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즐기지도 않고 디자이너라는 명성을 좇지도 않지만 김영재는 바느질계에서 정통의 솜씨를 갖고 있는 장인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규방의 고운 처자로 자란 그는 결혼한 뒤 오랜 세월 신산한 삶을 바느질에 의지해 견뎌왔다. 그에게 바느질은 생계 해결과 함께 위로와 창작의 기쁨을 주었고, 긴 시련 속에서 완성한 솜씨로 그는 침선세계에서 일가를 이뤄냈다.
뒤늦게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명장이 된 그를 보고 “내 덕으로 당신이 명장이 되었다”고 했다. 그 말은 슬프지만 사실이었다. 그 긴 번민과 시름의 세월 속에서 그는 수양하듯 바느질을 했고, 당장 생계와 아이들 교육을 위해 바느질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어릴 때부터 바느질하고 염색하고 옷 짓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토록 좋아했던 바느질이 결국 이런 곡절을 거쳐 그의 인생이 되어버릴 줄은 그도 몰랐다.
“제가 바느질하기 좋아하는 걸 보고 친정아버님이 걱정 많이 하셨지요. 여자가 재주 많으면 박복하다고, 그 재주로 밥 빌어먹는다고…. 지금도 힘들 때면 문득 아버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전남 광양의 부유한 집안에서 오빠와 남동생 사이에 고명딸로 태어나 얌전하게 자란 그는 아버지가 아끼는 딸이었다. 화초처럼 곱게 자란 딸이 시집가서 고생할 때마다 아버지는 애를 끓이곤 했다. 그때의 아버지 나이보다 그의 나이가 더 많아진 지금 돌이켜보건대 생전의 아버지가 그렇게 염려했던 대로 그는 바느질 재주로 밥을 벌었고, 마음의 위로를 삼았으며, 마침내 일가를 이루었다. 결국 그 재주로 명장의 반열에 올랐으니 오늘날 그를 본다면 아버지는 뭐라고 하셨을까?
한 번 보고 똑같이 만드는 재주
그의 이름 영재(永才)는 ‘오래가는 긴 재주’를 뜻한다. 한학자였던 할아버지가 특별히 지어준 그 이름은 예언처럼 들어맞았다. 그는 한 땀 한 땀 부지런히 손을 놀려 하염없이 시간을 잡아먹는 바느질 재주를 가진데다 오랜 전통을 이어받은 우리 옷을 짓고 있으니 과연 ‘길고 요원한’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긴 재주’라는 그의 이름은 이 재주가 이생에서 얻은 평범한 재주가 아니라, 몇 겁의 연이 쌓인 역사가 아주 긴 재주라는 뜻에 가까운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릴 때부터 누가 옷 짓는 것을 옆에서 보기만 해도 금방 따라 할 수 있었겠는가.
“열댓 살 때인가? 예전 촌에서는 아이들 저고리 소매를 일부러 짧게 만들어 입혔어요. 때 타기 쉽고 일하는 데 거추장스러우니까요. 소매가 짧으니 겨울이 되면 손목이 잘 텄죠. 그래서 제가 입던 명주저고리를 뜯어서 콩물에 염색하던 차에 저고리 원단을 찾아내어 같이 염색하고 소매를 이어 붙였지요. 어머니가 아버지의 명주 바지저고리를 보라색으로 염색할 때 검정콩을 삶아 물들이는 것을 봤거든요.”
그는 소매 단을 덧붙인 저고리를 곱게 풀칠하고 손질해 꾸며 입었다. 물론 집에 어른들이 안 계시는 틈을 타서 살짝 한 일이었다. 나중에 이를 본 할머니가 집안사람들에게 “어린애치고는 어북(제법) 잘했제”라며 그의 솜씨를 인정했다고 한다. 그러고 몇 해 지난 열여덟 살 어느 날에는 이웃의 딸 부잣집에 놀러갔다가 그중 바느질 잘하는 셋째언니가 무명으로 남자 겹배자(조끼) 호주머니 만드는 걸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다가 집으로 돌아와 금세 똑같이 만들어냈다.
“장롱에서 무명 한 필을 꺼내 호주머니도 제대로 잘 파서 넣고 그럴듯하게 만들었지요. 나중에 어머니가 보시고는 ‘아버지 일하실 제 입을 순 있겠네’ 하시더군요.”
