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호

박재규 경남대 총장 & 권홍사 대한건설협회장

“밀어주고 당겨주는, 우리는 동갑내기 스포츠 광”

  • 권주리애 전기작가, 크리에이티브 이브 대표 evejurie@hanmail.net

    입력2007-05-02 18: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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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년대 사업가와 학자로 처음 만난 권홍사 반도건설 회장과 박재규 경남대 총장. 성장 과정이며 성격이 판이한 두 사람은 운동을 좋아하는 공통된 취향으로 금세 가까워졌다. 어려운 가정환경을 딛고 건설업자로 자수성가한 권 회장이 대한건설협회장을 맡아 국내 건설산업을 이끌고 최근 두바이로 진출하기까지 최종 결정의 순간엔 늘 박 총장이 함께했다.
    박재규 경남대 총장 & 권홍사 대한건설협회장

    30년 지기인 권홍사 회장(왼쪽)과 박재규 총장.

    비를 맞으며 걷는 사람에겐 우산보다

    함께 걸어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임을



    울고 있는 사람에겐 손수건 한 장보다

    기대어 울 수 있는 한 가슴이



    욱 필요한 것임을



    -이정하, 기대어 울수 있는 한 가슴 중-

    세계 최고층 빌딩 버즈 두바이, 세계 최대 쇼핑몰 두바이몰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두바이 비즈니스 베이의 스카이라인을 아름답게 수놓을 반도건설의 유보라 타워. 그간 국내 대형 건설사들이 중동에서 주로 수주공사에 치중한 것과 달리 유보라 타워는 반도건설이 현지 토지를 직접 매입해 건설, 분양까지 도맡는다. 연면적 6만8246평, 57층 규모의 최첨단 유비쿼터스 빌딩으로 지어질 유보라 타워는 올해 본 공사를 시작해 2009년 9월 준공될 예정이다.

    지난해 4월10일, 두바이 프로퍼티스(Dubai Properties)사와 3억5000만달러 규모의 부지 매수 및 개발사업 계약을 체결하던 날, 반도건설 권홍사(權弘司·63) 회장은 부모님의 얼굴과 함께 박재규(朴在圭·63) 경남대 총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시인의 말처럼 ‘함께 비 맞으며 걸어줄 사람’을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 대한건설협회장을 맡고 있는 권 회장은 1980년, 김상훈 전 부산일보 사장의 소개로 박재규 총장을 처음 만난 뒤로 인생의 고비 때마다 박 총장으로부터 큰 힘을 얻었다.

    권 회장이 부산의 한 허름한 식당에서 처음 본 박 총장은 깡마른 체구의 전형적인 선비 타입이었다. 술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자신과는 어느 한 곳 맞는 구석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당시 경남대 대학원장이며 극동문제연구소장이던 박 총장에게서 은은하게 퍼지는 학문의 향기가 권 회장의 가슴 깊은 곳에 있던 배움에 대한 열정을 슬며시 건드렸다.

    권 회장은 보통 사람이라면 주저앉아 버렸을 질경이 같은 삶을 이겨내고 오늘에 이르렀다. 광복과 함께 일본에서 돌아온 귀환동포인 그의 부모가 짐 보따리를 푼 곳은 경북 의성. 가난한 부모와 8남매는 헐벗은 산과 척박한 황토뿐인 그곳에서 나무껍질을 벗겨 먹고 풀을 뜯어 죽을 쑤어 먹는 생활로 연명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돈을 벌러 일본으로 떠났다. 남의 집 일을 하는 것조차 흔치 않던, 모두가 가난한 시절이었다.

