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제 직후 한글은 지도층으로부터 외면을 받아 평민이나 하층민이 쓰는 글자로 전락했다. 그러나 한말에 이르러 한국에 온 외국인들에 의해 한글은 새삼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한글에서 중국문자의 대체 또는 보조 문자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한글의 우수성을 발견해 연구했던 대표적인 인물로는 중국의 정치지도자였던 원세개(袁世凱·위안스카이)와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가 꼽힌다.
문자의 문제로 고통을 받던 근대 중국의 지도자들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이 450년 전에 고민했던 것과 똑같은 문제에 봉착했다. 그들은 세종이 그랬던 것처럼, 어려운 한자로 인해 발생하는 높은 문맹률이 중국의 국력을 약화시켰다고 생각했다. 세종이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백성을 위한 길이라는 신념으로 문자의 혁명을 이뤘다면, 중국에서는 서양으로부터 침략을 받아 나라의 존립이 어려워진 원인 중 하나가 어려운 한자 때문이라는 인식이 퍼진 것이 문자 개혁운동이 일어나는 이유가 됐다.
근대 중국의 문자 개혁은 지리적인 여건상 싫든 좋든 한글을 의식해 진행되어왔기 때문에, 오늘날 한글의 세계화와 관련된 연구의 대상에는 중국이 당연히 포함된다. 특히 한글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한 중국인(원세개)의 행적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중국의 정치지도자 원세개에게 한글은 어떤 의미였을까. 또 근대 한글 교육의 선구자로 불리는 미국인 헐버트는 왜 한글에 집착했을까.
원세개
구한말인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청나라의 원세개는 군인 및 외교관 신분으로 조선에 파견되어 1894년 청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오랫동안 머물렀으며, 이때 조선에서 다진 정치적 발판을 이용해 후일 초대 중화민국의 총통과 황제에 오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원세개는 한국의 정치에 간여하며 문화나 풍속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또 원세개는 조선의 여인 세 명을 첩으로 두었기 때문에 한국의 풍속과 문화를 자연스레 생활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중화민국 초대 총통시절 원세개는 중국인의 높은 문맹률이 문제로오르자 “조선의 한글을 중국인에게 가르쳐서 글자를 깨우치게 하자”고 제안했으나, 신하들이 “망한 나라의 글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亡國之音, 何謂國字)”고 주장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중국의 쉬안룽윈(玄龍云) 교수가 필자에게 확인해준 바에 따르면, 원세개는 본처 외에 아홉 명의 첩 중 조선여인 이씨·김씨·오씨를 2·3·4번째 첩으로 삼았고 셋째 첩 김씨가 원세개의 둘째아들 극문을 낳았다. 그리고 극문의 아들(원가류)은 미국 최초의 고속가속기실험자가 됐다. 원가류의 부인인 오건웅 교수 또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핵물리학자로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물리학회 회장을 지냈다. 원세개의 아들 17명 중 7명, 딸 15명 중 8명이 조선여인에게서 태어났다. 원세개의 가정은 조선과는 절대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였음을 보여준다.
원세개와는 달리 세종은 문자 개혁의 필요성을 통감해 자신이 이 문제를 제기했고, 오히려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음에도 한글 창제가 백성을 구하는 길이라는 뚜렷한 신념으로 뜻을 관철했다. 그러나 원세개가 이끌던 중국은 “중국 문자의 개혁에 한글이 적합한가 아닌가”라는 핵심은 버려둔 채 ‘망한 나라의 글자’라는 이유로 이를 포기한 것이다. 후에 원세개는 사욕과 권력욕을 앞세워 신해혁명으로 이룩된 공화정을 뒤엎고 스스로 황제가 되는 야욕을 드러냈는데, 이것도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애민정신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것이다.
헐버트 박사
원세개와는 대조적으로,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국책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초빙되어 1886년 조선에 온 미국인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1863~1949)는 일찍이 한글의 가능성을 파악해 이를 조선 근대화의 희망으로 보았다. 그는 조선에서 근대교육 보급의 초석을 놓으면서 언제나 한글을 그 중심에 두었으며, 이러한 한글자강운동은 그가 남긴 여러 업적 중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독립신문 창간의 실질적인 주역이었고, 한글자강운동을 폈던 주시경 선생을 육성한 교육자였다. 그가 벌인 한글 관련 활동은 일제에 의해 나라가 없어진 뒤에는 독립운동의 형태로 발전했다.
원세개와 동시대를 살았던 헐버트는 조선에 발을 디디자마자 뛰어난 자질과 안목으로 한국문화의 진수를 파악했고 한글과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커다란 연구업적을 남겼다. 한국어정보학회장을 지낸 경희대 진용옥 명예교수는 헐버트를 두고 “근대 한국문화의 정립에 초석이 된 선구자의 한 분이며 한글자강운동의 창시자”라고 말했다. 헐버트는 우리나라가 을사늑약으로 주권을 뺏긴 이후에는 “조선의 살길은 교육뿐”이라며 교육을 통해 나라의 주권을 되찾을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는 고종이 헤이그에 파견한 밀사 4명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선교사 헐버트가 발행한 한글 전용 교과서 ‘사민필지’(왼쪽)와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는 내용의 헐버트 메모.
