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은 물론 아시아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구혜선이‘ 대형사고’를 쳤다.
- 소설책도 내고 그림 전시회도 열고 디지털 싱글 음반도 내고 직접 메가폰을 잡은 영화도 세상에 내놨다.
- ‘무한도전’팀 저리 가라다.
2009년을 뜨겁게 달군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헤로인’ 구혜선(27). 최근 2년간 그녀의 행보는 확실히 대형사고 수준이다. 그녀는 자신을 한류스타 반열에 올려놓은 ‘꽃보다 남자’가 끝나자마자 연기가 아닌 새로운 영역에 잇따라 도전장을 내밀었다. 성공한 연기자 앞에 펼쳐진 탄탄대로를 뒤로한 채.
2009년 4월, 작가 데뷔작인 소설 ‘탱고’ 출간은 서막에 불과했다. 같은 해 7월 동명의 그림 전시회를 열고 화가로 주목받은 그녀는 2010년 6월엔 자작곡 ‘갈색머리’를 직접 노래한 디지털 싱글 음반을 발표했다. 어디 그뿐인가. 단편영화 ‘유쾌한 도우미’(2008)와 장편영화 ‘요술’(2010)을 내놓아 감독으로서의 가능성도 인정받았다.
한 사람이 불과 2년 남짓한 시간에 이토록 많은 일을 해내다니, 그녀는 가히 MBC 인기 프로그램 ‘무한도전’팀에 견줄 만하다. 하지만 왜 굳이 편한 길을 놔두고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고행을 자처한 것일까. 본업인 연기를 제쳐둘 만큼 작가나 뮤지션이나 영화감독으로서의 창작활동이 절실했을까.
어둠이 짙게 깔린 1월31일 밤, 많은 궁금증을 안고 만난 구혜선의 첫인상은 ‘무한도전’의 주인공이기보단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소녀에 가까웠다. 화보촬영 중에는 꿀 먹은 벙어리더니 인터뷰가 시작되자 자분자분 말도 잘했다.
무대공포증, 연기로 떨치다
▼ 어쩌다 연기 아닌 것에 몰두하게 됐나.
“연기하느라 내 안에 가둬뒀던 것들을 하나씩 꺼내 보이고 싶었다. 원래 연기자가 될 생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친구들도 그림 그리는 아이 정도로 기억할 거다. 그림대회에서 상도 타고 그랬으니까. 부모님은 공부 잘하는 아이로 커주길 바랐지만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중3 때부터는 작곡에 빠졌다. 피아노로 작곡한 노래들을 연예기획사에 보냈더니 고1 때 소속사가 생겼다. 그때부터 몇 년간 연기수업을 받았다.”
▼ 연기자로 데뷔하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나.
“아니다. 그때는 가수지망생이었다. 연기수업을 받은 건 남 앞에 나서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과 무대공포증을 고치고 싶어서다. 당시에는 무대에만 오르면 의기소침해지는 트라우마가 있었다. 연기는 YG엔터테인먼트로 소속사를 옮기면서 우연히 시작했다. 연기수업 받은 것이 많은 도움이 됐다.”
인천 부평여고 재학시절 인터넷 얼짱스타로 주목받은 그녀는 2002년 컴퓨터 CF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2004년 KBS 드라마시티 ‘아나그램’으로 연기에 입문한 뒤에는 시트콤 ‘논스톱5’와 ‘서동요’ ‘열아홉 순정’ 등의 드라마를 통해 밝고 건강한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 무대공포증을 앓았다니, 의외다.
“연기하면서 성격이 많이 활달해졌다. 학창시절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다. 선생님이 내가 있었는지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고. 친구도 많지 않다. 사람 사귀는 데 서툴다. 소속사에도 특별히 친한 연예인이 없다. 연예인 중 ‘절친’은 남상미, 한효주 정도다. 남상미는 얼짱스타로 같이 주목받은 동갑내기 친구고, 한효주는 ‘논스톱5’ 하면서 친해진 동생이다.”
