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각<br>●1955년 강원도 강릉 출생<br>●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br>●풀꽃세상 사무총장, 고려원 편집장<br>●‘부용산’‘사막의 우물 파는 인부’ 등
어쨌거나 이 기획이 ‘해야 할 일들’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들’을 요구하고 있다는 게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나는 무엇보다도 죽기 전에 당나귀 한 마리를 키워보고 싶다.
내가 키울 당나귀는 기왕이면 내 젊은 날부터 비행기표 값만 마련되면 배낭 하나 짊어지고 훌쩍 날아가 헤매던 히말라야, 그 비좁은 산길에서 만나곤 하던 그런 당나귀여야 한다. 히말라야 당나귀는 순하고 힘 좋고, 조심성이 깊은데다 눈이 좋아 벼랑에 굴러 떨어지지도 않고, 사람을 물지도 않을뿐더러 공연히 뒷발질로 사람을 차지도 않는다. 수년 전 한 방송사에서 공들여 만들어 깊은 감동을 준 다큐멘터리 ‘차마고도’에 나오던 그 당나귀가 바로, 내가 키우고 싶은 당나귀다.
그런데 그 당나귀를 어떻게 이곳까지 건강하게 잘 데리고 온단 말인가? 실로 난제다. 그러나 그 난제도 사실 죽기 전의 마지막 각오라면 어려울 것도 없을 것이다. 강대국과 힘이 덜 센 나라들 사이에서는 가만히 보니, 장갑차도 사고팔고, 전투기도 사고팔고, 항공모함도 사고파는 모양인데, 그까짓 히말라야 당나귀 한 마리 정도를 못 들여올까?
당나귀를 구해 오면, 나는 일단 이웃집 앵두할아버지한테 시골 연구소 앞마당의 거위집 앞으로 펼쳐진 논을 내게 파시라고 부탁할 참이다. 할아버지 연세가 이미 94세. 이미 그 논은 이태 전부터 다른 이에게 농사지으라고 빌려준 터이지 않은가. 논을 빌린 이는 논농사를 지을 줄 알았더니만 쌀농사는 지어봤자 수지가 안 맞는다는 것을 느끼고선 콩밭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농부는 콩밭 가장자리에 고라니 침입을 막기 위해 검은 비닐그물을 치고, 콩밭에 엄청난 정성을 기울였지만 수확은 별로였던 것 같다. 나는 앵두할아버지에게 내 필생의 소원이 내 힘으로 논농사를 지어 단 한 끼라도 내가 소출해낸 쌀로 밥을 해먹는 것이라고 간곡한 얼굴로 말씀드리며, 논을 파시라고 부탁할 것이다.
그래서 만약 그 어른께서 논을 팔면, 논을 사기 위해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재산, 이를테면 자동차나 컴퓨터, 프린터, 전화기, 세계문학전집이나 사상전집, 심지어 등산화와 휴대전화까지 모조리 팔아서, 그 돈이 필경 몇 푼 안 될 것이므로 죽을힘을 다해 모자라는 돈을 보태 논을 장만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콩밭을 다시 논으로 만들어 논농사를 지으면서 논 가장자리에 길고 홀쭉한 당나귀 길을 만들 것이다. 그 길은 히말라야의 비탈길처럼 좁지만 빗물이 우선 잘 빠져야 하고, 밟을 때마다 사람과 당나귀를 밀어 올리는 부드러운 탄력이 있어야 한다. 정성껏 밟고 공을 들이다 보면 단단하되 흡수력이 강한 멋진 흙길이 될 것이다. 논가의 당나귀 길로 나는 아침마다 당나귀를 끌고 산책할 것이다. 어떤 날은 당나귀의 컨디션을 살핀 뒤 당나귀 잔등에 재빠르게 올라타기도 할 것이다. 당나귀 목에는 뎅그렁뎅그렁, 맑고 깊은 소리를 내는 쇠불알만한 쇠종을 하나 매달아놓을 것이다. 그러면 당나귀와 내가 흔들릴 때마다 고요한 시골 아침의 맑은 대기에 아름다운 종소리가 딩딩, 뎅그렁뎅그렁, 멀리까지 울려 퍼질 것이다.