배자 호주머니 만들기가 쉽지 않은데 그가 이렇게 눈으로만 보고 뚝딱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덕택이다. 그가 열 살 때 광복을 맞았는데, 그때 집에 재봉틀이 있었다. 재봉틀이 귀하던 그 시절 어머니는 식구들 옷은 물론이고 이웃의 바느질감도 종종 맡았다.
“치마저고리도 많이 지으셨지만, 남학생 교복도 자주 만드셨어요. 그때 호주머니 만드는 것을 많이 봐뒀지요. 어머니가 저고리를 한 장 만들어주면, 이웃이 와서 하루 일을 해주곤 했습니다. ‘품바꿈’(품앗이)이었지요.”
열아홉 살 무렵 그는 광양군수의 딸이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문을 연 양재학원에 다니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그렇게 재미날 수가 없었어요. 학생이 한 예순 명 되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네요.”
그러나 이 좋은 것도 몇 달 못 가 끝이 나고 말았다. 불면 꺼지랴 애지중지하며 키운 귀한 딸이기에 국민(초등)학교도 마지못해 보냈던 아버지는 다 큰 처자가 된 딸이 밖으로 나돌면 헛바람 든다고 극구 반대했다. 안 그래도 딸이 솜씨 좋은 것을 불안하게 여겼던 아버지는 대놓고 양재학원을 다니는 딸이 그 재주로 팔자가 사나워지지 않을까 두려웠으리라. 어느 날인가 아버지는 학원에 가지 말라는 말을 듣지 않는 딸에게 화가 나 나무 재떨이를 던졌는데, 공교롭게도 왼쪽 어깻죽지에 맞았다.
“바느질하면 오른쪽 어깨와 팔이 아프게 마련인데 10년 전부터 왼쪽이 자꾸 아픈 거예요. 주사를 맞고 물리치료를 해도 잘 낫지 않기에, ‘왼쪽은 따라만 가는 팔인데 왜 아프지?’ 하고 곰곰 생각해봤더니 그때 아버님께 맞은 것이 떠오릅디다.”
그 당시는 까맣게 멍이 들었다가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 아픔이 40년도 더 지나 다시 살아나다니 사람의 몸이란 참 신기한 것이다. 통증은 그가 무리할 때면 어김없이 되살아나서 그에게 경고를 하는 듯하다. 그때 아버지가 걱정하고 야단했던 것처럼.
친정아버지는 곰방대를 두드리고
양재학원은 곧 그만두고 말았지만 그는 바느질을 멈추지 않았다. 한번은 고향 어른 가운데 환갑을 맞은 이가 있어서 모시 중의와 적삼, 두루마기 일습을 지어 선물로 보냈다.
“그 어른이 양복점을 하는 분이어서 바느질과 옷에 대해 잘 아셨죠. 잔치 때 아버지께 ‘걔가 바느질 잘하는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잘할 줄은 몰랐다’고 칭찬을 하셨던가 봐요. 그 뒤로는 아버지의 야단이 조금 줄더군요.”
안에 털을 댄 갓저고리 외투(위). 겨울 방한모 남바위는 귀까지 따뜻하고 시야를 가리지도 않아 서양 모자보다 편리하고 멋있다(옆).
이런 그였기에 스무 살, 자신이 시집갈 때 자기 옷은 물론이고 시부모 옷까지 죄다 직접 지어갔다. 남편은 그보다 네 살 많은 멋진 해군 장교였다.
“멋쟁이 중 멋쟁이였습니다. 본래 해군이 멋진데, 이 사람은 더 멋있었어요.”
멋쟁이 남편은 한량이었다. 남편을 따라 진해로 살림나와 신혼을 보냈는데, 남편에 관한 소문을 들어도 그는 곱게 자란 숫기 없는 성품으로 남편에게 따지는 법을 몰랐다. 진해에서 2,3년 살다 남편은 제대하고 부산으로 내려와 해양경찰 생활을 시작했다.
“해군 경비선을 타고 한번 나가면 보름씩 걸리곤 했어요. 그러면 동네 할머니들이 옷 뜯어서 손질할 때 제가 꾸며드리곤 했지요. 이곳이 객지인데다 세 들어 사니까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게 됐습니다. 동네 어른들이 텃밭에 고구마나 고추 농사지으러 가면 따라다니기도 하고요.”
