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과 야망’의 미자 떨쳐내기까지 긴 시간 필요
- ‘한 큐’에 빠지는 사랑, 그런 작품 만났으면
- 사랑과 야망 중에 하나만 택하라면…야망이죠
- 악성 댓글로 마음고생…쓴 것 삼키는 법도 배워
- 외로움 못 견뎌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고 있지만…
1998년 영화 ‘태양은 없다’로 데뷔하면서 금세 톱스타 반열에 올랐지만, 기자가 ‘한고은’이라는 이름 석 자를 기억한 것은 2004년쯤이었다. 물론 그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굳이 이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가요 프로그램을 보다보면 섹시한 여가수가 줄지어 나오지만 ‘쟤가 지난 주에 본 그 가수인가’ 하는 궁금증 없이 그냥 그 순간만 즐기는 것 말이다.
그런데 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에서 고두심의 둘째딸로 나온 한고은은 분명 ‘연기자’로 다가왔다. 이전 드라마에서 보여준 ‘박제된 관능미’가 아닌, 살아 있는 인물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지난해엔 드라마 ‘사랑과 야망’에서 물오른 연기를 보여줬다. 그가 ‘미자’역에 캐스팅되자 언론은 ‘미스캐스팅’이라고 혹평했다. 하지만 드라마가 중반을 넘어서면서 그는 미자의 불안정한 심리를 공감 가게 빚어내며 시청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고은은 정말 복잡한 정서를 가진 여자,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이해가 가는, 괜시리 연민을 자아내는 여린 미자 그 자체였다.
드라마가 끝난 후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막 활동을 재개한 그를 만났다. 토요일 오후 6시 강남구 청담동. 주말 이 시간에 여유 있게 사진촬영을 하고 이야기를 나눌 만할 곳을 찾기는 어려웠다. 결국 영업 중인 카페에서 사진촬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탁 트인 실내라 카페를 찾은 사람들의 이목이 부담스러울 법한데도 그는 촬영을 위해 과감한 포즈도 서슴지 않았다.
치유의 시간들
한고은은 ‘사랑과 야망’ 초기에 ‘미스캐스팅’이란 비난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미자의 불안정한 심리를 공감 가게 그려내며 호평을 받았다.
▼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서 촬영하는 게 오랜만이죠?
“그런 것 같네요. 스튜디오보다 이런 데가 더 좋아요. 활용할 것도 많고, 공간도 다양하고, 재미있어요.”
▼ 드라마에 나올 때보다 얼굴은 많이 좋아졌는데, 조금 피곤해 보이기도 하네요.
“놀다가 요 며칠 움직여서 그런 것 같아요. 몸이 아직 덜 풀렸다고 할까요.”
▼ 배우들은 보통 쉬면서 몸을 만든다는데, 운동은 안 좋아하나봐요.
“어머, 제 몸매를 유심히 보셨나봐. 그래요, 저 살이 좀 쪘어요(웃음). 이제 관리를 좀 해야죠. 등산도 다니고 그러려고요. 이문세 선배가 하는 등산모임을 알게 돼서 오늘 등산장비도 구입했어요. 저 산 좋아하고 잘 타요. 보기보다 ‘깡다구’가 있거든요.”
▼ 드라마 ‘사랑과 야망’이 끝나자마자 미국에 갔다고 들었는데.
“바로 간 것은 아니고, 한 달가량 한국에 있다가 12월 중순에 갔어요. 5주 정도 머물다가 돌아왔죠. 와서도 계속 쉬었어요. 사람들도 안 만났어요. 그냥 현실에서 도피했다고 할까. 아무 생각 없이 나 자신을 백지 상태로 만드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그러다 2주 전 다시 일을 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요즘은 광고도 찍고 시놉시스도 보면서 다음 작품을 고르고 있어요.”
▼ ‘백지 상태’로 만들어야 할 만큼 ‘사랑과 야망’의 후유증이 컸나봅니다.
“그럼요. 1년 정도 촬영을 했으니까요. 뭐랄까, 다른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해서는, 한고은이란 캔버스에 다른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먼저 제 자신이 깨끗한 도화지가 돼야 하는데, 여전히 미자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것을 떨쳐낼 시간이 필요했어요.”
▼ 이전에도 그런 경험이 있나요.
“이번이 유난했죠. 미자라는 인물이 워낙 감정기복이 심하기 때문에….”
▼ 한고은씨가 우울증을 앓았다는 얘기도 있었죠.
