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년 후보 선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축구 감독이 됐다.
- ‘잉글랜드 축구의 전설’ 고(故) 바비 롭슨 경의 통역으로 출발한 그는 지금 유럽 3개국 리그 우승을 달성한 명장(名將)으로 각광받고 있다.
- 스페인 명문 클럽 레알 마드리드를 이끄는 주제 무리뉴 감독. 그를 세계적 감독으로 만든 건 ‘이기는 축구’에 대한 통찰과 선수들에 대한 뜨거운 애정이었다.
인화(人和)와 리더십을 동일시할 때가 많은 동양권에서는 오만할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이런 유형의 리더를 별로 반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발언의 주인공은 스스로를 ‘스페셜 원’이라고 지칭할 만한 성과를 냈다. 그는 이탈리아, 영국, 포르투갈 등 유럽 3개 리그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했고, 모든 축구 감독의 염원인 트레블(Treble)도 달성했다. 바로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 주제 무리뉴(Jose Mourinho)다.
스타 선수 출신도 아니며 나이도 48세에 불과한 그가 현재까지 쌓은 커리어는 그야말로 화려하다. 3배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 트레블은 어떤 스포츠에서 한 팀이 3개 대회를 우승했다는 말이다. 프로 축구의 트레블은 한 클럽 팀이 동일 시즌에 자국 정규 리그, 자국 축구협회(FA·Football Associations) , 유럽 축구의 왕중왕전이라 할 수 있는 유럽 축구협회(UEFA·Union of European Football Associations) 챔피언스리그 이 3개 대회에서 모두 우승하는 일을 말한다.
1955년 UEFA 챔피언스리그가 시작된 후 공식적으로 트레블을 달성한 클럽은 불과 6개. 셀틱, 아약스, 아인트호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 FC 바르셀로나, 인테르 밀란(영어식 표현 인터 밀란)뿐이다. 무리뉴 감독은 이 6개 팀 중 가장 근래에 트레블에 성공한 지도자다. 그는 2009~10 시즌 이탈리아의 인테르 밀란을 이끌고 이탈리아 클럽 팀으로는 사상 최초로 트레블을 달성했다.
맨유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은 것 또한 트레블을 달성했기 때문임을 감안하면 트레블을 달성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세계 축구계가 트레블의 권위를 얼마나 인정해주는지 잘 알 수 있다. 스타 선수가 워낙 많아 ‘지구 방위대’ ‘은하수 군단’ 등으로 불리는 레알 마드리드조차 아직 트레블을 달성하지 못했다. 레알 마드리드가 무리뉴를 감독으로 영입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화려한 언변, 영화배우 뺨치는 외모, 아르마니 슈트와 회색 머플러를 착용하는 뛰어난 패션 감각으로 유명하다. 세계 축구 감독 중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감독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화제를 몰고 다니는 뉴스 메이커인 셈이다.
후보 선수에서 훌륭한 지도자로
주제 무리뉴는 1963년 포르투갈 세투발의 부유한 가정에서 축구 선수인 아버지 펠릭스와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펠릭스는 세투발을 연고로 하는 비토리아 데 세투발, 벨레넨세스 등의 클럽에서 활약한 골키퍼였다. 그의 삼촌 또한 세투발 스타디움 건립에 관여한 인물이었다. 축구인 집안에서 자란 덕에 무리뉴는 어려서부터 축구 경기장을 제집 드나들 듯했고, 세투발 유스 클럽에서 축구 인생을 시작했다.
하지만 선수 무리뉴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아버지가 코치로 일했던 히우 아베, 벨레넨세스, 세심브라 등의 클럽에서 센터백과 중앙 미드필더를 맡았지만 경기에서 뛴 적은 거의 없는 만년 후보 선수였다. 아버지와 같은 팀에서 뛸 때 당시 팀의 구단주가 그의 아버지 펠릭스에게 “실력 없는 선수를 아들이라고 기용해서는 안 된다”는 면박을 주기도 했다. 무리뉴는 결국 20대 초반에 은퇴를 결정했다.