남편은 해양경찰도 그만두고 이번에는 외항선을 탔다. 그리고 일 년에 한두 번 집에 올까말까 했다. 그렇게 외항선을 타고 떠도는 남편을 기다리며 그는 바느질을 시작했고, 이곳 부산이 제2의 고향이 됐다. 이제는 부산 사투리가 입에 붙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다만 본토박이 부산 사람들보다 훨씬 부드럽다.
그가 바느질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것은 당장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서기도 했다. 남편은 외항선 타면서 받는 월급을 가족에게 보내지 않고 혼자 다 썼다.
“제가 바느질할 줄 안다는 걸 믿고 그랬겠지요. 언젠가 배에서 신원보증을 세워야 한다기에 제가 친정아버지와 이모부에게 부탁해서 서류를 만들어주었는데 직원이 보고 ‘와, 우리 회사보다 재산이 더 많네’ 했대요. 우쭐해진 남편은 그 다음부터 사람들에게 돈을 더 잘 쓰게 된 겁니다.”
천생 한량인 남편은 가족 부양의 의무마저 저버렸지만 그는 부부싸움을 할 기회조차 없었다. 아마 있었다고 해도 싸울 줄 몰랐겠지만. 외항선을 그만둔 남편은 곧 서울로 올라가버렸다. 막내가 겨우 세 살 때였다. 그리고 14년간 남편은 발길을 끊었다.
“어떻게 견뎌냈느냐고요? 바느질이 수양이 됩디다. 새 작품을 만들어낼 때마다 기쁨이 있으니까, 내가 행복한지 아닌지 그런 건 묻지 않고 그저 참고 견디며 바느질을 했지요.”
친정아버지는 과부 아닌 과부가 된 딸을 위해 쌀과 보리, 깨, 콩, 찹쌀까지 농사지은 것을 선주였던 이모네 배에 바리바리 실어 부산 자갈치까지 보내주었다. 거기서 대신동 그의 집까지 일꾼이 부려다놓았으니, 그는 멀리서도 여전히 사랑스럽고 안쓰러운 딸이었다. 그 아버지는 해가 질 무렵이면 마루 아래 축담 섬돌에 앉아 곰방대를 하도 탁탁 쳐대어서 담뱃대의 목이 다 휘어지곤 했다. 동네 사람들은 그 곰방대 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저 영감이 또 딸 생각하나 보다”고 수군거렸다.
“가끔 제가 친정에 가면 동네 사람들이 ‘야야, 니 아버지 담뱃대 봤나?’ 묻곤 했지요.”
그는 이 말을 하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남편의 부재가 만든 명장
그의 나이 서른에서 마흔다섯까지, 그에겐 남편 대신 여섯 아이와 바느질뿐이었다. 마침 1970년대와 1980년대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사람들은 고운 치마저고리나 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를 차려입는 멋을 부리기 시작했고, 명절이나 결혼식, 졸업식, 사은회 때면 우리옷을 입는 것이 멋이고 유행이었다. 꼼꼼한 그의 바느질 솜씨는 저절로 이름이 나니, 부산에서 옷 좀 입는다는 부인네는 모두 그의 가게를 찾았다. 그 덕택에 그는 여섯 아이를 다 번듯하게 키워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병들고 지친 몸으로 조강지처인 그의 품으로 돌아왔다. 평생 남편에게 따질 줄 모르고 늘 따뜻한 밥상을 차려냈던 그는 이번에도 남편의 건강을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았다.
“몸이 완전히 망가져 돌아온 거예요. 그때 옷 한 벌 짓는 삯이 2500원이었는데, 한 해 약값으로 250만원이 들어갔어요. 좋다는 보약은 뭐든 다 썼습니다.”
그의 정성에 남편은 차츰 건강을 회복했고, 친구들과 등산을 다니며 즐겁고 편하게 그의 곁에서 지냈다. 그는 또 여름이면 모시옷을 날아갈 듯이 손질해 입혀 왕년의 멋쟁이로서 남편의 위신도 세워주었다. 사람들은 “뭐가 예뻐서 그렇게 좋은 옷을 해주느냐?”고 물었다. 그럴 때면 얌전한 그도 당차게 대답하곤 했다.
