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이름에서 전쟁과 테러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가 많다.
-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은 ‘아프간 사람이 사는 땅’이라는 뜻.
- 그곳에는 계속되는 전쟁으로 고통 받는 평범한 사람이 있다.
- 2010년부터 10개월간 아프가니스탄 바그람 미 공군기지 한국병원에서 병원장으로 일하며 현지인을 돌본 박석산 인제대 서울백병원 비뇨기과 교수를 만나 남다른 경험과 소회에 대해 들었다.
▼ 아프간은 어떻게 가게 됐나요?
“2010년 1월 갑작스럽게 정해졌어요.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아프간 지방재건사업(PRT) 일환으로 추진한 바그람 미 공군기지 내 한국병원 운영을 인제대 백병원이 맡게 됐어요. 전국 5개 백병원에 근무 중인 의사를 비롯한 의료진은 다 꾸렸는데 책임자가 없었지요. 파견 의사가 전부 젊은 총각이라 현지 병원에 의료장비와 진료 시스템을 구축할 총괄 관리자가 필요했어요. 그때 병원장을 자원했습니다. 제가 간다니 사람들이 놀라더군요. 결혼하고 애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잘 안 가려고 하거든요.”
▼ 가족의 반대가 심했을 것 같아요.
“부모님은 전쟁터에 뭐 하러 가냐고 펄쩍 뛰셨죠. 친구나 제가 아는 의사들도 거길 왜 가느냐고 했습니다. 하지만 집사람은 저를 이해해줬어요. 평소 해외선교를 많이 다니고, 불가리아 카자흐스탄 등에도 다녀온 사람이거든요. 아프간 파견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열심히 기도해줬지요.”
▼ 왜 굳이 전쟁터에 가려 하신 건가요?
“종교인으로서 사명감이 있었고, 현지 상황을 잘 모르기도 했어요. 아프간에 가기 전까지는 위험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전쟁터로 간다는 건 알았지만 실감을 못했죠. 현지에 도착한 뒤 비로소 전쟁이 무엇인지 알았고, 눈물도 많이 흘렸어요.”
연세대 의대 학부와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 박 교수는 고려대 의대에서 비뇨기과 박사학위를 받고 전문의 자격을 획득한 뒤 군에 입대했다. 독실한 종교인으로 의대생 시절부터 의료봉사에 열심이었던 그는 제대 후 전주예수병원에 취업했다.
“선교사 병원이에요. 당시 원장이 미국인 닥터 실(Dr. Seel)이었고요. 우리나라에서는 ‘설대위 박사’로 더 많이 알려진 분인데, 설암 분야의 권위자이면서 선교사시죠. 그분을 평소 굉장히 존경했어요. 저도 그분처럼 의료 선교를 하고 싶었고요. 전주예수병원 의사 중 상당수가 선교사로 해외에 나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결혼하고 딸이 생긴데다 당시만 해도 믿음이 부족하고 소명의식이 약해 선교사가 되지는 못했어요.”
박 교수는 전주예수병원에서 6년간 근무한 뒤 1989년 인제대 서울백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국내 의료봉사활동을 시작했다. 2000년부터는 해외 의료선교를 시작해 네팔, 캄보디아, 몽골, 이집트 등 6개국을 10여 차례 다녀왔다.
▼ 아프가니스탄은 다른 의료 봉사지와 느낌이 달랐겠지요. 아프가니스탄의 첫인상은 어땠나요?
“두바이를 경유해 작은 비행기로 갈아타고 바그람 기지에 들어갔어요. 3시간 반 정도 걸려 도착했는데 가는 내내 비행기 창문 아래로 황토만 보이더군요. 2월 말이었는데 흙산에 눈이 많이 덮여 있었고, 나무 한 포기 풀 한 포기 없었어요. 말 그대로 누런 황토색 광야였지요. 아프간 시골은 민가도 전부 흙집이에요.”
황무지 폐허의 땅
▼ 바그람 기지에 첫발을 디딜 때는 무슨 생각이 들던가요?
