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호

영화로 책으로 노래로…흑인 영웅에서 미국의 우상으로

  • 안병찬│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언론인권센터명예이사장 ann-bc@daum.net

    입력2011-11-22 11: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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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투 역사에 길이 남을 ‘정글의 혈전’ 이후 알리는 미국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많은 영화 제작자와 작가, 음악가가 알리의 삶을 조명하고 ‘알리 현상’을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5장/‘ 알리현상’의파급

    1.‘우리가 왕이었을 때’

    영화로 책으로 노래로…흑인 영웅에서 미국의 우상으로
    1997년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장. 영국 영화감독 앤터니 밍겔라의 ‘잉글리시 페이션트’가 작품상·감독상·남우주연상 등 9개 부문을 휩쓸던 자리에서, 최고 다큐멘터리상은 미국 감독 레온 개스트의 ‘우리가 왕이었을 때(When We Were Kings)’에 돌아갔다. 표제음악은 맥나이트의 리듬 앤 블루스 곡 ‘우리가 왕이었을 때’다.

    이 다큐멘터리는 그해부터 거슬러 올라가 23년 전에 아프리카 킨샤사를 무대로 벌어진 ‘정글의 혈전’과 그 영향을 역동적으로 기록한 작품이다. 시상식장에 모인 수많은 할리우드 스타 가운데 ‘정글의 혈전’의 대결자인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이 있었다. 개스트가 제작진과 함께 오스카 기념패를 받을 차례가 되자 조지 포먼은 파킨슨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무하마드 알리를 부축해서 함께 무대로 올라갔다. 박수갈채가 일었다. 알리와 포먼은 ‘정글의 혈전’ 이후에 친구가 된 사이였다.

    기록영화 ‘우리가 왕이었을 때’는 ‘정글의 혈전’을 범상치 않게 다루었다. 레온 개스트는 카메라의 시선을 ‘정글의 혈전’이 만들어낸 정치·문화적 의미에 집중하면서 아메리카 흑인의 정체성을 다채로운 영상 메시지로 포착하고 있다. 이 작품은 알리라는 영웅을 중심으로 미국의 흑인(아프리코-아메리칸)이 아프리카 대륙에 모여서 자기들의 뿌리를 확인하며 서로 교감하는 내용을 담았으니 흑인 인권영화로 볼 수 있다.



    주연 알리를 중심으로 주위에 배치한 출연진을 보아도 이 다큐멘터리가 문화적 자각을 담은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물 출연진의 면모는 다채롭다. 흥행주 돈 킹과 자이르 대통령 모부투 세세 세코를 비롯해서 당대의 미국 작가·저널리스트·스포츠 전문기자·흑인 영화감독·흑인 음악가·남아프리카공화국과 자이르의 흑인 민권 음악가 등이 출연한다. 그 밖에 공연 프로모터·공연 프로듀서·권투 트레이너·알리 어머니를 합치면 등장인물이 60여 명에 달한다.

    솔(soul) 음악의 제왕인 제임스 브라운과 흑인음악을 대표하는 비비 킹 등 가수와 밴드 그룹이 그때그때 등장해서 정서적이고 역동적인 흑인 음악을 연주한다. 타이틀백에 이름을 올린 실물 배역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왕이었을 때’ 실물 출연자 (괄호 안은 필자의 주석)

    돈 킹(미국의 거물 프로권투 흥행주)

    제임스 브라운(솔 음악의 대부)

    비비 킹(블루스 가수 겸 기타리스트)

    자이르 대통령 모부투 세세 세코(독재자 스폰서)

    스파이크 리(흑인 영화감독 겸 인권운동가)

    노먼 메일러(뉴저널리즘 작가·‘더 파이트’ 저자)

    조지 플림턴(스포츠 저널리스트 겸 작가·‘셰도 박스’ 저자)

    토머스 호저(권투 전문 작가·‘알리 전기’ 필자)

    하워드 코셀(스포츠 저널리스트)

    말리크 보웬스(자이르 출신 음악가 겸 배우)

    로이드 프라이스(흑인 가수·킨샤사 솔 축제 프로모터)

    더 스피너스(솔 그룹)

    더 크루세이더스(재즈 그룹)

    미리암 마케바(남아공 가수 겸 인권운동가·별명 ‘마마 아프리카’)

    제작자

    레온 개스트(다큐멘터리 감독)

    데이비드 소넨버그(다스 연예산업 회장·하버드대 출신 변호사)

    테일러 핵포드(아카데미상 수상 감독)

    감독 : 레온 개스트

    무하마드 알리를 진원으로 한 문화 현상은 다양한 파급효과를 내고 있다. 특히 권투 챔피언 행사와 흑인문화 축제의 양면에서 세계의 이목을 끈 ‘정글의 혈전’은 그 파문이 오늘까지 이어진다.

