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대표 일본 간 사이에 일부 계파가 ‘거사’
- 다른 당도 아닌 한나라당이 공안검사라고 반대하다니…
- 입당 차단 여의치 않자 “지지율 낮다”며 경선 참여 배제
- 운동권 계열 파벌주의가 당 공조직 무력화
- “출마 포기하면 다른 것 주겠다”고 회유
- ‘정치검찰’ 행태, 예나 지금이나 비슷
- 운동권에서 공안검사로의 드라마틱한 인생 반전
한나라당 경기지사 출마 꿈을 접은 이범관(李範觀·63) 변호사는 정치에 환멸을 느낀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난생 처음 뛰어든 정치판에서 겪은 수모는 상대를 주저앉히기 위해 비방과 음해를 서슴지 않는 한국 정치의 부정적인 면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계파 이해관계로 움직이는 구태의연한 기득권 정치”의 산물이었다.
지난 두 달간 그가 겪은 일을 요약하면 이렇다.
그는 경기도 출신 정치인들의 추천으로 경기지사 후보 경선에 참여하기로 하고 한나라당에 입당원서를 냈다. 박근혜 대표의 내락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부 당직자들의 반대로 경선 참여는커녕 입당마저 순탄치 않았다. 그 와중에 음해성 문건이 언론에 유포되기도 했다. 심지어 ‘경기지사에 출마하지 않는다면 입당이 가능하다’는 모욕적인 제의까지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입당했지만 경선에 참여하지도 못한 채 출마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여론조사 지지율이 높지 않다는 이유로 경선 후보군(群)에서 배제된 것이다.
경기도 여주가 고향인 이 변호사는 30년간 검찰에 몸담았다. 대검 공안과장, 서울지검 공안부장, 대검 공안부장을 역임한 공안통(通)이다. 국회 법사위 수석전문위원과 청와대 민정비서관을 거치면서 정치권과 가깝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검찰 견제 발언을 정면 비판해 파문을 일으킨 그는 2004년 5월 광주고검장을 끝으로 검찰을 떠났다. 현재는 법률사무소 다솔 대표변호사.
지난 4월말 다솔 사무실에서 만난 그의 표정은 밝은 편이었다. 시간이 흐른 탓인지 경기지사 출마 좌절에 따른 울분이 어느 정도 가신 듯도 싶었다. 주관적인 어법보다는 객관적인 어법을 구사하려 애쓰며 대체로 차분한 어조를 유지했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듯 몇몇 대목에선 표정이 일그러지고 목소리도 높아졌다.
박근혜 대표, 경선 참여 보장
그는 담배를 꺼내 물면서 그간의 경과를 개략적으로 설명했다.
“영입 얘기가 처음 나온 건 지난해 12월이었어요. 이사철, 전용원, 목요상, 이해구 전 의원을 비롯한 한나라당 전·현직 당직자 1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경기지사 선거에 정치인이 아닌 사람을 도민후보로 내세우자는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당시 한나라당 경기지사 후보로 거론되던 사람들은 이규택 의원을 빼고는 모두 경기 출신이 아니었어요. 그런 점에서도 경기 출신인 제가 도민후보로 적합하다는 의견이었습니다. 그 후 모임에 참석했던 사람 중 몇몇이 저를 만나 출마를 권유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런 조직도 기반도 없는 상태라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의 경기지사 출마설은 올 2월 하순 일부 언론의 보도로 기정사실화됐다. 그는 3월2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자유민주세력을 대표하는 한나라당이 정권을 창출하는 것이 바로 구국의 길임을 확신한다”며 한나라당 입당을 선언했다. 아울러 “내가 태어난 경기도와 도민을 위한 봉사와 헌신을 다짐한다”며 경기지사 후보 경선에 나설 것임을 천명했다.
그런데 그 직후 그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일부 당직자들이 공개적으로 그의 입당 또는 경기지사 후보 경선 참여에 반대하고 나선 것. 경기지사 예비후보이자 이 변호사의 고향 여주가 지역구인 이규택 최고위원은 이날 국회에서 “당신이 왜 들어오느냐”며 언성을 높였다. 이계진 대변인은 “이번 입당은 경기지사 후보 결정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그의 입당이 갖는 의미를 축소했다. 일부 당직자는 언론을 통해 그의 공안검사 경력과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 민정비서관을 지낸 사실을 문제 삼았다. 그리고 당내에 그의 입당을 반대하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를 흘렸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사전에 아무런 조율 없이 입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저에게 경기지사 출마를 권유한 당의 원로급 인사들이 사전에 당 지도부와 접촉해 제 입당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박근혜 대표를 만나 경선 참여도 보장받았고요. 박 대표는 경기지사 후보 경선 활성화 차원에서 저의 출마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해요. 게다가 그동안 한나라당은 외부의 참신한 인사를 영입하겠다고 공언해왔거든요. 외부 인사도 입당과 동시에 공천을 신청할 수 있게 하겠다며. 그래놓고는 공당(公黨)의 약속을 정면으로 뒤집는 추한 행태를 보인 겁니다.”