▼ 한번 인연을 맺으면 오래가나 보다. YG엔터테인먼트의 1호 연기자로 벌써 8년째 양현석 대표와 함께 일하고 있지 않나.
“우리 회사는 연예인의 선택을 존중해주고 감시하거나 억압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간섭하지 않는다. 아껴주는 느낌이 든다. 한번은 화보집 제의가 들어왔다. 노출이 좀 심한 콘셉트의 화보집이었다. 대표님과 회사 관계자들은 화보집 촬영이 내 인생에 꼭 필요한 작업인지 아닌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진지하게 고민해줬다. 참 따뜻하고 고마웠다.”
▼ 가족 같은 느낌인가. ‘YG패밀리’라고들 하지 않나.
“가족이라기보다는 훌륭한 파트너라는 생각이 든다. 회사 경영이 굉장히 투명하다. 야박하다 싶을 정도다. 10원 단위까지 (수입과 지출을) 정확하게 기록해두기 때문에 서로 오해할 일이 없다.”
▼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싶은 일은 뭔가.
“모두 좋아하지만 하나를 꼽으라면 영화다. 연기를 할 때도, 그림을 그릴 때도, 작곡을 할 때도 왠지 모르게 공허했는데 영화를 만들 때는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영화는 무엇보다 간섭받지 않고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어서 좋다.”
인생의 엔도르핀, 영화
그녀에게서 영화감독의 끼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지금은 고인이 된, 영화사 ‘아침’의 정승혜 대표다. 정 대표는 구혜선이 자신의 모든 예술적 재능을 영화라는 종합예술 안에 녹여낼 수 있도록 이끌어준 스승이자 그녀의 롤 모델이다.
“25살 때 내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시기에 정 대표님을 만났다. 대표께 연기자가 되기 전에 쓴 시나리오 몇 편을 보여드린 적이 있는데 바로 집어던지셨다. 그러고는 ‘이러니까 안 되는 거다. 네가 가진 것들을 네 안에 가두지 말고 밖으로 꺼내서 세상과 공유하라’고 조언해주셨다.”
정 대표는 이후 구혜선에게 단편시나리오와 콘티, 음악 등을 만들어올 것을 주문했다. 구혜선은 영문도 모른 채 군말 없이 따랐다. 모든 과제를 끝내자 정 대표가 드디어 속내를 드러냈다.
“이제 됐네. 이것들로 영화 만들어봐.”
구혜선의 감독 ‘입뽕’(데뷔)작인 ‘유쾌한 도우미’는 그렇게 탄생했다. 구원받기 위해 성당을 찾은 한 남자의 일주일을 담은 영화다. 연출은 물론 각본 작곡 편집 미술까지 도맡은 구혜선의 1인 5역으로 관심을 모은 이 작품은 2009년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 관객상에 이어 지난해 일본 쇼트쇼츠 국제단편영화제에서 화제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예술학교를 배경으로 젊은 음악가들의 경쟁과 사랑을 그린 그녀의 첫 장편영화 ‘요술’도 지난해 전주영화제에 초청돼 ‘웰 메이드 청춘영화’라는 호평을 받았다. 이 작품은 도쿄국제영화제 ‘아시아 중동 파노라마 섹션’에 강우석 감독의 ‘이끼’와 나란히 초청돼 최우수 아시아 영화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 영화 작업 중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나.
“눈이 오는 장면을 ‘요술’에 꼭 담고 싶었다. 폭설이 내리던 때라 쉽게 될 줄 알았는데 촬영 당일에는 눈이 오지 않았다. 공교롭게 주인공인 임지규씨도 많이 아팠다. 하는 수 없이 촬영을 이튿날로 미뤘는데 그날은 눈이 펑펑 왔다. 정말 요술 같았다.”