    자이르에 도착하면서 알리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영웅이 된다. 그는 틈을 내서 아프리카 군중과 접촉하고 교감하면서 흑인이 긍지를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가자고 쉴 새 없이 고무한다.

    흑인들은 고향에서 벌어진 대축제로 그동안 감내해온 멍에를 한순간에 훌훌 털어 버리고 모두가 왕으로 거듭나고 싶어한다. ‘정글의 혈전’은 백인의 눈을 통해서 백인 중심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생활에 길든 사람들의 인식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우리가 왕이었을 때’는 이런 현상을 역동적으로 포착한다.

    / 22년의 산고 /

    레온 개스트는 1974년 ‘정글의 혈전’을 기록하려고 자이르로 가서 2개월 동안 머물렀다. 모두 250시간 분량의 필름(길이 9만1000m)을 찍었으나 재정 문제로 좌초하고 만다. 아프리카 라이베리아 공화국 소속이던 투자자가 갑작스럽게 실종된 후 죽음을 당해 개스트는 재정난에 빠졌다.

    개스트는 여러 해 동안 투자자를 찾던 끝에 아카데미상 수상 감독인 테일러 핵포드를 제작자로 맞이하면서 활로를 찾았다. 핵포드의 권고로 뉴저널리즘 작가 노먼 메일러와 흑인 영화감독 스파이크 리, 스포츠 저널리스트 겸 작가 조지 플림턴 등 당대 증언자를 찾아서 인터뷰를 추가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결국 ‘우리가 왕이었을 때’를 완성하는 데는 22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지만 제작 지연으로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 나왔으니 전화위복이었다.

    개스트 감독은 이 ‘정글의 혈전’에서 미국인 공동체와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회에 힘 있는 메시지를 보내는 데 성공한다. 특히 아프리카를 향한 알리의 대중적이고 전향적인 모습과 가라앉고 수동적인 포먼의 태도를 대비하고, 아프리카 현지인들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교감하는 모습을 인상적으로 담아냈다.

    이 다큐멘터리는 1996년 미국 유타 주의 선댄스 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을 타는 것을 시작으로 각종 영화상 여덟 개를 휩쓸고 다른 여러 상의 수상후보에 이름이 올랐다.

    2. 다큐와 영화

    /‘오직 아메리카만의 돈 킹’/

    영화로 책으로 노래로…흑인 영웅에서 미국의 우상으로
    미국의 권투 흥행사 돈 킹은 ‘정글의 혈전’을 만들어낸 주인공이다. ‘정글의 혈전’은 무명의 돈 킹을 스타덤에 올려주었다.

    존 허츠펠드 감독이 돈 킹을 주인공으로 한 텔레비전 다큐드라마 ‘오직 아메리카만의 돈 킹(Don King: Only in America)’을 만든 것은 1997년이다. 미국 프리미엄 영화채널인 HBO 방송용으로 제작한 영화인데 걸출한 권투 흥행주로서의 돈 킹을 그렸다. 특히 그가 ‘정글의 혈투’를 성사시키기 위해 어떤 책략을 쓰고 어떤 노력을 했는지 묘사하고 있다.

    알리(다리우스 매커리 분)는 이 영화에서만은 돈 킹을 뒷받침하는 조역이 된다. 돈 킹이라는 풍운아는 ‘정글의 혈전’에서 성공을 거둔 후 이듬해에 또다시 알리를 앞세워서 ‘마닐라의 전율’을 성사시켜 권투 프로모터의 입지를 확실하게 다졌다.

    이 텔레비전 영화는 레온 개스트 감독이 만든 ‘우리가 왕이었을 때’가 아카데미 영화상을 탄 해에 나왔고, 그 이듬해인 1998년에 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가 주관하는 골든 글로브상에서 텔레비전 영화부문 남우주연상을 탔다. 그 밖에도 에미상 등 영화상 9개를 휩쓸었으며 다른 15개 상 후보에 올랐다.