기본적인 사실관계만 확인했어도…
3월8일 한나라당 경기도당은 이 변호사의 입당 보류를 발표했다. 당원자격심사위원회에서 그런 결정이 내려졌다는 것. 경기도당이 이 변호사에게 보낸 ‘당원자격심사위원회 심사결과 통보’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이 전 고검장이 과거 한나라당을 탄압한 전력에 대해 논란이 있어 입당 불가도 검토됐으나, 도지사 후보로 중앙당에 공천을 신청해 접수되었고 전력에 대한 심도 있는 조사와 논의가 필요하다는 다수의견에 따라 입당 보류로 의결되었음을 통보합니다.”
이에 따라 이 변호사는 경기도당의 최종 심사를 기다리거나 중앙당에 다시 입당원서를 내고 중앙당의 입당 심사를 받아야 할 처지가 됐다.
“경기지사 경선에 관련된 일부 계파가 문전에서 막은 겁니다. 당내 계파 갈등의 산물이었죠. 김문수·전재희·김영선·이규택 의원으로 굳어진 경선구도에 변화가 생길 듯싶으니 상식에도 맞지 않는 일을 꾸며 저를 주저앉히려 한 겁니다.”
논란이 된 ‘한나라당 탄압 전력’이란 그가 대검 공안부장이던 2000년 10월 한나라당 의원 15명이 선거법위반으로 기소된 일이다. 당시 민주당 의원은 9명이 기소됐다. 그중 한나라당 의원 8명과 민주당 의원 3명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이를 두고 그는 “기소 숫자로 보면 한나라당에 해당(害黨) 행위를 한 것이고 기소유예 숫자로 보면 애당(愛黨) 행위를 한 것이냐”고 반박했다.
“어이가 없었죠. 당시 검찰은 법대로 수사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검찰 조직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런 엉터리 같은 주장을 펼칠 수가 없습니다. 대검은 구속기준 지침만 정할 뿐이고 수사와 기소는 각 지검이 독자적으로 결정하거든요. 당시 대검 공안부는 각 지검의 선거법위반 수사 실적을 취합해 발표만 했을 뿐 수사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당내 일각에서는 그가 당시 선거법위반 수사와 관련, 한나라당에 의해 고발당했다는 출처불명의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공천심사 자료에도 이 같은 사실이 언급돼 있었다.
심사위원회에서 그가 고발당했다는 근거로 제시한 사건은 서울지검 2000형제140124호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한나라당이 고발한 사건이 아니라 윤모씨가 판·검사 및 변호사 175명을 선거와 무관한 개인 사건과 관련해 직무유기로 고소한 것이다. 바로 그 175명의 고소 대상자 중에 이범관 대검 공안부장이 포함됐던 것이다. 당시 그와 함께 고소당한 사람들 중에는 전·현직 대법원장, 현직 대법관, 전직 헌법재판관, 현 국정원장, 현 한나라당 의원 등이 있다. 검찰은 이 사건에 대해 2000년 12월29일 각하 처분했다. 따라서 그가 한나라당에 의해 고발당했다는 얘기는 사실무근인 셈이다.
그렇다면 박근혜 대표의 경선 참여 보장 약속은 공수표였다는 얘기인가.
“박 대표가 일본에 가 있는 동안 경기지사 선거에 이해관계가 있는 특정 계파에서 일을 꾸민 거예요. 박 대표가 귀국한 후 저의 후원자들이 박 대표를 면담해 ‘이게 무슨 짓거리냐’고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박 대표가 ‘신속히 시정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당에선 시간을 질질 끌더라고요.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박 대표의 당 장악력이 약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대표가 국내에 없는 틈을 타서 대표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벌인 것이라면 당내 질서가 엉망이라는 얘기죠.”
희망을 품고 뛰어든 정치판에 대한 회의가 쌓여갔다.