“주위에 군복 입고 완전무장한 사람밖에 없는 점에 놀란 기억이 나요. 민간인은 우리 일행뿐이니 얼떨떨했죠. 전쟁터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확 들더군요.”
▼ 기지에 도착해 무슨 일부터 했습니까?
“병원을 둘러봤어요. 새로 지은 콘크리트 2층 건물인데 아무 준비가 안 돼 있더라고요. 인테리어가 없는 건 물론이고 온통 먼지구덩이데요. 의료진 전부가 쓸고 닦는 일부터 시작했죠. 병원에서 쓸 책상이며 가구, 진료실 침대와 세면대, 냉장고, 시계 등 집기도 우리가 비행기 타고 두바이까지 가서 직접 사왔어요. 전쟁터에서 그런 물건을 구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아프간 시내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었거든요. 그곳에서 한국 사람은 굉장한 ‘봉’으로 소문나 있었어요.”
기지 밖 마을 진료를 나가기 위해 방탄조끼를 착용한 박석산 교수(오른쪽에서 세 번째).
“우리를 납치하면 큰돈이 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는 거죠. 탈레반이 외국인을 납치한 뒤 석방 대가로 돈을 요구하면, 가장 많이 주는 게 한국인이라고들 했어요. 현지에 가보니 샘물교회 사건뿐 아니라 우리나라에 알려지지 않은 납치 사건이 더 있더라고요. 건설 공사장에서 납치됐다가 탈출한 한국 근로자가 있고, 우리 기업 건설 현장에 고용된 외국인을 납치한 뒤 우리나라에 대고 돈을 내놓으라고 한 경우도 있었어요.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 민간인이 납치돼도 테러범과 타협을 안 한대요. 직접 가서 구해오면 구해왔지. 그러다보니 탈레반이 우리나라 사람을 더 노리는, 그런 경향이 있었어요.”
▼ 납치 근로자 탈출 소식은 처음 듣네요.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납치사건이 그 외에도 더 있나요?
“가끔 있었어요. 그럴 땐 비상이 걸리죠. 기지 주변 마을 학교 진료나 외부 회의 참석 같은 활동을 일절 못하고 안에만 있어야 해요. 기지 안은 철통 경비 덕분에 안전하지만, 수시로 포탄이 떨어집니다. 포탄 공격을 하루에 세 번 받은 적도 있어요. 대전차포나 박격포 공격을 받으면 사이렌이 울리고 다급하게 ‘인커밍(Incoming·포탄이 날아온다)’을 외치는 방송이 나와요. 그럼 숙소에서 자다가도 방탄조끼 챙겨 입고 방공호 구실을 하는 병원으로 뛰어야 합니다. 숙소는 나무로 지어져 포탄에 파괴될 수 있거든요. 제가 부임하기 직전인 2009년에는 우리 병원 100m 옆에서 포탄이 터졌대요. 박격포가 터지면 막사 하나 정도는 그대로 무너지기 때문에 위험하죠.”
박석산 교수를 비롯한 의사 5명, 간호사 8명과 임상병리사, 물리치료사, 약사, 행정지원자 등 총 23명으로 구성된 대한민국 의료진은 아프가니스탄 도착 후 한 달 반 만인 2010년 4월 11일 파르완주 바그람 미 공군기지에서 한국병원 개원식을 열었다. 이용준 외교통상부 차관보, 박해윤 주(駐)아프가니스탄 한국대사, 한영태 KOICA 사회개발부장 등 국내 인사와 바시르 살랑기 아프간 파르완주 주지사, 미군 관계자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한국병원은 연면적 3000㎡, 30병상 규모로 내과와 외과 등 5개과 진료실과 초음파실, CT실, X-ray실, 심전도실, 병리실, 물리치료실 등의 검사·치료실을 갖추고 있다. 약 200명을 진료할 수 있는 이곳은 이때부터 아프간 주민에게 무료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2차 의료기관 구실을 하고 있다.