    알리의 자전적 영화도 나왔다. 2001년에 영화 감독 마이클 만(국내에서 상영된 그의 최근작은 조니 뎁과 크리스천 베일이 출연한 ‘퍼블릭 에너미’)은 알리의 행적을 사실적으로 구성한 ‘알리’를 만들었다.

    알리 역을 맡은 배우는 윌 스미스다. 그는 처음에 알리 역을 극구 사양했다고 한다. 결국 알리가 나서서 자기 역을 맡아달라고 부탁해 문제를 풀었다고 한다. 뒷날 스미스는 알리가 “당신은 말이야, 날 연기하기엔 멋이 부족해”라고 첫 말을 걸더라고 전했다.

    미국 영화 ‘로키’는 알리가 무명선수와 싸운 권투경기를 소재로 만들어졌다. ‘정글의 혈전’을 치르고 5개월 만인 1975년 3월24일에 알리는 이름 없는 척 웨프너를 상대로 1차 방어전을 치른다. 누구나 알리의 압승을 예상했는데 웨프너는 9회에서 알리를 다운시켰을 뿐 아니라 최종회까지 잘 버텼다. 알리는 15회 막판에 겨우 웨프너에게 케이오(KO)승을 거둔다.

    이 경기를 본 실베스터 스탤론은 무명 선수가 무적 챔피언에 도전해서 이기는 내용의 권투영화를 착안했다. 그는 스스로 대본을 쓰고 로키 발보아 역을 맡았다. 영화 속에서 로키와 대결하는 입심 좋은 챔피언 아폴로 크리드는 알리의 모습이다. 불과 110만달러를 들여 28일 만에 만든 저예산 영화‘로키’는 대박을 터뜨려 1억1700만달러를 벌어들인다.

    알리는 1976년 아카데미 영화상 수상식에서 실베스터 스탤론과 무대에 올라가 익살을 부렸다. 무명의 척 웨프너는 “나야말로 진짜 로키 웨프너”라고 자처했다고 한다.

    3. 3대 명저

    미국 작가 노먼 메일러의 ‘더 파이트(The Fight)’는 ‘정글의 혈전’이 낳은 뉴저널리즘의 대표적 실명 소설이다. 이 작가는 알리와 동반해 킨샤사로 가서 ‘정글의 혈전’을 근접 취재한 후 이듬해인 1975년에 ‘더 파이트’를 출간했다. 미국 흑인(아프리코-아메리칸)의 시선을 바닥에 깔고 ‘정글의 혈전’을 치밀하게 묘사한 내용이다.

    노먼은 저널리즘의 객관성과 소설의 작법을 교차하며 ‘더 파이트’를 써냈다. 이 책은 새로운 문학 장르에 권투의 매력을 십분 용해해 뉴저널리즘의 대표작으로 남았다. 노먼은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는 적나라함과 위험을 무릅쓰는 대담함으로 글을 쓰는 작가다.

    노먼은 권투를 남성성의 대명사로 여겼다. 그는 1950년대에 장인에게서 권투를 처음 배운 후 헤비급 챔피언 호세 토레스에게 본격적인 권투 수업을 받고 정기적으로 권투장을 찾은 권투광이었다.

    그는 1963년 라스베이거스 듄스 호텔의 카지노 주사위 탁자 앞에서 알리를 처음 보았다고 ‘더 파이트’에서 밝히고 있다. 당시 캐시어스 클레이(무하마드 알리의 첫 이름)는 키가 크고 마른데다 신경질적으로 보였다고 한다.

    클레이는 뉴저널리즘 개척자로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받은 노먼을 몰라봤다.

    “노음 메일러…이름은 들어봤어요. 영화 쪽에선가 일하시죠?”

    이 말에 노먼은 기분이 별로 안 좋았다고 한다.

    그 후 메일러는 종종 알리를 만났고 그 인연으로 알리와 동행해 ‘정글의 혈전’을 밀착 취재할 수 있었다. 메일러는 ‘우리가 왕이었을 때’에 출연해 킨샤사의 ‘정글의 혈전’ 이후 알리를 만난 일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아마 10년쯤 지나선지 나는 에스콰이어지가 주최한 명사 파티에 참석한 일이 있지. 그해 에스콰이어에 기사를 쓴 인연으로 뽑혔는데 25명쯤이 귀빈으로 초대를 받은 자리였어. 아내와 동행한 나는 알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는데 아주 근사하고 편안한 대화였지.