“일부 계파와 연결된 도당에서 제게 아무런 문의도 없이 멋대로 그런 의혹을 제기한 겁니다. 무조건 막아놓고 보자는 심산에서. 회의록 제출을 요구했는데 끝내 들어주지 않더라고요. 기본적인 사실관계만 확인했어도 제가 한나라당을 탄압했다는 엉터리 주장을 할 수 없거든요. 정치판이 이런 거구나 싶더라고요.”
그에게 한층 더 모욕감을 안긴 것은 “(경기지사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입당을 허락하겠다”는 조건부 제안이었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됩니까. 내가 지사 출마하려고 입당한 거지, 한나라당 당원 못해 환장한 게 아니잖아요. 심지어 ‘출마를 포기하면 다른 걸 주겠다’고까지 하더라고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의 전력에 대한 의혹이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지자 한나라당은 3월23일 마침내 입당을 허가했다. 보류 결정을 한 지 보름 만이었다. 그 기간에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발만 굴러야 했다.
이상한 여론조사
경선은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나중에 4월21일로 바뀌었지만, 애초 정해진 경선일은 4월10일이었다. 4월3일 경선 참가자 5명의 TV토론회(경기방송)가 열렸다. 토론회가 끝난 후 이규택 의원이 사퇴를 선언하고는 손학규 지사와 함께 외국으로 나갔다.
그 직후 당은 이 변호사를 경기지사 경선후보에서 제외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남은 4명의 후보 중 지지율이 가장 낮다는 게 이유였다. 근거로 제시한 것은 자체 여론조사 결과. 그에 따르면 김문수 의원이 48%로 가장 높고, 전재희·김영선 의원이 각 20%, 이 변호사가 6%로 꼴찌였다.
“어떤 식으로 여론조사를 했는지 의문이었습니다. 외부기관에 맡겼다는데, 자세한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어요. 자기네끼리만 돌려보고 제게는 수치만 통보했거든요. 신인의 참여로 기존 경선구도가 바뀔 조짐이 보이자 허위사실을 사실로 둔갑시켜 입당을 막고는 손발을 꽁꽁 묶어놓았어요. 그러고는 경선이 임박해서야 풀어준 뒤 곧바로 객관성을 의심받는 여론조사를 실시해 그것을 빌미로 경선에서 배제한 건 공정 경선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죠. 공당에서 있을 수 없는 불법·부당한 행위입니다. 제가 꼴찌라는 것도 믿기 어렵지만요.”
그가 우선 문제 삼는 것은 당이 자체적으로 실시했다는 여론조사에 나타난 각 후보의 지지율이다. 그간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무응답자, 즉 부동층 비율이 50%였다. 그런데 당 여론조사에서는 후보들의 지지율을 합하면 응답률이 100%에 가까웠다.
“어떻게 응답률이 100% 가까이 나왔냐고 물으니, 미응답자 50%를 응답자의 지지비율에 따라 배분해 합했다고 하더라고요. 지지율을 이렇게 주먹구구로 계산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캠프에서 자체 조사한 바로는 김문수 의원은 25% 안팎의 고정된 지지율을 보였고, 저를 비롯한 나머지 3명간 격차는 3~4%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뛰어든 후 기존 지지율 구도가 조금씩 변해가는 양상이었어요.”
3월14일자 ‘내일신문’에 실린 한나라당 경기지사 후보 적합도 조사(3월12일 경기도 남녀 1095명 대상) 기사에 따르면, 이 변호사의 지지율은 김문수(26.7%)-전재희(5.9%) 의원에 이어 3위(5.1%)였다. 그 뒤가 김영선(4.1%), 꼴찌는 이규택(3.4%) 의원이었다.
이것만 놓고 보면 이 변호사가 억울함을 느낄 만도 하다. 자신보다 뒤져 있던 김영선 의원은 경선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또 여론조사 결과를 기준으로 경선에서 배제한 것이 공정한지도 의문이다.
“배타적 파벌주의 우려할 수준”
이 변호사는 “경선에서 배제된 후 ‘더럽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말로는 외부 인사에게 문호를 개방한다면서 실제로는 기득권 유지에 집착하는 행태를 보였습니다. 경기도 모 지역 시장의 경우 선거법위반으로 기소된 상태인데도 공천했어요. 또 경남 모 지역에서는 탈당한 사람을 다시 입당시켜 공천을 줬습니다. 한마디로 원칙이 없는 거죠. 제 경우 사실관계도 확인하지 않고 음해성 소문을 유포하는가 하면 합리적인 이유 없이 경선에서 배제했습니다. 공정 경선의 의지가 전혀 없었던 겁니다. 다시는 정치에 관심을 두고 싶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썩은 정치판을 그대로 둬선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범관 전 고검장은 “한나라당 내 배타적 파벌주의가 위험수위에 이르렀다”고 개탄했다.
