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비아 재건사업? 과도정부 구성 지켜봐야 예측
- 민정(民政) 경험 없어… 컨센서스 도출 과정 주목
- 3000여 명 직원 구출작전…“건설 강국이 그냥 되나요?”
- 14일간 공사현장에서 야영생활한 ‘가 선생’
- 카다피-이상득 면담은 대우 현지법인장이 ‘연결고리’
- “한국은 리비아 무시한다”던 카다피, 면담 후엔 “슈크란”
두 시간여 인터뷰하는 동안 차분하던 그의 목소리가 유일하게 커졌다. 소파의 나무팔걸이 끝 부분을 꽉 잡은 오른손의 두툼한 정권(正拳)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그는 여느 대기업 사장과 달리 심리상태가 얼굴 표정과 몸짓으로 드러났다. 사장이라는 ‘겉옷’이 44년을 건설인으로 살아온 그의 DNA와 자부심까지 가리진 못한 듯했다.
기자는 9월5일 서울 신문로1가 대우건설 본사에서 서종욱(62) 사장을 만났다. 서 사장은 한·리비아 수교 이전(1980년)부터 리비아 현지에서 일을 했고, 이후 리비아 건설본부 관리부장을 맡는 등 국내 몇 안 되는 ‘리비아 전문가’로 통한다. 지난해 국가정보원 직원 추방 문제로 한·리비아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을 때도, 비선을 통해 특사인 이상득 의원과 카다피 당시 국가원수의 만남을 주선한 인물도 그다.
최근 리비아 재건사업에 건설업체의 관심이 쏠리면서 서 사장의 행보를 지켜보는 눈도 많아졌다. 하지만 서 사장은 ‘지켜보는 중’이다. 과도정부 구성 등 향후 4개월간의 움직임을 읽어야 ‘포스트 카다피’ 체제를 예측해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리비아는 물론 해외 곳곳에서 건설 공사를 수행하는 회사의 대표인만큼 그의 말 한 마디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터. 그가 인터뷰 요청을 어렵게 받아들인 것도, 인터뷰 도중 두 차례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를 요구한 것도 그 연장선상이었다. 인터뷰는 서 사장과 리비아와의 인연부터 시작했다.
1979년 리비아와 첫 인연
▼ 리비아에 처음 가신 게 1979년인가요?
“맞아요. 입사 3년차였죠. 한때 반정부 세력의 거점도시인 벵가지의 가리니우스 의과대학 신축 공사 현장으로 발령이 났죠. ‘DC1 현장’이라고 했어요. ‘Daewoo Contract No.1’이라고, 대우의 첫 계약이라는 의미였어요. 국교가 수립되기 전에 리비아에서 한국 회사가 수주한 첫 사업이었죠. 이 공사를 계기로 지금까지 리비아에서 114억달러의 공사를 수행해왔으니 큰 인연이라고 봐야죠. 그땐 정말 일밖에 몰랐어요.”
▼ 초기에는 힘들었겠어요.
“그럼요.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단체 체조하고 식사하고 7시 반부터 밤늦게까지 일했으니….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면서 동료들의 소중함도 알게 됐죠. 그땐 한 달에 두 번 쉬었는데, 쉬는 날에는 밤에 횃불을 들고 바다로 가 문어를 잡았어요. 현지 주민들은 뼈 없는 동물을 먹지 않으니까 문어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죠. 문어를 잡다가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어요. (현지 경찰 생각에는) 쉬는 날에 쉬지도 않고 떼로 몰려다니니까 수상했던 거죠.”
▼ 1982년 귀국했다가 1988년에 다시 리비아로 갔는데요.
“88올림픽 기간이었어요. 1979년 갔을 때 현장소장 하시던 분이 본부장으로 있었는데, ‘SOS’를 친 거죠. 도로와 비행장, 학교, 주택건설 등 공사현장이 너무 많아 일손이 부족했거든요. 그때 직원들 비자 문제와 현장민원 때문에 이민국이나 시청 부동산국을 수없이 드나들었죠. 대관(對官) 업무를 많이 하면서 알게 된 인맥이 20년 넘게 이어지고 있네요.”