하지만 현역 선수에서 물러나는 일이 축구와의 작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무리뉴는 자신이 선수보다 지도자로 더 큰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경영학을 전공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바람을 뒤로하고 리스본의 체육학교 ISEF에 입학했다. 체육과학을 전공하며 본격적으로 지도자 인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사실 지도자로서 그의 잠재력은 아주 오래전부터 발휘됐다. 세투발 유스 팀에서 뛰던 청소년 시절, 그는 우연한 기회에 세투발이 상대할 클럽의 전력 분석을 위해 파견됐다. 전력 분석을 위해 그가 가져온 기록지와 분석표는 당시 세투발 코칭스태프가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10대 때부터 성인 지도자 못지않은 통찰력과 분석력을 지녔던 무리뉴는 대학 졸업 후 몇몇 학교에서 체육 교사로 활동했다. 1989년 고향 친구인 마틸드와 결혼한 그는 1990년 친정인 세투발의 유스 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1992년 포르투갈의 명문 팀 스포르팅 리스본에 통역으로 부임한 그는 지도자 인생의 출발점을 맞이했다. 잉글랜드 축구의 전설적인 감독인 고 바비 롭슨 경을 만난 것이다.
롭슨 감독은 무리뉴가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카탈로니아어(스페인 바르셀로나 지방의 토착 언어) 등 다양한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에 매료됐다. 이에 무리뉴를 개인 통역으로 삼으며 항상 곁에 뒀다. 이후 롭슨은 세계 최고 수준의 클럽 팀인 FC 바르셀로나의 감독으로 부임했고, 당연히 무리뉴도 데려갔다. 무리뉴는 이곳에서 보조 코치로 일하며 상대 팀의 전술을 분석하는 임무를 맡았다.
롭슨이 떠난 이후 FC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부임한 네덜란드의 명장 루이스 반 할 역시 무리뉴의 재능을 높이 샀다. 그 덕분에 무리뉴는 30대의 젊은 나이에 명문 FC 바르셀로나의 정식 코치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 레알 마드리드의 영원한 라이벌이자, 현재 지도자 무리뉴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FC 바르셀로나의 주제 과르디올라 감독도 당시 이 팀에서 선수로 뛰고 있었으니 이래저래 질긴 인연이다. 반 할은 무리뉴가 포르투갈의 벤피카 리스본에게서 선임 코치직을 제의받자 “감독이라면 모를까 선임 코치라면 나와 함께 있자”고 할 정도로 그에 대한 신뢰가 깊었다.
초짜 감독, 우승 청부사가 되다
무리뉴는 2000년 9월 비로소 꿈에 그리던 감독(head coach)이 됐다. 그가 맡은 팀은 포르투갈의 축구 영웅 에우제비오가 활약했던 벤피카 리스본이었다. 하지만 회장 교체 등 클럽의 내분이 생기고 성적도 좋지 못하자 그는 단 여덟 경기만 치른 후 스스로 사임한다.
무리뉴를 세계적인 감독으로 만든 곳은 벤피카의 라이벌인 FC포르투였다. 무리뉴는 2002년 1월 성적 부진으로 감독이 경질된 FC포르투의 지휘봉을 잡았다. 남은 경기에서 15경기 11승2무2패의 성적을 기록하며 팀의 순위를 리그 3위로 끌어올렸다. 비교적 좋은 성적으로 FC포르투의 첫해를 마감한 무리뉴는 이렇게 말했다. “내년에는 FC포르투를 우승 팀으로 만들겠다.” 이때만 해도 무리뉴나 FC포르투를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록 1960년대 에우제비오가 활약할 당시 월드컵에서 3위에 오른 적도 있지만 포르투갈은 언제나 유럽 축구의 변방에 불과했다. 포르투갈 리그 즉 수페르 리가의 시장 규모 자체가 빅 리그에 비해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포르투갈 리그는 유럽 빅 3 리그로 불리는 영국 EPL,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이탈리아 세리에A는 물론이고 독일 분데스리가, 프랑스 리그, 네덜란드 리그보다도 훨씬 작다. 이런 변방국의 중소 클럽을 맡은 초짜 감독을 주목하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무리뉴는 1년 만에 자신의 말을 입증했다. 2002~03 시즌 FC포르투는 포르투갈 리그와 포르투갈 FA컵에서 우승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32개 팀이 겨루는 UEFA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지 못한 나머지 팀들이 모여 우열을 가리는 UEFA컵 결승에서도 연장전 끝에 스코틀랜드의 셀틱을 물리쳤다. 공식적인 트레블은 아니지만 일종의 미니 트레블을 달성한 셈이다. 챔피언스리그 우승은 아니라지만 초짜 감독이 트레블을 달성하는 일은 상당한 성과임이 분명하다. 유럽 축구계 또한 무리뉴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2003~04 시즌 무리뉴는 더 놀라운 성적을 냈다. 압도적인 기세로 포르투갈 리그 2연패를 달성한 그는 UEFA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해 모나코를 3-0으로 꺾고 우승했다. 포르투갈 클럽이 유럽 축구의 왕중왕전인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한 건 무려 17년 만이어서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당시 FC 포르투의 주전 선수들은 데코, 페레이라, 마니셰 등이었다. 물론 이들은 훌륭하고 좋은 선수였지만 호나우두나 지단처럼 축구를 잘 모르는 사람도 이름을 알 정도의 슈퍼스타는 아니었다. 당시 포르투의 운영비 또한 맨유와 같은 빅 클럽의 10분의 1에도 못 미쳤다.
