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호

“국보 1호 공사도 도급에 하청, 목수 품값도 제때 주지 않다니…”

숭례문 복원 진두지휘 신응수 대목장의 일갈

  • 백경선│자유기고가 sudaqueen@hanmail.net

    입력2012-04-20 16:0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3월 8일 숭례문 상량식이 열렸다. 12월에는 숭례문 복원 공사가 완전히 끝난다. 숭례문 복원공사에 도편수로 참여한 중요무형문화재 신응수 대목장은 “복원된 숭례문을 국민에게 선뵐 날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설렌다”면서도 한편으론 “문화재 뒤편에서 묵묵히 땀 흘린 숨은 노력도 생각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국보 1호 공사도 도급에 하청, 목수 품값도 제때 주지 않다니…”
    숭례문 복원 공사는 12월에 완전히 마무리됩니다. 숭례문은 그전에 볼 수 있을 거예요.”

    2008년 2월 방화로 불타버린 숭례문의 복원 공사에 도편수로 참여하고 있는 신응수(70) 대목장은 “10월쯤 복원된 숭례문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국민에게 숭례문을 선뵐 날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설렌다고 한다.

    신응수 대목장에게 숭례문 복원 공사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1962년 그는 스승 이광규 씨와 함께 숭례문 중수 공사에 참여했고, 그 현장에서 궁궐 복원 도편수로서 전설적인 인물인 최원식 씨의 수제자이자 이광규 씨의 스승인 조원재 씨를 만났다. 당시 숭례문 중수 공사에는 조 씨가 도편수로, 이 씨가 부편수로 참여했다.

    보답하는 마음으로…

    그는 반세기가 지났지만 그때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막내(조원재 씨와 이광규 씨의 측근으로 대우를 받긴 했지만 나이로는 가장 막내였다고 한다)였던 그가 지금은 도편수로서 숭례문 복원 공사를 진두지휘하니 감회가 남다르다고 했다.



    1958년,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고향(충북 청원)을 떠나 사촌형이 있는 서울로 올라왔다. 동사무소 급사로 취직해 야간학교에 다닐 꿈을 안고 상경했는데, 취직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다시 시골로 내려가지 않고 목수인 사촌형을 따라다니며 한옥 공사 현장에서 잔심부름을 하기 시작했다.

    “어른들이 대패를 잡아보라고 해서 ‘그냥 한번’ 잡아보았는데, 잘했나 봅니다.(웃음) 다들 입을 모아 사촌형에게 ‘사촌동생 목수 시켜보라’고 그럽디다. 하라 니까 했고, 그렇게 목수가 되었죠.”

    목수의 길을 걷게 된 그에게 1960년과 1962년은 잊을 수 없는 해라고 한다. “행운과 기회의 해”라고 그는 말했다. 먼저 1960년, 신촌 봉원사 암자 신축 공사 현장에서 우리나라 고건축의 거목인 이광규 씨를 만났다.

    “공사 현장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40대 후반에서 50대였는데, 그 가운데 어린애가 하나 있으니까 이광규 선생님이 많이 귀여워해주셨어요. 그 인연으로 선생님의 제자가 되었죠.”

    그리고 1962년 스승을 따라간 숭례문 보수 공사 현장에서 스승의 스승인 조원재 씨를 만났다.

    “지금의 제가 있는 것은 이광규, 조원재 두 분 선생님 덕분입니다. 이광규 선생님이 전통 고건축 대목의 길로 저를 이끌어주셨다면, 조원재 선생님은 저를 큰 대목으로 거듭나게끔 밑바닥부터 단련시켜주셨죠.”

    그는 숭례문은 조원재란 아주 소중한 인연을 만나게 해준 곳이기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이번 공사에 최선을 다해 참여했다”고 덧붙였다. 장인들의 기술은 철저한 도제 관계에 의해서만 대물림된다. 장인들의 세계에선 기술의 전수에 따라 한 계보가 만들어지는데, 그는 최원식-조원재-이광규의 계보를 이어 이 시대 ‘최고의 궁궐 복원 도편수’가 된 것이다. 계보 안에서 스승은 절대적인 권위를 차지했다. 시대가 변해 요즘에야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어렵지 않다지만, 1960~70년대만 해도 “감히 스승과는 눈도 못 마주치고 그림자도 밟지 않을 정도로 스승은 어려운 존재였다”고 그는 회상했다.

    “궁궐 공사할 때 가장 뿌듯해”

    “숭례문 중수 공사에 참여하고 몇 달이 지나자 조원재 선생님께서 안암동 선생님 댁으로 들어오라 하셨어요. 방까지 내주시면서 말이에요. 그렇게 함께 살면서 선생님은 저에게 도면 그리는 법부터 건물의 비례, 장인의 정신과 자세 등을 일일이 가르쳐주셨죠. 하루 종일 무서운 선생님 밑에서 일하고, 일이 끝나고도 같이 지내야 하니까 어렵고 힘들었어요. 그땐 그랬죠.(웃음) 돌이켜보면, 그런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는 거죠.”

    그는 만일 두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쩌면 자신은 작은 한옥을 짓는 일반 목수로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했다.

    목수의 길을 걸어온 지 올해로 55년째. 그간 그는 목수로서 승승장구했다. 1970년 불국사 복원 공사 때 부편수로, 1975년 수원성 복원 공사 때 도편수로 발탁됐다. 그리고 1991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기능 보유자로 지정됐다. 도편수는 고건축에서 건물의 중심을 이루는 공사인 대목 분야의 총책임자이며, 대목장은 도편수 중에서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된 대목 분야의 장인을 말한다.

