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호

‘마지막 독립군’ 김준엽을 기리며

조국 광복 위해 싸우고 군사정권에 맞선 시대의 참스승

  • 황의봉│세종대 초빙교수·전 동아일보 출판국장 hyp8610@daum.net

    입력2011-06-23 09: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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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교육계의 큰 별이자 지식인의 표상인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이 별세했다. 김 전 총장은 독립군으로 일제와 맞서 싸웠고 광복 후에는 학계에 투신해 교육 발전에 큰 공을 남겼다. 전두환 정권의 강압에 맞섰고 노태우 정부의 총리직 제의를 거절하는 기개를 보였다. 생전에 그와 남다른 교분을 가졌던 황의봉 전 동아일보 출판국장이 김 전 총장의 일대기를 돌아보고 추모하는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마지막 독립군’ 김준엽을 기리며

    6월10일 서울 안암동 고려대에서 열린 김준엽 전 총장 발인식.

    마지막 독립군 별세’

    6월7일 오전 김준엽(金俊燁) 사회과학원 이사장(전 고려대 총장)의 별세 소식을 전한 많은 언론이 붙인 제목이다. 일제강점기 학병으로 중국 전장에 끌려갔다가 탈출해 천신만고 끝에 충칭(重慶) 임시정부에 도착, 광복군에 가담한 ‘학병탈출 1호’ 김준엽의 행적은 그동안 하나의 전설처럼 회자돼왔다. 올해 91세로 세상을 떠났으니 마지막 독립군이 우리 곁을 떠났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김준엽 선생의 생애를 자세히 살펴보면 ‘독립군 김준엽’은 시대의 스승으로 불리는 애국적 삶의 시작일 따름이다. 6월10일 거행된 영결식에서 이기택 4·19혁명공로자회 회장은 “선생님은 살아 계시는 것만으로도 나라의 기둥이셨고 우리의 힘이고 자랑이었다”고 추모했다. 일생을 학자로 초지일관하면서 그가 보여준 꼿꼿한 지성인의 자세와 치열한 시대정신 그리고 다양한 업적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든든함을 느끼게 해준 게 사실이다.

    필자는 대학 1학년 때 김준엽 선생을 만나 근 40년 동안 가까이서 혹은 멀리서 가르침을 받고 또 지켜볼 수 있었다. 특히 최근 10여 년간에는 일년에 두세 차례 만나 뵙고 많은 대화를 나누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거의 완벽한 기록으로 남긴 자서전 ‘長征’ 시리즈 5권과 중국 관련 저서들, 선생과 가까이 지낸 많은 분의 증언, 그리고 생전에 직접 들려주신 이야기를 토대로 독립군 김준엽에서 시대의 스승으로 살다 간 고귀한 삶의 주요장면을 더듬어본다.

    일제가 한국을 강제병합한 지 10년이 지난 1920년 김준엽이 태어난다. 평안도의 북단으로 압록강에서 가까운 강계(江界)의 부유한 집안이었다. 압록강 부근의 시중(時中)에서 보통학교를 다녔고, 고등보통학교(5년제 중학교)는 압록강가에 있는 신의주고보에 다니게 된다. 평안도는 조선시대 때부터 차별대우를 받아온 지역으로 저항의식이 강했고, 만인평등을 주장하던 기독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이다. 따라서 외세의 침략에 민감했고 망국 이후 많은 항일운동가를 배출한 지역이기도 하다.



    강계는 그중에서도 압록강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군 소식이 빨리 전달되는 곳이었다. 신의주고보 역시 이런 지역적 배경과 무관치 않은 학교다. 일제시대 신의주고보는 평양고보 함흥고보 등과 함께 동맹휴학을 가장 자주 하는 학교였다. 동맹휴학의 저변에는 항일의식이 흐르고 있었다.

    학병 입대와 탈출계획

    ‘마지막 독립군’ 김준엽을 기리며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

    김준엽은 어린 시절, 군자금을 얻기 위해 잠입한 독립군들이 자신의 집을 드나드는 것을 보았고,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질 때면 대포소리를 들으면서 자랐다고 회고했다. 또 신출귀몰하는 독립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지게 된 동경심이 후일 학병탈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도 했다. 유년시절을 보낸 고향과 집안 분위기 그리고 학창생활 속에서 항일의식이 자라고 있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일본 도쿄의 게이오(慶應)대학 동양사학과에 진학한 김준엽은 대학시기를 통해 반골의식과 민족정신이 투철한 청년으로 성장한다. 동양사 중에서도 최근세사에 흥미를 느껴 집중적으로 공부한 것도 조선의 멸망, 중국의 몰락, 일본의 근대화 성공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어서였다.

    1943년 여름방학을 고향에서 보내고 도쿄로 돌아온 김준엽은 9월 초 개학이 되자 조선인 전문학생·대학생들도 학병으로 징집한다는 소문을 접하게 된다. 학병 징집을 피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산으로 숨는 학생들로 학교 분위기는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김준엽은 마침내 결단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숙고를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은 학병으로 입대하자는 것이었다. 중국전선으로 가게 된다면 일군을 탈출해 동경해오던 독립군 임시정부로 갈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본 것이다.

    ‘마지막 독립군’ 김준엽을 기리며

    광복군 시절의 김준엽(가운데) 전 총장. 오른쪽은 고 장준하 선생.

