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호

‘신데렐라 맨’ 꿈꾸는 최고령 한국챔피언 이경훈

“나는 40대의 좌절과 맞서 싸우는 아파치…주먹이 운다!”

  • 최호열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oneypapa@donga.com / 사진·조영철 기자

    입력2006-06-07 16:4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퇴역복서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다시 글러브를 끼고 세계 챔프에 오르는 휴먼 영화 ‘신데렐라 맨’이 지난해 큰 인기를 모았다. 한국엔 그보다 더 극적인 복서가 있다. 마흔셋의 나이에 가족을 위해 동양챔피언에 도전하는 중년 복서 이경훈. 그의 주먹이 우는 까닭.
    ‘신데렐라 맨’ 꿈꾸는 최고령 한국챔피언 이경훈
    하루가 다르게 몸이 무거워진다. 늘어나는 뱃살 때문만은 아닐 게다. 아침햇살에 잠이 깨도 온몸을 천근만근 짓누르는 피로 때문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쉽지 않다.

    이렇듯 술과 담배, 스트레스에 찌들어 사는 40대가 며칠 밤을 새워도 팔팔한 열아홉 청년과 ‘맞짱’을 뜬다면 어떻게 될까. 더구나 똥개도 호랑이 행세를 한다는 제 집, 홈링도 아닌 적진에서 혈혈단신으로 싸워야 한다면.

    어쩌면 4월28일은 우리나라 프로복싱사(史)를 새로 쓰는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최고령 한국챔피언 기록을 가진 ‘할아버지 복서’ 이경훈(43)씨가 이날 호주 멜버른에서 세계 챔프 후보로 손꼽히는 프라딥 싱(19)과 범아시아권투연맹(PABA) 미들급 챔피언 타이틀전을 벌일 예정이었다. 늙다리 중년 세대의 어깨를 한껏 펴줄 영웅의 탄생을 기대했지만, 시합 일주일을 앞두고 싱이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경기가 무기 연기됐다.

    당초 그와의 인터뷰는 경기가 끝난 후에 진행할 예정이었다. 이기면 이긴 대로, 지면 진 대로 할말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기가 연기됐지만 언제 있을지 모를 시합 날까지 마냥 기다릴 필요는 없어보였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만으로도 그는 중년들에게 충분히 희망을 줬다.

    경기가 예정되어 있던 4월28일, 강원도 춘천 아트복싱체육관을 찾았다. 계속된 황사와 꽃샘추위에 잔뜩 움츠린 탓일까, 차창 밖으로 경춘가도에 늘어선 산들이 모처럼 내리쬐는 따뜻한 햇살에 어깨를 늘어뜨리고 살폿 잠이 들었다. 피가 튀는 격한 운동을 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봄날이었다.



    하지만 봄 햇살의 나른함은 체육관에 들어서는 순간 탁, 탁, 탁, 탁 줄넘기 소리와 쉭, 쉭 뿜어내는 거친 숨결에 화들짝 놀라 달아났다. 긴 머리를 고무줄로 질끈 동여맨 사내 하나가 보인다. 러닝셔츠가 땀으로 푹 젖어 있다. 앞머리는 벗겨지고 이마에 팬 주름이 깊지만 불끈거리는 근육, 가벼운 발놀림과 날렵한 주먹이 함께 운동하는 젊은이들 못지않다.

    “시합은 연기됐지만 운동을 쉴 수는 없죠. 언제 다시 날이 잡힐지 모르니까요. 나이도 많은데다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꾸준히 해야 해요.”

    이경훈은 프로복싱 선수인 동시에 복싱체육관을 운영하는 관장이며, 관원을 지도하는 코치다. 또한 방송통신대에 다니는 늦깎이 대학생이다. 집안을 책임지는 가장이기도 하니까 1인5역이다.

    “하루 일과요? 아침엔 로드워크로 체력을 다지고, 오후 1시부터 체육관 업무를 보면서 틈틈이 관원들을 가르쳐요. 5시나 돼야 한두 시간 정도 제 개인훈련을 할 짬이 나죠. 저녁엔 복싱에어로빅 강의를 하고, 밤에는 방통대 수업을 들어요. 훈련량이 절대적으로 적으니 그저 꾸준히 하는 수밖에 없어요.”

    현 동양챔피언 프라딥 싱은 나이는 어리지만 아마추어 전적이 108전 100승 8패에 이르며, 프로에 들어와서도 9전 9승 7KO승을 기록 중인 강자다. 불혹을 훌쩍 넘긴 이씨로서는 벅찬 상대임에도 “이번 시합은 자신이 있었다”고 말한다.