이런 상황에서 슈퍼스타가 즐비한 빅 리그의 빅 클럽들을 꺾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당시 FC포르투는 치밀한 수비와 탄탄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우승을 일궈냈다. 포르투의 우승 비결은 상대팀 미드필더진에 대한 강한 압박, 빠르고 효율적인 공격 등이었다. 이는 현대 축구가 지향하는 바를 고스란히 보여줬다. 무리뉴는 첼시 시절에도 이 기조를 계속 유지했다.
“나를 다른 감독과 비교하지 말라”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으로 세계적 명장 반열에 오른 무리뉴를 주목한 사람은 러시아 출신 석유 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였다. 2003년 영국 프리미어리그(EPL)의 첼시를 인수한 아브라모비치는 막대한 돈을 투자해 세계 최고의 감독과 선수를 원하는 대로 끌어모았다. 당시 EPL 내의 경쟁 팀인 맨유, 아스날, 리버풀 등에 비해 우승 경력이 뒤처졌던 첼시는 이런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단기간에 영국뿐 아니라 유럽을 대표하는 빅 클럽으로 성장했다.
2004년 6월 무리뉴는 연봉 420만파운드에 첼시와 계약했다. 그는 입단 기자회견에서 그 유명한 말을 남긴다. “나를 거만한 사람이라고 부르지도, 다른 감독과 비교하지도 마라. 나는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한 감독이다. 따라서 나는 내가 특별한 사람(special one)이라고 생각한다.”
무리뉴가 이 발언에 걸맞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면 단순한 입방정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스페셜 원이 그의 이름과 동의어가 된 것은 그가 그만큼 뛰어난 성과를 이룩했기 때문이다. 무리뉴는 부임하자마자 첼시를 2년 연속 EPL 리그 우승 팀으로 만들었다. 무리뉴가 오기 전 첼시는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맨유나 아르센 벵거 감독의 아스널보다 한 단계 낮은 팀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첼시로 온 무리뉴는 자신의 구미에 맞는 팀을 만들기 위해 대대적인 변화를 주도했다. 일단 과거 주전이었던 베론, 크레스포, 하셀바잉크 등을 다른 팀으로 임대 또는 이적시켰다. 당시 유망주였던 드록바, 로벤, 케즈만 등 눈여겨봤던 젊은 선수들을 대거 첼시로 데려왔다.
무리뉴는 특히 첼시의 수비진에 강력한 메스를 가했다. 존 테리와 갈라스라는 걸출한 수비수들이 있었지만 자신이 데리고 있던 페레이라, 카르발뇨를 첼시 수비의 새로운 주전으로 가담시켰다. 수비의 핵인 골키퍼도 체코의 신성 페트르 체흐를 데려왔다. 빠르고 공격적인 축구를 구사하지만 수비는 조금 빈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첼시는 무리뉴의 수비 보강 이후 탄탄한 전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의 전략은 맞아떨어졌다. 2004~05 시즌 첼시는 리그 최소 실점을 기록하며 우승했다. 첼시의 리그 우승은 무려 50년 만이었다. 같은 해 리그 FA컵에서도 우승했다. 2005~06 시즌에도 다른 클럽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며 내내 독주한 끝에 리그 2연패를 달성했다. ‘스페셜 원’이 자신의 능력을 다시 증명한 셈이다.