“배우에겐 때로 그런 상태가 와요. 드라마를 시작하면 ‘나’ 한고은으로 사는 시간보다 드라마 속 캐릭터로 사는 시간이 더 길어요. ‘나’로 돌아오는 시간은 잠잘 때말고는 없어요. 계속 대본을 보며 미자 캐릭터에 몰두하다보니 그 캐릭터가 평소 생활에 묻어나요. 더구나 미자는 늘 우울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해서 그런 감정을 유지하려면 즐겁고 행복한 생각을 할 수가 없었어요. 우울한 분위기만 유지하다보니 나중엔 정말 우울해지더군요.”
▼ 다른 배우들은 캐릭터에서 벗어나기 위해 책도 읽고 여행도 한다고 들었어요.
“드라마가 끝난 뒤 한동안은 그저 멍했어요.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 공황기가 왔다고 할까. 책을 펴기조차, 여행을 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 몇 개월 가더군요. 그게 아마 저 나름으로 미자란 캐릭터에서 벗어나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뒤늦게 깨달은 연기의 맛
▼ 드라마 ‘사랑과 야망’에서, 정말 ‘어느 순간’이란 표현이 어울릴 것 같은데, 어느 순간 한고은이 아니라 미자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칭찬도 쏟아졌고.
“솔직히 그런 칭찬을 받아들일 여유도 없었어요. 그전에 질타가 쏟아질 때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지금 내가 쥔 대본에만 빠져들자. 평가는 대본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생각하자’는 마음가짐 덕이었어요. 그러니 주위에서 칭찬을 해도 기쁘지 않았어요. 그보다는 당장 내가 헤쳐 나가야 할 것들, 대본 외우고 감정 조절하는 게 더 중요했어요.”
▼ 열연을 했지만 방송사가 연말에 주는 상을 하나도 못 받았는데 섭섭하지 않았어요?
“상은 제가 주는 게 아니잖아요. 다음에 더 좋은 작품으로 ‘왜 내가 상을 못 받았지?’ 하고 섭섭해할 정도로 열심히 하고 싶어요. 이번엔 스스로 평가하기에 많이 부족했어요. 요즘 케이블방송에서 ‘사랑과 야망’을 재방송하는데, 처음엔 차마 못 보겠더군요. ‘왜 저렇게 했을까, 그게 아닌데…’ 싶은 대목이 너무 많아요. 배우는 누구나 그럴 거예요.”
▼ 드라마를 끝내면서 “여전히 배가 고프다”는 말을 해서 곧 다음 작품을 할 줄 알았는데, 휴식 기간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기자들이 종종 ‘다음엔 어떤 캐릭터를 하고 싶냐’고 묻는데, 제게는 잘못된 질문이에요. 저는 맡아본 캐릭터가 그다지 많지 않아요. 늘 한고은이라는 기존의 이미지와 비슷한 캐릭터가 들어와서 정말 아직도 배가 고프고,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그래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계속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뜻에서 한 말이었지 금방 다른 작품을 하고 싶다는 게 아니었어요. 서두르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요. 다음 작품은 뭔가 재미있는 역할, 과거의 한고은이 보여주지 못한, 또는 보여줬지만 더 부각할 수 있는 맛깔나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한고은은 인터뷰 내내 거리낌없이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보디가드’의 유진 역이 재미있었고, ‘꽃보다 아름다워’의 미수 역도 그랬어요. ‘꽃보다 아름다워’는 제가 처음으로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나온 드라마였어요. 가족이란 서로 살을 비비고 엄마가 있고 동생이 있고 사랑이 있고…그런 건데 그게 제겐 생소했어요. 제가 내뿜는 도시적 이미지, 깔끔하고 딱 떨어지는, 항상 남의 남자를 뺏기 위해 도전하는 역할에서 한층 더 깊이 들어가는 역할이었어요. ‘보디가드’의 유진은 말이 없지만 강한 내성을 가진 여자죠.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게 사랑해야 하고 미워하지만 미워하지 않게 미워해야 하는 내면이 있었어요. 액션도 많았고요. 그래서 매력이 있었어요. 그런 작품을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작품을 만나는 게 꼭 사랑을 만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랑은 ‘한 큐’라고 하잖아요. 어떤 사람을 10년을 알고 지내도 사랑하게 되는 건 한순간이거든요. 한순간 사랑에 빠지는 시놉시스가 내 손에 쥐어지길 바라고 있어요.”
‘소심한 B형’
▼ 슈퍼모델 선발대회에 참가하면서 연예인이 됐죠?
“슈퍼모델 이야기는 안 하면 안 될까요. 꼭 알고 싶으세요? 그 얘기, 하고 싶지 않아요. 그걸로 데뷔한 게 아니라 한참 뒤에 시작했거든요.”
▼ 연기는 영화로 시작했죠.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을 배우로서 업그레이드해준 작품을 꼽는다면?