    “지난해 7월 얼떨결에 동양태평양복싱연맹(OBPF) 챔피언전에 도전했다 실패한 후 많은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이번엔 열심히 준비했죠. 상대가 빠르고 주먹이 강하지만 저도 주먹과 스피드에서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어요. 이번엔 제대로 겨뤄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무산돼 아쉬움이 커요. 하지만 언젠가는 시합이 열릴 테니까 빈틈없이 준비할 겁니다.”

    절망 끝에서 다시 낀 글러브

    ‘신데렐라 맨’ 꿈꾸는 최고령 한국챔피언 이경훈
    그는 1950년대 육군 권투부에서 선수활동을 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복싱을 접했다. 하지만 어릴 땐 복싱이 재미있기는커녕 지겨웠다고 한다.

    “아버지는 TV만 켰다 하면 복싱만 보셨어요. 만화영화도 보고 싶은데 만날 복싱만 봐야 하니 얼마나 지겨웠겠어요. 하지만 피는 못 속이나 봐요. 저도 군에 입대해 취미 삼아 복싱을 시작했습니다.”

    1982년 특전사 하사관에 지원 입대했다. 대대 대항 복싱대회가 열릴 정도로 당시 권투는 특전사의 최고 인기 스포츠였다.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았을까. 이전까지 스파링 한번 해본 적이 없던 그는 제대할 때까지 11번을 싸워 10번을 KO로 이겼다.

    “1987년엔 아마추어 시합에도 나갔어요. 제대 말년이었는데, 저를 가르치던 부대 인근 복싱체육관 관장이 전국신인선수권대회 출전을 권하더라고요. 호기심에 출전해 3전 3승(3KO)으로 우승했죠.”

    그 정도 실력이면 본격적으로 복싱계에 뛰어들 수도 있었지만 인연이 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제대 후 전국신인선수권대회 우승 자격으로 1988년 서울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 참가신청을 했다.

    “제가 우승했을 때는 부대 앞에 있는 체육관 소속이었어요. 하지만 제대한 후에도 거기 남아 훈련할 이유는 없잖아요. 권투연맹에다 체육관을 옮겨서 출전해도 되느냐고 문의했더니 상관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집 근처 체육관으로 옮겨 훈련을 했어요. 그런데 경기 당일, 이전에 있던 체육관에서 이의를 제기한 겁니다. 연맹에선 골치 아프니까 경기 30분 전에 저를 실격 처리했어요. 황당했죠. 권투에 대한 회의도 느끼고….”

    하지만 그의 재능을 높이 산 한 대학에서 복싱 특기생 입학을 권유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일본 백화점 납품 회사에도 취직이 됐다. 일본에 있으면서 자사 제품과 판매사원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외국에 나가 일하는 기회가 드물던 시절이라 주저 없이 일본행을 택했다.

    “러시아에서 초코파이와 라면을 파는 장사도 했어요. 제법 큰돈도 만졌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아버지가 하시던 골재상 일을 돕기도 했고요. 결혼하고, 아이들 낳고, 30평대 아파트도 장만하고…남부러울 것 없는 중산층으로 살았죠.”

    먹고 살 만해지자 또 권투가 생각났다. 그때까지 복싱과 연결된 끈을 아주 놓지는 않았다. 인근에 복싱도장이 있으면 일주일에 하루 정도 들러 운동을 했고, 골재상 일을 하면서는 빈터 한쪽에 샌드백을 매달아놓고 심심풀이로 두드려댔다. 그 무렵 신문에 조그맣게 실린 MBC 신인왕전 기사가 마음을 뒤흔들었다.

    “신인왕전에 나가 2연속 KO승을 거두고 결승에 올라 아깝게 판정으로 졌어요. 그런데 시합이 끝난 후 한 체육관 관장이 본격적으로 선수생활을 해보라며 찾아왔어요. 안 한다고 했죠. 복서의 길이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운지를 아니까요. 제가 먹고 살 길이 없으면 모르겠지만 배곯지 않고 사는데 그런 고통을 겪고 싶진 않았어요. 복싱은 정말 헝그리 스포츠예요. 선수생활 해보니까 정말 고통스러워요(웃음).”