    나이 스물둘에 일생일대의 결정을 내린 김준엽은 “당시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내 소신대로 움직인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당시 자신의 생각이나 자세가 너무나 확고한 것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대학 총장이 되어 학생들을 지도할 때 젊은이들의 정의에 불탄 당당한 태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소중하게 생각했다고 밝힌 바 있다.

    유학기간 중 돌아가신 부친을 대신해 형들과 상의한 결과도 그의 소신과 같았다. 전쟁터에 끌려가면 죽을 확률이 대단히 높은 상황에서도 형들은 동생의 학병 입대와 탈출계획을 듣고 적극 찬성하고 나선 것이다. 이때부터 김준엽은 구체적인 탈출계획을 세우고 준비작업에 들어간다.

    서울 부민관(시민회관)에서 학병들을 모아놓고 장행회를 할 때 김준엽은 몰래 빠져나와 명동으로 가 탈출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했다. 우선 나침반부터 샀다. 생소한 외국땅에서 부대를 탈출해 임시정부까지 찾아가려면 방향을 알려줄 나침반은 필수품이었다. 중국지도와 중국어 회화책도 챙겼다. 한밤에 탈출할 것에 대비해 야광 손목시계도 준비해야 했다. 탈출과정에서 중국군이나 연합군을 만났을 때 한국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게이오대학 모자를 쓰고 한복을 입은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도 간직했다. 마지막으로 돈과 칼을 챙겼다. 돈은 탈출 이후에 필요할 것 같았고, 칼은 거사 전 탈출의도가 발각될 경우에 대비한 자살용이었다. 독약을 구하기 힘들어 아버지의 유품인 주머니칼을 가져가기로 한 것이다.

    부적과 암호

    문제는 이 모든 준비물품을 발각당하지 않고 무사히 징집절차를 거쳐 부대 안에까지 가져갈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한 가지 꾀를 냈다. 일본군에 입대하면 사물은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지만 일종의 호신용 부적인 ‘오마모리후다’만큼은 휴대할 수 있다는 사실에 착안한 것으로, 어머니가 치마를 찢어서 만들어주신 주머니에 물품들을 담았다. 오마모리후다를 많이 휴대한 것으로 가장한 것이다.

    암호도 만들어 형들과 공유했다. 고향으로 보내는 서신은 반드시 엽서에 일본어로 쓰되, 편지 말미에 ‘경구(敬具)’라고 쓰면 중국에 있는 일본부대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고, ‘頓首(돈수)’라고 쓰면 중국에서 탈출기회를 얻지 못한 채 동남아로 전출된다는 뜻이고, ‘草草(초초)’라고 쓰면 곧 탈출한다는 뜻이었다. 이 암호들은 일본인이 편지 말미에 흔히 인사치레로 쓰는 용어이므로 의심받지 않고 상황을 알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행히도 김준엽은 예상했던 대로 중국전선으로 보내져 장쑤(江蘇)성 쉬저우(徐州)의 일본군 경비중대에 배속된다. 당시의 풍경을 김준엽은 유배돼가는 죄수로 묘사하고 있다.

    “유배지인 徐州(서주)역에 내려 나흘 만에 비로소 땅을 밟게 되었다. 밖은 쌀쌀한 날씨인 데다가 바람이 심하여 황사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우리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황소들 모양으로 줄을 지어 시내를 지나 교외로 빠져나갔다.”(‘장정1’) 1944년 2월16일이었다.

    탈출날짜를 정하려고 고심하던 중 꿈에 아버지가 하얀 모시옷을 입고 나타나 “달아나려거든 3월29일에 달아나라”는 말씀을 남기고 사라진다. 거사일이 정해지자 지체 없이 고향으로 엽서를 보냈다. 엽서 말미에 일군을 탈출한다는 ‘草草’라는 표현이 들어간 것은 물론이다(이 엽서를 받은 고향의 형님들은 경찰이 의심할 만한 서적 등을 모두 불살랐다. 일경의 수색과 심문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마침 3월29일은 달이 없는 날, 캄캄한 밤을 기다렸다. 이날도 김준엽의 치밀하게 준비하는 품성이 발휘된다. 맹장이 아프다고 꾀를 부려 부대에서 먼 곳으로 가는 행군에 불참한 것이다. 그리고 몰래 분대장의 수류탄을 훔친다. 자살용 칼을 준비했으나 아무래도 칼로는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지를 발휘해 빵도 3개를 확보했다. 결행시간인 29일 새벽 2시를 40분을 앞두고는 성벽을 넘어 탈출하다가 보초에게 발각될 것에 대비해 다음과 같은 편지를 교관 앞으로 남겼다.

    “지금 새벽 1시가 넘었는데 맹장이 굉장히 아프다. 혼자 계신 어머니가 나를 군대에 보낼 때는 대일본제국의 장교가 되는 것이 희망이었는데, 만일 행군에 참가하지 못하면 나는 장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나 혼자 죽더라도 대묘까지 행군 갔다 오겠다.”

    보초한테 들킬 경우 자신이 가는 방향을 틀리게 판단하도록 조작해 다른 방향으로 추적게 할 목적에서 쓴 편지다. 실로 주도면밀한 탈출시도가 아닐 수 없다.