    고향에서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열셋의 어린 나이에 홀로 외삼촌이 살고 있는 부산으로 왔다. 부산에 있으면 행여 어머니가 계신 일본으로 가는 고깃배를 얻어 타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가슴 한 편에 자리잡고 있었다. 1957년의 부산은 번잡했다. 전쟁의 상흔이 여기저기 남아 있지만, 그의 고향에 비하면 활력이 넘치는 곳이었다. 국제시장에는 늘 사람들이 넘쳐나고 맛있는 음식과 자동차, 미군과 아가씨도 있었다. 그는 외삼촌 가게 일을 봐주며 부산에서 몇 년을 보낸 뒤에야 북부산중학교 야간을 다니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학업을 중단한 상태였다.

    “중학교 2학년에 편입했는데, 동급생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덩치 큰 학생이었어요. 공짜로 먹고 자는 것도 미안한데, 외삼촌에게 학비까지 대달라고 할 염치가 없어 도너츠 장사를 시작했어요. 국민학교 3학년까지 다녔으니 한글은 깨쳤고 장사판에 뛰어다니느라 셈도 어느 정도 실력을 갖췄는데, 영어가 안 되는 거예요. 요즘 젊은이들이 목에 휴대전화를 걸고 다니는 것처럼 영어책을 목에 걸고 도너츠를 팔러 다니다 틈틈이 들여다보곤 했어요. 비가 오거나 장사가 잘 안 되는 날은 부서진 미군 트럭 고철을 주워다 팔기도 하고요.”

    동성고등학교 야간에 입학한 그는 더욱 열심히 일했다. 체격이 좋아 건설현장에서 막노동도 하고 새벽에는 신문배달도 했다. 힘든 나날을 꿋꿋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훗날 어머니를 만날 때 자랑스러운 아들이 돼 있겠다는 각오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한국과 일본 사이에 외교가 단절된 때라 어머니와 1년에 한 통 편지를 주고받는 것도 어려웠다.

    박재규 경남대 총장 & 권홍사 대한건설협회장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할 때면 늘 친구처럼, 형제처럼 상의하는 두 사람.

    청년 권홍사는 4.3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동아대 건축학과 야간에 입학한다. 전쟁으로 파괴된 건물과 주택, 도로 등에 대한 복구 열기로 인해 건축학과 경쟁률이 유독 높았다. 1965년 한일회담이 시작되자 일본과의 연락이 비교적 자유로워져 일본에서 식당을 하고 있는 어머니에게서 학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그는 3학년 때 주간으로 편입했다.

    쌀 세 가마에 김치 가득 있는 집

    1972년 대학을 졸업하고 제일토건에 입사한 그는 현장에서 험한 일을 한 대가로 받는 월급 20만원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 얼마 못 다니고 퇴사했다. 그러고는 1975년, 서른한 살의 나이에 반도건설을 창업했다.

    “말이 창업이지 구멍가게나 다름없었어요. 직원이라고 해야 저와 사촌동생, 후배 이렇게 세 명이 전부였죠. 오토바이를 타고 일을 따러 다녔는데, 주위에 성실하고 일 잘하는 청년들이라고 입소문이 나면서 일거리가 하나씩 들어왔어요. 그러다 처음으로 집 한 채 짓는 공사를 따냈는데, 얼마나 기뻤던지 계약서를 쓰면서 눈시울을 붉혔죠. 쌀 세 가마에 김치가 가득한 집을 갖는 게 소원이라 내 집 짓듯 정성껏 지었죠. 그렇게 집 한 채를 짓고 나니 일이 마구 밀려왔어요.”

    한 채, 다섯 채, 열두 채, 그러다 병원 건물을 짓고, 59가구의 저층 아파트를 지었다. 당시 건설법 규정상 60가구가 넘으면 엘리베이터를 설치해야 했다. 그래서 60가구가 아닌 59가구였다.

    권 회장이 박 총장을 만난 것은 부산에서 성실을 무기로 건설사업을 키워가던 서른여섯 살 때다. 박 총장은 권 회장의 첫인상에 대해 “젊은 날의 권 회장은 자신감 넘치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건실한 기업가였다”고 떠올렸다. 두 사람은 초기엔 “사업 잘되십니까?” “대학은 어떻습니까?” 하는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는 사이였는데, 차츰 서로 운동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취향이 같은 것을 확인한 다음부터 두 사람은 급속히 가까워졌다. 권 회장의 말이다.