하지만 무리뉴는 2007년 9월 전격적으로 첼시를 떠났다. 표면적으로는 상호 합의하에 감독을 사퇴했다고 밝혔지만 구단주로부터 해임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첼시는 수비수들의 잇따른 부상으로 고심하고 있었다. 수비를 중시하는 무리뉴는 겨울 이적 시장에서 수비수 보강을 요구했지만 아브라모비치는 이를 거절했다.
첼시 감독으로 재직하는 3년 동안 6개의 우승컵을 들어올린 그였지만 유달리 심한 구단주의 간섭과 전력 보강 요청에 대한 무시를 참을 수는 없었다. 그가 첼시를 떠날 때 첼시의 스타였던 드록바, 램파드 등은 “무리뉴는 아버지와도 같은 사람”이라며 상당히 동요했다. 세간에 이들의 이적설까지 나돌 정도였다.
레알 마드리드에 거는 기대
무리뉴는 2008년 6월 이탈리아의 명문 클럽 인테르 밀란의 지도자로 부임했다. 유벤투스, AC 밀란과 함께 이탈리아 축구를 주름잡고 있는 인테르 밀란은 오랜 역사와 스타 선수를 여럿 보유하고 있었지만 챔피언스리그 우승은커녕 1989년 이후 2000년대 중반까지 자국 리그 정상에도 오르지 못했다.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도 1965년 이후 40년이 넘도록 정상을 차지하지 못했다.
이 숙원을 풀기 위해 마시모 모라티 인테르 밀란 구단주가 데려온 인물이 바로 무리뉴였다. 약 1년간의 야인 생활을 청산하고 이탈리아에 도착한 무리뉴는 이탈리아어로 입단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그는 회견장에서 “난 스페셜 원이 아니다. 내가 세계 최고의 감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의외로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바로 “나보다 뛰어난 감독을 아직까지 본 적은 없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선수들도 그를 좋아했다. 한때 ‘호나우두의 후계자’로 기대를 모았지만 방황했던 아드리아누, 이기적인 플레이로 지적받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모두 순한 양이 됐다. 무리뉴는 2008~09 시즌에 바로 이탈리아 세리에A 리그와 이탈리아 FA컵인 수페르 코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는 16강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칼을 갈고 기다린 무리뉴는 2009~10 시즌 이탈리아 리그와 이탈리아 FA컵에서 또 우승한 후, 2010년 5월 마침내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차지했다. 챔피언스리그의 결승전 상대 팀인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은 한때 그의 멘토였던 루이스 반 할이었다. 반 할은 “무리뉴가 이처럼 위대한 감독이 될 줄은 몰랐다”며 패배를 인정했다. 이탈리아 클럽이 트레블을 달성한 건 사상 최초여서 그의 지도력에 대한 칭송은 더욱 높아졌다.
하지만 무리뉴는 우승 직후 전격적으로 인테르 밀란의 감독직을 사임한다고 밝혔다. 또 1000만유로(약 150억원)의 파격적 연봉을 조건으로 레알 마드리드행(行)을 발표했다. 그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이 끝나자마자 홀로 스페인에 남아 레알 마드리드와 계약 협상을 진행했다는 점 때문에 비판받기도 했다. 레알 마드리드 감독이 된 후에는 현재 스페인 리그를 지배하고 있는 FC 바르셀로나와의 경기에서 밀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불안감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세계 축구계는 올스타급 라인업에도 불구하고 ‘모래알’ 조직력 문제로 리그 우승이나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번번이 실패해온 레알을 바꿔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무리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그가 레알 마드리드를 스페인 리그의 우승 팀으로 만들면, 유럽의 3대 빅 리그 즉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3대 클럽을 모두 우승으로 이끈 최초의 지도자가 된다.