    ‘마지막 독립군’ 김준엽을 기리며


    마침내 김구 주석 앞에

    탈출 작전은 적중했다. 김준엽은 학병탈출 1호가 된 것이다. 이후 김준엽은 김구(金九) 주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과 독립운동가들이 있다는 충칭을 향해 6000리 대장정길에 들어선다. 도중에 중국유격대에 들어가 일군과 싸우기도 하고 다른 학병탈출 동지들과 감격의 해후도 하면서 중국대륙을 문자 그대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면서 종단하게 된다. 당시의 탈출과정은 장준하의 ‘돌베개’와 김준엽의 ‘장정’에 자세히 나와 있다.

    여기서는 평생의 동지가 된 학병탈출 동료 장준하와의 첫 만남 장면만 간단히 살펴본다.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빠져 들어가기 시작할 때이다. 갑자기 마을사람들이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孫(손)참모가 하는 말이 ‘일본병사’들이 방금 도착하였다는 것이었다. 마당으로 뛰어나가 보니 일본군복 차림의 청년 셋이 서 있는데, 그 지성적인 얼굴과 느낌으로 대번 나는 나와 같은 한국의 학병일 것으로 단정했다. ‘한국분들이죠?’ 그렇다는 대답을 듣자마자 와락 달려들어 그들을 차례로 꽉 끌어안았다. 나는 이때처럼 감격에 차고 희열에 넘친 일은 없었다. 이제 한국인 동지가 생긴 것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치려는 씩씩한 동지들을 얻은 것이다. 나는 우리 몇몇이라도 백만의 독립군이 조직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세 청년이 바로 장준하(張俊河), 윤경빈(尹慶彬), 홍석훈(洪錫勳)이었고 함께 탈출한 김영록(金永祿)은 중도에 흩어져서 그날 밤 자정께나 사령부에 도착하였다. 나와 장준하 형과의 만남은 이때가 처음인데 이로부터 그와 나는 친형제 이상으로 가깝게 지냈으며, 그가 1975년 8월에 별세할 때까지 연인처럼 일생 고락을 함께 하게 된다.”(‘장정1’)

    김준엽이 연인으로까지 묘사한 장준하는 이후 광복군 시기는 물론, 전 생애에 걸쳐 둘도 없는 동지적 관계로 일관하게 된다. 두 사람은 일군을 탈출한 학병들 가운데서도 단연 뛰어난 인재로, 학병출신그룹의 리더 노릇을 하게 된다.

    1945년 1월31일, 마침내 6000리 고난의 장정이 끝난다. 충칭의 임시정부 청사 앞에 도달한 것이다. 일본군을 탈출한 지 10개월 만이었다. 학병 출신 23명을 포함한 50명의 한국인 청년과 함께였다. 꿈에 그리던 임시정부 청사에 도착한 김준엽 일행은 누런 군복을 입은 57세의,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이청천(李靑天) 장군에게 감격스러운 경례를 붙이게 된다. 이 장군의 짧은 훈시가 끝나자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 김구 주석을 비롯해 머리가 희끗희끗한 임정요인들과 역사적인 첫 대면을 했다. 김규식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등 혁명원로들이었다. 김준엽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한 분도 빠짐없이 백발이 성성하였고 몹시 노쇠해 보였다. 얼굴은 핏기가 없이 부석부석하였으나 두 눈과 꽉 다문 입술에는 혁명가의 굳은 의지가 한눈에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한반도 진공작전

    충칭의 임시정부에서 감격의 날들을 보내던 김준엽은 임정 내 각 정치세력의 분열상과 암투에 실망하던 중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李範奭) 장군을 만나게 된다. 이 장군은 미군과 한반도 상륙작전을 전개할 계획을 밝히면서 함께 시안(西安)으로 갈 것을 권유한다. 장준하와 함께 이 장군을 따라나섰을 때 동행한 동지는 19명으로 이 중 10명이 학병 출신이었다.

    충칭 임시정부 도착 3개월 만에 시안의 광복군 제2지대에 들어간 김준엽 일행은 미군들과 함께 미국전략정보기관(OSS)의 한반도진공계획에 따른 게릴라 훈련을 받게 된다. OSS는 정보활동과 유격활동을 병행하면서 적의 후방지역 교란 공작을 수행하기 위한 조직으로, 당시 유럽전선을 비롯해 아프리카 태평양 중국 등을 활동무대로 삼고 있었다.

    시안의 광복군 제2지대에서 김준엽은 두 가지 중요한 일을 겪는다. 먼저 이범석 장군의 부관이 된다. 투철한 애국심과 독립군으로서의 사명감 그리고 성실성을 갖춘 데다 실무능력도 뛰어난 김준엽을 이범석 장군이 발탁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연이 돼 이범석 장군의 비서로 일하던 민영주(閔泳珠)와 결혼하게 된다. 이 장군의 부관과 비서로 일하면서 자주 대화를 나누고 친근감을 느끼던 사이였는데, 부대 내에서 염문설이 퍼진 게 발단이 됐다. “나와 미스 민에 대한 동지들의 오해 때문에 괴롭기가 한이 없다”며 의논하는 김준엽에게 장준하는 명쾌하게 결론을 내려준다. “서로 호감을 갖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오늘이라도 미스 민을 만나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라. 그리고 약혼을 선포하면 동지들의 낭설도 일소될 것이다.”