“처음에 모델을 하다 어떻게 해서 이쪽 일을 하게 됐는데, 제가 연기를 하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감히 내가 어떻게?’라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기회가 주어졌어요. 연기를 하기 위해 무명시절 10년, 20년을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피나는 노력 끝에 올라온 선배님들도 있는데, 전 그냥 어느 날 돼버렸기 때문에 감사할 줄을 몰랐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생활이 처음엔 힘들기만 했어요. 사람들에게 얼굴과 이름이 알려졌지만 보람은 없었어요. 그러다 여러 가지 문제가 겹쳐 1년 반 정도 쉬었는데, 문득 ‘연기가 하고 싶다’는 욕구가 솟으며 가슴이 뜨거워지더라고요.
그때 ‘보디가드’에 출연해보라는 제의를 받았어요. 대본을 보니 정말 작은 역할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하고 싶었어요. 이전에 제가 한 역할과 너무나 다른 그 인물이 신선하고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당시 다른 드라마 주연 제의도 들어온 상태였는데 그걸 포기하고 이걸 하겠다고 했어요. 이 역할은 내가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매니저는 저보러 ‘미쳤다’고 했죠. 결국 끝까지 우겨서 하게 됐는데, 스스로 열정이 느껴지는 걸 하면 잘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기대했던 것보다 좋은 모습을 보여줘서 역할 분량도 예정보다 늘어났고 호평을 받았어요.
그때 정말 죽기 살기로 했어요. ‘다찌마리(액션)’ 신이 많았는데 여자라고 봐주지도 않았어요. 너무 힘들어서 많이 울었어요. 차 안에 뿌리는 파스를 5, 6통을 넣고 다녔고, 매일 한의원을 들락거렸어요. 지금 보면 ‘아유, 왜 저래’ 하는 부분이 많지만, 작품 끝내면서 스스로 ‘고은아 수고했다’고 했지요. 그러면서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어요. 뭔가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 개인적으로는, ‘꽃보다 아름다워’에서의 연기가 인상적이었어요.
“그 드라마에서도 제 분량은 적었어요. 워낙 쟁쟁한 연기자가 여럿 출연해 과연 그 틈에서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고요. 동시에 얻을 게 참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너무나 큰 가르침을 받았어요. 처음으로 이런 걸(몰입 상태) 느꼈어요. 상대와 대사를 치고받는데, 촬영 때 주위에 보통 30~40명의 스태프가 있어요. 그런데 그들이 보이질 않는 거예요. 오직 상대방의 눈과 마음만 보였어요. 컷 소리도 안 들렸어요. 그때 처음으로 ‘아, 연기란 게 이런 재미로 하는구나’ 하고 느꼈어요. 어떤 이들은 ‘연기자가 준비된 후에 나와야지, 연기를 하면서 배운단 말이냐?’고 쏘아붙여요. 솔직히 좀 찔리죠. 그래도 어렵게 배운 만큼 더 많이 깨닫고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자고 다짐해요. ‘사랑과 야망’을 찍으면서 ‘사랑과 야망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뭘 택할 거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저는 지금 주저없이 야망을 택하겠다고 할 만큼 일 욕심이 커졌어요.”
▼ 평생 연기를 하겠다는 각오로 들립니다.
“솔직히 제가 연기를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죠. 평생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전에는 다른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젠 제가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는 없어졌어요. 할 줄 아는 걸 잘해야죠.”
▼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는 것하고, 하고 싶은 게 이것밖에 없는 것하곤 다르죠.
“어쩜 그렇게 직설적으로…(웃음).”
▼ ‘악플(악성 댓글)’ 때문에 속 많이 상했죠?
“전에는 그랬어요.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게 사실이 아닌 소문이 나는 거예요. 저만큼 언론에 많이 오르내린 사람도 없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초연해졌어요. 물론 신경은 쓰여요. 제가 아주 소심한 B형이라 누가 한마디 던지면 그걸 들고 일주일씩 고민하거든요. 그래도 이젠 단 것, 쓴 것 나름대로 다 삼키는 법을 배웠다고 할까요.”
어머니의 손톱
▼ 중학교 1학년 때 이민을 갔는데, 어릴 때 집이 부유하지는 않았나봐요? 1980년대에 연탄을 때고, 심지어 나무도 땔감으로 썼다고 하던데.
“어디에 그런 이야기가 나와요? 나무는 왜 때요? 아이구 진짜, 저 서울에서 살았거든요. 어릴 때 아주 가난하게 살았다고 쓰고 싶은 거죠?(웃음) 아버지가 사업을 하셨어요. 그래서 아주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집안 형편이 ‘업앤다운’이 잦았어요. 굳이 힘들게 살았다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저는 부모님께 용돈 달라고 하는 게 싫었어요. 그래서 중3 때부터 용돈은 스스로 벌었어요. 한국에 있을 때는 이사를 많이 다녔어요. 초등학교 6년 동안 전학을 8번 다녔기 때문에 졸업사진도 없고 ‘해피투게더’에 나가 찾을 친구도 몇 안 돼요.”