“내가 남편을 위해 사는데 왜 당신이 상관하느냐고, 내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이 어떻게 해줄 거냐고, 제가 이렇게 대답하면 아무 말 못했지요.”
그때 그는 남편을 원 없이 모시고 받들며 살았다. 젊은 날 제대로 해보지 못했던 아내 노릇을 남편의 마지막 15년 동안 이렇듯 곱고 진하게 해낸 것이다. 그리고 남편이 눈을 감았을 때 그는 비로소 참 많이 울었다.
“제 인생에 대한 회한 때문이었겠지요. 제가 살아온 나날이 서러웠는지, 눈물이 참 많이 나오더군요.”
아마 이 울음은 서러움 이상의 울음이었을 것이다. 젊은 날 남편이 떠났기 때문에, 그리고 남편이 돌아왔기 때문에, 또 돌아온 남편을 신혼의 새색시와 마찬가지로 극진히 봉양했기에 그는 비로소 울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식들은 내가 이런 얘기하는 걸 싫어한다”면서도 그는 남편의 바람과 자신의 지난한 과거를 솔직하고 담담하게 내보인다. 여자로서 한 점 부끄러울 것 없는 떳떳한 삶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남편의 부재는 그의 바느질 인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남편의 말마따나 평범한 남편과 함께했다면 과연 그의 바느질이 그렇게 무르익을 수 있었을까?
그가 바느질로 일가를 이룰 무렵 남편이 돌아온 것 역시 결코 예사로운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남편이 돌아온 뒤 그는 완성된 바느질 솜씨를 기반으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한국의상협회 부산지회장을 맡게 되고 우리옷 공모전 금상과 한국전통의상 공모대제전 특별상을 받고, 한국의상협회 기술지도 이사 등을 거쳐 한국과 독일에서 한복 발표회를 여는 등 사회활동을 넓혀나갔고, 1997년 부산한복협회를 창립하고 드디어 섬유분야 명장과 대통령 표창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뿐인가. 1999년에는 단국대 사회교육원에서 전통복식 과정을 수료하고 석주선 기념박물관에서 16세기 출토 복식 및 원삼 과정을 마친 그는 유물을 재현하는 데도 참여했다. 또 재봉틀의 노루발(박을 때 옷감을 눌러주는 장치)을 개선해 누빌 때도 주름지거나 천이 울지 않도록 만들어 특허까지 냈다.
그동안 국내외 전시회를 숱하게 했지만, 그는 단독 전시회만 세 번, 염색전시회를 한 차례 열었다. 그리고 올 2월 부산시민회관에서 그의 바느질 인생 60년을 정리하는 전시회를 네 번째 개인전으로 연다. 이날 속옷부터 배자 수의까지, 삼베 무명부터 비단 양단까지, 서민의 잠방이부터 임금님의 용포까지, 어린이 버선부터 부녀자의 아얌(장식 댕기가 달린 방한용 모자)까지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작품 300점을 선보인다.
“할매, 파이팅!”
늘 규방에 앉아 조용히 바느질만 하던 그는 뒤늦게 복식 기능사 자격증을 주는 기능경기 대회에 참가하는가 하면 침선 명장까지 땄는데, 그렇게 된 사연이 재미있다.
“기능경기 대회에 나가려면 재단을 도식화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마름질하는 법은 제 머릿속에 다 들어 있지만 그것을 치수대로 도면으로 그려낼 줄은 몰랐지요. ABC도 모르는 제가 뒤늦게 시험 보려고 공부를 시작한 겁니다.”
밤 12시까지 손님 옷을 만들고 난 뒤 새벽 2시까지 책을 들고 씨름한 그는 쉰아홉 살에 본 첫 시험에서 깃 너비를 잘못 계산해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장인은 좀처럼 포기할 줄 모르는 법. 그는 이듬해 다시 대회에 나갔다. 기술고등학교를 나왔거나 대학에서 복식학과를 나온 손자뻘 되는 아이들과 함께 시험을 치렀는데, 시험장 밖 복도를 지나던 고등학생들이 창 너머로 그를 보고 “할매, 파이팅!”이라고 외쳤다. 이번에는 은상을 받았다.
“저는 국민학교밖에 못 나왔는데,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자들과 겨뤄 은상을 받았으니 대단한 것 아닌가요?”