“소수 강경파가 주도하는 배타적 파벌주의가 위험수위에 이르렀습니다. 저의 입당과 경선 참여를 막은 것도 이들입니다. 당을 장악한 이OO, 김OO 의원 계열이 장난을 치는 바람에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진 겁니다. 운동권 논리로 무장한 이들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요. 이들 때문에 당 대표를 정점으로 한 공적인 조직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에는 한나라당 이념과 맞지 않는 위장전입자도 있어요.”
-한나라당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현 정부 출범 이후 나라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시장경제체제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민을 위한다는 정부가 무능한 정치로 오히려 서민에게 고통을 더 주고 있지 않습니까. 대안은 한나라당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한나라당이 지금처럼 자만하고 당내 개혁을 이루지 못하면 미래가 없다고 봅니다. 현재 다수 국민이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것은 한나라당이 잘해서가 아니라 달리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집권여당에 대한 실망감에 따른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는 거죠.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국민의 소리를 귀담아들어야 해요. 이번 경기지사 경선을 보면 8000여 명의 대의원 중 25%만이 투표에 참석했습니다. 이래서야 출마 후보의 대표성이 인정되겠습니까.”
-정치판의 생리를 모르고 뛰어들었습니까.
“정치를 하겠다는 게 아니라 지방행정을 한다는 생각에 나섰던 거죠. 우리나라 지방자치제에는 중앙정치가 과도하게 개입돼 있습니다. 탈(脫)정치의 지방자치가 정착돼야 합니다. 경선 후보 4명 중 유일한 경기도 출신을 배제하고 타 지역 출신들만으로 경선을 치를 정도로 자만에 빠진 모습을 보였습니다.”
“고건 전 총리를 보세요”
이 변호사는 이번 사건이 한나라당의 정치를 정상화하고 지방자치의 참뜻을 살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일본에서도 처음 10년간은 정치인이 주류를 이뤘습니다. 하지만 지자제가 정착된 이후엔 공직자 출신이 단체장의 80%를, 기업인 출신이 15%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정치인은 5%밖에 안 돼요. 중앙정치에서 거의 독립된 상태죠. 이것이 바람직한 모델이에요. 정치가 아니라 지방의 민생(民生)행정에 주력하고 그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거꾸로 가고 있어요. 정치가 주(主)이고 자치는 부(副)인 셈입니다. 경기지사 예비후보로 나선 사람들만 해도 모두 현역 의원입니다. 떨어지면 다시 국회로 돌아가죠. 모든 공직자는 선거 60일 전에 사퇴하게 돼 있는데 유독 국회의원만 예외입니다. 후보 TV토론회에서도 제가 그 문제를 지적했어요. ‘당신들, 국회의원직 사퇴하고 나와야 되는 것 아니냐’고. 아니, 지방자치가 중앙정치의 놀음판입니까. 시도지사 출마가 대선(大選)으로 향하는 전략이거나 정류장입니까. 매명(賣名)하기 위해 출마한 사람도 적지 않아요. 김OO 의원도 중앙정치에서 자신의 비중을 더욱 높이기 위해 출마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는 조만간 박근혜 대표를 만나 당 쇄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할 예정이라고 했다.
“곧 만나기로 약속돼 있어요. 제가 애초 출마한 것도, 되고 안 되고를 떠나 장기적으로 당에 참신한 기풍을 불어넣는 데 기여하겠다는 생각에서였거든요. 박 대표측과도 그렇게 얘기가 됐고. 지금 제가 나이로나 경력으로나 당에 들어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는 자기소개서에 ‘입법·사법·행정의 다양한 경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스스로 주요 경력으로 꼽는 것은 법무부 공보관, 국회 법사위 수석전문위원, 청와대 민정비서관, 법무부 기획관리실장, 대검 공안부장, 서울지검장, 광주고검장 등이다.
-김대중 정부 때 청와대 민정비서관을 지낸 것이 입당과정에서 논란이 됐는데요.
“그게 문제가 됩니까.”