무리뉴 리더십의 요체
① 인기와 재미보다 승리가 먼저다
수비를 중시하는 무리뉴 식 축구 스타일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를 안티 풋볼(Anti Football)의 선봉장이라고 비판한다. 축구의 재미를 반감시킨다는 이유에서다. 실제 무리뉴의 팀은 상대방보다 훨씬 낮은 볼 점유율, 경기 전체를 통틀어 1~2개에 불과한 유효 슈팅을 선보이고도 이길 때가 많다. ‘선(先) 수비, 후(後) 역습’의 승리 공식을 잘 이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기에 아름다운 축구라고 하기 어렵고, 관중에게 큰 재미를 선사하기도 힘들다. 레알 마드리드의 영원한 라이벌인 FC 바르셀로나(바르샤)의 축구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FC 바르셀로나는 리오넬 메시라는 걸출한 스타가 등장하고, 자팀 선수들이 주축을 이룬 스페인 국가대표팀이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우승한 후 21세기 축구의 교본으로 평가받고 있다. 빠르고 효율적인 패스와 공격으로 보기에도 즐겁고 경기도 이기는 축구를 구사한다. 게다가 유소년 팀에서 직접 키운 선수들로 핵심 멤버를 삼아 팀워크까지 뛰어나다.
하지만 FC 바르셀로나의 스타일이 많이 반영된 스페인 축구 또한 2008년 월드컵 우승 전에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보기에는 아름다울지 모르나 가장 중요한 명제인 승리를 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세계 각국 리그에서 뛰는 호화 멤버들로 국가대표팀을 꾸렸지만 월드컵 8강에도 오르지 못할 때가 많으니 비판이 없을 리 만무했다.
즉 아름답고 보기 좋은 축구도 결국 승리가 선행될 때만 의미를 지닌다. 아무리 멤버들이 그림같이 아기자기한 패스를 경기 내내 주고받고, 수많은 유효 슈팅이나 득점을 기록한들 이기지 못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떤 팬이나 구단주가 이를 반기겠는가. 싫든 좋든 프로 스포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승리다. 승리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감독은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 승리와 인기를 동시에 거머쥐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 결국 우선순위는 승리에 있다. 다른 사람의 비판이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리더로서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했던 그 철저함이 그를 훌륭한 지도자로 만들었다.
프랑스 축구 영웅 미셸 플라티니는 “축구는 실수의 스포츠다. 모든 선수가 완벽한 플레이를 하면 스코어는 영원히 0대0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실수를 줄이면 이기지는 못해도 지지도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 발언이다. 조그만 실수가 승패를 결정짓는 스포츠의 특성을 감안할 때, 강력한 수비를 통해 상대방의 실수를 유도하고 그 실수가 나오는 순간 역습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무리뉴의 전술 자체를 안티 풋볼로 매도하기에는 트레블 달성, 2번의 챔피언스리그 우승, 3개국 리그 우승 등 그가 보여준 성과가 많다.
무리뉴는 부정행위로 이기지 않았다. 수비 축구가 싫으면 더 강력한 공격 축구로 그 수비 축구를 이겨야 한다. 수비 축구를 이기지도 못하면서 안티 풋볼만 언급하는 건 공허하다. 그는 트레블을 달성하던 시절 인테르 밀란을 이탈리아 리그 역사상 한 시즌에 가장 많은 골을 넣은 팀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를 감안할 때 그의 축구는 실리를 극대화하면서 승리를 추구하는 축구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무리뉴와 안티 풋볼에 대한 논란은 현재 한국 프로야구를 지배하는 김성근 SK와이번스 감독에 대한 논란과도 흡사하다. 김 감독은 수많은 불펜 투수를 투입해 악착같이 승리를 따낸다는 뜻으로 소위 ‘벌떼 야구’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그러자 ‘SK 야구는 재미가 없고, 비인간적이며, 투수 혹사도 심하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하지만 불펜 중심 야구는 이제 다른 팀도 시행하는 전술이 됐다. SK의 핵심 불펜 투수인 정대현, 정우람, 이승호 등은 몇 년째 이어진 혹사 논란에도 여전히 위력적인 공을 던지고 있다. SK와 다른 팀의 차이는 똑같이 벌떼를 투입해도 한쪽은 위험을 잘 막고, 나머지는 못 막는다는 점뿐이다. SK와이번스는 2007년부터 2010년까지 3번의 우승과 1번의 준우승이라는 독보적인 성적을 냈다. 그 기간 인천 연고 구단으로는 사상 최초로 8개 구단 중 홈경기 평균 관중 1위를 차지했다. 최신식 구장, 다양한 마케팅 활동도 있었지만 역시 성적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기지 못하는 팀을 보러 오는 팬은 없다.