    골재상을 정리한 그는 지인이 운영하던 컴퓨터 유통회사에 들어갔다. 그런데 섣부르게 사업에 손을 댔다가 전 재산을 날리고 1억5000만원의 빚까지 졌다. 다시 컴퓨터 유통회사에 들어갔지만 살길이 막막했다. 한 달 이자만 150만원이 넘으니 월급으로는 죽을 때까지 일해도 빚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 회사 사장이 4000만원을 줬어요. 그 순간 ‘회사 그만두고 복싱 선수를 하자’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어요. 복싱을 해서 성공하면 큰돈을 만질 수 있잖아요. 물론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평생 직장생활 해서 빚도 다 못 갚는다면 도전이라도 해봐야 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서른아홉 살 때였다. 마흔을 앞두고 권투를 하겠다고 하자 다들 미친 짓이라고 했다. 가족의 반대도 심했다. 4000만원으로 권투도장을 차려 생계를 꾸리면서 선수생활을 하는 것으로 아내와 타협을 봤다. 아내도 한번 한다면 하는 그의 성격을 아는지라 더는 반대하지 않았다.

    ‘신데렐라 맨’ 꿈꾸는 최고령 한국챔피언 이경훈

    권투로 인생을 말하는 이경훈씨는 “무엇을 시작해도 늦지 않다”며 중년들에게 희망을 준다.

    그는 권투를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남을 가르치고 스스로 연습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동양챔피언이나 세계챔피언이 있는 도장에 찾아가 스파링 파트너를 자원했어요. 태릉에서 국가대표 상비군 스파링 파트너를 하기도 했고요. 그러면서 그들의 훈련방법을 배우고 공부했어요. 그렇게 여기저기서 배운 걸 종합해 저만의 훈련방법을 터득한 거죠.”

    링에선 이팔청춘

    2003년 첫 랭킹전을 치렀다. 한창 물이 오른 20대 선수를 KO시켰다. 이듬해엔 열일곱 살이나 아래인 MBC 신인왕 출신 유망주 엄정식 선수를 역시 KO로 이겼다. 시합에 나가 이겨도 가족들의 반대는 누그러질 줄 몰랐다. 복서 출신인 아버지조차 “이번에 붙은 선수가 세다며? 웬만하면 포기하지 그러냐”며 말렸다.

    하지만 반대가 심할수록 더 복싱에 매달렸다. 다들 불가능하다고만 하니 나중엔 오기가 생기더라나? 그리고 해냈다. 지난해 1월, 미들급 한국챔피언 결정전에서 MBC 신인왕 출신의 베테랑 최광진 선수를 KO로 눕히며 한국 최고령 챔피언이 됐다. 링 위에서만큼은 이팔청춘이었다.

    “취미로 할 땐 복싱만큼 재미있는 스포츠도 없어요. 하지만 선수로서 훈련을 하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죠. 금주, 금연은 필수인데다 6, 8, 10, 12km를 매일 번갈아가며 로드워크하다 보면 ‘내가 이렇게 힘든 걸 왜 하고 있나’ 싶어져요. 스피드를 최대한 낸 상태에서 달리고 또 달리다 보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아요. 인터벌 훈련을 한 날은 아내가 골반을 자근자근 밟아줘야 할 만큼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포기할 순 없었어요.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기 싫었거든요.”

    하지만 좌절이 찾아왔다. 지난해 7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아라키 요시히로(31)와 치른 동양태평양 미들급 챔피언 결정전에서 3회 2분36초 만에 TKO로 패한 것.

    “아쉬움이 많아요. 한국챔피언 결정전서 다친 손이 완치되지 않은 데다 경기 보름 전에 제안을 받아 제대로 연습도 못한 채 링에 올랐거든요. 나이 든 복서는 상품가치가 떨어져 시합 잡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앞으로 기회가 없을 줄 알고 무조건 받아들인 건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제가 동양랭킹 2위였더라고요. 그때 시합을 안 하더라도 다음에 기회가 또 있었는데, 조급했던 거죠.”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국내 유망주들을 차례로 이기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런 졸전을 했다는 게 수치스러웠어요. 제 복싱 인생, 한국 복서로서의 자존심이 무너졌다고 할까요. 제가 이긴 후배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고…. 한동안 매일 술만 마셨어요. 그러다 다시 훈련을 시작했어요. 은퇴하더라도 그 선수는 꺾고 은퇴하겠다는 결심이었죠.”