-한나라당 정서와 맞지 않다는 거죠.
“김대중 정부 때 비(非)호남 출신으로 청와대 비서관을 지냈다면 긍정적으로 볼 면이 있지 않습니까. 계파적 이해관계와 맞물려 그런 거지, 다른 쪽에서는 오히려 포용력이 있다고 평가하더군요. 공직자가 어느 정부의 요직에서 일했다고 다음 정부에서는 일하면 안 된다는 얘기인가요? 그럼 김대중 정부에서 한자리 한 사람이 지금 한나라당엔 아무도 없나요? 5, 6공 인물이 현 정부에는 없습니까. 고건 전 총리 보세요. 그 직책에 있을 때 비리를 저질렀다면 또 몰라도….”
호남 출신 검사들의 견제
-공안통인데,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비서관으로 발탁된 것이 예사롭지는 않습니다. 특별한 인연이 있었나요.
“그런 것 없었어요. 김대중 정부의 탈(脫)지역화 인사방침과 관련된 것이라고 봐요. 제가 경기 출신이라.”
-동교동계 인맥은요?
“없어요. 청와대 들어가기 전까지 김대중 대통령과 악수 한 번 한 적도 없는데요, 뭐. 내가 오히려 그쪽에서 당한 게 있어요. ‘신동아’에 기사가 났었는데.”
-동교동계 보고서 나돈 것 말이죠? 그거, 제가 썼어요.
“아, 그거, 조 기자가 쓴 거예요? 이렇게 만났으니 물어보죠. 그거, 누가 돌린 거예요?”
-나중에 따로 얘기하죠.
“제가 듣기로는 김OO(당시 검찰 간부)이 작성했다는데 맞습니까? 김OO을 비롯한 호남 출신 검사들이 여기저기 돌렸다던데. 그 정도로 날 호남 쪽에서 공격했다고요. 견제 차원에서.”
그가 언급한 기사는 ‘호남검찰 5년의 피 튀긴 파워게임’이라는 제목으로 ‘신동아’ 2003년 2월호에 실린 것이다. 당시 기자는 호남검찰의 영욕과 파워게임 실태를 취재하던 중 김대중 정부 초기 이범관 서울지검 1차장이 청와대 민정비서관에 내정될 당시 동교동계에 나돌던 정보보고서를 입수해 일부 관련자의 실명을 가리고 보도했다. 호남 출신 검찰 간부가 작성해 동교동계 실세에 넘긴 그 보고서에는 이범관 민정비서관 내정자의 공안검사 전력과 반(反)DJ 성향,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및 조선일보 방우영 회장과의 친분이 거론돼 있다.
“나도 그때 그런 게 돌았다는 얘기만 들었지 내용은 보지 못했거든요. 어쨌든 해명도 했어요. 그거, 다 맞다. 삼성 이건희 회장과 동기동창으로 가까운 것도 맞고, 조선일보 방 회장이 동문이라고 아껴주는 것도 맞다. 공안검사 전력도 맞는 얘기고. 그런데 그것 때문에 내가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냐? 검찰 조직에서 꼭 해야 할 일을 맡은 것뿐인데, 내가 엉터리로 간첩을 만들어 고문한 일이 있느냐, 누군가를 표적수사한 적이 있느냐 말이지.”
-청와대에서 문제가 됐습니까.
“문제가 됐죠. 그래서 제가 그런 게 문제가 된다면 나가겠다고 했어요. 이번 경우와 비슷해요.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음해한 것인데, 김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은 거지요.”
-열린우리당이라면 이해가 되는데, 한나라당에서 공안검사 경력을 문제 삼았다는 게…. 한나라당 정체성과 크게 다른 것 같지도 않은데요.
“그러니까 말이죠. 웃긴다니까요. 아무리 정치판이라도 말이 될 만한 걸 얘기해야지, 검찰 경력 자체를 문제 삼으니 어이가 없는 거죠. 당내 계파 이해관계에 따른 겁니다. 이OO, 김OO 의원이 이OO 의원을 앞세워 저를 어떻게 해보려다 여의치 않자 끝에 가서는 그냥 쳐버린 거예요.”
“한나라당 깨지게 생겼어요”
이 변호사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17대 국회에서 검사 출신 의원은 17명인데, 그중 16명이 한나라당 소속이다. 나머지 한 명은 열린우리당 조배숙 의원인데, 검사에서 판사로 전직했기 때문에 검사 출신으로 보기에 애매한 점이 있다.