    “취미가 같으니 자주 어울리게 됐어요. 박 총장이 스킨스쿠버를 배우고 있기에 저도 몰래 스킨스쿠버를 배웠죠. 어느 날 박 총장이 스킨스쿠버 하러 간다기에 따라갔어요. 도착해서 저도 장비를 갖추고 물에 뛰어드니 박 총장이 얼마나 놀라던지….”

    승마 또한 박 총장이 먼저 시작하고 권 회장이 나중에 배웠는데, 오히려 권 회장이 승마협회장을 지낼 정도로 말 타기를 즐긴다. 운동을 하면서 마음이 통한 이들은 서로 깊은 속내를 주고받기에 이른다. 권 회장은 박 총장을 가까이 하면서 시와 음악을 사랑하게 됐다고 말한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는 자신의 삶의 이력과 비슷해서 아끼고, 김상훈 전 부산일보 사장이 쓴 ‘내 구름 되거든’을 낭송하며 늘 그렇게 살리라고 다짐한다고 한다. 김남조 시인 등 여러 시인과도 교류한다. 권 회장이 건설협회장에 취임한 뒤 ‘건설인송년음악회’를 개최한 것도 뒤늦게 찾아낸 풍류가 기질 때문일 것이다.

    “건설사업, 세계를 시장으로 삼아야”

    박 총장과의 교유는 권 회장의 사업에도 영향을 끼쳤다. 박 총장은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가 페어레이디킨슨대, 뉴욕시립대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친 해외 유학파로서 권 회장에게 “건설사업은 세계를 시장으로 삼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후 권 회장은 박 총장의 관심분야인 러시아의 극동지방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를 함께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고 사업영역도 확대해 나갔다.

    IMF 외환위기 때 일이다. 일본에서 시세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매물로 나온 골프장 매입 건을 두고 권 회장은 박 총장에게 자문했다. 두 사람은 즉시 함께 일본으로 날아갔다.

    “평소 골프를 좋아하는 권 회장이 어느 날 도쿄 근처의 골프장을 사고 싶다고 해요. 외환위기 때라 다른 기업은 긴축재정과 구조조정으로 허덕이고 있는데, 골프장 매입이 웬 말인가 싶어 두말 않고 일본으로 따라갔어요. 라운드를 하면서 본 컨트리클럽은 예상외로 풍광이 아름다웠어요. 역시 권 회장의 사업적 눈썰미는 대단하다 싶었죠. 그래서 매입을 적극 권유했어요.”

    권 회장은 “그때 많은 사람이 골프장 인수를 반대해 박 총장에게 최종적으로 조언을 구했는데, 결국 박 총장의 권유로 매입했다”며 “지금은 골프장 시세가 구입가보다 2배 이상 뛰었다”고 귀띔한다.

    박재규 경남대 총장 & 권홍사 대한건설협회장

    권 회장이 박 총장에게 두바이에 지을 유보라 타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권 회장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 전이면 혼자 한참을 고민한 뒤 박 총장과 의논한다. 그런 다음 결정이 나면, 특유의 에너지로 강력하게 밀어붙인다. 그래서 그는 “사업의 성패는 고독의 깊이에 비례한다”고 말한다. 그의 나이 예순이 넘어 열사(熱砂)의 땅 두바이에 3억5000달러를 투자한다는 것은 대모험이다. 잘못하다간 평생 일궈놓은 것을 한순간에 잃을 수도 있음은 물론, 중동시장을 새로운 활로로 여긴 대다수 중소건설업체가 낙심하고 주저앉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가 30년간 키워낸 반도건설은 중소건설업체의 모델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미래란 준비한 사람에게는 즐거움’ ‘농사꾼에게 나쁜 땅은 없다’가 권 회장이 믿고 따르는 신념이다. 그는 “꿈에는 한계가 없다. 마음대로 꿈꾸어라(Dreams have no limit, Go further)”라고 한 세이크 라시드 전 국왕이 불붙인 ‘두바이의 꿈’에 반했다. 두바이는 2020년까지 상주인구 1000만의 세계적인 비즈니스 도시이자 휴양도시로 개발될 예정이다. 더군다나 두바이는 외국인에게 완벽한 투자 자유를 허용한다. 예리한 기업가인 그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다.