    그때 난 62세였지. 알리가 내게 몇 살이냐고 물었어. 62세라고 했더니, 당신은 킨샤사에서 시합을 앞둔 한밤중에 나와 함께 조깅을 할 때처럼 건강해 보인다고 말하더군. 나도 62세가 되어 당신처럼 되면 좋겠다, 아주 대단하다고 말하더군. 그 소리에 나는 아주 기분 좋아져 으쓱했지. 흡족했어.

    내가 잠깐 용변을 보러 자리를 뜨자 알리는 나보다 훨씬 연하인 내 아내한테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대.

    “여태 같이 살아요?”

    늘 그런 식이야. 그게 알리지. 그렇게 뒤통수를 쳐도 알리는 밉지가 않아.

    / 알리 일대기의 결정판 /

    토머스 호저는 미국 작가이자 복싱 전문 평론가다. 영화 ‘미싱(Missing)’의 원작이 된 ‘찰스 호먼의 처형’을 써서 퓰리처상 후보에 올랐고 저서가 36권이나 된다. 토머스 호저는 인간적인 정서를 실어 공정하고 사실 위주로 글을 쓴다고 정평이 나 있다.

    1992년에 그는 ‘무하마드 알리: 그의 생애와 시간(Muhammad Ali: His Life and Times)’을 발간했다. 이 전기는 알리 일대기의 결정판이라고 불린다. 호저는 이 일대기를 쓸 때 알리의 전폭적인 협조를 받아 폭발적인 챔피언으로 성장하는 역정과 파킨슨병을 앓는 근황에 이르기까지 솔직하게 밝힐 수 있었다. 그는 알리의 가족·상대 선수·친구·세계 각국 지도자와 알리 친지 200여 명의 증언을 모아 이 책을 썼다.

    호저는 알리의 모습을 신앙심 깊고 민활하고 관대하면서도 흥행사 기질을 가진 것으로 묘사한다. 호저의 책은 근접감과 솔직성으로 알리를 재탄생시켰다고 호평을 받았다. 뉴욕타임스는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탁월한 전기다”라고 서평을 실었다.

    2005년 호저는 다시 ‘무하마드 알리의 상실한 유산(The Lost Legacy Of Muhammad Ali)’을 출간했다. 저자는 근년의 알리를 검증하면서 알리의 유산은 ‘멸균당한 유산’이 되었다고 꼬집었다. 알리는 미국인의 삶에서 신화적인 영향력을 획득했으나, 미국이라는 이름의 주식회사는 알리의 특출한 인격을 균질하게 바꾸어 이미지를 개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알리가 믿는 것, 알리가 말하는 것, 알리가 대표하는 것을 계획적으로 왜곡하고 그의 유산을 살균 처리해 남 앞에 내놓기 좋게 포장하고 있으니 알리 자신과 역사에 해악이 된다는 지적이다.

    /‘알리, 아메리카를 쏘다’/

    ‘알리, 아메리카를 쏘다’는 원제인 ‘구원의 노래: 알리와 60년대 정신(Redemption Song-Ali and the Spirit of the Sixties)’의 한국어 번역본(마이크 마커시 지음, 차익종 옮김, 당대)이다.

    저자 마커시는 흑인 정체성 운동의 뿌리와 권투라는 스포츠의 본질을 파헤치면서 알리의 행적을 치밀하게 추적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우리가 왕이었을 때’를 감독한 레온 개스트는“탁월한 서술, 매혹적인 책으로 흥미진진하며 의미심장하다. 이 책은 무하마드 알리를 보기 드물 정도로 탁월하게 통찰하고 격동의 변화를 겪은 이 시대에 알리가 끼친 지구적인 영향을 그리고 있다”고 평가했다.

    나이지리아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켄 위와는 “이 책은 폴 로브슨에서 재키 로빈슨·샘 쿠크·밥 딜런·모부투 세세 세코·돈 킹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당대 인물들의 삶을 되살려냈다. 가슴 찌르는 일화로 가득 차 있다”라고 내셔널 포스트지에 썼다.