-검사 출신 한나라당 의원들 중에는 공안통이 꽤 있죠?
“그럼요. 과거엔 능력 있는 검사들이 다 공안부로 갔지요. 그 다음이 특수부였고.”
-검사들이 한나라당으로 가는 이유가 뭘까요.
“보수적인 거죠. 저의 정체성도 중도보수이고. 이번에도 그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현 정권은 국가정체성을 지켜나가는 데 문제가 있다고.”
-제가 보기엔 한나라당에서 환영해야 할 분 같은데요. 성향이나 그간의 행적으로 봐서.
“그러니까. 그러니까. 허허. 소수강경파가 자기들 이해관계에 따라….”
-박 대표가 거기에 휘둘렸다는 얘기네요.
“처음에 박 대표가 그 정도를 갖고 어떻게 문제를 삼느냐고 했대요. 그러니까 말 못하고 있다가 (박 대표가) 일본 간 사이 전격적으로 일을 벌인 거예요.”
-어떻게 대표가 없을 때 그럴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개판이라니까. 박 대표가 지금 당을 제대로 관리 못해요. 큰일이에요. 겉으로는 박 대표가 하지만 실제로는 그 사람들이 다 한다니까. 저러다 한나라당 깨지게 생겼어요.”
-과거엔 공안검사의 자부심이 대단했지만 요즘엔 조직과 업무가 축소되고 인기도 없죠. 국민 사이에서도 과거 불합리한 공권력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죠.
“국가보안법 때문에 그런 건데, 나라의 정체성을 지켜야 할 기구나 조직을 흔드는 건 문제예요. 검사들도 다 양식이 있어요. 검찰 스스로도 잘못된 것은 고치려 노력하고 있다고요. 저는 대검 공안부장 할 때 국보법 개정에 찬성한 사람이에요. 폐지하자니까 문제지.”
-수원지검과 부산지검 공안부장, 대검 공안과장, 서울지검 공안부장, 대검 공안부장을 역임한 대표적인 공안통인데, 특별히 그쪽으로 계속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제가 한 공안은 1970~80년대 공안과는 달라요. 6·29 이후예요. 그 전 공안은 체제유지 공안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6·29 이후 공안은 사회질서와 국가정체성 확립에 주력했습니다. 간첩활동과 불법 폭력집단행동을 그냥 둬선 안 되잖아요. 지금도 그 기능은 그대로 유지돼야 하는데….”
이 변호사는 2003년 9월 광주고검장 재직시 검찰 내부통신망에 노무현 대통령의 이른바 ‘광양 발언’을 비판하는 글을 올려 화제가 됐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전남 광양에서 “검찰을 누구의 감독도 받지 않게 내버려두지 않겠다. 전직 대통령의 아들도 별것 아닌 문제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며 검찰을 견제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검찰을 흔들지 말라”
당시 이 고검장은 ‘검찰 중립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대통령의 언급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다”며 “검찰의 중립이 보장되지 못한 주 원인은 정권에 있다. 정치권은 지금도 말로는 검찰의 중립과 수사의 독자성을 보장하겠다면서도 또 다른 형태로 검찰의 중립을 저해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그는 2002년 5월 서울지검장으로서 김대중 대통령의 3남 홍걸씨에 대한 구속수사를 지휘했다.
그 글에 대해 노 대통령은 “검찰 간부가 내 말뜻을 잘못 알아듣고 자세한 내용도 모르면서 의견을 표시했다”며 개의치 않는다는 태도를 보였다. 문재인 민정수석도 “이 고검장이 일부 언론의 잘못된 보도로 사실을 잘못 알고 글을 쓴 것으로 보인다”고 거들었다. 문 수석은 검찰 내부통신망에 대통령 발언의 ‘원문’을 소개하며 이 고검장의 주장을 반박하기도 했다.
-당시 청와대측에선 대통령 발언이 와전된 것이라고 주장했지요.
“할말 없으니 그렇게 나온 거죠. 그런 식으로 검찰이 정권에 당해왔어요. 제 글의 취지는 검찰을 자꾸 흔들지 말라는 것이었죠.”
-당시 문재인 수석에 따르면, 원래 대통령의 발언은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이 재임 중 처벌받았고,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도 요즘 터져 나오는 큰일에 비하면 어찌 보면 별것 아니라고 할 만한 일로 재임 중 검찰 조사를 받았다’였다는 거죠.