▼ 어머니가 봉사활동을 많이 했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지금도 하세요. 저는 조금 ‘날라리’지만, 어머닌 신앙심이 깊어요. 그런데 얼굴 알려지는 게 싫어서 제가 딸이란 걸 절대 밝히지 않으세요. 하루는 매니큐어 바르는 법을 알려달라고 하셔서 왜 그러시냐고 하니까 손톱이 부러져서 아프대요. 보니까 손이 다 짓무르고 손톱이 온통 갈라졌어요. 물을 많이 만져서 그렇다는 거예요. 속상하죠. 이젠 여행도 하면서 편하게 사셨으면 좋겠는데…. 어머니는 당신이 자식에게 물려줄 게 없어서 살아 있는 동안 좋은 일 많이 해서 덕을 쌓으면 그거라도 자식에게 돌아가지 않겠냐고 하세요. 그런 마음이니 말릴 수가 없더라고요.”
▼ 같이 봉사활동을 하기도 합니까.
“아직까진 그런 적 없어요. 우선 어머니가 싫어하시고. 저도 어머니가 구체적으로 뭘 하시는지 최근에야 알았어요. 미국에서 살 땐 제가 어렸고 제 생활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벅차 엄마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어요. 한국에 와서도 아기자기하게 이야기할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부끄럽지만 제가 참 무뚝뚝한 성격이라 어머니랑 깊은 이야기를 잘 못해요. ‘어디 갔다 왔어?’ ‘왜 이렇게 늦었어?’ 하고 물어서 어머니가 ‘○○교도소 갔다 왔다’고 하시면 ‘아 그래요’ 하고 말아요.”
▼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면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을 텐데.
“그런 일도 연이 닿아야 하는 건데, 그동안 연이 안 닿았어요. 이번에 조금씩 연이 닿아서….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서 ‘그게 뭐냐’고 물어보지 마세요. 그래도 안 가르쳐줄 거예요. 그런 건 말하는 거 아니에요.”
마흔의 꿈
일부 인터넷 사이트에 그의 생년이 1977년으로 나와 있다. 77년생이면 올해로 꼭 서른이다. 그래서 서른을 보내는 심경과 마흔에 대한 기대를 물었다. 그런데 그는 1975년생이라고 했다.
“열여덟 살 어느 날, 제 자신이 먼지처럼 작고 부질없게 느껴졌어요. 지금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아무 일 없을 것 같은 그런 느낌…. 그게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한고은이란 친구가 이 세상에 잠시 살았다는 걸 많은 사람이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스무 살 생일에 서른 살이 됐을 때를 생각했어요. 앞으로 10년 동안 내가 하고 싶은 일들, 막연하지만 이루고 싶은 일들을 쭉 적어봤죠. 그런데 서른 살 생일에 보니까 90%는 이뤘더라고요. 아득바득 살면서 지난 10년을 허비하지는 않았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서른 살 생일엔 마흔 살이 됐을 때 이루고 싶은 것을 적어봤어요. 솔직히 이룰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현재를 미친 듯이 전투적으로 살아내면 미래가 밝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이 하루가 10년 후 마흔 살 한고은을 만들겠죠.”
▼ 마흔에 이루고 싶은 게 뭔가요?
“말 안 해요. 그걸 말하면 안 이루어져요.”
▼ 그럼 서른에 이루고 싶었던 꿈은 뭐였나요?
“내 집을 갖고 싶었고, 안정된 일을 하고 싶었고, 성공하고 싶었고, 부모님께 좋은 것을 해드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결혼을 하고 아이도 있을 줄 알았어요. 또…여행하고 싶은 나라가 몇 나라 있었고요. 신문에 오르내리는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어떻게 오르내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신문에 오르내리고 있고(웃음)…. 결혼만 빼고는 대부분 이룬 것 같아요.”
▼ 결혼은 ‘마흔의 꿈’에도 들어갔겠군요.
“아뇨. 결혼은 포함시키지 않았어요. 그것만은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세상을 다 가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뭔가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결혼을 위해 일을 포기하고 싶진 않아요. 사랑이라는 행운이 찾아온다면 사랑을 하고 싶지만, 지금은 미자처럼 선택하고 싶어요.”
▼ 외로움을 견뎌내는 부류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는 부류가 있는데, 어느 쪽인가요.
“저도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고 있답니다.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지 마세요. 아직 좋은 소식은 없거든요.”
▼ 혼자 있을 때는 뭐해요?
“영화 보는 걸 좋아해요. 그런데 극장에 가는 건 안 좋아해서 집에서 DVD로 봐요. 나흘 동안 영화 32편을 본 기록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