    저자 마커시는 알리에게 비판적인 시선도 보낸다. 애틀랜타올림픽의 성화 점화 주자로 나타난 알리는 1960년대에 보여준 영웅의 모습이 아니라 국가와 자본에 순응하는 톰 아저씨의 모습이라고 했다.

    이 책의 끝 대목은 인상적이다.

    “알리는 미국의 경계를 뛰어넘어서 사유하고 행동함으로써 20세기의 순수한 영웅이 되었다. 영웅도 실책을 범하고 유혹 앞에 망설이고 심각한 판단착오를 범한다. 그렇지만 알리라는 우상이 과거에 실천한 바는 전쟁과 테러로 점철된 오늘의 현실을 구원하는 데 분명히 강력한 힘이 될 수 있었다.”

    이 말과 관련하여, 노바리라는 평자는 알라딘의 독자리뷰(2004년 1월15일)에서 '알리, 아메리카를 쏘다'(마이크 마커시 지음, 차익종 옮김 /2003년)를 평하면서, 이 책은 단순한 알리의 평전이 아니고 무하마드 알리라는 새로운 챔피언 영웅이 나타난 시대적 배경, 알리와 시대가 서로 주고받은 상호작용의 결과들을 깊이 있고 날카로운 통찰로 분석하고 있다고 말한다. 노바리의 평문 일부를 인용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시대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잘생긴 떠버리 권투선수 캐시어스 클레이는, 처음엔 백인들의 꼭두각시 인형 노릇을 하는 듯 했지만, 처음 헤비급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쥔 뒤 자신의 이슬람네이션 가입 사실을 발표하고 소리친다. '난 당신들이 원하는 그런 챔피언은 되지 않아!'

    그리고 그가 갑자기 백인들의 공적이 되고, 노예의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흑인들, 그리고 이후 나아가서 전 세계의 억압받는 자들의 희망의 상징으로 떠오르기까지, 저자는 무하마드 알리를 중심으로 60년대 이전 스포츠계와 흑인 민족주의 운동의 전통부터 70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맥락을 꿰뚫는다.

    이 책을 보며 느끼는 전율과 감동은 '무하마드 알리'라는 한 사람이 얼마나 영웅적 행적을 보여주었는가에서 연유하지 않는다. 무하마드 알리라는 영웅은, 그 사람의 개인적인 탁월함에서 탄생한 게 아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던 그 시대에 적극적으로 조응했으며, 자신의 고민을 멈추지 않았고 그 범위를 확장시키며 실천에 옮겼다.

    그리고 결국 그를 영웅으로 만든 것은 그 시대 자체였으며, 그 시대에 함께 살던 약자들의 소망과 희망이었다. 단순히 개인적인 배려에서 비롯했다가 세계 전체의 민중들과 연대하는 차원으로 나아간 베트남전 징병 거부 사건에서 그의 연설은, 그의 인터뷰는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애틀랜타 올림픽의 성화봉송주자로 나타난 알리의 모습은, 더이상 60년대 그 영웅의 모습이 아니다. 그가 그토록 대항하고 침을 뱉었던 국가와 자본이 이제 그를 '위대한 자'라고 찬미한다. 그는 더이상 '위험하지 않은 존재'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를 단순히 '변절한 놈'이라고 욕할 수만은 없다.

    그는 자신이 냉전의 도구로 이용되던 시절, 미 국무부 사절 신분으로 아프리카를 방문했다가 아프리카 각국 기자들의 날카로운 질문에 '내가 뭔가 대단히 잘못된 것에 이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께 많이 배웠습니다.'라고 말해 미 국무부 직원의 얼굴을 하얗게 질리게 만든 적이 있다. 파킨슨씨병으로 오랜 기간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그가, 갑자기 변절을 해서 국가와 자본의 품에 적극적으로 뛰어 들어갔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저자인 마이크 마커시는 1997년 이 책을 영국에서 출판했다. 미국에서 태어난 그는 ‘뿌리가 뽑힌 뉴욕의 유대인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했다. 작가 겸 저널리스트이고 정치운동가인 그는 1971년 영국으로 이주해서 런던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 제목은 자메이카 가수인 밥 말레이가 흑인민족주의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한 ‘구원의 노래(Redemption Song)’와 같다.

    더 이상 게임은 없다. 더 이상 폭격은 없다. 더 이상 걸을 일은 없다. 더 이상 즐길 일은 없다. 더 이상 수영할 일은 없다.