“언론엔 그렇게 보도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청와대측 얘기가, 일부 언론이 대통령 발언을 거두절미하는 바람에 그런 오해가 생겼다는 거였죠.
“그게 그거지. 뭐, 차이가 있나요.”
-당시 이 고검장의 글에 대해 언론은 대체로 높게 평가하면서도 일부의 부정적인 평도 소개했는데요. 정치를 하려 한다며, 국회의원 출마를 앞둔 포석이라고. 심지어 정치적인 검사라고.
“비판하는 쪽에선 그럴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제가 정치를 했습니까? 정치하려 했다면 그때 국회의원 나갔지, 지역구로.”
-정치검사라는 비판의 근거는 과거 정권에서 국회와 청와대를 드나들며 정치권과 가깝게 지냈다는 건데요.
“문제 삼을 게 그것밖에 없지. 그런데 청와대 파견검사는 저만 한 게 아니잖아요. 역대 정부 때 (검찰에서) 다 파견했지. 굳이 비판하려면 할 수도 있겠지만, 억지라는 느낌입니다.”
“언제는 보고한다 하고 했나”
-정치검찰 얘기가 나오게 된 데는 검찰에도 책임이 있지 않나요. 검찰이 정치권력과 가까이 하면서….
“그런 검사들이 일부 있었죠. 그렇게 따지면 지금은 없나….”
-옛날과는 좀 다르지 않나요.
“더해요. 지금 현대사건도 보세요.”
-그래도 지금은 검찰과 청와대의 공식라인이 없잖아요. 검사가 청와대에 직접 보고하는 일도 없고.
“언제는 공식라인으로 했나. 똑같아요. 지금은 보고 안 하는 줄 아시우? 그땐 그럼 (보고)한다 하고 했나.”
이 변호사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표정으로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검찰 내부에서도 정치권과의 관계가 과거와 달라졌다는 평이 많은데, 실제론 안 그런가 보죠?
“물론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동안 조금씩 바뀌어온 거지 이 정부에서 유독 달라진 건 아니죠. 대선자금수사만 해도 높게 평가할 만한 일이지만, 가이드라인 정해놓고 했잖아요. 그런 행태는 똑같다, 이거예요. 검찰 스스로 독립하려는 변화의 몸부림은 과거 정권에서도 있었어요. 그런데 정권 담당자들의 행태는 그렇지 않았다는 거죠. 지금도 그렇고.”
-서울지검장을 6개월 하고 물러났는데, 대통령 아들 구속과 관련해 청와대의 압력이 있었나요? 구체적으로 얘기해줄 수 있습니까.
“왜 없었겠어요. 자세한 얘긴 나중에 하죠. 하여튼 어려운 점이 많았죠. 그리고 그것 때문에 제가 인사 불이익 당한 건 공지의 사실 아닙니까.”
평생 공안검사라는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이 변호사는 공교롭게도 학생 시절엔 운동권이었다. 연세대 법대 4학년이던 1965년 한일협정 비준 반대시위 주동자로 구속되기도 했다. 서울구치소에서 45일간 옥살이를 하고 보석으로 풀려났는데, 재판에서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지금도 남아 있는 유일한 전과 기록이다. 이 변호사는 “내가 고시에 붙어 검사가 되지 않았더라면 재야 운동권이 됐을지도 모른다”며 웃었다.
대학 졸업 후 공군장교 시험에 합격한 그는 신원조회에 걸려 입교하자마자 퇴교당했다. 군에 가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그 길로 고시공부를 하기 위해 입산했다. 어느날 시골에 계신 어머니한테 연락이 왔다. 어머니 말씀이 “경찰에서 너 잡으러 다닌다”는 것이었다. 병역기피자라고. 그는 병무청으로 달려가 병역기피가 아니라고 항변했다. 그 직후 공부를 정리하고 입대했다.
“경찰에서 너 잡으러 다닌다”
“군대 안 가서 병역기피자 소리를 들어서야 앞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진해 사병으로 입대했어요.”
그는 의가사(依家事)제대를 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북한군 특수요원들이 청와대를 기습한 1·21사태의 영향이다.
“1·21사태 직후 군 개혁을 한다며 한 가구에서 세 사람 이상이 입대한 경우 한 사람은 면해준다는 규정을 만들었어요. 가정을 돌보게 한다는 취지였죠. 당시 제 조카 3명이 같은 시기에 군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제가 늦게 입대하는 바람에 겹친 겁니다. 그래서 삼촌인 제가 먼저 제대하게 됐죠. 1년4개월 만에.”