    얼마 후 김준엽과 민영주는 장준하의 주례로 학병동지들만 모인 자리에서 약혼식을 하게 된다. 그리고 민영주의 부친인 임시정부 민필호(閔弼鎬) 판공실 주임(김구 주석의 비서실장 격)의 결혼 승인 소식이 전해지자 아침조회 때 이범석 장군이 전 대원 앞에서 “오늘부터 김준엽 동지와 민영주 동지는 부부가 된다”고 선포했으니 이것이 두 사람의 결혼식이었다. 동지이자 아내가 된 민영주 비서는 저명한 독립운동가 신규식(申圭植) 선생의 외손녀이기도 하다. 신규식 선생은 상하이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했을 뿐 아니라 중국 정부로 하여금 임시정부를 승인케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OSS의 훈련은 3개월 만에 예정대로 마쳤다. 침투술 폭파술 사격술 등 각종 훈련을 이수하자 무기와 무전기, 조선은행권 지폐, 금괴, 각종 가짜 증명서, 국민복, 모자, 신발 등 국내 것과 똑같은 장비 일체가 지급되었다. 이제 출격명령만 내리면 고대하던 조국으로의 진공작전이 개시되는 것이다. 8월20일 안으로 50명이 함경도로부터 남해에 이르기까지 4, 5명씩 지구공작반을 편성해 잠입하게 되어 있었는데, 김준엽은 강원도반장을, 장준하는 경기도반장을 맡아 긴밀한 협동작전을 벌일 예정이었다.

    학계로 진출하다

    1945년 8월10일 출격명령을 기다리던 OSS 대원들에게 엄청난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무조건 수락하겠다는 뜻을 중립국 스위스를 통해 연합국에 통지해왔다는 것이다. 소식이 전해지자 영내는 발끈 뒤집혔다. 미군들은 샴페인을 터뜨리며 서로 껴안고 환호했지만, 광복군은 해방의 환희와 함께 허탈감에 사로잡혔다. 김준엽은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적어놓았다.

    “이것은 내게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 산동에서 미국 잠수함을 타고 본국에 들어가 국내 요소를 점령한 후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할 계획을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애석하기 짝이 없다. 그보다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차 국제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점이다.”(‘장정2’에서 요약)

    해방이 되자 충칭의 임시정부 요인을 비롯해 광복군 그리고 일본군대에 속해 있던 조선인들이 귀국길에 올랐다. 김구 주석도 11월23일 개인 자격으로 상하이를 떠나 귀국했고, 장준하 역시 김구 주석과 함께 떠났다. 이 무렵 김준엽은 또 한번 일생일대의 선택을 하게 된다. 함께 귀국해 새 나라를 건설하는 데 힘을 합치자는 김구 주석, 이범석 장군 등 독립운동가 원로들의 뒤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중국대륙에 남아 못다 한 동양사 공부를 하고 학계로 투신할 것인가 하는 두 갈래 길이 앞에 있었다. ‘장정2’에 당시의 결심배경이 잘 나와 있다.

    “나는 나름대로 여러 가지로 분석하였다. 우선 일제의 투항으로 정세가 일변하였다는 점이다. 일제의 식민지 하에서는 우리 민족의 해방과 독립이 지상과제였기에 그를 위하여 나의 목숨까지도 바치려고 하였으나, 이제 독립이 되어 건국사업이 전개되는 마당에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치뿐 아니라 경제 문화 사회 군사에 걸친 제반 건설사업이기 때문에 국민 각자가 자기의 적성에 맞는 일에 투신하여 최선을 다해야만 될 것이다.

    그러면 나의 적성은 무엇일까? 학문에 대한 나의 정열도 정열이려니와 정치에는 흥미도 없을뿐더러 권모술수나 머리 숙일 줄 모르는 내 성격은 관료로는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게다가 나는 강제징집으로 학업을 중단하였기에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내가 게이오대학에서의 전공과목이 중국사였기 때문에 중국사를 연구하기 위해 일부러라도 중국에 유학을 와야 할 것이 아닌가. 나는 전쟁터에서 중국어를 배웠고 대륙을 동분서주하는 동안에 중국의 지리나 실정에도 어느 정도 익숙한 장점을 터득한 것이 아닌가. 이 모든 것을 살려서 나는 기어코 중국전문가가 되리라.”

    마침 이 무렵 김준엽에게 학계로 진출하게 되는 행운이 찾아온다. 중국 국립 동방어문전문학교에서 한국어과를 신설하고 한국어를 가르칠 교수요원의 추천을 우리 주화(駐華)대표단에 요청해온 것이다. 대표단에서 김준엽을 지명함에 따라 1946년 2월 전임강사로 취직, 학계에 첫발을 들여놓게 된다. 동방어전(東方語專)은 일본이 항복하자 장차 독립할 한국과의 관계를 고려,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중국 정부가 설치한 중국의 유일한 외국어대학이었다. 김준엽 선생이 말년에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중국에서의 한국학 연구의 씨앗이 이때 뿌려진 셈이다. 당시 제자였던 양퉁팡(楊通方)이 후일 베이징대 교수가 되어 중국 내 최고의 한국학 전문가로 이름을 떨치는 등 오늘날에도 김준엽 선생의 동방어전 제자인맥이 두텁게 형성돼 있다.