이미 한국의상협회 기술지도 이사였고 여러 공모전에서 상을 받은 그가 뒤늦게 기능경기 대회에 나간 것은 명장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능경기 대회 실적이 있으면 명장 심사에서 우선 20점을 받기 때문이었다. 그 덕택이었을까? 그는 그해 명장도 됐다. 그런데 애초에 명장이 될 준비를 한 이는 그가 아니라 그의 친구였다.
“국제시장에서 옷 가게를 하던 친구였어요. 하루는 장 보러 나갔다가 비가 와서 그 친구 집에 비를 그으려고 들렀지요. 그 친구 말이 명장 심사에 서류를 넣었는데 틀림없이 될 거라고 장담하더라고요. 저는 그런 심사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었지요. 그래서 어디다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지 자세히 물어봤어요.”
장인들이 지닌 한 가지 공통된 욕심은 자기 기술에 대한 확신과 인정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자신도 서류를 넣어보리라 마음먹는다. 그리고 장인 특유의 실천력을 발휘해 집에 보따리를 내려놓자마자 시청으로, 노동부 인력관리공단으로 뛰어다녀 퇴근하는 공무원들을 붙잡고 겨우 서류를 얻어왔다.
“마감날짜가 나흘밖에 남지 않아서 시간이 촉박했지요. 대학생이었던 딸내미 둘을 시켜 서류를 급하게 꾸며서는 마감 시간에 겨우 대어 제출했어요.”
연습 삼아 서류를 대충 준비한 탓에 그는 안타깝게도 떨어졌다. 대학에서 한복을 가르치는 교수의 제자가 명장 1호가 됐다. 그러나 이듬해 그는 기능경기 대회에서 은상을 타고 명장까지 한꺼번에 거머쥐었다. 비록 1호라는 이름은 놓쳤지만, 젊은 1호 명장이 얼마 안 돼 암으로 세상을 뜨는 바람에 그는 사실상 연배로 보나 기술로 보나 우리나라 최고 명장 자리를 지키게 됐다.
산야를 다니며 염색 공부만 10여 년
그의 뒤늦은 학구열은 학교 공부로 이어져 석주선 박사가 몸담았던 단국대에서 전통복식 이론을 공부하고 출토유물을 재현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손님 옷도 지어야 하는데다, 학교 과제나 출토 유물을 재현하노라면 밤을 꼴딱 새우기 일쑤였지만 그는 피곤한 줄 몰랐다.
“참 이상한 것이, 돈 때문에 옷 만들 때는 지겨울 때가 있어도 유물 복원이나 돈 안 나오는 작품 만들 때는 그렇게 재미나고 신이 날 수가 없어요. 색다른 것을 시도해보는 재미에 푹 빠져버리는 거지요.”
금박으로 멋을 낸 여자아이의 색동저고리.
“첫해에는 스님이 직접 가르쳐주었지만 그 다음부터는 배우는 사람들끼리 한 달에 한 번 모여 염색 재료도 채취하고 공부도 하면서 익혀나갔습니다. 그 덕에 우리나라 산야를 참 많이도 다녔네요.”
멋진 검은색을 내는 신나무 이파리를 따기 위해 태백산 깊은 골짜기까지 들어간 적도 있다. 남자교수가 앞에서 뱀을 쫓기 위해 장대를 휘두르면 여자들은 가슴까지 올라오는 초목을 헤치며 뒤를 따랐다. 그렇게 염색을 공부한 것이 10여 년. 그는 홍화씨로 물들인 여린 살구빛부터 신나무의 검정빛까지 갖가지 색깔의 옷감을 펼쳐보였다. 황기, 고추씨, 빛남, 황토, 밤꽃, 송이, 오미자, 양파, 오배자, 곰피, 치자, 누릅나무, 꼭두서니, 소목, 참졸, 쑥, 소나무 껍질, 밤 껍질까지 갖가지 천연 재료로 손수 물들인 옷감이었다. 식물뿐 아니라 광물이나 임균류까지 염색재료로 써온 조상의 지혜를 고스란히 담은 옷감으로, 그는 이것들을 가지고 염색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이렇게 바느질 장인과 교수, 염색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배우는 것도 느끼는 것도 많았다. 때로 교수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그는 금방 이해하기도 한다. 이론을 가르치는 교수보다 그가 더 실기에 능해서다.