② 리더는 심리전의 대가여야 한다
인간의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스포츠의 승패도 종종 실력보다 멘탈이 좌우한다. 어차피 프로 스포츠에 종사하는 선수들의 기량은 비슷하다. 기량이 뛰어나지 않다면 애초에 프로 선수가 될 수 없다. 어차피 기량은 백지장 한 장 차이일 때가 많다. 결국 어떤 승부 근성을 가지고 어떻게 상대방의 심리를 역이용하느냐가 중요하다. 세계적인 명장들이 심리전의 대가인 이유다.
전무후무한 한국시리즈 10회 우승을 달성한 김응룡 전 삼성라이온즈 사장 또한 현역 감독 시절 심판 판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덕아웃에서 의자를 부수고 심판과 육탄전까지 벌이는 일로 유명했다. 판정 그 자체에 불만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선수들의 동요를 잠재우고, 투쟁 심리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다.
무리뉴도 마찬가지다. 그는 어떤 여건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상대방을 자극할 만큼 영리하게 경기를 운영할 줄 아는 지도자다. 특히 라이벌 전이 있을 때 상대 팀 감독과 설전을 벌여 최대한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끈다. 상대방을 있는 대로 약 올려 그들의 심리를 동요하게 만들고, 자신의 팀에는 무한한 자부심과 동기를 부여해 선수들의 승부욕을 불태우게 만드는 식이다.
첼시 감독 시절 아름다운 축구를 중시하는 걸로 유명한 아스널의 아르센 벵거 감독과 논쟁이 붙자 무리뉴는 이렇게 말했다. “아스널은 훌륭한 감독과 선수를 보유했지만 축구가 승리해야 하는 스포츠라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 첼시는 멋진 경기를 보여주진 못해도 승리한다.”
리버풀과의 비교에는 이렇게 대응했다. “리버풀의 역사는 위대하고 나는 그 역사를 존중한다. 그러나 첼시가 지난 3년간 2번의 리그 우승을 할 동안 리버풀은 약 20년간 우승을 하지 못했다.”
현존하는 최고의 축구 감독으로 평가받고 자신의 아버지뻘인 알렉스 퍼거슨 맨유 감독에게도 지지 않았다. 퍼거슨 감독은 이적시장에서 거액을 쏟아 붓는 첼시에 “돈으로 우승을 구입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무리뉴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맨유 예산의 10%도 안 쓰는 FC포르투를 이끌고 맨유를 제압한 후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했다”고 되받았다. 감독의 이런 말을 듣고 투지를 불태우지 않을 선수는 없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언론과의 일전도 불사한다. 몇 년 전 FC 바르셀로나와 챔피언스리그 32강 조별 예선경기를 할 때의 일이다. 스페인의 한 기자가 “당신은 FC 바르셀로나에서 통역으로 일하던 주제에 왜 이렇게 바르샤에 무례한가”라고 비아냥거렸다. 이에 대한 무리뉴의 답이 걸작이다. “그때 나는 통역관이지만 지금 첼시의 감독이다. 내가 통역관에서 명문 팀 감독이 될 동안 당신은 여전히 삼류 기자 나부랭이 아닌가. 지금까지 대체 뭐했나?”