    동방어전이 충칭에서 난징(南京)으로 옮겨오자 김준엽은 국립중앙대학의 대학원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연구생활에 몰두한다. 중국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으로 중국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된 것이다. 중국사 외에도 한중일 3국의 어법연구와 공산주의 이론을 연구하느라 거의 24시간 책과 씨름하는, 원 없이 공부할 수 있었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고려대 사학과 조교수

    김준엽의 중국에서의 연구생활은 신장결석이 발병하는 바람에 돌연 중단되고 수술을 하기 위해 귀국하기에 이른다. 1948년 4월의 일이다. 조국을 떠나올 때는 탈출계획을 품은 학병 신세였으나 이제 독립투사 경력의 학자로서, 처와 아들을 거느린 가장이 되어 귀국하게 된 것이다.

    귀국한 김준엽은 이승만 대통령, 김구 주석, 이범석 국무총리 등 중국시절 인연을 맺었던 정계 요인들에게 인사를 다니는 한편, 다시 만난 장준하에게서 국내 정세에 관해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국방장관을 겸하고 있던 이범석 총리는 총리실이든 국방장관실이든 희망하는 곳으로 들어와 자신을 도와달라고 했지만 이미 학계에 투신할 결심을 굳힌 김준엽은 정중히 사양했다.

    1949년 김준엽은 고려대학교 사학과 조교수로 발령받는다. “서울대 연세대에서도 교수직을 제의해 왔으나, 인촌 김성수 선생과 기당 현상윤 선생 같은 민족지도자가 학교를 이끌고 있었고 이상은, 김경탁, 정재각 교수 등 중국학의 대가들이 모여 있었던 고려대를 택한 것”(고대교우회보 인터뷰)이다.

    30세가 채 안 된 최연소 고려대 교수 김준엽은 이렇게 해서 36년간의 ‘고려대 시절’이라는 제2의 장정을 시작하게 된다. 김준엽의 고려대 시절 역시 광복군 시절 못지않게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기고 있으나 여기서는 지면관계상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설립해 세계적 연구소로 발전시킨 업적과 ‘사상계(思想界)’참여, 고려대 총장 재직 시의 일들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김준엽은 고려대 재직기간 36년 가운데 1957년부터 1982년 총장 취임 때까지 25년을 발기인, 부소장, 소장으로 아세아문제연구소(이하 아연)와 관련된 일에 매진했다. 아연이 곧 김준엽이었고 김준엽이 아연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헌신적으로 아연을 발전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아연 설립에 처음 뜻을 모은 것은 김준엽과 조기준 김정학 교수 등 3인이었다. 이들은 서양이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벗어나 아시아 국가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는 우리 나름의 안목을 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연구소를 세우기로 의기투합했다. 다행히 유진오 총장이 이에 대한 이해가 깊어 본관 2층에 교실 하나와 전화기 1대를 마련해주었고 학술지 간행비를 지원해주었다. 전화 받을 사동을 한 명 고용해 세 교수가 분담해 월급을 지급했다. 연구소의 도서로 세 사람이 각각 10권씩의 책을 내놓아 30권을 비치하는 것으로 출발한 아연의 초대 소장은 베이징대 출신 중국철학의 권위자인 이상은 교수를 추대했다.

    사상계 주간

    김준엽은 연구소의 성공적 운영을 위한 조건으로 △뚜렷한 설립목적 △연구를 수행할 전문인력 △연구수행 및 결과발표에 필요한 재원 마련 등 세 가지를 내세웠다. 그래서 아연의 설립목적은 중국 일본 등 아시아지역 연구에 초점을 두었고, 전문인력은 고려대에만 제한하지 않고 국내외 학자들이 참여하도록 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1950년대 후반 무렵의 한국에는 제대로 된 연구소도 없었고 국내에선 자금지원을 받을 곳이 전무했다. 하는 수 없이 외국에서 지원을 받기 위해 노력했는데 연구소 설립 후 첫 번째 외부지원금은 아시아재단으로부터 받은 200달러였다. 등사기와 잉크 종이를 사는 데 썼다. 아연이 재정적 안정을 이루면서 본격적인 연구 활동에 돌입하게 된 계기는 뉴욕에 본부가 있는 포드재단의 지원이었다. 김준엽이 1958년 8월부터 1년간 하버드대학에 객원교수로 가 있을 때였다.

    포드재단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게 된 것은 사우스캘리포니아대학에서 열린 공산권 문제 연구자들의 토론회에 초청학자로 참석한 데서 비롯됐다. 이 자리에서 김준엽은 프린스턴대학의 페이지(Glenn D. Paige) 교수를 만나게 된다. 6·25 당시 연합군으로 참전한 경력이 있는 페이지 교수가 한국의 젊은 학자에 호감을 갖고 말을 걸어온 게 인연이 돼 마침 그 자리에 참석한 포드재단의 고문 바네트(Doak Barnet) 교수를 소개해준 것이다. 선교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성장했던 바네트 교수가 중국 유격대와 한국 독립군 출신의 김준엽에게 친밀감을 가진 것이 결정적이었다.