박 교수는 한국병원 개원 전인 2010년 3월부터 현지 의료진을 선발해 한국의 인제대 백병원으로 보냈다. KOICA와 백병원이 아프가니스탄 의료 수준을 높이기 위해 마련한 의료종사자 교육프로그램 연수를 위해서였다. 지금까지 인제대 백병원에서 교육받은 아프간 의료종사자는 90명이 넘는다. 박 교수는 아프간 한국병원에서 근무하는 현지 의료인을 대상으로 매주 의학과 컴퓨터를 가르치기도 했다.
현지인과의 갈등
▼ 병원에서의 일과는 어땠나요?
“정식 진료 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예요. 그런데 우리병원에서 근무하는 현지 의료인들은 오후 3시 반이면 일을 끝내고 싶어했죠. 병원에서 셔틀버스로 약 2시간 거리인 카불에 사는데, 날이 어두워지면 가는 길에 공격당할 수 있다며 서두르는 거예요. 또 퇴근 후 다른 병원에서 일하는 ‘투잡’을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요. 현지 의사나 간호사, 물리치료사들은 수입이 많지 않아서 대부분 투잡을 해요. 우리 병원 직원들도 퇴근 뒤 카불에 있는 개인 진료실에서 서너 시간씩 일을 더 하더군요. 아프간 의사의 한 달 월급이 200달러 정도인데, 투잡을 하면 추가로 월 200~300달러를 벌 수 있다고 했어요. 우리 병원의 현지 의사 월급이 700달러쯤 됐는데, 일반 의사보다 두세 배 많은 월급을 받으면서도 투잡을 하더라고요.”
▼ 현지 의료진을 채용해 일자리를 주고, 현지인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 봉사도 했으니 다른 외국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생활했을 것 같습니다.
“아니요. 우리도 위협을 많이 받았어요. 그쪽 정서가 그래요. 예를 들면 자기들이 원하는 사람을 진료해달라고 부탁하는데 우리가 안 된다고 할 때가 있잖아요. 절차와 시스템대로 병원을 운영해야 하니까. 그러면 앙심을 품죠.”
▼ 의료진과 현지인 사이에 갈등이 생기거나, 의료진이 현지인의 공격으로 다친 적도 있나요?
“바그람 기지 근처 마을 사람들과 갈등이 일어난 적이 있어요. 우리는 기지 밖으로 못 나가니까 마을 사람들이 전날 밤부터 병원에 찾아온 환자를 문 앞에 줄 세워요. 그러면서 돈을 받고 자기들 마음대로 새치기를 시키곤 했죠. 매일 수백 명이 줄을 서는데 당일 모두 진료를 받지는 못하거든요. 그 덕분에 줄 세우는 걸 담당하는 마을 사람들이 적지 않은 돈을 챙기는 거예요. 10~15달러를 받은 적도 있다고 들었는데 아프간에서는 엄청난 액수입니다. 그렇다보니 우리는 무료로 진료하는데, 환자들은 ‘돈 내고 치료받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어요. 상태가 괜찮아 약을 처방하지 않고 가라고 하면 ‘돈은 다 받고 왜 그냥 보내느냐’며 화를 내지요. 한번은 돈을 안 내고 줄 선 임신부가 마을 사람들한테 구타당하는 걸 본 적도 있어요. 한국병원에 가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소문이 도니까 이미지가 오히려 안 좋아지는 것 같더군요.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 싶어서 줄 세우기 관행을 싹 없앴어요. 그것 때문에 마을사람들과 분쟁이 생겼지요.”
아프가니스탄 바그람 미 공군기지 내 한국병원 초대 병원장으로 2010년부터 10개월간 현지에서 의료봉사를 한 박석산 교수.