마을에 하루 세 번씩 들어오는 시내버스가 지나간 뒤에는 조심스레 주위를 살핀 뒤, 큰길까지 당나귀를 끌고 나갈 것이다. 그래서 마을 뒷산의 저수지 둑에도 올라가고, 때로는 고라니와 멧돼지가 자주 출몰하는 부엉이다리를 지나 시내로 이어지는 입구에 세워진 묵은지 닭볶음탕을 파는 내 시골 친구 박나비네 집에까지 산책길을 확장할 것이다. 가을이면 당나귀와 나는 쌓인 낙엽을 밟게 될 것이므로 발밑에서는 사각사각, 매우 듣기 좋은 소리가 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절대 시내에는 당나귀를 안 끌고 나갈 것이다. 아무리 시골의 중소도시라지만 시내는 너무 많은 차량과 차량이 내뿜는 매연 때문에 당나귀가 틀림없이 고통스러워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가 뭐라고 그래도 내가 지금 놀고 있는 퇴골 골짜기에서만 당나귀와 놀 것이다. 늙어서 위험스럽게 오토바이나 경운기를 타고 노는 것보다 히말라야 당나귀와 노는 것이 훨씬 ‘본때’ 나는 일이 아니겠는가.
당나귀를 끌고, 혹은 당나귀 등에 올라타고 나는 죽기 전에 내가 못다 한,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부질 있는 일들과 부질없는 일들이 당나귀 등에 올라타면 선명하게 구별될 것이다. 신세진 사람들에게 충분한 답례를 했는가, 살펴볼 것이다. 그뿐인가. 젊은 날 나를 버리고 간 옛 애인의 안녕에 대해서도 가끔 생각할 것이고, 피치 못하게 내가 떠나버릴 수밖에 없었던 여인들에 대해서도 더러 생각할 것이다. 한 시민으로서 평생 동안 충분히 내 나라가 살기 좋고 인간적인 사회가 되었으면 하고 소망하고 깜냥껏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노력을 해왔지만, 여전히 인류가 핵을 너무 많이 지니고 있다는 문제와 기후변화나 ‘오일피크(석유 생산의 정점이 되는 시기)’에 사람들이 너무나 무관심한 데 대해, 혹은 무지막지한 토목공사로 이 아름다운 내 나라 산천이 대책 없이 파괴되고 있는 데 대해서도 깊은 슬픔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엄청난 일들을 내 힘만으로 어찌할 수 없다는 절망감과 한계 때문에 나는 이내 쓸쓸한 심정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내 품을 벗어난 두 딸자식이 사람보다 돈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물신의 가치관에 함몰되어 혹시 흔들리고 있지나 않는지 당나귀 위에서 안부전화를 걸어볼 것이고, 내 대단찮은 생애에 걸쳐 내가 맡아야 했던 여러 종류의 다양한 의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혹시 생각이 짧거나 넘쳤던 적은 없었는지 당나귀 잔등에서 흔들리면서 반성할지도 모른다. 우정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것이다. 언제 어느 때나 마음을 온전히 털어놓아도 되는 좋은 친구를 한 명쯤 갖기를 평생 그토록 갈망했지만, 내가 누군가의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스스로도 인정할 만큼 헌신한 적이 있던가, 냉철하게 자문해볼 것이다.