“출토 유물 가운데 사선으로 달린 깃을 시접도 없이 잘라낸 것을 보고 어떻게 해서 깃 아랫부분을 곡선, 윗부분은 직선으로 만들어냈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해요. 그러나 한복을 지을 줄 아는 사람들 눈으로 보면 동정을 달기 전에 주름박음을 해 넣어 동정 부분을 반듯한 직선으로 만든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알아도 알은체는 하지 않는다. 대신 출토 유물을 재현할 때면 이름 모를 옛사람의 솜씨에 혼자 감탄하며 배우는 바가 많다고 한다. 고운 당의를 보여주며 그는 얇은 옷감으로 지었는데도 당의의 끝자락이 말려 올라가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테두리를 네 번이나 감아 넣었더라고요. 이렇게 끝을 단단히 마무리 지어주니 하늘거리는 옷감인데도 말려 올라가지 않는 겁니다. 세 번만 접었어도 아마 말려 올라갔을 거예요.”
우리 전통 옷은 중국이나 일본 옷처럼 요란한 무늬를 쓰지 않아 화려하기보다 단아한 편인데, 바느질만큼은 세계 어느 옷보다 섬세하단다.
“서양 옷이나 일본 전통 옷은 거의 홈질 하나로 만들었는데 우리 옷은 부분에 따라 홈질과 박음질뿐만 아니라 감치고 누비고 시치고 공그르기까지 다양하게 사용했습니다. 그만큼 바느질이 발달했던 거지요. 그래서 보이는 디자인은 단순할지 몰라도 보이지 않는 바느질만큼은 그렇게 세련되고 섬세할 수가 없습니다.”
단순함과 섬세함이 어우러진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옷이라는 말이다.
“사극용 옷은 안 만들어요”
요즘 텔레비전이나 영화의 사극을 보면 과거에 비해 화려하고 멋진 우리 옷이 자주 등장한다. 시청자 입장에서 보면 이제 우리나라도 잘살게 돼서 옛 복식을 제대로 멋지게 재현했구나 하고 감탄하지만 전문가인 그는 시각이 다르다.
“언젠가 인기 사극에 썼던 옷을 누군가 갖고 와서 좀 봐달라기에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고, 그건 옷도 아니었어요. 꽃 국사 화학섬유로 보기만 곱지, 안감도 안 쓰고 만들어낸 조각에 가까웠어요. 옷을 알고 보면 그건 옷이 아닌데 색깔만 보면 아주 곱지요. 한번 촬영하면 못 입게 되니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자기 손으로 만드는 옷 하나하나 모두 작품으로 여기는 그로서는 그런 ‘소모용’ 옷을 도저히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가르친 제자나 알고 있는 사람 가운데도 사극용 옷을 만드는 이가 더러 있는데, 디자이너 자신이 옷을 능숙하게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 매주 두 번씩 방영되는 사극 의상을 해대려면 돈도 돈이거니와 그 번잡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그런 드라마 협찬을 자주 하는 디자이너 가운데 부도를 내는 사람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돈도 많이 들고 골치 아픈 일을 이 나이에 왜 하겠습니까. 그런 일은 앞으로 커나가고 싶은 사람이나 하는 거지요. 저는 그런 성공은 바라지도 않아요.”
명실 공히 그의 바느질 솜씨는 이 시대 첫 손가락에 꼽히는데 사회적 명성과 상업적 성공으로 보면 그는 오히려 비주류에 가깝다. 2005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각국 정상의 두루마기를 바느질 장인들이 나눠서 지었을 때도 그런 일을 맡아 총괄하는 이는 이름난 한복 디자이너였지만 가장 중요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입을 두루마기는 그가 맡았다. 사실 노 전 대통령과 이전에도 인연이 좀 있었다.
“제자 가운데 한 명이 노 전 대통령의 처제와 친구였던가 봐요. 그래서 ‘네 형부가 대통령이 되면 내가 빚을 내서라도 옷 한 벌 해준다’고 큰소리쳤다가 막상 대통령이 되자 제게 달려와 사정을 했어요. 제 손으로 그런 옷을 짓기는 아직 부담스러웠던 게죠. 그래서 내가 해드리겠다고 하고 염색해놓은 옷감으로 지어드렸죠.”