    정식으로 프로젝트를 신청한 지 4년 만인 1962년 포드재단으로부터 28만5000달러를 지원받게 되자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액이었다. 이때부터 아연은 ‘아시아의 근대화 문제’(1965)를 주제로 당시까지 우리나라에서 열린 최대 규모의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는 등 명성을 쌓아갔다. 필자가 대학에 다니던 1970년대까지도 “해외에서는 고려대는 몰라도 아연은 알고 있다더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아연은 또 공산권연구실을 설치해 이 분야 연구의 씨앗을 뿌렸다. 김준엽과 김창순 공저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전 5권이 발간(1967~76)된 것도 이 무렵이다. 외국에서 공산주의 관련서적을 구입해오면 공항에서 바로 압수당했고 빨간색 커버만 보여도 압수당하던 시절이었다.

    고려대 교수 시절 중요한 활동 가운데 하나가 ‘사상계’에 참여해 주간을 맡은 일이다. 잡지 ‘사상계’는 1953년 4월 장준하가 창간해 지식인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나 재정적으로는 취약한 상태였다. 김준엽이 참여한 1955년 무렵 ‘사상계’는 매월 3000부를 발행했으나 1800부는 반품되어 경영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김준엽은 당시 사상계의 필자가 기독교 신자인 장준하와 가까운 연세대 교수들이라는 점을 알고는 고려대나 서울대 등의 우수한 필자를 적극 발굴하는 데 앞장섰다.

    총장실 기관원 출입금지

    김준엽이 처음 편집에 참여한 4월호에 학생특집으로 3000부가 모두 매진됐고 계속 판매부수가 증가해 그해 12월에는 1만부를 돌파하기에 이르렀다. 필자의 다변화와 내용의 충실화를 기하면서 사상계가 도약하게 된 것이다. 김준엽은 편집위원으로 정치와 사회부문을 담당했고, 1959년 10월부터 1961년 1월에 이르는 4·19혁명의 격동기에는 제3대 주간을 맡았다.

    1982년 6월 김상협 고려대 총장이 임기 만료를 2개월 남겨놓고 국무총리로 취임하자 그 뒤를 이어 김준엽 교수가 7월10일 제9대 총장이 된다. 총장으로 첫날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김 총장은 가족에게 자신의 결의를 알려준다. 첫째, 결코 비굴한 행동을 취하면서까지 총장 자리에 남아 있지 않겠다. 둘째, 총장으로서 업적을 내지 못한다든지 또는 업적을 낼 수 없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두 가지였다. 마치 후일 그가 정권에 의해 총장직을 그만두어야 할 상황이 도래할 것을 알고나 있었던 것처럼 가족에게 미리 각오를 다지게 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김준엽 총장은 취임하자마자 그때까지만 해도 총장비서실에 진을 치고 간섭과 협박을 일삼던 기관원들의 출입을 금지했다. 아마 이때부터 정권의 미움을 사기 시작했을 것이다. 기관원 축출로 시작된 대학의 자율성 회복노력은 그 후 학생시위 때마다 총장을 불러다 학생처벌 등의 ‘지시’를 내리는 문교부와의 끝없는 불화로 이어졌다.

    김 총장에 따르면 보안사 안기부 치안국 시경 성북경찰서 문교부 상주연구원(감시원) 등 10여 명이 하루 종일 비서실 소파를 점거하는 바람에 손님이 와도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 문교부에서 대학을 대하기를 마치 대학총장은 소대장, 학장은 분대장, 교수는 반장, 그리고 학생은 졸병 격으로 여겼다고 술회했다.

    ‘마지막 독립군’ 김준엽을 기리며

    고려대 총장 시절 김준엽 선생은 전두환 정권과 자주 충돌했다.

    김준엽 총장이 재직한 1982~85년의 대학가는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학생시위가 가열되던 시기다. 야당 당사에 이어 집권당인 민정당사를 점거농성하기도 했고, 관 주도의 학도호국단을 민주적 총학생회로 조직하려는 움직임도 거셌다. 해직교수의 복직을 둘러싼 갈등도 끓어올랐다.

    이런 시국 분위기에서 대학 총장은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대학 총장들을 모아 놓고 ‘데모를 막으라’는 훈계와 ‘못 막으면 책임지고 물러나라’는 경고가 일상화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김 총장은 사사건건 정부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위학생 제적 압력에는 ‘학칙에 의거해’ 처리하겠다고 버텼고, 총학생회 조직을 허용하기로 했는가 하면, 해직교수에게는 생활비를 지급하면서 원 소속 대학으로의 복직을 주장하고 나섰다.

    총장으로서의 김준엽과 관련해서는 이처럼 독재정권에 맞선 용기 있는 자세가 상대적으로 크게 부각되는 감이 있으나 그에 못지않게 당시 고려대가 처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한 게 사실이다. 대표적인 업적이 과학도서관 법학관 정경관 등 무려 7만5900㎡(2만3000여 평)의 건물을 세우고, 400명 선이던 전임교수를 600명 선으로 늘리는 등 교육의 내실화를 기한 점이다. ‘중흥의 전기를 마련한 총장’(고대교우회보 1985.4.5)이라는 평가가 잘 말해준다.

