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던 옷 입은 채, 신던 신 신은 채 그날 밤 그렇게 끌려갔다. 창문이 없던 이상한 기차, 그 안에 들어선 순간 모든 게 틀어진 걸 알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하루에 열다섯 명씩…. 월경이 끊어지자 자궁을 떼어내고 다시 찾아왔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새벽은 오지 않았다.
| 무엇을 실었느냐 화물열차의 검은 문들은 탄탄히 잠겨졌다 바람 속을 달리는 화물열차의 지붕 위에 우리 제각기 드러누워 한결같이 쳐다보는 하나씩의 별 두만강 저쪽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쟈무스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험한 땅에서 험한 변 치르고 눈보라 치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남도 사람들과 북어쪼가리 초담배 밀가루떡이랑 나눠서 요기하며 내사 서울이 그리워 고향과는 딴 방향으로 흔들려 간다 푸르른 바다와 거리 거리를 설움 많은 이민열차의 흐린 창으로 그저 서러이 내다보던 골짝 골짝을 갈 때와 마찬가지로 헐벗은 채 돌아오는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헐벗은 나요 나라에 기쁜 일 많아 울지를 못하는 함경도 사내 총을 안고 뽈가의 노래를 부르던 슬라브의 늙은 병정은 잠이 들었나 바람 속을 달리는 화물열차의 지붕 위에 우리 제각기 드러누워 한결같이 쳐다보는 하나씩의 별 -이용악 ‘하나씩의 별’ |

김 할머니는 중국 송화강 상류, 러시아 국경 가까이에 있는 헐벗은 도시 자무스에서 평생을 살았다. 간절히 ‘저 지붕 위’에 올라앉고 싶었지만 김 할머니는 그러지 못했다. 그때 내려왔든 머물렀든 마찬가지였을까. 아니, 그 선택 자체가 생사(生死)의 기로였을까.
대구의 13평 영구임대 아파트에 살고 있는 김수해 할머니는 지금 행복해 보였다. 실제로 잘 웃고 쾌활하고 건강에 신경 써서 하루 한 시간씩 운동하고 노래책을 펼쳐놓고 최신 가요를 배우며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이웃과 나눠 먹고 집안을 정갈하게 꾸며놓고 산다.
“중국서 가끔 친구들이 옵니다. 거기서는 재벌이라도 나맨치 잘살지 못합네다. 집도 주고 돈도 주고…. 나라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네다. 보답할 길이 없습네다.”
러시아에 면해 있는 춥고 삭막한 국경도시 자무스(한자로는 ‘가목사(佳木斯·자무쓰)’라 쓴다)에서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 살아온 김수해 할머니는 77세이던 재작년 비로소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15세에 떠났으니 실로 62년 만이었다. 눈을 의심할 만큼 발전한 조국이었다. 어린 처녀가 중국에는 왜 갔나? 그 이야기야말로 책 열 권으로 써놔도 모자랄 사연이다. 떠나던 날은 지금도 생생하다. 절대로 잊을 수가 없다.
잊을 수 없는 그날 밤
그는 9남매의 맏이였다. “우리 어매가 모두 열둘을 낳았는데 셋은 없애고 아홉만을 낳아 길렀소. 그중 내가 맏이요.” 아아. 이렇게 시작되는 이야기를 김수해 할머니 세대말고 앞으로 또 누가 들려줄 수 있을까. 나는 그의 무릎 아래로 바짝 다가앉으며 말했다. “오늘 밤 여기서 자고 갈게요. 저 하룻밤만 재워주세요.”
김 할머니는 포항 근처 흥해라는 바닷가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가난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딸이지만 부지런하고 힘 좋고 겁 없는 아이였다. “내가 물힘이 좀 있었잖소. 헤엄을 아주 잘했제. 열두 살 때부터 물에 들어갔소. 처음엔 미역하고 천초(우뭇가사리)를 뜯다가 나중에는 전복 따는 법도 배웠소.”
당시엔 흥해 앞바다에도 해녀가 있었다. 제주도에서 올라온 해녀들이었는데 바다를 좋아한 수해는 그들에게서 잠수기술을 익혔다. 여름엔 바다에서 일하다가 10월이 돼 추워지면 산에 올라 나무를 했다.

일본이 사실을 인정하고 제대로 사과를 하는 것, 그것이 김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이다.
그 많은 동생과 밥을 굶지 않고 산다는 것만도 버겁고 바빴다. 어머니가 글자를 조금 알아 받침 없는 글자 몇은 읽을 줄도 알게 됐다. 그걸로 족했다. 오로지 먹을 것만이 문제이던 시절이었다.
