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호

부산국제영화제 15년 산증인 김동호집행위원장

  • 글 / 구가인 동아일보 영상뉴스팀 기자 comedy9@donga.com 사진 / 연합뉴스

    입력2010-11-03 16: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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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국제영화제 15년 산증인 김동호집행위원장
    그의 수첩에는 검정, 빨강, 파랑 글씨로 매일의 스케줄이 담겨 있다. 영화제가 열리기 직전 어느 날에는 그가 이른 아침 포럼에 참석했고 오찬을 한 후 네 건의 인터뷰를 소화했으며, 부산과 서울을 오가는 약속에 참석했다고 빼곡히 기록돼 있다. 해외출장도 적지 않았다.

    “빨간색 글씨는 비행기 탄 시간이에요. 1년에 절반은 해외에 나가 있었죠.”

    김동호(73)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지난 15년간 수첩을 그렇듯 빼곡히 채워 보냈다. 매년 10여 개가 넘는 해외영화제와 관련 행사에 참석해 세계영화인들에게 부산국제영화제와 한국영화를 소개했다. 그 노력 덕에 지난 15년 동안 영화 불모지였던 부산도 변화를 거듭했다. 부산시 지원금 3억을 포함해 총 22억원의 예산으로 시작한 영화제는 이제 그 다섯 배인 99억원 규모의 아시아 대표 영화제가 됐다.

    부산국제영화제를 만들고 지금까지 이끌어온 김동호 위원장이 올해 영화제를 끝으로 사퇴했다. 10회 영화제 때부터 사퇴 의사를 밝혔지만 주변의 만류로 한동안 위원장직을 유지했던 그는 “올해가 적기라고 판단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꼭 이루겠다는 집념으로 추진한 게 부산영상센터 두레라움인데, 내년이나 내후년 개관을 앞두고 있어요. 이제는 기반이 확보됐다고 판단해요. 제가 없어도 젊은 사람들이 맡아서 다음 영화제, 도약하는 영화제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1961년 문화공보부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김 위원장은 영화진흥공사 사장과 문화부 차관 등 전형적인 관료의 길을 걸었지만 영화인을 비롯한 예술인에게 존경받는 어른이기도 하다.

    1988년 영화진흥공사 사장으로 부임했을 당시에는 낙하산 인사라며 영화인들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이후 남양주 종합촬영소 건립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며 신뢰를 얻었다. 국내 영화인들은 물론 티에리 프레모 칸영화제 집행위원장과 대만의 허샤오셴 감독 등 해외영화인들과도 자신의 이름 마지막 자(虎)를 딴 ‘타이거 클럽’을 결성할 정도로 깊은 친분을 나눴다.

    “비결은 특별히 없어요. 소탈하게 성심껏 대하고 저녁자리든 술자리든 같이 어울리다보면 친해질 수밖에 없죠. 외국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오면 포장마차 데려가고 한국의 술 나누는 습관이다 해서 잔 주고 받게 하고 다 마시면 털게 하고 폭탄주 나누면서 러브샷 시키면 그 사람들도 동화돼버리니까요.”

    어렵게 시작한 1회 영화제 개막식에서 대형스크린이 올라가던 순간과 해운대 백사장에서 영화인들과 나누던 술자리, 택배 오토바이 뒤에 타고 남포동 일대를 누비던 일들이 모두 잊지 못할 추억이라고 말하는 김 위원장은 박수 받으며 떠난 흔치 않은 수장으로 기록됐다.

    그는 영화제 집행위원장을 그만둔 이제 제3의 인생을 준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삶의 1기가 공직생활이었고 2기는 영화인 혹은 영화행정가 정도로 본다면 3기는 예술인으로 살고 싶어요. 20년 가까이 영화계에 몸담았으면 영화 한두 편은 만들어야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있죠. 현장에서 예술을 직접 체험하는, 예술인이 되는 게 제3의 인생이 아니겠는가 싶어요. 너무 욕심이 많지만. 하하.”



    He & S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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