    김 총장이 2년8개월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놀랄 만한 규모의 시설확충과 교수증원 등 ‘재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을 해낸 데에는 기업인을 상대로 한 기부금 유치노력이 주효했다. 구자경 럭키금성 회장, 김우중 대우 회장, 조내벽 라이프 회장, 김형종 한신공영 회장, 박용곤 OB 회장 등 기업인에게서 무려 100억원의 기부금을 찬조받은 것이다. 연세대 출신인 김우중 회장을 찾아가 “고려대는 민족기업가들의 손에 의해 육성 발전되었다. 오늘날 민족기업가의 대표 격인 대우도 그 대열에 서달라”고 간곡히 호소해 결국 기부를 이끌어냈다는 비화도 있다.

    요즘은 대학 총장의 주 업무가 외부로부터 기부금을 유치하는 것처럼 비칠 정도지만 이미 30년 전에 김 총장은 기부금 유치를 위해 발 벗고 나선 것이다. 김 총장의 기부금 유치 노력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연 시절 해외재단으로부터 지원받은 경험과 함께 광복군 출신의 지조 있는 학자라는 경력이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총장 사퇴반대 학생시위

    고려대 중흥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과 성과에도 김준엽 총장 체제는 단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예견한 대로 1985년 2월12일 총선이 끝난 바로 다음날 권이혁 문교장관으로부터 “총장이 책임지고 사표 내라. 사표 제출하지 않으면 재단에 총장 승인 취소통고를 하겠다”는 통보를 받게 된다. 정권으로서는 진작 김 총장을 쫓아내고 싶었지만 총선을 앞두고 여론을 악화시킬까 두려워 이날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사표 종용의 표면적 이유는 ‘특혜 입학시킨 교직원자녀 25명을 제적조치하지 않은 책임’이었다. 문제가 된 사안이 다른 학교에서도 관례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고, 이미 1년이나 지난 사안이었지만 김 총장은 숙고 끝에 사표 제출을 결심한다. “내 목을 자르려고 오래전부터 계획한 것인데, 이번에 용케 모면한다고 해도 또 무슨 트집을 잡아 사표를 요구하고 학교에 가지가지의 압력과 불이익을 줄 것이 아닌가! (문제가 된) 25명만 살려주는 데 장관이 동의하면 사표를 제출하리라.”(‘장정3’)

    이렇게 해서 고대의 김준엽 총장 시대는 2년8개월 만에 막을 내린다. 1985년 2월25일 총장으로서의 마지막 행사였던 졸업식은 ‘총장사퇴 결사반대’를 외치는 거대한 학생시위장이 됐고, 이 사퇴반대 시위는 그 후 한 달간 지속된다. 후일 김 총장은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총장퇴진 요구 시위는 많았어도 사퇴반대 시위는 내가 처음이었을 것”이라며 이를 제자들로부터 받은 가장 큰 영광이라고 말하곤 했다.

    김준엽과 관련해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깃거리는 ‘고사 총리’라는 별명까지 얻게 된 관직 고사(固辭) 부분이다. 이범석 초대 국무총리의 함께 일하자는 요청에서부터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제2건국추진위원장에 이르기까지 10여 차례의 각종 관직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1987년 6·29선언 이후 1노2김이 격돌했던 대통령선거전에서는 민주당의 김영삼 후보 측에서 ‘선거대책본부장과 당선 후 국무총리’를, 평민당 김대중 후보 측에서 ‘상임고문과 당선 후 국무총리’를, 노태우 당선자 측에서 국무총리직을 각각 제의하는 등 어떻게든 김 총장을 자기 진영에 끌어들이려고 혈안이 되기도 했다.

    수많은 입각 제의를 거절하다

    1974년 봄 어느 날 필자가 수강하던 김준엽 교수의 동양최근세사 강의실. 교실에 모인 학생들이 약간 들뜬 기분으로 김 교수를 기다렸다. 마침내 김준엽 교수가 나타나자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우렁찬 박수가 쏟아졌다. 그날 아침 조간신문에 김 교수가 통일원 장관 입각교섭을 거절했다는 기사가 난 것이었다. 이것이 당시의 민심이었다. 촉망받던 지식인이 어느 날 갑자기 유신정권에 발탁돼 고관이 되는 행태를 보며 실망을 거듭하던 차에 김준엽 교수의 장관직 거절은 한줄기 빛과도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수많은 입각교섭 중에도 노태우 당선자의 총리 영입시도가 가장 집요했던 경우였다. 당시엔 김 총장의 측근 가운데 일부도 민주적 선거로 출범한 정부이니 받아들여 국가를 위해 봉사할 필요도 있지 않으냐며 총리직 수락을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관직 고사는 그의 오랜 신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어떤 경우에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노태우 정부 측의 영입시도에 대비한 거부 이유를 일기에 써놓은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①해방 직후에 결심한 대로 일생을 학자로 지내지 정계나 관계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을 것이다. ②벼슬 하면 하나밖에 없는 머리를 숙여야 할 것 아닌가. ③제자들이 감옥 속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총리를 맡을 수 있는가. ④전두환씨가 자동적으로 국정자문회의 의장이 될 것이고, 총리가 되면 그 회의에 나가 국정보고를 해야만 할 터인데 머리가 100개 있어도 이런 군사독재자에게 머리를 숙이며 국정보고를 할 수 없다…”