“우리 아부지가 청년 때 일본놈을 하나 죽여 돌을 매서 바다에 빠뜨렸다오. 그래서 늘 쫓기는 몸이었제. 배를 타고 늘 강원도다 어디다 바다로만 돌아댕기느라 혼인이 늦었다오. 한 20년 지난 후에 순사들도 갈리고…. 그런 연후에야 육지에 올라와 살 수 있었던 갑소. 내가 아부지 서른일곱 살에 낳은 첫딸이오. 그러니 말도 못하게 귀애했지. 이름자도 특별히 공을 들여서 짓고. 어머니는 아부지보다 스무 살 아래로, 날 낳을 때 열일곱 살이었소.”
고모가 시집가서 구룡포에 살고 있었다. 고모부는 배를 타고 나가 일본, 대만 같은 데서 장사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살림이 제법 괜찮았다. 가까이서 어려운 친정을 이모저모 도와주던 그 고모에게 풍병이 났다. 어리지만 걱실걱실 일을 잘하는 수해가 고모집 일을 도와야 한다고 어른들 사이에 공론이 모아졌다.
그래서 열다섯 살 쯤엔 구룡포 등대 근처 고모집에서 살았다. 밥하고 빨래하고 우물물을 길었다. 식모가 하는 일이었지만 박대받지 않았으니 섧지도 않았다. 기질이 천성적으로 밝고 씩씩했다. “그때 고모집 인근에 일본 사람이 하는 점방이 있었소. 과자도 팔고 비누도 팔고 하는 집인데 그 집에 남갑숙이라고, 어데 촌에서 온 아~가 하나 있었소.”
자연 남갑숙과 친하게 지냈다. 나이는 한 살 아래지만 둘은 밤마다 모여서 수도 놓고 돈 벌 궁리도 하고 막막한 미래도 꿈꿔보고 그랬다. “하루는 갑숙이가 오더니 오데 외국으로 돈 벌러 갈 길이 있다고 그래요. 저네 집 주인남자가 그런 말을 꺼내드라 캐요. 부모께 의논하면 못 가게 붙들 게 뻔하다, 그러니 일단 먼저 가서 돈을 벌자. 그래놓고 편지를 하자. 봉투에 든 돈을 받아보시면 부모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나…. 그렇게 우리끼리 의논이 모아졌댔소.”
며칠 후 저녁 먹고 설거지까지 해놓은 후에 남갑숙이네 점방으로 갔다. “일본 남자 둘이 이미 와 앉아 있데요. 낯선 처녀도 두 명 더 있고. 일본 남자 중 하나는 순사 옷을 입었데요. 점방주인 남자가 차비는 자기가 대줄 테니 걱정 말라고 해요. 집에다는 말하지 말고 그냥 가서 나중에 편지로 알리라고 갑숙이가 했던 말을 또 하대요.
입던 옷 입은 채로 신던 신 신은 채로 그날 밤에 배를 탔네요. 내가 머저리니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있나요. 어디 기차역이 있는 곳에 내리니 우리말고 처녀 4명이 더 있데요. 꺼먼 무명 치마에 흰 저고리를 뻘춤하니 차려입고…. 외출한다고 벌건 댕기도 들였대요. 차림새만 봐도 숭악한 촌에서 데려온 처녀들인 줄 알겠데요. 지금 생각하면 거게가 아마 포항쯤 된 거 같애요.”
김 할머니는 이야기를 아주 구성지게 했다. 다 잊었다고 하면서도 어떤 부분은 대화 내용, 배경 설명, 입은 옷들까지 두루 선명하게 기억했다. 구술 여성사(史)에 관심 있는 친구와 나는 할머니가 내준 알록달록한 몸뻬 바지를 입고 할머니가 자랑하는 자석요에 엎드려서 60년 전 내 나라 처녀들이 당한 기막힌 고초의 사연을 통분하며 들었다.
악몽이 시작되다
이야기하다 말고 할머니는 벌떡 일어나 오징어를 데쳐오고 채소전을 부쳐왔다. 그리고 먹으라, 먹으라고 권했다. 식사 때는 수북한 밥그릇을 국그릇에다가 팍 엎어서 말아버렸다. “많지 아이 하오. 든든하게 다 먹어놓시오. 먹어야 이야기도 듣고 글씨도 쓰잖것소?” 할머니는 경상도 단어와 옌볜식 억양을 절묘하게 섞어 쓰는 화법을 구사했다. 키가 크고 살성이 희고 정 많고 화통하고 솜씨 좋은 여장부 기질이 언뜻언뜻 내보였다.
