 잘한 아버지의 DNA를 물려받은 점도 있을 테고, 강남 삼호가든 아파트에 살 때 과외를 시켰다든가….
“제 소관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들 엄마가 했죠. 정성을 많이 기울였습니다. 어쨌든 보통 우리나라 부모가 하듯이 고생했죠. 고3이면 전 가족이 비상이지 않습니까. 두 딸이 서울대에 들어가 고시 공부하는 바람에 집사람이 힘들었죠. 정치인의 아내로서 지역구 관리도 도와주랴…. 둘째아이가 외무고시에 합격해 고3의 연장 같은 상황에서 최근에야 해방됐습니다.”
-검찰 쪽에서 지성씨가 검사를 지원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더라고요. 장관 딸을 ‘인질’로 확보하고 싶은 전략인지 모르겠습니다.
“지성이가 법조인이 안 됐으면 좋겠다고, 그 아이가 어릴 때부터 생각했어요. 법조인은 장래가 불투명하고 어려운 길입니다. 큰아이가 어디로 갈지는 제 권한이 아니죠. 지금은 사법연수원에서 고시 준비할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더라고요. 사법연수원은 성적에 따라 임관 여부가 결정되니까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데 본인 희망대로 해야죠. 검사로 간다고 하면 말릴 생각은 없습니다.”
부인 서의숙(50)씨는 고려대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결혼 전까지 목포에서 교편을 잡았다. 천 변호사는 교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있는 부인이 딱해 보여 인재근(김근태 장관 부인)씨에게 집사람이 사회를 위해 유익한 일을 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전교조 태동 후 참교육학부모회가 생겼다. 서씨는 그 단체에서 촌지 안 주기 운동을 벌였다. 정책실장도 했고 서울지회장도 맡았다.
“촌지 안 주기 운동을 하니까 우리 아이 선생님들에게도 촌지를 줄 수 없잖아요. 그때 서울 강남의 학교에서 촌지 안 주기는 학부모에겐 부담스러운 일이었죠. 뒤에 알고 보니까 당시 우리 애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한테 어머니가 참교육학부모회 간부라는 정보가 전달돼 학교에서 긴장했다고 들었어요. 어쨌거나 우리 아이들이 그런 어려움을 뚫고 잘해줬어요. 큰아이는 초등학교 때 총학생회장도 했어요.”
촌지 안 주기 운동을 벌이던 참교육학부모회 간부는 자녀들이 성장해 대학입학을 준비할 때가 되자 ‘참교육’을 접고 ‘대입 교육’과 ‘고시 교육’에 발벗고 나섰던 모양이다.
대권 도전 요건 아직 못 갖췄다
-인터뷰하러 오기 전에 현실 정치에 밝은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하나같이 천 장관이 2007년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할 것이라고 하더군요.
“대권에 도전하려면 세 가지 정도의 요건을 갖춰야 합니다. 첫째, 한국사회의 앞날에 대한 확실한 비전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둘째, 현실적으로 다른 대안보다 자신이 제일 낫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셋째, 현실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개연성을 확보해야죠. 아직 이 세 가지를 갖췄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의원실 비서가 다음 약속시각을 넘겼다고 알렸다. 천 장관이 법률 및 정치 문제에 길게 대답하는 바람에 준비한 ‘인물탐구형’ 질문을 미처 소화하지 못했다. 필자가 “정치하다 보면 폭탄주를 억지로 마셔야 할 자리가 많을 텐데 몇 잔까지 마셔봤냐”고 묻자 한 관리관이 “장관님께서는 폭탄주를 잘 못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답변을 가로챘다.
검찰에서는 내부적으로 폭탄주 안 마시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김종빈 검찰총장은 얼마 전 오찬 자리에서 “폭탄주 한 순배 돌리자”는 조크성 제의에 “여론조사를 해보니 ‘검찰 하면 폭탄주’라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아 이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 전 검찰인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천 장관은 한 관리관의 홍보지침형 대리 답변에 개의치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
“아차 하면 폭음하는 스타일이에요. 술을 마실 때는 남보다 더 많이 마셔야 같이 취하고, 그 다음에는 완전히 뻗는 스타일이죠. 술에 관한 한 가장 비효율적인 스타일이라고 생각하는데, 폭탄주를 7잔까지 마셔봤어요. 처음 한두 잔 마시면 그 다음에는 컨트롤을 못하죠. 제 주량으로는 한 잔 정도 마시면 딱 좋을 것 같아요.”
-일생에 영향을 준 책을 든다면….
“황석영씨가 쓴 겁니다. 1980년대 읽은 ‘어둠의 자식들’과 광주민주항쟁을 다룬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입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광주사태가 일어났습니다. 한동안은 광주사태가 다시 일어난다면 저도 총 들고 싸워야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해봤어요. 어릴 때 책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천 장관에게 ‘범생이’라는 말을 아냐고 묻자 “모범생이죠”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에게 한 개혁당쪽 정치인이 ‘범생이’라는 코멘트를 하더라고 전했다.
“모범생 맞습니다. 다만 저는 섬마을에서 야생적으로 컸습니다. 나쁘게 표현해 혼자 자랐지요. 단순한 범생이가 아니죠. 들꽃처럼 자랐죠. 그냥 범생이였으면 지금쯤 아마 판·검사를 하고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