    두바이 프로젝트를 검토하는 과정은 하루 24시간도 모자랐다. 세이크 모하메드 국왕을 비롯해 현지 건설업체 지사장,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와 대사관 관계자 등을 두루 만나며 두바이 사정을 파악했다. 한국의 토지공사 격인 두바이 프로퍼티스 사장과 실무자, 토후국의 왕족까지 만나 두바이의 미래를 점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두바이 주변의 이집트, 가나, 터키, 말레이시아, 발칸반도 건설업계 관계자까지 접촉한 그는 최종 결정을 앞두고 이번에도 박 총장을 만났다.

    “권력은 뜨거운 용광로 같은 것”

    “일을 저지르려면 크게 저질러라.”

    박 총장은 단 한 문장으로 권 회장의 기를 살려주었다.

    “권 회장이 2005년부터 두바이에 자주 드나들며 뭔가를 궁리하는 것 같았어요. 그 무렵 지방 중소건설업체의 암울한 미래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죠. 최근처럼 건설사가 힘들었던 경우는 없었다는 거죠. 정부의 강력한 부동산 억제 정책으로 지방 건설업체 중 20%는 한 해 한 건의 수주실적도 없어 고사(枯死)해 가는 중이라고요. 중소건설업체도 이제 해외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블루오션 전략에 대해 말했습니다.

    하루는 권 회장이 얼굴이 누렇게 떠서 저한테 왔어요. 두바이에서 오는 길이라며 두바이 프로젝트를 차분히 설명하는 거예요. 함께 운동할 때의 열정적인 모습과는 사뭇 다른 태도에 저도 덩달아 긴장했어요. 권 회장이 저한테 의논할 때쯤이면 이미 그 일을 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죠. 제 격려가 듣고 싶어서 온 거예요. 그래서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줬죠. 권 회장은 다시 자신감을 찾고 돌아갔어요.”

    ‘권력이란 뜨거운 용광로 같아서 너무 가까이하면 타 죽고, 너무 멀리하면 얼어 죽는다.’ 몇 년 전 박 총장이 권 회장에게 해준 말이다. 권 회장은 과거 대통령선거 때 동향 출신 후보를 지원했다가 선거가 끝난 뒤 구설에 휘말린 적이 있다.

    “검찰에 불려 다니면서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조사받는 와중에 속이 상해 박 총장을 만났어요. 박 총장은 윤리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으니 괜찮을 거라고 저를 안심시키면서도, 설사 안 좋게 되더라도 신의를 위해 모든 잘못은 혼자 지고 가라고 했어요. 코너에 몰린 사람에게 한 말치곤 좀 야속했지만 다 맞는 말이었죠.”

    박 총장은 “오늘의 권 회장은 어느 누구의 도움 때문이 아니라 권 회장 스스로 일어선 결과”라며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쓴소리지만 거침없이 말했다”고 회상했다.

    “자고로 기업가가 정치인과 너무 친하게 지내면 꼭 뒤탈이 나죠. 권 회장과는 형제 같은 우정을 느껴요. 그래서 항시 권 회장이 곧 나라고 생각하고, 옳은 말을 해주려고 노력해요.”

    경남대 석전(奭田) 연구실

    권 회장은 3년 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경남대 북한대학원 건물을 신축했다. 박 총장이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학교라 최첨단으로 잘 지어주려고 신경을 쓰다보니 7억원 정도의 손해가 뒤따랐다고 한다.