▼ 그 ‘인맥’이 결국 빛을 발했군요.
“네?”
▼ 이상득 의원이 특사자격으로 리비아를 방문했을 때 서 사장께서 카다피 당시 국가원수와 이 의원 만남을 주선했으니까요.
“거, 참. 그 얘기는….”
헛헛하게 웃던 서 사장이 탁자에 놓인 차가운 결명자차를 반쯤 마셨다. 아랫입술을 윗입술에 포개더니 이마에 2개의 굵은 주름이 그려졌다. 가벼운 미소를 짓는 그의 표정이 ‘그 얘기는 넘어갑시다’하고 말하는 듯했다.
지난해 9월30일 리비아 시르테시에서 카다피 전 국가원수를 만나 관계 정상화에 합의한 직후 촬영한 사진. 왼쪽부터 주 요르단 주정훈 서기관, 김종근 아중동국장(현 에티오피아 대사), 이상득 의원, 카다피 국가원수, 서종욱 사장, 알리 딸락 시르테 보안사령관, 이권상 대우건설 시르테 합작법인 대표.
“1979년 리비아 우조비행장 건설공사 현장에 ‘가 선생’이 나타났어요. 사하라 사막 남쪽 끝 차드와의 국경 인접지역인데, 당시 현장 책임자인 서만석 상무(작고) 등이 처음 만났죠(그는 배석한 강우신 전무에게 리비아 지도를 달라고 하더니 지도를 보며 자세히 설명했다). ‘가 선생’은 예고 없이 방문해 그곳에서 14일간 텐트 치고 머물렀어요. 직원들과 탁구도 치고, 일하는 모습도 지켜봤죠. 당시 몇몇 직원이 ‘가 선생’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는데, 이 사진 한 장이면 공항은 물론 리비아 전역을 다녀도 프리패스(Free Pass)였다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직원들과 함께 야영 생활한 ‘가 선생’
▼ ‘가 선생은’ 왜 왔습니까?
“그 공사는 당초 이탈리아 업체가 진행하다가 기후 등 열악한 공사 환경 때문에 중간에 포기하고 철수한 현장이었어요. 대우가 수의계약으로 넘겨받은 거죠. 한낮 기온이 40~50℃를 오르내리는 사막 한가운데서 한국인들이 야영생활을 하면서 공사를 하는 게 궁금했나봐요. ‘가 선생’은 한밤중에도 대낮같이 불을 밝히고 일하는 모습을 보고 한국인의 열의와 근면함에 찬사를 보냈어요. 우리는 무사히 공사를 마쳤고요. 이를 계기로 한국과 리비아 간에 국교가 수립됐어요.”
한국과 리비아는 1970년대 이전부터 수교를 추진했지만 정식 대사급 수교가 이뤄진 해는 1980년 12월이었다. 정식 수교 후 설치된 주한 리비아대사관은 2006년 리비아 외교관의 부정행위 연루혐의로 2007년 경제협력대표부로 격하됐지만, 지난해 이상득 특사의 방문 이후 대사급 관계가 복원됐다. 북한과는 이미 1974년 1월에 대사급 수교를 했다.
▼ 카다피 체제하의 리비아는 어땠나요?
“리비아는 140여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카다피는 관습과 전통이 다른 부족들을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통치하면서 전체 부족 간 화합으로 이끈 것으로 평가받았어요. 1969년 쿠데타 이후 반(反)서방 정책을 펴면서 비효율성 같은 문제점은 있었지만 부정적 측면만 있었던 건 아니라고 봐요. 하지만 장기집권에 따른 부작용은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이죠. 국민의 민주화 욕구가 잠재되어 있다가 올해 초 튀니지의 재스민혁명 등 중동, 북아프리카 국가에 불어닥친 민주화운동 여파로 한꺼번에 폭발한 것으로 봐요. 2011년 2월 최초로 봉기가 일어난 벵가지 지역은 카다피 집권 이전의 수도이자 전통적인 야도(野都)로 친정부 성향의 수도 트리폴리와는 대비되는 도시죠.”