▼ 감독을 해보니 감독 심정 알겠던가.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게 됐다. 감독의 고충도 헤아리게 되고, 배우와 스태프의 의견도 존중하려고 노력한다. 좋은 영화는 팀워크에서 나온다. 감독은 권력자가 아니라 전체적인 조화를 이끌어내는 지휘자 같은 존재다. 이 점을 간과하고 감독 개인의 욕심을 팀워크보다 앞세우면 탈이 나게 마련이다.”
▼ 연기와 연출 중 어느 것이 더 힘든가.
“둘 다 힘들고 재미있다. 다만 스트레스 받는 걸로 치면 연기가 더하다. 연기할 땐 자신을 버리고 새 생명을 담아야 하니 감정을 꾹꾹 누르고 숨겨야 한다. 가장 힘든 건 기다림이다. 연기자는 5분의 촬영을 위해 8시간을 기다릴 때도 있다. 지금은 노하우가 생겼지만 연기 초년병 때는 그 시간이 너무 괴로웠다. 언제 불려갈지 모르니까 내내 긴장하고 있었다.”
▼ 노하우가 뭔가.
“노트북을 가지고 다니며 시나리오를 쓴다.”
▼ 다른 영화를 준비하고 있나.
“올해 또 다른 장편영화를 만들려고 한다.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갈 때 나와 함께 일하는 제작진이 모일 거다. 영화사도 만들었다. ‘구혜선 필름’이라고(웃음). 정 대표가 지어준 이름이다.”
자연인 구혜선을 엿보다
▼ 스태프와 잘 지내나.
“친해지려고 많이 노력했다. 같이 술자리하면 새벽까지 가고.”
▼ 술 잘하나 보다.
“잘 못 마시는데 악으로 깡으로 버텼다. 요즘은 몸이 배겨내지 못해 적당한 시점에 먼저 일어난다. 애초에 주당들과 ‘맞짱’ 뜬 자체가 무모한 도전이었던 것 같다(웃음).”
▼ 기분 좋은 주량이 어느 정도인가.
“소주 한 잔, 맥주도 한두 잔 정도가 딱 좋다.”
▼ 연기자가 된 것을 후회해본 적이 있나.
“20대 초반에는 주위의 시선 때문에 마음대로 다닐 수 없는 것이 삶의 불편함으로 느껴졌다. 나이 어린 연예인들은 비슷한 고민을 하더라.”
▼ 대신 큰 대가를 받지 않나.
“다른 일을 하는 친구들보다 수입이 많은 건 사실이다. 그래서 20, 21살 때는 허황된 소비를 많이 했다. 좋은 차도 사고, 명품도 막 사들이고, 신지도 않은 신발이 수두룩했다. 연예인이니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어느 순간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원래 겉치장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시 내 모습을 찾기까지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 돈을 주로 어디에 쓰나.
“가방을 잘 산다. 크고 주머니가 많은 가방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노트북이며 온갖 생필품과 의약품까지 갖고 다니다 보니 큰 가방을 좋아한다. 액세서리나 옷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1만원짜리 티셔츠를 입으면 어떤가. 잘 어울리고 편하면 되지.”
▼ 요즘도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한가.
“개의치 않는다. 지하철도 종종 이용한다. 모자를 푹 눌러쓰면 알아보는 사람도 없다.”
▼ 혹시 집에서 가장인가. 연예인 중에 가장이 많더라.
“가장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퇴직하셨고 어머니는 주부다. 1년여 전에 문 연 갤러리 카페는 언니와 형부가 운영하고 있다.”(구혜선은 2009년 가을 서울 반포동 서래마을의 복층 주택을 개조해 ‘마놀린’이라는 갤러리 카페를 열었다. 자신이 그린 작품을 전시해 팬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다. 처음에는 1,2층 모두 갤러리 카페로 썼지만 지금은 1층을 그녀의 영화사로 사용하고 있다.)
▼ 가장으로서 고충이 있다면.