그는 처음 본 내게 하염없이 먹으라, 먹으라고 권했다. 오로지 먹는 것만이 절체절명의 가치였던 젊은 날을 지내온 할머니 세대, 사랑을 표현하는 절실한 방법은 밥을 해 먹이는 일밖에 없다. 그러니 한 숟갈이라도 덜 먹어 다이어트를 실천해야 한다는 지금 처녀들과 한 숟갈이라도 더 먹이지 못해 안달하는 할머니들은 승강이를 벌일 수밖에 없다.
이건 압축성장의 대표국인 우리나라에만 있는 현상일까. 모처럼 밥을 국에 덤벙 말아버리는 할머니를 보면서 이야기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 친숙한 동작 때문에 나는 지레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바다 깊이 잠수했던 것도, 고모 집에 얹힌 것도, 부모 몰래 집을 떠난 것도 배부르게 밥을 먹기 위한 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다. 그 많은 동생을 배곯려서는 안 된다는 누이로서의 의젓한 사랑이 시킨 일이었다.

열 일곱에 가족과 생이별을 한 김수해 할머니. 어머니는 임종 순간까지 수해를 찾았다.
“일반차가 아니라 짐칸 같은 찹디다…. 창문이 하나도 없습디다. 덜컥거리며 가기는 가지만 내다볼 수가 없으니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그냥 며칠을 그 안에 갇혀서 차를 타고 간 거 같소. 그게 암만해도 군용차 같앴소. 보진 못해도 딴 칸에 군인이 가득 타고 있었던 갑소. 우리 중에 얼굴 반반한 몇은 기차 안에서 벌써 어디론가 끌려나갔다 옵디다. 돌아와서 엎드려서 울어싸요. 그게 뭘 뜻하는지 알겠데요. 들은 적은 없어도 왜 우는지 다 알아지데요…. 기가 딱 찹디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요. 어데로 도망갈 수가 있었것소?”
며칠 후 기차를 내렸다. 혹은 그냥 하루만이었는지도 모른다. 얼마만큼 시간이 흘렀는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극도의 공포와 극도의 절망 속에 기차에서 내리자 일찍이 한 번도 맞아본 적 없는 찬바람이 귀때기를 때리며 지나갔다. 여기가 시베리아라는 데구나 싶었다. 1944년 10월이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다니
“알고 보니 목단강이었습네다.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 제1신시가지. 산 밑에 허름한 가건물이 죽 늘어서 있데요. 군부대가 주둔한 것 같앴어요. 우리들을…, 그걸 머라고 합니까? 환자를 치료하는 사람 있잖소? 아, 의무병이라고 칭했습네다. 너희들은 군대다, 군대 중에서도 의무병이다, 의무병으로서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3년만 임무를 완수하면 집으로 보내준다, 돈도 줄 것이다, 얼른 전쟁에 이겨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동안 잘 싸워달라고 했습네다.”
난 정말 물어볼 게 많았다. 우선 그 말을 한 사람의 신분이 뭔지, 도착한 후 기분이 어땠는지, 처녀들의 나이는 얼마 정도인지, 몇 명쯤인지, 거기까지 온 경위를 서로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지, 외모는 평균 이상이었는지, 머리는 어땠는지, 옷이나 화장품을 나눠줬는지, 먹을 것은 충분했는지, 군인은 하루 몇 명쯤 왔는지. 얼마나 머물렀는지, 혹 우정이나 사랑 비슷한 게 생길 틈은 없었는지, 몇 푼이라도 돈을 받은 적은 있는지 등등등.
“내 차근차근 다 얘기할 끼요. 내 죽으면 누가 그걸 말하겠소. 일본 총린가 뭔가 하는 놈, 그 아벤가 뭔가 하는 놈이 우리를 동원한 적이 없다고 한다믄서요? 내가 날마다 아홉시 뉴스는 빼놓들 않고 보요. 내가 당장 일본에 달려가서 허파를 뒤집어 보이고 싶제마는…. 자식들하고 조카들 눈이 있어 가질 못해요. 까짓꺼 이야기사 왜 못하것소? 다만 내 이름자를 말하지는 마시오. 우리 아부지가 특별하게 지어준, 얼마나 뜻이 좋은 이름인데…. 말해뻐리면 자식들이 내 일을 다 알 꺼 아이요?
하긴 알아도 상관없소. 내 인제 얼매나 살 끼라고. 그 안에서 맞아 죽는 것도 봤고 목매 죽는 것도 봤소. 그런데 사과는 못할 망정 그런 일이 없었다니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놈들…. 일본이 망하는 걸 내 눈으로 봐야 하는데. 내 몸 한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