    67세. 50에 17년이 지난 나이. 내가 원했던 50을 17년이나 초과했다. 지쳤다. 나는 심보가 고약했다. 아무에게도 재미를 못 주었다.

    67세. 탐욕스러워진다. 늙은이다운 행동. 편안하게 쉬자. 그러면 고통이 없다.

    영화로 책으로 노래로…흑인 영웅에서 미국의 우상으로


    영화로 책으로 노래로…흑인 영웅에서 미국의 우상으로
    5. 흑인 음악

    2008년 ‘솔 파워(Soul Power)’라는 제목의 93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가 나왔다. 감독은 앤티도트 필름 대표인 제프 레비. 그는 킨샤사 ‘정글의 혈전’ 당시 선보인 흑인음악제를 시네마 베리테(의도적 간섭 없는 직접영화) 형식으로 담았다.

    ‘우리가 왕이었을 때’를 만든 감독 레온 개스트와 다스 연예산업 회장 데이비드 소넨버그가 제작에 참여했다. 이 영화는 그해 캐나다 토론토국제영화제와 2009년 미국 댈러스국제영화제 개막작품으로 상영되었다.

    ‘우리가 왕이었을 때’는 22년 만에 완성됐는데, ‘솔 파워’는 34년 만에 빛을 보았다. 이 다큐멘터리는 네 명의 카메라맨이 킨샤사 흑인음악축제를 125시간 촬영한 필름을 창고에서 다시 끄집어내 편집한 것이다. 레온 개스트 감독이 다 사용하지 못하고 남긴 부분이다.

    영화는 젊은 어머니가 두 아기를 자기 몸에 묶어서 업고 먼지투성이의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어 흑인 음악가들이 공연을 통해 폭발적인 힘을 발산하고 민속 문화적인 표현을 하는 모습이 이어진다.

    ‘솔 파워’는 ‘정글의 혈전’이 보여준 흑인 찬가가 오늘까지 생명력을 갖고 있음을 알려준다.

    / 검은 음악축제 ‘자이르 74’/

    ‘검은 솔 음악 페스티벌’은 1974년 9월에 ‘정글의 혈전’을 앞두고 킨샤사에서 3일간 밤낮으로 열렸다. 이 음악 축제에는 ‘자이르 74’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프리카 한가운데서 만난 흑인 음악가들은 신이 들린 듯이, 아프리카의 혼이 작열하는 듯이 노래하고 연주했다.

    음악 축제를 착안하고 추진한 사람은 뉴욕의 레코드 프로듀서인 스튜워트 레빈이었다. 그는 ‘정글의 혈전’이 결정되었다는 신문기사를 볼 때 뉴욕음악학교(뉴욕스쿨 오브 뮤직) 룸메이트인 남아프리카의 트럼펫 가수 겸 음악가 휴 마셀바와 같이 있었다. 두 사람은 권투대전과 연결하는 음악제를 열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밤새워 의논했다.

    문득 레빈의 머릿속에 이 음악제를 영화 속에 담으면 미국의 흑인음악을 드높일 수 있고 아프리카의 뿌리를 다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지나갔다. 그는 2009년 6월에 그때 일을 회상하면서 “지금 생각해도 얼마나 엉뚱한 구상이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그때 뉴욕에서 상영하던 소품 영화 ‘우리들의 라틴 음악(Our Latin Thing)’을 봤는데 그것은 바로 레온 개스트라는 신출내기 감독의 작품이었다.

    레빈은 돈 킹을 설득하는 데 성공해 페스티벌 공연의 연출자가 되었다. 그런데 킨샤사로 떠나기 직전 ‘정글의 혈전’이 조지 포먼의 부상으로 6주 동안 연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이 사실을 비행기가 활주로를 이륙하기 전까지 동행하던 음악인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음악 축제를 취소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비행기가 하늘을 몇 시간째 날고 있을 때 비로소 대회가 연기되었다는 소식을 알렸다. 흑인 음악인들은 권투대전 연기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아프리카 본토의 공연에 온통 들떠 흥분해 있었다. 다들 재능의 최정상에서 경력을 뽐내는 가수와 연주자들이었다.