“파르완 주 지역보건소나 지역병원에서 초진을 받은 환자에게만 우리 병원 진찰권을 주고 예약한 뒤 병원에 오도록 했어요. 초진환자는 아예 안 받았죠. 바그람 기지에서 20㎞ 이상 떨어진 차리카르시에 전산시스템을 갖춘 사무실을 하나 만들어 환자 예약 처리와 진찰권 발급을 전담하도록 하고, 그곳에서 취합한 예약 환자 리스트를 매일 e메일로 받았어요. 하루에 진찰권을 가진 환자 150명만 들어오게 하니까 병원 앞 줄서기나 돈 주고받는 관행이 사라졌죠.”
▼ 돈줄 끊긴 마을 사람들과는 사이가 나빠질 수밖에 없었겠네요.
“우리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려면 차리카르 시까지 다녀와야 한다는 데 대한 불만도 있었던 것 같아요. 가까운 데 병원 지어놓고 못 가게 한다고 화가 난 거죠. 계속 항의하고 데모도 하고 그랬어요. 나중에 하루 몇 명씩은 진찰권 없이도 우리 병원에서 진료받을 수 있도록 하는 걸로 타협했지요. 그 순서를 정하면서 또 돈이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처럼 혼란스러운 분위기는 없었어요.”
폭격과 테러에 대한 공포
▼ 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할 때 자살폭탄 테러에 대한 염려는 없었나요?
“한국병원은 미군기지 안에 있기 때문에 출입 단속이 굉장히 철저해요. 한국 경찰과 네팔 용병, 미군이 합동으로 담당하죠. 병원 출입구 양쪽에 초소가 있는데 이걸 통과하려면 6단계의 검문·검색을 거쳐야 합니다. 폭탄탐지견이 무기를 수색하고, 금속탐지기 검사, 몸수색, 홍채검사, 지문검색까지 해요. 병원 건물 위에는 미군 저격병이 있고 한국 경찰도 기지 안에서 망원경으로 주변을 항상 감시하지요. 자살폭탄 테러가 워낙 많으니까 보안을 철저히 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가끔 기지 밖으로 회의나 진료를 나갈 때는 방탄조끼를 입고 장갑차나 헬리콥터를 탔습니다.”
▼ 병원장으로 계신 동안 바그람 기지에 대한 탈레반의 공격도 여러 차례 있었죠?
“아프간에 도착한 지 두 달쯤 됐을 때 탈레반 10여 명이 기지에 침투하려 한 적이 있어요. 숙소 양쪽 옆에 숲이 좀 있어요. 숙소 앞은 공터여서 노출되니까 숲 쪽으로 들어왔는데, 새벽에 자다가 총소리에 놀라 숙소 바닥에 바짝 엎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로켓포 공격은 방공호에 들어가면 피할 수 있는데, 침입 공격은 그게 아니니까 매우 걱정됐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 탈레반이 우리 숙소 몇 백m 앞까지 접근했었고, 11명인가 사살됐다더군요. 아프간에 가면 적군이 침입한 경우 방공호에 가기 위해 밖으로 나가면 안 되고, 실내에서 문을 잠근 채 꼼짝 말고 엎드려 있어야 한다고 교육받아요.”
박 교수가 회상한 이 사건은 2010년 5월 19일 일어난 탈레반의 바그람 기지 공격이다. 당시 AP통신 보도에 따르면 자살폭탄조끼와 로켓포, 수류탄, 자동소총 등으로 무장한 탈레반 대원들은 현지 시각 오전 3시경 바그람 공군기지를 공격했다. 이들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 사이의 교전은 이날 낮까지 산발적으로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미군도 7명이 부상했다.
▼ 긴박한 순간 바닥에 엎드려서 무슨 생각을 했나요?
“우리나라 경찰이 있고 미군도 있으니 안전할 거라고 믿었어요. 다만 밖의 상황을 모르니 불안했죠. 그런 일이 한번 벌어지고 나면 기지의 모든 출입문을 폐쇄하고 수색을 시작해요. 잠입한 사람이 있는지, 내부에 탈레반이 없는지 확인하는 거예요. 며칠 동안 수색해 침입자를 완전 소탕하거나 안전하다는 결론이 내려져야 기지문을 열죠. 병원도 그때까지는 문을 닫아야 하고요.”