    거듭되는 관직 제의를 고사한 김준엽 선생의 말년은 사회과학원 이사장을 맡아 현대 한국과 국제문제 연구를 진흥하는 일이었다. 김우중 회장이 아무 조건 없이 거액을 출연해 연구원을 만들고 그 운영까지 부탁한 데 따른 것이었다. 사회과학원 운영과 함께 중국 내 주요대학에 한국학연구소를 설치하도록 지원한 것도 중요한 업적이다. 이런 공로로 베이징대 등 중국의 명문대 12군데에서 명예교수로 위촉하기도 했다. 또 상하이 충칭 항저우 등지에 있던 임시정부 청사의 수복, 의천 대사와 관계가 깊은 항저우 고려사 복원 등 중국 내 한국유적지를 확인 복원하는 사업도 생애 마지막 과업으로 생각하고 전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일년에 수차례 중국을 왕래한 김준엽 선생의 노력은 사실 국가가 해야 할 몫이었다.

    김준엽 선생의 일생을 되돌아볼 때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장준하 선생이다. 김준엽은 장준하를 ‘연인’에 비유했고, 장준하는 상하이에서 김구 선생과 함께 귀국할 때 (홀로 남겨진 김준엽을) ‘반쪽 몸’을 떼어두고 가는 심정이었다고 했다. 이제 김준엽 선생이 영면했으니 이승에서 맺어진 동지의 인연은 다시 저승에서도 이어지지 않았을까?

    가까이에서 본 김준엽

    필자가 김준엽 선생과 처음 만난 것은 1972년 고려대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중어중문학과에 들어갔는데, 학과장이 바로 김준엽 교수였다. 알고 보니 중어중문학과를 창설하기 위해 10년 전부터 정부에 인가를 요청했는데, 이루어지지 않다가 1971년 닉슨 미 대통령의 중공 방문으로 국제정세가 돌변하자 비로소 성사됐다는 것이다. 50대 초반의 김준엽 학과장은 무척이나 인자한 분이어서 어린 학생들과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한번은 설날에 명륜동 자택으로 세배를 갔는데 사학과의 대선배들이 많이 찾아와 사제간에 거리낌 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었다. 1학년생이던 필자와 동료들은 약간 주눅이 들어 대화만 경청했던 게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1970년대 후반 졸업을 앞두고 있던 무렵인가 김준엽 교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선생님 저희는 언제쯤이나 중국에 갈 수 있는 건가요?” 진로문제에 고민을 하던 끝에 물어본 것이다. 그때의 대답인즉, “아마 10년은 걸리지 않을까”였는데, 실제로 중국과 수교한 때가 1992년이었으니까 5, 6년은 더 걸린 셈이다.

    그칠 줄 모르던 사회에 대한 관심과 걱정

    한중수교 4년이 지난 1996년 필자는 동아일보 베이징 특파원으로 부임했다. 당시 김준엽 선생은 베이징대를 비롯해 중국의 여러 대학을 자주 방문하던 때여서 다시 만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대학 시절엔 학생과 학과장 교수로 만났지만 이때부터는 고려대 동문 자격으로 만나 다양한 대화를 나누었다. 선생께서 베이징에 오실 때마다 몇몇 고려대 동문과 함께 자주 만났는데 화제는 자연스럽게 중국 문제였다. 선생은 중국 문제에 관해서는 최고의 권위자였음에도 필자에게 “중국 노동자의 월급은 얼마나 되는가?” “중국관리들이 한국기자들을 대하는 태도는 어떠한가” 등 세세한 것에 관심을 가지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김준엽 선생과의 대화모임은 특파원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서도 이어졌다. 베이징 시절 가깝게 지낸 동문 서너 명과 일년에 두세 차례 선생을 모셨다. 주로 힐튼호텔의 중식당에서 만나곤 했는데, 이때는 중국 문제뿐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화제에 오르곤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북한에 대해 그릇된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며 사회 일각의 친북(親北)적 언행에 우려를 나타내시던 모습이다. 90대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은 여전했다. 심지어 한일 축구 경기가 있는 날에는 “이번에 꼭 이겨야 할 텐데, 요즘 국민이 어려워하는 일이 많은데 만약 지게 되면 사기가 떨어지니까 말이야”하는 식이다.

    선생은 기억력도 비상했다. 적당히 대화하는 법이 없었다. 사람 이름과 연대를 정확히 기억해 말씀하시곤 했다. 필자와 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도 “저번에 큰딸이 저장대(浙江大)에 교환학생 간다고 했는데, 잘 마치고 왔느냐”고 물어볼 정도로 자상했다.

    선생이 별세하기 닷새 전 비서를 통해 전갈이 왔다. 상태가 위독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뵈러 오라는 것이었다. 황급히 고대병원 특실로 가니 폐암이라 했다. 건강검진을 자주 했더라면 발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동안 병원을 멀리하는 바람에 말기에 이른 최근에야 암 진단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날은 마침 의식이 호전돼 필자를 알아보았다. 무어라 말씀은 하셨으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목소리가 작았다. 바쁜데 뭐 하러 왔냐는 말씀 같았다. 수척해진 얼굴에 미소를 띤 모습은 여전히 품위를 잃지 않았고 잡은 손은 따뜻했지만, 나의 마음속으로는 “한 시대를 장식했던 ‘나의 위대한 스승’이 마지막 순간을 보내고 있구나” 하는 안타까움이 밀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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