    “그 벅찬 희망과 기쁨의 정신은 잊어버릴 수 없다. 모두가 정치적으로 정서적으로 음악적으로 확실한 믿음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거기에는 어떤 프리마돈나도 없었다. 흑인 음악의 아버지라는 존 브라운도 음악장비를 잔뜩 끌고 가면서 환희의 분위기에 휩쓸려 있었다.”

    흥행사 돈 킹과 가까운 흑인 가수 로이드 프라이스는 공연 프로모터였다. 그렇게 쟁쟁한 흑인 음악가들이 킨샤사에 모여들었다. 모두 축제의 도가니에 뛰어들어 불타올랐다.

    공연에 참석한 흑인 음악가는 다음과 같다.

    솔 음악의 대부 : 제임스 브라운

    블루스 가수 겸 기타리스트 : 비비 킹

    남아공 트럼펫 가수 겸 작곡가 : 휴 마세케라

    솔 그룹 : 스피너스

    재즈 그룹 : 더 크루세이더스

    쿠바 출신 ‘살사의 여왕’: 셀리아 크루즈

    가수 겸 음악가 : 빌 위더스

    남아공 가수 겸 인권운동가(별명 ‘마마 아프리카’) : 미리암 마케바

    / 검은 슈퍼맨 /

    이 축제는 수많은 후속곡을 낳았다.

    1974년에 아이언 앤더슨이 이끄는 영국 록그룹 제트로 툴은 ‘럼블 인 더 정글(정글의 혈전)’의 어감에 맞추어 ‘벙글 인 더 정글(Bungle in the Jungle)’을 만들어 불렀다. 도시 아파트의 야자나무 숲 속의 실패한 삶을 노래한 것이다. 1975년에 영국 팝가수 겸 작곡가인 조니 와클린은 ‘정글의 혈전’을 소재로 삼아 ‘검은 슈퍼맨’을 작곡하고 ‘조니 와클린과 킨샤사 밴드’의 이름으로 불러서 크게 히트했다.

    검은 슈퍼맨 가사

    여기 이것은 캐시어스 클레이의 이야기

    그는 이름을 무하마드 알리로 바꿨지

    그는 어떻게 말할지 알고 어떻게 싸울지 안다

    상대는 모두 두들겨서 밖으로 내몰았지

    (중략)

    그는 말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다

    헤비급 챔피언이 돌아왔다

    내 얼굴은 너무 아름다워 흉터 하나 없다

    내가 링의 왕이라는 걸 증명하지

    노래하자, 무하마드, 무하마드 알리

    그는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았지

    무하마드, 검은 슈퍼맨

    그는 남한테 이렇게 말하지

    난 알리다 잡을 수 있으면 날 잡아봐라

    난 알리다 잡을 수 있으면 날 잡아봐라

    와글린은 1976년에도 ‘자이르에서(In Zaire)’를 만들어 역시 차트 4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다. 1997년 3인조 힙합댄스 그룹 퓨지스는 ‘럼블 인 더 정글’을 불렀다.

    2007년에는 디아워 밴드그룹이 ‘정글의 알리(Ali in the Jungle)’를 작곡했다. 다큐멘터리 ‘우리가 왕이었을 때’에 뒤따라 1997년에 나온 사운드트랙 앨범은 브라이언 맥나이트와 다이애나 킹이 부르는 ‘우리가 왕이었을 때’와 퓨지스가 부르는 ‘정글의 혈전’을 수록하고 있다.

    안병찬

    영화로 책으로 노래로…흑인 영웅에서 미국의 우상으로
    경찰에 앞서 살인사건 2건을 해결해 이름을 날린 사건기자 출신. 한국일보 베트남 특파원 시절이던 1975년 남부 베트남 패망(베트남 통일)의 마지막 현장을 취재하고 탈출한 후 르포르타주 ‘사이공 최후의 새벽’을 발간해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한국일보 주불특파원·논설위원을 거쳤고 시사저널 편집·발행인을 역임한 후 경원대 언론학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현재 민영통신 뉴시스의 고정칼럼 ‘기자 49년차―안병찬의 영상르포르타주’(http://www.newsis.com)를 집필하고 소셜뉴스 위키트리의 개인 데스크 ‘안병찬 기자 49년차’(http://www.wikitree.co.kr)를 운영하며 언론인권센터 명예이사장을 맡고 있다. ‘신문 발행인의 권력과 리더십’ 등 저서 16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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