▼ 그곳에 계시는 동안 수색작전 때문에 병원 문을 닫은 일이 여러 번 있었나요?
“그렇죠. 기지에 드나드는 현지 민간인이 많기 때문에 탈레반의 공격이 없어도 종종 수색작전이 펼쳐지곤 해요. 자살폭탄 테러범이 잠입했다거나 공격이 있을 거라는 첩보가 입수되면 비상을 걸고 기지를 폐쇄하지요. 한두 달에 한번 정도는 꼭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아요.”
▼ 두렵기도 하겠지만 병원이 쉰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휴가일 수도 있겠네요. 병원 문이 닫혀 있을 때는 주로 뭘 하셨나요?
“숙소에서 꼼짝 못하니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어요. 평소 미군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숙소에서 한 10분 거리거든요. 비상 걸리면 거기에도 못가요. 체력단련실도 갈 수 없고요. 하루 종일 방에서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곤 했습니다. 한국으로 휴가 갔다 오는 병원 사람들이 그런 걸 많이 가져와서 돌려봤거든요. 병원이 쉬는 건 우리보다 현지 직원들에게 반가운 소식이었어요. 기지 폐쇄가 결정된 뒤 ‘문이 닫혔으니 출근하지 말라’고 전화해주면 좋아하는 게 느껴졌지요. 월급은 다 받으면서 며칠 동안 개인 진료소를 더 열 수 있으니까요.”
▼ 전쟁터에 계셨는데 부상당한 군인을 치료하거나 수술한 적은 없나요?
“우리 병원은 현지 민간인을 위한 곳이에요. 부상병은 기지 내의 미군병원에서 치료하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제 일이 아니었지요. 딱 한 번 미군병사를 수술해준 적이 있긴 해요. 기지 밖으로 장갑차를 타고 작전 수행차 나갔다가 차 밑에서 폭탄이 터져 심각하게 부상당한 친군데, 음낭이 다 찢어지고 요도가 파열된 데다 방광에까지 파편이 박혔더군요. 미군병원에 비뇨기과 의사가 없어서 저한테 연락이 온 거예요. 3시간에 걸쳐 파편을 제거하고 음낭과 방광, 요도를 아주 꼼꼼히 꿰매줬지요. 미군병원 의사들이 그 모습을 보더니 ‘정말 섬세하고 샤프하다’며 감탄하더라고요. 그 사람들은 전쟁터에서 일하기 때문에 수술도 대충합니다. 항상 긴박하게 움직이니 꼼꼼하게 처치할 상황이 못 돼요. 나중에 그 병사가 완전히 정상적으로 소변을 보고 건강도 회복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 늘 공포와 마주해야 하는 전쟁 상황이라는 것 외에 다른 힘든 점은 없었나요.
“먹는 것도 좀 힘들었어요. 유제품 알레르기가 있어서 치즈나 우유를 잘 못 먹어요. 빵 같은 밀가루 음식, 기름진 음식도 잘 안 받고요. 그런데 미군식당 음식이 다 그렇잖아요. 밥과 매운 음식이 정말 그립더라고요. 어느 날 현장 근로자로 일하던 한국 분이 병원에 왔다가 비빔국수 재료를 선물로 주고 간 적이 있어요. 의사 중 한 명이 그걸로 매운 비빔국수를 만들었는데, 한 그릇 받아드는 순간 목이 메어서 눈물만 뚝뚝 흘렸어요. 지금도 그 생각하면 목이 메어요.”
외로움, 그리움
▼ 이슬람교도인 아프간 현지인들과 생활하면서 문화 차이를 느낀 적도 많았겠네요.