군에서 나온 그는 구속 전력 때문에 공무원은 생각도 못했다. 은행에 1년가량 다니다 공부를 더하고 싶어 행정고시 준비를 했다. 1971년 28세 때 행시에 합격했다. 학생시위가 좀 잠잠해졌을 때라 그런지 사무관 임용에 별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법제처에 근무하던 중 이번엔 사법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행시에 붙은 지 1년 만이었다. 검사를 지원했는데, 행정사무관 임용 때와는 달리 신원조회가 까다로웠다. 중앙정보부가 관여하던 시기였다. 그는 약간의 ‘편법’을 써서 검사에 임용됐다. 아이러니하게도 학생시위 전력은 나중에 그가 공안검사의 길을 걷는 데 영향을 끼쳤다.
“학생 때 데모한 놈이니 공안을 해보라고 하더군요.”
-시위 전력 때문에 힘들지 않았습니까.
“내가 해본 짓이니 잘 알지. 오히려 대화가 더 잘 됐어요. 제 말에 설득당한 친구도 꽤 있었고요.”
-공안검사는 학생들의 적이 아니었나요?
“우리가 한일회담 반대할 때의 학생운동과는 또 달랐어요. 지나치게 이념화돼 있었습니다. 민주니 해방이니 주사(主思)니 하면서. 순수성이 크게 변질됐지요.”
그는 1남2녀를 뒀다. 장녀는 모 일간지 기자이고 장남은 공군장교로 전역한 후 사법시험 준비에 매달리고 있다. 장남의 부인, 즉 이 변호사의 며느리도 함께 사시공부를 하고 있는데, 올해 1차시험에서 며느리는 붙었고 아들은 떨어졌다.
“아들이 아버지처럼 검사를 하겠다고 저러고 있는데, 저는 말리는 편이에요. 우리 때는 사실 검사가 출세길이었지만 지금은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잖아요.”
-이번 경기지사 출마 건으로 가족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었겠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다들 제가 출마하는 데 반대했거든요. 안 되니까 좋아하죠. 잘 됐다고.”
“현 정부가 못하니 자만에 빠져”
-한나라당에 정나미가 떨어지지 않았나요.
“그렇진 않아요. 당 차원에서 저한테 그런 건 아니니까. 소수 강경파가 문제죠. 제가 ‘정정당당히 경선해서 당신들이 이기면 될 것 아니냐’고 했어요. 그러자고 해놓고 뒤로는 비열한 짓을 했어요. 지금 한나라당엔 인적인 문제, 이념적인 문제가 있고, 조직 운영에도 문제가 있어요. 개혁적 국민정당으로 거듭나려면 내부의 계파적 이해관계와 상대를 죽이기 위해 비방하고 모함하는 구시대적 행태를 빨리 청산해야 합니다.”
-국민의 대북관(觀)과 대미관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지요. 한나라당이 국민정당으로 거듭나려면 이런 시대 흐름을 잘 반영해야 하지 않을까요.
“당연히 시대 변화에 따라 달라져야지요. 그렇지만 기본이 흔들리면 안 된다는 게 제 소신입니다. 미·소 데탕트 시대에도 서로 간첩은 잡아가면서 대화했어요.”
-일부 젊은층에서는 한나라당에 대해 ‘수구꼴통당’이라는 비난도 하지요.
“요즘은 좀 덜한 것 같은데요. 저만 하더라도 그렇지는 않거든요. 대검 공안부장 할 때 국가보안법 개정에 찬성했고, 그 전에 대검 공안과장 할 때는 학생들의 방북(訪北)을 허용해주자고 주장했어요. 1990년대 초 노태우 정부 때 일이죠.”
-향후 계획은요. 정치 쪽입니까.
“좀더 지켜보고 결정하려 합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나라당에 대한 충고를 잊지 않았다.
“현 정부가 워낙 못하니 자만에 빠져 국민은 안중에 없고 집안싸움을 하고 있어요. 이념의 정체성도 흔들리고 있고. 건전한 중도보수 세력이 당을 이끌어야 합니다. 기득권에 집착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개혁 정당을 바라는 국민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면 대선에서 또다시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 운영의 투명성과 선명성을 확보하고 공정 경쟁 원칙 등을 확립해 민주적 국민정당으로 거듭나야 해요. 당의 풍토를 민주적으로 쇄신하는 데 헌신할 생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