▼ 리비아 사태가 일단락되면서 재건사업에 뛰어들려는 기업이 많은데요. 일각에서는 항만, 정유시설 등 최소 1000억달러 이상의 사업이라고 분석합니다.
“리비아에서의 비즈니스가 만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일반적으로 리비아 사람들은 친절하고 따뜻하지만, 역사적으로 상술에 밝은 아라비아 상인의 후예들이고, 정부나 발주처의 주요 인사들은 영국 등 선진국에서 유학한 엘리트들입니다. 자존심이 매우 강해 처음부터 신뢰관계를 구축하는 게 쉽지 않아요. 한마디로 서구적 계약 관습에 익숙하면서 비즈니스는 철저히 따지는 성향입니다. 이런 성향부터 알고 면밀히 분석한 뒤 뛰어들어야죠.”
철저한 비즈니스 무장
▼ 어렵군요.
“대우건설도 33년간 때로는 손해도 보고 무작정 기다리기도 했어요. 행정 면에서 일관성이 부족해 행정처리가 신속히 이루어지지 않는 점에서는 인내가 필요해요. 리비아에 뛰어드는 기업이 유의해야 할 리스크 1순위는 ‘정책의 일관성 부족’입니다. 앞으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다고 해도 핵심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현재의 엘리트 중심의 국가운영은 큰 변화가 없을 겁니다. 얼마 전 국가과도위원회(NTC)가 ‘카다피 정권 당시 진행된 공사계약을 승계할 것’이라는 입장을 발표했으니 예의주시해야죠. 한편으로는 인간관계와 신뢰를 중시하는 동양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어요.”
▼ 행정처리가 늦으면 ‘급행료’도 줍니까?
“급행료요? 아, 아닙니다. 설명과 설득을 하고 사태의 긴박성에 대해 이해를 시키는 노력이 필요한 거죠. 부패가 개입되는, 그런 연장선상은 아닙니다.”
▼ ‘포스트 카다피’의 리비아 정국은 큰 변화가 없다는 말씀이군요.
“지켜봐야 합니다.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는 NTC가 리비아를 대표하는 기구로 자리매김하고 있는데, NTC가 본격 활동하는 9월부터 4개월간 국정운영 상황을 주시할 필요가 있어요. NTC는 9월 중 임시 내각을 구성하고 3개월 내에 헌법 초안을 마련한 뒤, 8개월 내에 총선거를 실시해 200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한다는 청사진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어요. 하지만 리비아는 지난 42년간 카다피 정권하에 민정(民政) 경험이 없고, 현재의 NTC는 140개의 리비아 부족 지도자들이 참여하고 있잖아요? 이 중에는 이슬람주의자, 세속주의자, 서구식 민주주의자, 이슬람식 민주주의자 등 정치관이 다른 다양한 세력이 참여하고 있거든요. 조속한 내부 컨센서스(Consensus) 도출이 가능한지 4개월간 지켜봐야 한다는 얘깁니다. 저희도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이 추이를 지켜보고 있어요.”
▼ 국내 기업 간 경쟁도 치열하겠어요.
“걱정이에요. 경쟁은 당연합니다만, 우려스러운 부분도 있어요. 해외 공사 수주에서 한국 업체끼리 ‘제 살 깎기 식’과당경쟁을 하는 거요. 이건 지양해야 합니다. 특히나 국내 건설 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발주 물량이 줄고, 해외 공사 경험이 없는 업체들이 무분별하게 해외 시장에 진출하면서 이런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어요. 이는 해당 업체의 손해뿐 아니라, 국가적 손실로 이어질 수 있어 신중해야 합니다. 1위를 인정하면 되는데….”
▼ 1위요? 제 살 깎기라면….
“공개입찰에서 낙찰받은 회사가 공사를 하면 됩니다. 그런데 2, 3등 한 업체들이 낙찰받은 1위 업체보다 더 싸게 공사해주겠다고 나서는 거죠. 발주처에서 (싼 공사를) 요구한다고 해도 응하면 되겠어요? 밑지고 공사하면 되나요.”