“남녀가 함께 병원에 출입할 수 없어서 매주 3일은 여자 요일, 2일은 남자 요일로 구분해 진료했어요. 이슬람 문화의 특성상 여성 환자를 대할 때 힘든 점이 많았지요. 진료할 때조차 부르카를 벗지 않겠다고 버티는 분이 많아요. 비뇨기과 여자 환자를 직접 진단하거나 치료할 수 없는 것도 답답했죠. 간호사한테 환부를 살피게 한 뒤 그의 설명을 듣고 적절한 처치를 지시하는 방식으로 진료했으니 오죽했겠어요. 병원 침대나 가구 조립 같은 걸 도와주는 현지 기술자들도 눈에 차지 않았어요. 조금만 일하면 배고프다고 하고, 식사한 뒤엔 기도하러 가기 일쑤였거든요. 하루에 5번은 꼭 기도해야 하잖아요. 그곳 사람들의 기질과 문화가 우리와 달라 힘든 점이 있었죠.”
▼ 특히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나요?
“아프간에는 선천적으로 피부에 땀샘이 없는 유전병을 가진 환자가 많아요. 온몸의 피부가 쩍쩍 갈라지다 3~6세 무렵 죽는 병이지요. 자식 10명 중 절반이 전쟁통에 죽고 5명만 남은 가족이 있었는데 그중 세 아이가 땀샘이 없었어요. 2세, 3세, 7세였는데 얼마나 안타깝던지…. 치료 방법이 없는 병이라 로션만 줘서 보내며 의사로서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또 아프간 어린이 중에는 화상 환자가 많아요. 화덕을 집안에 놓고 사니까 하루에 3~5명은 꼭 드레싱을 받으러 병원에 와요. 우리 병원이 바그람 기지 내 이집트병원이나 아프간 현지 병원보다 화상 치료를 잘한다고 소문이 나서 더 많이 왔던 것 같아요. 그런데 화상의 경우 상처가 아물어도 흉터는 남잖아요. 그 아이들은 피부이식 수술 같은 건 꿈도 못 꿀 테고…. 그래서 어린 화상 환자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어요.”
▼ 현지에 간 지 1년이 채 되기 전인 2011년 1월 한국에 돌아오셨죠?
“서울백병원에서 계속 연락이 왔거든요. 저를 찾아오는 환자가 많았대요. 아프간 간 지 2~3개월 후쯤부터 ‘개원을 위한 기초 작업이 끝났으면 당장 한국에 돌아오라’는 재촉이 계속됐어요. 몇 번을 미루는 사이 제 환자들이 다른 병원으로 옮겨서 병원이 손해를 많이 봤다고 들었어요. 서울백병원에서는 절 아프간에 보낸 걸 많이 후회했죠.”
▼ 한국에 돌아왔을 때 소감을 들려주세요.
“정말 시원했어요. 개원식부터 예약·진료 시스템 구축까지 다 마무리했고, 진료도 차질 없이 돌아가는 상황에서 돌아왔으니 속이 후련했지요.”
▼ 집에 와서 처음 드신 음식은 뭔가요?
“집사람이 두툼한 삼겹살을 듬뿍 넣은 김치찌개를 끓여줬어요. 거기다 밥 비벼 먹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잖아요. 아프간 있을 때 가장 그리웠던 게 김치찌개였는데 그걸 먹고 속이 뒤집혀 설사를 했지 뭡니까. 그동안 몸이 현지 음식에 적응했던 거죠.”
박 교수는 귀국 후 6개월 동안 ‘외상후스트레스장애’에도 시달렸다고 털어놓았다. 한밤중에 밖에서 꽝 소리가 나거나 사이렌이 울리면 폭탄이 터지는 전장에 있는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아프간에서 참 많이 힘들었구나’ 하는 걸 새삼 깨닫곤 했단다. 1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의 고통조차 뜻 깊은 추억이 됐다.
“돌아보면 아프가니스탄에서 만난 환자들 생각이 가장 많이 납니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게 힘들었고, 한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괴로웠던 적도 있지만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 있었던 건 의사로서 굉장히 보람된, 잊지 못할 경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