“수입이 늘어난 만큼 지출도 늘었다. 풍족하진 않았어도 아버지 월급으로도 그럭저럭 살았는데 수입이 많아지니까 나뿐 아니라 가족들의 씀씀이가 커졌다. 전처럼 소박하게 살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가족들이 막 지르지 못하게 단속한다(웃음).”
▼ 수입은 누가 관리하나.
“내가 한다. 그동안에는 여기저기 나간 돈이 많아서 제대로 모으지 못했다. 앞으로는 저금도 열심히 하고 잘 모아보려고 한다.”
‘꽃보다 남자’ 그리고 사랑
연기자의 수입은 출연한 작품의 히트 여부와 직결된다. 작품이 뜨면 연기자의 몸값도 뛰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구혜선은 운 좋은 연기자다. 그녀가 출연한 작품은 대부분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특히 그녀에게 부와 명예를 동시에 안겨준 ‘꽃보다 남자’는 방영 막바지에 시청률이 35%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다시 그런 작품을 할 수 있을까 싶다.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을. 일본과 대만에서 이미 화제가 된 작품이라 어느 정도 기대치는 있었지만 그렇게 열렬한 사랑을 받을지는 몰랐다. 매일 감사한 마음으로 일기를 썼다. 하루하루가 그저 감사했다. 덕분에 광고도 많이 찍었지만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 어떤 아쉬움인가.
“연기에 대한 아쉬움이다. 해외 촬영이 미리 잡혀 있어서 13, 14회부터 찍고 1,2회를 찍었다. 감정이 잡히지 않은 상태로 먼저 후반부를 찍다 보니 연기력 논란이 좀 있었다. 처음부터 순차적으로 촬영에 들어갔다면 연기를 더 잘했을 것 같다.”
‘꽃보다 남자’에서 그녀는 작은 세탁소집 딸로 평범하게 자란 여주인공 금잔디를 열연했다. 금잔디는 우월한 외모와 재력을 겸비한 꽃미남 4인방 ‘F4’에게 아무리 밟혀도 기죽지 않는 꿋꿋함과 불굴의 생활력으로 맞서는 당찬 캐릭터다.
▼ 평소 모습도 금잔디와 닮았나.
“당시에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금잔디에 빙의돼 살았던 것 같다(웃음).”
▼ F4(구준표, 윤지후, 소이정, 송우빈) 가운데 이상형에 가장 가까운 캐릭터는 누군가.
“없다. 돈만 많은 남자는 별로다. 돈 많은 게 나쁘단 의미가 아니다. 다들 스스로 땀 흘려 부를 일궈낸 게 아니라 무임승차한 인물이지 않나.”
▼ 외모나 느낌은 안 따지나 보다.
“생김새는 잘 안 본다. 어릴 때는 느낌을 중요시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필(feel)’이 꽂혀 낭패 본 적이 있다. 끝이 안 좋더라.”
▼ 이상형은.
“예의 바르고 친절하고 개념 있는 남자가 좋다. 자력으로 뭔가 해내려고 하는 사람, 여자에게 의존하지 않는 사람, 10만원을 벌든 20만원을 벌든 자기 일에 열심이고 자존심을 지킬 줄 아는 사람에게 끌린다. 그렇다고 10만원 버는 남자가 이상형이라는 뜻은 아니다(웃음).”
▼ 현재 진행 중인 사랑은 없나.
“종종 보는 이성친구들은 있는데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은 아직 없다. 진짜 사랑은 오래 지켜보면서 힘든 시간을 함께 겪어봐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 지난해 언론에 ‘남자친구가 생기면 결혼하겠다’고 했던데 진심인가.
“농담으로 한 이야기가 크게 나왔다. 결혼은 서른 즈음에 하고 싶다. 아이 키우고 그러려면 너무 늦게 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다.”
▼ 어떤 사랑을 하고 싶은가.