③ 내 부하는 내가 지키고 보호한다
특유의 카리스마와 독설, 거만하고 차가운 이미지로 각인돼 있지만 그는 자신의 선수를 끔찍하게 아끼는 리더로도 유명하다. 첼시 감독 부임 첫 시즌이던 2004~05 시즌 도중 그는 잉글랜드 축구협회(FA) 측에 후보 엔트리를 7명으로 늘려달라고 요청했다. 첼시의 벤치 멤버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첼시가 호화 멤버를 갖춘 팀이라고 해도 후보 선수의 분발 없이는 장기전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가 힘들다. 종목을 막론하고 모든 스포츠의 강팀들은 소위 선수단의 뎁스(depth)가 두껍다. 핵심 멤버가 부상이나 불의의 사고를 당해도 그 자리를 바로 메울 수 있는 쟁쟁한 후보 선수가 많다는 의미다. 이런 후보 선수가 많아야 팀 내 건전한 경쟁도 더욱 촉발된다. 그는 이름값이 떨어지는 아이두르 구드욘센이 마테아 케즈만과 디디에 드록바의 영입으로 방출 위기에 놓이자 오히려 꾸준한 출장 기회를 보장하기도 했다.
2006년 10월 레딩 전에서는 골키퍼 페트르 체흐와 카를로 쿠디치니가 경기 도중 심한 부상을 당했다. 그는 다음 경기 전망을 묻는 기자들에게 “지금 축구가 문제가 아니다. 나는 다른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오직 두 명의 내 친구를 걱정할 뿐이다. 다음 경기도 중요하지만 우리 선수들이 더 소중하다”고 말했다.
2006~07 시즌의 우승을 놓친 아스널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경기 종료와 동시에 서포터 석으로 달려와 선수들을 여러 번 가리키며 박수를 쳐달라고 요청했다. 눈앞에서 우승을 놓친 상황에서 서포터들의 기분이 좋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감독이 직접 나서 “저기 숨이 턱까지 차 있는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달라. 그것이 당신들의 임무다”라고 말하는데 박수를 치지 않을 팬이 있을까. 그런 감독을 어떤 선수와 팬이 미워하겠는가.
지난해 5월 인테르 밀란의 챔피언스리그 우승 직후 경기장을 나가던 그는 경기장 벽에 기대선 마테라치를 발견했다. 급히 차에서 내려 종종걸음으로 마테라치에게 다가간 그는 선수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전세계로 중계된 이 장면은 그가 선수를 얼마나 아끼는지 잘 보여줬다. 아무리 쇼맨십이 강하다고 해도 선수에게 이 정도의 애정을 보여주는 감독은 많지 않다.
선수들과 감정적으로 매우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는 그의 리더십 스타일은 많은 스타 선수가 그 앞에서 순한 양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6개 국어를 구사하기에 어떤 나라에서 온 선수라도 의사소통에 별 문제가 없다는 점도 한몫했다. 첼시와 결별할 때 드록바, 램파드 등이 그를 따라 이적하려 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그 외에도 인테르 밀란 시절 미드필더로 활동했던 웨슬리 슈나이더는 “그와의 1년은 다른 감독과의 10년보다 더한 가치가 있다”고, 레알 마드리드의 골키퍼 카시야스는 “무리뉴는 내가 아는 최고의 감독이자 최고의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고 선수들을 무작정 예뻐하기만 하는 건 아니다. 태도가 불성실하거나 팀워크에 위해를 가하면 세계 정상급 선수라도 바로 철퇴를 가한다. 첼시 감독 시절 그는 ‘무결점 스트라이커’로 명성이 높았던 안드레 셰브첸코가 부진하자 그를 종종 출전 명단에서 빼버렸다. 기량이 내림세 조짐을 보였던 에르난 크레스포는 과감하게 다른 팀에 임대했다. 인테르 밀란에서도 새벽 음주 행각을 벌인 아드리아누와 경기에서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던 훌리오 크루스를 명단에서 제외한 적도 있다. 인테르 밀란 사령탑 부임 초기 그가 가장 강조한 말은 “훈련과 경기 시간에 늦는 선수는 바로 집으로 돌려보낼 것”이었다.
레알 마드리드로 옮긴 다음에도 마찬가지다. 수비의 핵인 히카르두 카르발류가 자신을 주전에서 뺀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자 “머리가 어떻게 된 거냐. IQ 테스트나 다시 받으라”는 일침까지 날렸다. 수비 축구를 중시하는 감독이 핵심 수비수를 일부러 내보내지 않으면서 이 정도 독설을 날린다는 건 그가 철저히 팀 운영 원칙을 지키는 리더임을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