쪽물 들인 바지저고리와 홍화로 노랗게 물들인 마고자, 그리고 오디로 염색한 붉은 기운이 도는 은회색 두루마기를 받은 노 전 대통령은 “와, 딸 시집보낼 때 입으면 좋겠다!”고 감탄했단다. 그는 영부인에게도 홍화로 붉게 물들인 두루마기를 선물했다.(홍화는 밀도에 따라 여러 색깔을 낸다.)
지난해에도 그는 조효순 명지대 명예교수가 한복단체총연합회 회장에 취임하면서 국회에서 취임식 겸 역대 영부인의 옷을 재현하는 전시회를 열 때 참가했다. 처음에는 국회에서 전시 허가가 잘 안 나왔는데, 조 회장이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에게 간곡히 부탁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옷도 나온다고. 그래서 육영수 여사의 옷을 지은 김영재 명장은 박 의원의 치사를 들었을까?
그가 만든 조각보. 세 땀씩 이어 박은 섬세한 바느질은 소름 끼칠 정도다.
이렇듯 그는 이름 알리는 데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 보인다. 다만 바느질 솜씨에 관해서만은 자존심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일까. 부산에 정착해 줄곧 대신동에 자리 잡은 그의 가게는 지금 눈으로 보면 허름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그가 만드는 옷은 요즘 유행하는 날아갈 듯 맵시 나는 옷이 아니라 점잖고 단아할 뿐이다.
“텔레비전에 연예인들이 입고 나오는 새뜻한 치마저고리를 보던 사람이 우리 집 옷을 보면 얼마나 후줄근하겠습니까? 쇼윈도 꾸미는 것이요? 그런 데 왜 헛돈을 들이겠습니까? 그건 가게 보러 오라는 말밖에 안되잖아요? 그런 데 돈 들이면 공임만 비싸지겠지요.”
안 그래도 간판에 적힌 ‘침선 명장’이라는 이름 때문에 사람들은 비싼 집인가 보다 하고 차마 들어오지 못하지만, 들어온다고 해도 유행을 좇지 않는 그의 옷에 눈길을 주기는 힘들 거라고 했다. 마침 30년 단골이라는 허문엽 씨가 혼인을 앞둔 처자와 그 어머니를 이끌고 가게에 들어섰다. 허문엽 씨는 ‘할머니 옷’에 대한 신뢰가 대단하다.
“할머니 옷은 싫증이 안 납니다. 요즘 옷은 당장은 날아갈 듯해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유행에 뒤떨어져 못 입게 되는데, 이 집 옷은 두고두고 입을 수 있지요. 또 할머니가 직접 물들인 천으로 색깔도 잘 골라 맞춰주시니까 좋지요. 우리 자식과 며느리, 사위는 모두 이 집에서 옷을 했는데, 어느 자리에 가도 빛이 납니다.”
허 씨는 무엇보다 “할머니의 옷값은 거품이 없어서 좋다”고 덧붙였다. 천연재료로 손수 정성 들여 염색한 옷감으로 명장에게 옷 한 벌 지으려면 돈이 얼마나 들까? 의외로 싸서 모시 같은 특별한 천이 아니라면 100만 원 선이다. 부산의 여느 시장 한복집은 말할 것도 없고 서울의 광장시장 같은 도매시장도 바지저고리 한 벌 값이 250만 원 안팎이니 청담동에 들어선 화려한 가게나 이름이 좀 난 한복디자이너의 옷값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더 커질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명장이 직접 지은 옷을 가장 값싸게 얻을 수 있다는 희한한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새색시 모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결혼박람회에서 보고 선금까지 걸어둔 요즘 한복을 포기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 소개한 허문엽 씨가 아무리 “한 번 입고 말 불편한 옷이 아니라 웃어른께 인사하러 다닐 때, 다른 사람 결혼식에, 또 명절이나 뜻 깊은 자리에 품위 있게 차려입고 갈 수 있는 우아하고 편안한 옷”을 고르라고 권해도 모녀는 요즘 유행하는 옷을 포기하기 힘들었나 보다.