    마음을 추스르고 지난해 말 재기전을 치렀다. 6회 KO승. 그래서 그의 전적은 현재 8전 6승 2패. 동양 랭킹 3위, 국내 랭킹은 챔피언이 없는 1위다. 그가 동양챔피언에 도전하며 한국챔피언 벨트를 반납했기 때문에 한국챔피언 자리는 공석이다. 한국 미들급 챔피언이 되려면 그를 이겨야 한다.

    복싱을 하는 것을 반대하던 아내는 이제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경기가 있는 날이면 아내를 데리고 가지만, 아내는 슬그머니 경기장을 빠져나가 밖에서 기도하기 일쑤다.

    “저라도 못 볼 것 같아요. 며칠 전 영화 ‘신데렐라 맨’을 비디오로 봤는데 거기서도 주인공의 아내가 시합을 못 보더군요. 그걸 보면서 집사람 생각 많이 났어요.”

    그는 이기든 지든 시퍼렇게 멍든 몸을 이끌고 들어올 때가 아내에게 가장 미안하다고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딸과 4학년 아들도 아빠의 시합을 본 적이 없다. 권투가 뭔지도 잘 모른다고 한다. 다만 “아빠가 동양챔피언이 되면 지금보다는 더 잘살게 될 것”이라고 하니까 동양챔피언은 좋은 거라고 생각한다. 아빠가 남에게 얻어맞는다는 건 상상도 못하고서.

    ‘신데렐라 맨’ 꿈꾸는 최고령 한국챔피언 이경훈
    “동양타이틀전에서 지고 술에 절어 지낼 때였어요. 방에 누워 퉁퉁 부은 눈과 욱신욱신한 턱을 만지고 있는데, 학교 가던 딸아이가 볼에 뽀뽀를 하면서 ‘아빠! 또 시합할거야?’ 하고 물어요. ‘응’ 하니까 아이가 ‘요번에는 꼭 이겨!’ 하는 거예요. 아내도 그 일본 선수는 꼭 이기고 나서 은퇴하라고 하고요.”

    빚 갚기 위해 동양타이틀 도전

    “나이 들어 혹독한 훈련을 하는 게 힘들지 않으냐”고 하자 대뜸 “돈 아니면 안 해요”라고 말한다. 복싱이란 운동을 좋아하긴 하지만 선수로서 하기엔 너무 힘들다는 것.

    “정말 배고프고 고통스러운 운동이에요. 체중조절을 위해 식사량을 극도로 줄여야 하고, 매일 비지땀을 흘리며 뛰고 또 뛰며 주먹을 휘둘러야 해요. 그것만도 고통스러운데 링 위에 올라가면 때리고 맞아야 하잖아요. 고통스럽게 링에 쓰러지든지 상대가 쓰러지는 걸 보며 기뻐 날뛰든지 둘 중 하나의 결과만 존재하죠.”

    돈 때문에 글러브를 다시 꼈지만 형편이 그리 나아진 것도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1억원이 넘는 빚을 안고 있고,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45만원짜리 집에 산다.

    “국내 랭킹전은 라운드당 10만원을 받아요. 한국타이틀전 정도 돼야 200만원을 받고, 동양타이틀에 도전하면 300만원 정도 받아요. 하지만 동양챔피언이 되어 외국에서 원정경기를 하면 3000만원 정도 받아요. 타이틀전을 세 번만 하면 빚을 갚을 수 있죠. 그는 게 제 목표예요.

    건강음료 광고를 보면 일반인도 모델로 많이 나오잖아요. 솔직히 한국챔피언이 되면 모델 제의가 들어오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런데 아무 연락도 없더라고요. 동양챔피언은 돼야 광고가 들어오겠구나 싶어서 열심히 하고 있어요.”

    현재 그의 주된 수입원은 체육관 수강료다.

    “체육관 수입이야 빤하죠. 보통 월 250만원, 많아야 400만원 정도인데 거기서 부모님 생활비, 우리 가족 생활비, 아이들 교육비, 월세, 이자 나가면 남는 게 없죠.”

    경제적으로는 별로 달라진 게 없지만 인생은 확 달라졌다고 한다.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암울함이 사라졌다는 것. 건강 또한 몰라보게 좋아졌다고 한다.