▼ 지난 6월 정부 대표단이 리비아 동부 벵가지를 방문해 시민군과 만났고, 한국 기업의 재건사업 진출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촉구했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적절한 대응이었어요.
“6월 말이죠? 외교통상부 실무대표단이 벵가지로 떠날 때 우리가 차량과 숙식을 제공하고 일부 NTC 인사들과의 면담 주선을 지원했어요. 당시에는 시민군 측과의 우호 관계를 만드는 게 출장 목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시의적절했어요.”
▼ 미국과 영국도 리비아 재건 안정화 지원팀을 보내겠다고 했죠.
“그렇죠. 이미 터키, 중국 등에서도 정부 또는 민간 차원에서 NTC에 대한 지원을 공식적으로 결정했고, 우리 정부도 100만달러 규모의 인도적 지원을 추진 중이에요. 또 정부 대표단을 동부지역에 파견해 긴급 지원물품을 파악 중이고요. 우리는 정부 지원과는 별개로 현지에 진출한 건설업체를 중심으로 한 해외건설협회를 통해 50만달러 내에서 인도적 지원을 하기로 합의했고요. 정부와 함께 공동 지원을 준비하고 있어요.”
해외건설협회도 50만달러 지원
▼ NTC 인사들과도 친분이 있는가 보네요.
“우리(대우건설)가 리비아에서 여러 공사를 수행하는 동안 각계각층의 수많은 인사와 인연을 쌓아왔어요. 우리가 처음 진출한 곳이 벵가지인 만큼 지역적 유대관계를 갖고 있는 분들이 NTC 고위 관계자로 참여하고 있죠. 전투가 치열해도 벵가지 메디컬센터 공사 현장에는 대우건설 직원 3명과 방글라데시 근로자 29명이 철수하지 않고 남아 있어요. NTC 관계자들은 이를 무척 고마워하죠.”
▼ 지난 4월에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인사를 했죠? 리비아 철수 당시 미국인을 도와줬다고.
“본사에 상황실을 만들고 리비아 파견 근로자 3000여 명을 대피시켜야 했는데,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배를 구하기도 어렵고 가격도 비쌌어요. 간신히 배 3척을 빌려 미수라타, 벵가지, 트리폴리, 시르테 등에서 근로자들을 그리스로 옮겨와 그곳에서 비행기에 태워 보냈죠. 인도, 이집트, 말레이시아, 방글라데시 등 8개국 외국인 근로자 2800여 명과 한국인 직원 210명을 모두 안전하게 고향으로 보냈어요. 4차례에 걸쳐 해상과 육로로 사고 없이 무사히 복귀시켰죠. 그때 리비아를 탈출하지 못해 발을 구르던 미국인 1명과 우즈베키스탄인 등 여러 외국인을 함께 태웠어요. 힐러리 국무장관이 고맙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이죠. 그들 중 일부는 몸만 빠져나와 우리가 비행기표를 끊어줬어요. 그때는 정말 전쟁이었습니다. 전쟁….”
▼ ‘리비아 엑소더스’였네요.
“다른 나라 기업의 외국인 근로자들은 대부분 국경 인근 난민촌으로 몸을 피했죠. 우리도 철수 작전에만 150억원 정도가 들어갔어요.”
▼ 전투 중이었는데….
“그땐 우리 스스로 결정해야 했어요. 도움 받을 곳이 없으니까. 마지막 철수할 때에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배는 들어오지 마라’고 하는 거예요. 정부에 SOS를 보냈고, 주(駐)이탈리아대사관 김영석 대사가 나서 나토를 설득했어요. 주(駐)리비아 조대식 대사와 현지 직원들, 외교부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았어요.”
당시 현장에서 대규모 철수작전을 진두지휘한 인물은 강우신 전무(해외영업본부장)였다. 강 전무는 입항 허가가 나지 않거나 항구에 접안 공간이 없을 때는 평소 잘 아는 국영회사 회장에게 부탁했다. 그는 “그동안 리비아에서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어놓은 게 대규모 철수 작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나토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 대규모 철수를 결정한 이유가 있었나요?