“당장은 보기 좋은 옷에 끌리겠지요. 하지만 전시된 대로 입으려면 여간 손질하기 까다롭지 않을 테고 몸에도 편치는 않을 거예요. 자기 결혼식 말고 다른 자리에 입고 나가기도 어려울 테고요. 우리 집에서 안 맞춰서 하는 소리가 아니에요. 그런 점 때문에 결국 우리 옷을 자꾸 입지 않게 되니 그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우리 옷이 화려해지고 세련돼질수록 사람들이 더 우리 옷을 입지 않게 되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는 것이다. 보통사람이 멋지게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지 않고 전시용 한복이 유행하는 요즘 세태에 장인은 답답한 표정이다.
우리 옷은 미래 디자인이다
요즘 사람들이 우리 옷을 입지 않는 가장 큰 이유로 불편함을 꼽는 이가 많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는 온전히 수긍하기는 힘들다고 했다.
“그렇다면 기모노는 입기 편한가요? 혼자서는 입을 수도 없는 옷이잖습니까? 그래도 일본사람이 그 옷을 사랑하고 즐겨 입는 것은 그만큼 전통의 가치를 이해하고 아끼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는 우리나라도 언젠가, 더 잘살고 문화에 대한 안목이 높아지면 우리 옷을 입는 바람이 다시 불 것이라고 했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후학을 기르는 일은 중요하다. 우리 옷을 제대로 지을 만큼 실력을 쌓으려면 10년 정도 세월이 걸린다. 이를 견뎌내는 젊은이가 요즘 있을까 싶다. 설사 우리 옷에 관심이 있어도 그처럼 충실한 바느질로 승부를 거는 장인이 되기보다는 바느질은 제대로 못해도 화려한 디자이너의 길을 가려 하지 않을까?
“바느질은 차분하고 조용한 사람이어야 꾸준히 실력을 쌓을 수 있어요. 인내심이 필요한 거지요. 재능과 머리도 무시할 수 없고요. 이 힘든 일을 잘 안 할 것 같지만 이쪽 인구가 의외로 적지 않답니다. 바느질은 여자들의 영원한 친구니까. 다만 결혼하고 아이 낳고 하면서 그 맥이 끊기니 그게 흠이지요.”
그가 12년간 키운 제자도 결혼과 출산으로 잠시 손을 놓고 있다. 그의 솜씨를 이어받은 다섯째 딸도 몸이 불편해 쉬고 있다. 일흔 중반 나이에 도와주는 이 하나 곁에 두지 않고 혼자 일하는 그가 안쓰러울 법도 한데, 그 생기 넘치는 표정과 잽싼 몸놀림, 빠른 머리 회전을 보노라면 젊은이처럼 느껴져 솔직히 그런 안쓰러움은 생기지 않는다. 아침마다 목욕탕에 다녀오는 것이 건강비결인데, 다만 지금은 눈이 조금 침침해져서 손바느질 조각보는 더 이상 만들 수가 없다. 그가 만든 조각보의 땀은 얼마나 조밀한지 그저 감탄만 나올 뿐이다. 우리 조각보는 그 독특한 색감과 섬세함으로 외국에서 인기가 많은데, 그렇다보니 재봉틀로 후루룩 박은 것까지 외국에 가져다 파는 이도 생겼다고 한다.
“그래도 찾는 이가 많으니까 그리 하는 모양이지만, 그렇게 정도를 벗어나면 결국 공멸하게 됩니다. 또 어떤 무형문화재는 털옷을 만들 때 광목에 풀로 털을 붙여야 하는데 다시 쓸 수 없게 본드로 붙인다는 소문도 있어요. 우리 옷을 배우는 젊은 후학들이 실망해 그만두는 것을 몇 번이나 봤습니다.”
그는 우리 바느질 세계의 미래를 걱정하며 또 낙관한다. 개중에는 일 잘하는 사업가도 나오겠고, 말 잘하는 연구가도 나오겠지만, 자신과 같이 그저 일 잘하는 장인도 틀림없이 나올 테니까. 그런 후진을 위해 그는 자신의 전 작품을 대구섬유대학에 기증하기로 약조했다. 끝까지 깔끔하게 처리하는 그에게 단 한 가지 아쉬운, 이루지 못한 소망이 있다면 복식 부분에서 부산 지방문화재가 되는 일이다. 화려한 명성도 돈도 크게 안달내지 않던 명장은 의외로 문화재에 뜻을 두고 있었다. 기술에 목숨을 거는 장인은 역시 장인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