    “그전엔 주말이면 피곤하다며 잠만 잤어요. 지금은 아이들이랑 축구도 하고 대화도 많이 해요. 그래서 아내는 ‘동양챔피언 못 돼도 괜찮다, 남는 장사했다’고 해요. 정말 그래요. 담배를 끊고 매일 달리기를 한 덕에 얼마나 건강해졌는지 몰라요. 처음 시작할 때 87kg이었는데 지금은 75kg으로 줄었어요. 10분만 달려도 숨이 찰 정도로 체력이 달렸는데 이젠 7km를 22분 안에 주파합니다. 성격도 긍정적으로 바뀌었고요.”

    그의 권투 예찬론은 끝이 없었다. 보통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운동 중에서 극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체력과 정신력을 익힐 수 있는 몇 안 되는 종목의 하나라는 것.

    “처음엔 링에 올라가면 아무것도 안 보여요. 보호장비를 제대로 갖춰도 겁이 나죠. 자기가 때리지 않으면 맞아야 하니까요. 더구나 싸움질은 30초나 1분 안에 끝나지만 권투는 3분 동안 싸우는 거잖아요. 쉬었다 다음 라운드에서 또 싸우고요. 덜 맞으려면 더 많이 움직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을 참고 훈련을 많이 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복싱을 하면 저절로 인내와 극기를 배워요.”

    맞지 않으려 뛴다

    또한 링 위에서는 나이가 없다. 그의 체육관에서도 64세 할아버지부터 대학생, 고등학생이 함께 샌드백을 두드린다. 노력만 한다면 40∼50대가 20∼30대와 맞짱을 떠 때려눕힐 수도 있다.

    ‘신데렐라 맨’ 꿈꾸는 최고령 한국챔피언 이경훈

    지난해 1월 최고령 한국챔피언이 되어 챔피언벨트를 허리에 찬 이경훈씨.

    “복싱도 무도예요. 어느 경지에 이르면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생겨요. 스파링할 때도 무조건 상대를 때려눕히려는 게 아니라 가르치면서 하게 돼요. 때릴 때에도 덜 아프게 때리죠.”

    하지만 한국 권투는 사양길로 접어든 지 오래다. 그가 운영하는 체육관만 해도 프로선수를 목표로 훈련하는 관원은 1명뿐이다. 다이어트, 호신술, 취미로 복싱을 배우는 이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여성, 어린이 관원이 많고 복싱에어로빅 시간이 성황을 이룬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선수층도 전보다 훨씬 엷어졌다. 몇 체급을 제외하곤 한국 랭킹 10명 리스트를 채우지 못한다. 복싱 시합이 한 달에 한 번 열리기도 힘들 정도다. 그나마 한때는 큰 체육관이나 시민회관을 빌리지 못해 나이트클럽에서 경기를 한 적도 있다. 한번 시합이 열리면 많아야 6경기를 치른다. 12명이 시합을 하는 셈인데, 그렇게 계산해보면 1년에 어림잡아 140여 명만이 경기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일본은 한 달 동안 열리는 경기수가 우리나라의 1년 경기수보다 많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도전

    사람들은 그를 영화 ‘신데렐라 맨’의 주인공과 비교한다. ‘신데렐라 맨’은 미국의 전설적 복서 제임스 J. 브래독(1906∼74)의 삶을 다룬 전기영화다. 퇴물 복서 브래독은 아이들에게 우유 한 병 못 사줄 만큼 가난에 시달리자 가족을 위해 다시 권투를 시작, 마침내 세계 챔프가 된다. 게다가 주인공은 이씨처럼 손을 크게 다쳤다. 그리고 척추분리증이라는 고질적인 부상에 시달렸는데 이씨도 같은 병을 앓고 있다. 하지만 영화의 주인공은 당시 갓 서른으로 이씨보다 훨씬 젊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영화 ‘주먹이 운다’에 나온 퇴물 복서(최민식 분)와 비교한다. 하지만 최민식은 신인왕전 결승에 오르는 정도지만 이씨는 동양 챔프를 목전에 두고 있다. ‘신데렐라 맨’이나 ‘주먹이 운다’의 두 주인공보다 더 영화 같은 도전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이 나이에 젊은이들과 스파링하다 몇 대 얻어맞으면 머리가 멍하다”면서 “나는 죽을 것을 각오하고 싸우는 아파치”라고 했다.

    그는 권투로 인생을 말하고 있다. 불가능은 나약한 사람들의 핑계에 불과하다고. 불가능은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고. 고로 ‘불가능은 없다’고. 그는 이제 중년 남자들의 희망이 됐다. 그의 꿈은 그들이 대신 이루고 싶은 꿈이다. 무엇을 시작하든 늦지 않다는 걸 그는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