    “손해는 고사하고 더 잘해주지 못해 안달이 날 지경이었어요. 최첨단 시설을 갖춘 아늑한 학교를 짓고 싶었지요.”

    박 총장은 모자라는 건축비를 충당하기 위해 각 연구실에 건축비 기증자의 이름을 붙였는데, 권 회장은 여기에도 참여해 3억원을 기증했다. 북한대학원대학교엔 그의 호를 딴 석전(奭田) 연구실이 있다.

    박 총장은, 두바이 프로젝트도 대단하지만 권 회장이 2005년 대한건설협회장에 당선된 것도 높이 평가한다. 당초 권 회장이 건설협회장선거에 출마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을 때 박 총장은 신중하게 처신하라고 충고했다. “노무현 정부가 시작됐는데, 같은 부산 사람이 나서면 위에서 밀어준다는 정치적 해석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게 박 총장의 우려였다. 그러나 권 회장은 뜻을 굽히지 않고 출마했고 결국 당선됐다.

    “1만3000여 회원사로 구성된 대한건설협회는 중소기업인 반도건설 회장이 넘기엔 꽤 높은 산이었어요. 하지만 특유의 열정으로 전국을 돌면서 120여 명의 대의원을 직접 만나 설득하더군요. 기회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찾아나서야 한다면서요.”

    박재규 총장은 경남 마산의 바닷가 옥계 마을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멸치잡이를 하던 부모를 떠나 친척집이 있는 마산시내로 유학 왔다. 구산중학교를 졸업하고 마산고등학교를 다니다 서울 용산으로 가서 미군으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그때 이미 유능한 외교관이 되리라는 결심이 서 있었다. 1963년 뉴욕으로 건너가 페어레이디킨스대에서 국제정치를 전공하고 뉴욕시립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박사과정 중에 군 복무를 위해 귀국한 청년 박재규는 39사단에서 신병훈령을 마치고 북한 관련 연구를 하는 곳에 배치됐다. 세계적인 사회주의 경제학자 피터 와일리스 교수로부터 “한국의 통일을 대비해 북한 연구를 하면 그 분야의 선구자가 될 수 있다”는 조언을 들은 바 있는 박재규는 미국에서도 구할 수 없는 북한 자료를 군대에서 접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제대 직전 북한 관련 저서를 내기도 했다.

    그는 제대 후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계속 밟는 대신 경남대와 인연을 맺었다. 적자에 허덕여 다 쓰러져가는 경남대를 일으켜 세우고 미국으로 돌아가려 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1972년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를 세우며 본격적으로 북한 연구에 나선 그는 2001년 경남대 북한대학원을 설립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엔 통일부 장관(1999년 12월~2001년 3월)으로서 6·15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데 기여했다.

    “30년을 ‘형님’이라 불렀는데…”

    권 회장과 박 총장은 전혀 다른 성장과정을 거쳤고, 성격도 정반대지만 비슷한 점도 많다. 둘 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점이 그렇고, ‘스포츠 광’인 것도 닮았다. 골프는 박 총장이 한 수 위고, 저녁 먹고 시작하는 ‘고스톱’은 권 회장이 한 수 위다. 스킨스쿠버, 승마는 서로 지지 않으려 한다.

    권 회장과 박 총장은 1944년생 동갑내기다. 그런데 권 회장은 지금껏 박 총장을 ‘형님’이라고 불러왔다. 지난 30여 년 동안 가깝게 지내면서 한 번도 나이를 확인해볼 필요를 못 느꼈고, 박 총장의 언행이나 인품으로 봐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을 거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이번 ‘신동아’ 인터뷰 후 필자가 요청한 이력서를 통해 서로의 출생연도를 확인한 두 사람은 한참을 웃었다. ‘동갑내기 친구’임을 확인한 두 사람의 우정은 오래도록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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