“아무리 어렵더라도 책임을 다한다는 사명감이 컸죠. 당장 돈은 들지만, 다시 공사가 재개되면 우수한 인력들은 대우로 돌아올 겁니다. 외국인 근로자들도 무사히 고향까지 보내준 회사를 기억하니까요. 건설 강국이 그냥 되는 건 아니죠.”
여기에서 기자는 지난해 한·리비아 외교 갈등 당시로 화제를 돌렸다. 건설 강국 같은 애국심을 자극하는 표현이 등장해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었기 때문이다. 예상은 들어맞았다.
▼ 지난해 한·리비아 외교 갈등 당시에도 한국인 2명을 무사히 ‘구출’했는데요.
“그건 제가 한 건 아니고요. 정부와 이상득 특사, 기업인 모두가 머리를 맞댄 결과였어요.”
여기서 잠시 지난해 6월로 시곗바늘을 돌려보자. 당시 ‘리비아 사태’로 보도된 이 사건은 리비아 주재 대사관에서 활동하던 국정원 직원(2등서기관)이 리비아 국가원수와 가족, 정부요인, 무기 보유 현황 등에 관한 첩보활동을 벌였다는 이유로 추방된 사건이었다. 하지만 리비아의 대응은 추방으로 그치지 않았다. 영사업무를 하던 주한 리비아 경제협력대표부를 철수시켰고, 불법 선교혐의로 현지 교민 2명을 구금했다. 이들에게는 영사접견권도 불허했다. 당시 대우건설만 해도 7개 공사현장에서 22억달러 규모의 공사를 진행 중이었지만, 비자 발급과 원산지 증명 발급이 중단돼 공사 진행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정부는 이상득 의원을 특사로 임명했고, 이 특사와 서종욱 사장 등은 7월과 9월 두 차례 리비아를 방문했다. 2차 방문 때는 어렵게 카다피 당시 국가원수를 만나 이 문제를 해결했다. 만남 과정에서 서 사장의 인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는 지금까지 구체적인 활동에 대해 언급을 피했다. 이어지는 서 사장의 말이다.
“당시 기업들은 앞이 안보였어요. 굉장히 위급한 상황이었죠. 당시 17개 한국 업체가 100억달러가 넘는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모두 발만 구르고 있었어요. 그런데 2010년 7월4일 국토해양부에서 연락이 왔어요. 이상득 의원과 외교부, 국토부 관계자, 17개 업체 대표가 모여 리비아 사태 해결을 위해 머리를 맞댔죠. 다음날에는 저를 포함해 4개 업체 대표가 모여 도시락을 먹으며 회의를 했어요.”
이상득 특사와 기업인들의 7월 첫 방문 당시에는 카다피를 만나지 못했다. 총리와 카다피 최측근인 대외보안부 부장을 만났지만, 리비아의 남북을 가르는 1600㎞의 고속도로 건설에 한국이 돈을 대라는 요구만 들었다.
▼ 2차 방문 시에는 공식적으로 대우가 지은 ‘트리폴리 호텔 준공식’에 참가하기로 했죠?
“네. 준공식에 카다피의 둘째아들이 참석하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출발 1시간 전에 둘째아들이 일정을 바꿔 해외로 떠났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그래도 누구든 만나야 했습니다. ‘산 넘어 산’이라고, 두바이에 도착했는데 리비아 입국 비자가 발급되지 않았어요.”
이상득 특사는 최근 펴낸 ‘자원을 경영하라’는 책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모든 루트를 통해 비자 발급을 체크했으나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절망적이던 순간, 대우건설 현지 라인을 통해 희소식이 들려왔다. 일전에 리비아군 고위 사령관을 만나 카다피 면담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는데 그가 허락을 했다는 것이다.…그 루트를 통해 간신히 리비아 입국에 성공했다.”
▼ ‘리비아 루트’는 누구입니까?
“카다피의 고향 시르테의 합작법인장이었어요. 그가 다리를 놓아준 겁니다. 리비아에서는 항상 차선책을 준비하거든요.”