최초의 한국어 신문인 독립신문의 편집 책임을 맡았던 주시경 선생이 바로 헐버트의 제자였으며, 박사가 운영하던 삼문출판사의 인쇄시설과 기술자 등이 있었기에 독립신문의 발행이 가능했다. 그는 주시경과 함께 최초로 한글의 띄어쓰기와 점찍기 등의 맞춤법과 문법을 연구 발전시켰다. 그 후 주시경은 국어문법 등의 방대한 저술과 최초의 국어사전 등의 편찬으로 조선어 연구에 큰 자취를 남겼다. 주시경의 사후 제자들이 조선어학회를 설립해 국어·국문의 연구와 그 보급을 통해 국민을 계몽하고 민족의 상징인 한국어를 통해 민족적 통일을 꾀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어문민족주의를 표방한 애국계몽사상을 보급하는 것이었으니 모두 박사로부터 시작된 사업이었다.
또 고종황제가 한글 보급 목적으로 추진한 국문연구소의 설립도 헐버트 박사와 주시경 선생의 건의로 이루어졌다. 헐버트는 한글의 우수성을 정확히 간파해 조선의 관리와 양반들이 당장에는 한글의 가치를 절하하고 있으나 언젠가는 한글을 사용하게 될 것이며, 궁극에는 한자가 유럽의 라틴어 같은 처지가 될 것으로 예견했으며, 또 중국인들도 한자를 버리고 한글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1906)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중국인들이 세계 어떤 문자보다도 간단하고 음운을 폭넓게 표기할 수 있는 한글을 채택해야 한다고 나는 감히 주장해왔다.”
1910~20년경 그가 쓴 제목 불상의 원고에서는 이런 대목도 발견된다.
“필자(헐버트)는 200개가 넘는 세계의 문자를 검토해본 결과, 형태의 간결성에서나 음운의 일관성에서 한글을 따를 문자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한글은 현존하는 문자 중 가장 훌륭한 문자임이 분명하다. 누구라도 한글을 대하면 배운 지 나흘 만에 책을 읽을 수 있다. 일본이 한글을 채택한다면 최선의 선택이 될 것이다.”
헐버트는 이외에도 한글에 관한 연구를 논문의 형태로 발표해 국내의 영문지 외에 미국 정부와 의회에 보내는 보고서에 수록되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한글의 특징과 독창성, 우수성을 전 세계에 다양하게 소개했다. 한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국학을 개척한 그의 노력과 업적은 알려져 있는 것보다 훨씬 컸으며 조선의 근대화에 큰 도움이 됐다.
YMCA 창립총회 의장이기도 했던 헐버트는 YMCA 창립 당시 일부 선교사들이 YMCA의 설립 목적을 선교에 국한하자고 주장했으나, YMCA가 만인에게 교육의 장을 제공해야 하며 계몽활동을 하는 사회단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관철했다. 선교사였던 그는 이런 식으로 우리나라 근대교육에 초석을 놓았다. 한글학회 김종택 회장은 “한글 암흑기에 한글운동을 펼친 헐버트 박사를 겨레의 스승으로 받들어야 한다”고 했고 이대로 한말글문화협회 대표는 “헐버트 박사는 한글사랑의 표상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 자주정신을 불어넣어준 진정한 은인이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원세개와 헐버트는 동시대 사람으로, 한 사람은 조선에서 입신해 중국 역사의 주역이 되었고 다른 사람은 미국에서 태어났으나 조선을 위해 헌신하고 나중에 조선에 뼈를 묻어 조선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선구자의 한 사람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두 사람 모두 한글을 생활 속 깊이 접해 한글의 특징과 가능성을 알았고 한글을 보급할 수 있는 중심 위치에 서 있었으나, 한 사람(원세개)은 세종대왕의 거룩한 정신이 담긴 한글의 도입과 문자 개혁에서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했고, 시대의 사명인 중국의 근대화에도 소홀한 채 권력에 집착하다 중국 역사의 그늘 속으로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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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다른 한 사람(헐버트)은 조선에 발을 디디자마자 한글의 가능성을 간파해 한글을 하늘이 한국인에게 내린 희망으로 보고, 근대화와 근대교육의 핵심이 한글 속에 있음을 깨달아 몸을 던져 이를 실천했다. 이러한 노력이 근대조선의 형성에 큰 등불이 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우리도 등한히 했던 가치를 살려냄으로써 한글 세계화의 기초를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원세개(袁世凱·1859~1916 중국의 군인, 정치가, 중화민국 초대 총통)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경군통령(慶軍統領)인 오장경(吳長慶)을 따라 조선에 부임했고 후에 총리교섭통상대신으로 취임해 국정을 간섭하고 일본, 러시아를 견제했다. 1894년 청일전쟁에 패한 뒤 서양식 군대를 훈련시켜 북양군벌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개혁파를 배반하고 변법운동을 좌절시켰다. 이후 의화단의 난을 진압했으며 신해혁명(1912)으로 탄생한 중화민국의 임시 대총통 손문(孫文)을 사임시키고 임시 총통(1913)이 됐다. 이어 국민당을 해산시키고 정식 총통이 되었으며 이후에 스스로 황제(1916)라 칭했으나 시대를 역행한 군주제로 열강의 비웃음과 계속되는 국민의 반대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화병으로 죽었다. 헐버트(Homer B. Hulbert·1863~1949 선교사) 미국 명문가 태생. 구한말 근대교육을 위해 설립된 관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교사로 23세에 조선에 파견되어 19년간 체류했다. 800쪽이 넘는 초대형 역사책인 ‘한국사’와 역사, 문화, 풍습, 사회제도 등 한국의 모든 것을 집대성한 ‘대한제국 멸망사’(1906)를 출판해 국제사회에 한국을 소개했다. 직함은 고문이지만 실제적인 조선 교육정책의 최고책임자(1887)였다. 헤이그 밀사 파견 사건 후 일제에 의해 조선에서 추방된 후에도 미국에서 조선의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1949년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한국에 초빙되어 건국문화훈장을 받았으나 귀국 일주일 후 서거했고 양화진에 묘소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