사랑하는 내 당나귀는 내가 뭔가 자숙하는 심정일 때에는 틀림없이 내 사색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천천히 걸을 것이고, 내가 활기차게 아침을 시작하면 덩달아 겅충겅충 달릴 것이다. 당나귀 잔등에서 내려선 뭘 하나? 나는 하루 종일 당나귀를 위해 아낌없이 시간을 사용할 것이다. 내 논에서 생산된 쌀겨를 마구간에 넉넉하게 깔아줄 것이고, 현미를 깎는 과정에서 부산물로 나온 ‘싸라기’는 여물을 끓일 때마다 듬뿍 넣어줄 작정이다. 당나귀가 좋아하는 풀을 나는 기어이 찾아내고야 말 것이고, 그 과정에서 나는 땅 위의 여러 풀에 대해 전보다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을 말만 앞세우고 나약하게 만들기 쉬운 책보다는 언제나 과묵하고 믿음직스러운 당나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삼태기를 둘러메고 들과 산에서 좋은 먹을거리를 구하고, 마구간은 언제나 신속하게 똥을 치워 늘 깨끗한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당나귀 똥은 양지 바른 곳의 편평한 돌 위에 잘 펼쳐 말려 여물을 끓일 때 땔감으로 사용할 작정이다. 틀림없이 구수한 냄새가 진동할 것이다. 나는 일처럼 자주 당나귀의 목덜미를 쓰다듬어줄 것이고 그의 뺨에 내 뺨을 자주 비벼댈 것이다. 때 없이 내가 당나귀의 이름을 큰소리로 부르면, 검고 맑은 눈을 가진 당나귀는 어김없이 성의껏 반응할 것이고, 그 일련의 시간들은 어쨌거나 나를 무척이나 황홀하게 할 것이다. 대장간에서는 좋은 쇠붙이로 편자를 넉넉하게 주문해 맞춰놓을 것이다. 간혹 친구들이 찾아와 내 당나귀에 깊은 관심을 보일 때 그 친구가 평소 신중한 사람이었다면 기꺼이 고삐를 건네줄 용의가 있다. 그리고 안전하고 아름다운 내 논자락의 당나귀 길에서 산책해보라고 권할 것이지만, 절대 함부로 올라타지는 못하게 할 것이다.
어떤 예리하고 당돌한 젊은 친구가 “왜 하필이면 당나귀지요?”라고 물으면, 나는 “멋있잖아요!”라고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대답해줄 것이다. 그는 내 짧고 무뚝뚝한 답변에 자신이 왠지 묵살당한 것 같은 느낌에 잠시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그가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으니, 죽기 전에 어떤 사람이 필생의 결단으로 당나귀를 키우든, 배추벌레를 키우든 그것은 궁금해 하기보다는 무조건 존중해줘야 하는 게 옳은 태도라는 게 그것이다.
누군들 안 그렇겠는가만, 나 역시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과 관련해 당나귀와 노는 일말고도 사실 이것저것 몇 가지는 더 댈 수 있다. 시의원이나 구의원을 비롯해 사람들 모두 해외여행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 같아 어떤 때에는 그 대열에 끼어들고 싶지 않을 때도 있지만, 온 세상을 젊은 날처럼 배낭 하나 둘러메고 한 번 더 돌아다니고 싶은 욕망도 있다. 악기 하나쯤은 제대로 배우고 싶고, 바둑실력도 좀더 심오해지고 싶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흉내를 내서 통나무집도 한 채 내 힘으로 지어보고 싶고, 나를 모욕한 이들에게서는 기어이 사과를 받아내고, 내가 시민운동 하던 시절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었던 이들에게는 공의(公義)를 지나치게 앞세우느라 그랬노라고 정중하게 사과하고도 싶다. 한 사람의 책 중독자로서 평생 모은 내 약간의 책들은 ‘퇴골 마을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마을에 기증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도서관 현판은 잘 마른 대추나무에 내가 직접 서각을 해 걸 작정이다. 시골까지 기꺼이 찾아온 이 세상의 진짜 책벌레들은 아마도 상당히 경건한 마음으로 도서관에 들락거리게 될 것이다. 당나귀가 쉴 때에는 사람들이 너무 쉽게 버린 목재들을 잔뜩 주워 모아뒀으니, 그것들로 의자나 탁자나 책 받침대를 만들어 사소한 신세를 진 이들에게 선물을 하는 것이다. 내 조잡한 목공작품을 선물 받은 이들이 즐거워해야 할 텐데,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의 성사 여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꼭 ‘돈의 문제’는 아닌 것만 같다. 내 비록 부유하지는 않지만,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이것저것 많이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 아니겠는가. 죽기 전에 내 힘으로 쌀농사짓고 겨우 당나귀 한 마리 키우겠다는데 그것도 정녕 불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그나저나 ‘죽기 전’이 언제인가? 아직 살아 있는 ‘바로 지금’이 아니겠는가. 도가(道家)의 고수도 아닌 내가 내 죽을 때를 어찌 알 것이며, 설사 안다 한들 어찌 내가 그 순간을 내 마음대로 당기거나 늦출 수 있겠는가. 아무래도 몬순이 오기 전에 당나귀 구하러 히말라야로 들어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