두 번째 방문에서 이상득 특사와 서 사장, 김종근 외교부 아중동국장 등은 카다피를 만났다. 카다피는 “한국 기업에 최우선권을 주었지만 대통령이 방문한 적도 없고 기업인들은 리비아에 기여한 게 없다. 게다가 한국 외교관이 벌인 일에 대해 조사 결과를 받지 못했다”며 서운함을 나타냈다. 동시에 “리비아가 핵무기 개발 계획 포기 이후 한국 고위인사에게 미국을 설득해 보상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성과가 없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
카다피, 이상득 특사 파워 인정
이에 이 특사와 서 사장은 “미국 주도로 리비아에 유엔 경제제재가 있었을 때 우리 기업만큼은 남아서 대수로 공사를 마무리 지었다. 우리는 은혜를 아는 나라다. 귀국의 정보를 빼내는 반국가적 행위는 하지 않는다”고 설명했고, 동시에 억류된 한국인 2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 특사는 “핵무기 포기에 대한 미국의 보상 설득 문제는 외교부와 협의해 반드시 조치하고 회신하겠다”고 답했고, 카다피는 가슴을 치며 “슈크란(고맙습니다)”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리비아 사태’는 그렇게 해결된 것이다. 서 사장의 설명이다.
“이 특사는 깨알 같은 글씨로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메모했어요. 카다피의 말도 꼼꼼히 받아 적었죠. 카다피는 그런 모습이 좋았던지 우리를 편하게 대해줬어요. 여기에 그동안 한국 업체의 이미지가 좋았고, 이 특사가 카다피에게 사과하고 현안 해결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도 먹혔던 거 같아요. 아랍 사람들은 실세를 인정하고 대접하거든요. 임명직은 ‘파워(실세)’라고 인정하지 않아요. (이 특사는) 현직 대통령의 형인데다 6선 의원이고, 그리고 나이도 많아 카다피가 인정한 겁니다. 아랍 사람들도 장유유서(長幼有序) 정서가 강하거든요.”
▼ 왜 그런가요?
“사막에서 부족끼리 살 때 모든 결정권은 부족장이 쥐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실세의 권위를 인정하고 나이 든 사람을 존중해요. 당시 저보고 ‘대우 무디르(리더) 왔느냐’고 한 것도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이죠.”
그렇게 문제는 해결했지만, 그는 두 번의 귀국길에 좋지 않은 평을 들어야 했다. 마침 사장 임기가 끝나던 터여서, 일부 언론과 야당은 ‘정치권 줄서기’라고 비판했다. 한 국회의원은 “서 사장은 고려대 출신에 이상득 의원의 계보인 경북 상주 출신”이라며 “연임을 앞두고 벌이는 로비”라고 말하기도 했다.
▼ 노력에 대한 평가치고는 서운했겠어요.
“….”
그는 “괜한 논란을 만들 수 있다”며 대답을 피했다. 기자가 “이상득 의원과 아는 사이냐”고 재차 묻자 그는 허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답답함이 깔려 있었다. 그가 인터뷰 초반에 특사 관련 질문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상득 의원은 그때 처음 만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상주가 아니라 문경 출신이거든요. 당시 기업으로서는 정말 위기상황이었고, 생사가 걸려 있는데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어요. 특사가 누구든 간에 비상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적극 협조했을 겁니다.”
이 의원은 자신의 책 ‘자원을 경영하라’에서 이를 두고 불편한 마음을 피력했다.
“만약 자신들(서종욱 대우건설 사장, 김중겸 현대건설 사장)의 안위를 위한 정치권 줄서기였다면 내가 거절했을 것이다. 그들의 바람은 오직 사태 해결이었다. 자신의 기업이 리비아에서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볼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속사정도 모르고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야속하기만 했다.”
서 사장은 경영철학을 묻는 질문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며 다음과 같이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외환위기 때나 대우그룹 해체 때나, 금호아시아나 그룹의 유동성 위기 때나, 우리가 겪은 어려운 시기마다 항상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해요. 건설업은 사람이 전부라 할 수 있는 업종이에요. 직원들이 회사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어요. 우리가 10여 년간 그 험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직원들의 힘이었어요. 그런 회사를 최선을 다해 살려야 하는 게 제 역할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