“김수현 선생님의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드라마를 감명 깊게 봤다. ‘절친’인 남상미가 출연해서 열심히 봤는데 마음이 따뜻해지는 드라마였다. 교활하지 않고 비열하지도 않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면 좋은지를 보여줬다. 사랑도 그래야할 것 같다.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를 더 이해하고 아껴주고 존중해줘야 좋은 연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공부의 재발견
일과 사랑 중 하나만 고르라면 무엇을 택하겠느냐고 묻자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그녀가 말한다. “일”이라고. 최근 그녀는 연기활동을 재개했다. 오랜 고심 끝에 선택한 작품은 올해 방영 예정인 ‘더 뮤지컬’. 이 드라마에서 그녀는 의대생 고은비로 분한다.
“고은비는 텍스트 천재다. 한번 본 텍스트를 사진 찍듯 통째로 암기해버린다. 이처럼 머리 좋고 똑똑한 친구가 쉽게 갈 수 있는 의사의 길을 외면하고 뮤지컬에 꽂혀 있다. 뮤지컬 배우가 되려고 80번 정도 오디션을 봤다. 뮤지컬 배우로 성공할지 여부는 지켜봐야 한다. 지금 한창 촬영 중인데 대본이 여기까지밖에 나오지 않았다.”
▼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가 뭔가.
“고은비가 나하고 많이 닮아서다. 고은비 같은 텍스트 천재는 아니지만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을 두고 새로운 도전에 투지를 불태우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뮤지컬 배우를 해도 좋을 만큼 노래 실력이 수준급인 그녀. 노래방 애창곡이 뜻밖에도 1980년대 히트곡인 ‘내 사랑 내 곁에’와 ‘비 오는 날의 수채화’다. 1987년에 세상을 뜬 가수 유재하의 노래도 빼놓지 않는 레퍼토리란다.
▼ 1984년생 맞나.
“시대를 거슬러 좋은 노래를 찾아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정서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풍이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건가(웃음).”
▼ 앞으로 꼭 도전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나.
“악역도 해보고 싶고 섹시한 매력의 소유자나 살인마 같은 냉혈한에도 도전해보고 싶은데 내 안을 들여다보니 따뜻하고 재미있는 것을 찾고 있더라. 세상이 점점 각박해지니 그런가 보다.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금잔디 같은 역할을 하고 싶다.”
올해도 구혜선에게는 바쁜 한 해가 될 듯하다. 드라마 촬영이 끝나도 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4월부터는 대만드라마 ‘절대달령’ 촬영이 잡혀 있다. 이에 앞서 같은 달에 열리는 제1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공식 트레일러 제작을 완료할 계획이다.
공식 트레일러는 영화 상영 전에 틀어주는 1분 이내의 홍보 영상물로, 영화제의 성격과 이미지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상징적인 작품. 2009년에도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의 공식 트레일러를 제작한 바 있는 구혜선은 “이번에는 여성영화인의 진취적인 활동을 독려하려는 영화제의 취지를 살려 나이를 초월해 꿈을 키우는 여성의 이미지를 형상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촬영은 3월 중에 하루를 잡아 서울 신촌 일대에서 진행할 예정이다.
도무지 짬을 내기 힘든 스케줄 탓에 학업도 잠시 미뤘다. 지난해 뒤늦게 공부에 뜻을 두고 성균관대 예술학부 영상학과 수시모집에 당당히 합격한 구혜선은 “올해 3월부터 바로 캠퍼스를 누비긴 힘들겠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대충 졸업장을 받고 싶진 않다”고 열의를 보였다.
‘팔방미인’이라는 닉네임이 제대로 어울리는 이 여자. 10년 후에는 이름 앞에 어떤 타이틀을 달고 있을까.
“그땐 한국에 없을 것 같다. 학교 마치면 다큐 영화를 찍을 계획이다. 불특정 다수의 사랑을 주제로. 편한 운동화 차림으로 한 손엔 카메라를, 다른 손엔 마이크를 들고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찍을 거다. 우리나라에서는 한계가 있어서 해외 곳곳을 돌아다니려고 한다. 하지만 미래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법. 어쩌면 아기 엄마나 학부모가 되어 있을지도…. 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