    숭례문부터 시작해 경주 불국사, 경주 안압지, 수원 장안문,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복궁, 흥례문에 이르기까지 웬만한 문화재 보수 및 복원 공사는 거의 그의 손을 거쳤다. 그뿐만이 아니다. 단양 구인사, 분당 대광사, 청와대 상춘재와 대통령 관저, 삼청동 총리공관,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의 호암장과 승지원 등의 신축 또한 그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내로라하는 큰 공사는 모두 그의 손을 거친 것에 대해 그는 “내 복이고 행운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수많은 공사 중에서도 특히 애착이 갔던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최고의 궁궐 복원 도편수’답게 궁궐 공사할 때 가장 뿌듯하고 보람을 느낀다고 대답했다. 궁궐은 나라의 최고 건물이지 않으냐며 그가 웃었다. 그는 또한 분당의 대광사 미륵보전 신축에 대한 자긍심도 컸다.

    “분당 대광사 미륵보전은 660㎡(200평)짜리 건물을 3층으로 올렸어요. 630㎡(190평)짜리를 2층으로 올린 경복궁 근정전도 어마어마한데 그보다도 더 어마어마한 거죠. 목공사 끝나고 현재 단청만 하면 되는데, 완성되면 동양에서 제일 큰 목조건물이 되는 거죠.”

    그는 “문화재 보수 공사는 몇 백 년 전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이라며 “거기에서 얻는 희열은 엄청나다”고 했다. 신축 공사 또한 “이 시대에 내 손으로 만든 것들이 언젠가는 우리 문화유산이 될 것이라 생각하면 그에 못지않은 보람과 희열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숭례문 공사 중단된 사연

    숭례문 복원 공사에 도편수로 참여하면서 그는 어느 때보다 의욕이 넘쳤다. 그런데 “공사 진행 과정에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털어놓았다.

    “저는 처음부터 전통 기법을 주장했죠. 전통 방식으로 모든 것을 일일이 손으로(기계가 아닌 전통 공구로) 하되, 나무는 제재해서 받자고 했어요. 그런데 문화재청에서는 제재 과정도 없이 나무를 베서 그대로 가져다 하라더군요. 완벽하게 조선시대 방식대로 하라는 거죠.”

    문제는 역시 돈이었다. “문화재청이 원한 대로 모든 것을 직접 목수의 손으로 하자면 비용(인건비)이 더 많이 들고 따라서 예산을 늘려야 할 판에 문화재청으로부터 복원 공사 위탁을 받은 명헌건설은 오히려 예산을 줄였다”는 게 그의 주장. 그는 “심지어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회사는 목수들에게 품값을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전통 방식으로 공사를 하면 비용이 많이 드니까 저는 문화재청이 직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건설회사에 도급을 준 것 자체가 잘못되었죠.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건설회사는 또 다시 장인들에게 하도급을 줬어요. 그 과정에서 예산이 줄어들었어요.”

    문화재청이 시공사인 명헌건설과 계약한 공사비는 약 170억 원. 이 중 목수 품값은 약 3%인 5억4000만 원이다.

    “명색이 국보 1호 복원 공사를 하는데 목수들에게 제때에 품값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지난해 12월 공사를 중단시켰는데, 명현건설은 설계변경을 이유로 목공사 노임을 3억8500만원으로 감액시켰어요. 상황이 이런데 한 달가량 공사가 중단되자, 사정을 모르는 ‘밖’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나더라고요. 제가 돈을 더 받으려고 공사를 중단시켰다는 겁니다.”

    자신의 돈으로 목수들에게 품값을 줬는데, 그런 오해를 받는 것이 억울했다. 하지만 억울함을 뒤로하고 일단 공사를 진행했다. 국민은 올해 말에 숭례문 복원 공사가 끝날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마냥 중단하고 있을 순 없었다는 것. 그는 “일단 공사를 끝내놓고, 이후에 오해와 억울함을 풀 것”이라고 했다.

    공사를 재개하기 전, 그는 “목공사 노임으로 약 7억 5000만원이 드는데 예산은 그것의 절반 밖에 안되니 차라리 받은 돈 다 내놓고 전액을 기부하겠다”고 했다. “숭례문과 특별한 인연도 있고 하니 보답하는 마음으로 목공사(에 대한 보수)는 전부 기부로 하겠다고 했는데, 현재 그것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 실정”이라는 것. 그는 자신이 건설회사의 직원으로 전락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중요무형문화재가 건설회사 직원으로 되어 있어요.(웃음) 더욱이 돈 한푼 받지도 못하고 목수들 인건비를 대주는 저에게 약정서에 도장 찍었다며 모든 책임을 돌리고 있네요. 상황이 우습죠? 문화재청은 원칙에서 벗어나 있는 건설회사를 감싸고 (정작 챙겨야 할) 장인은 나 몰라라 하고 있어요.”

    회사와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시비에 대한 결론은 아직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공사가 끝난 후 꼭 잘잘못을 가릴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건설회사가 한 행위가 정당한 것인지 법적으로 따져볼 것이라고.

    다음은 울산 태화루 복원

    그간의 마음고생을 이야기하는 끝에 그는 “오롯이 숭례문 복원에만 집중해도 부족할 할 판에…”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는 문화재 복원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문화재 복원은 굉장히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다 짓고도 새로운 고종이 나타나면 다시 지어야 하니까요. 보수나 중수와 달리 복원은 자료가 없어 더욱 더 힘이 듭니다.”

    그는 경복궁 자선당 복원 공사 때의 일화를 소개했다.

    “자선당 복원 공사를 할 적에 설계 나온 걸 가지고 문화재위원회에서 문제를 제기했어요. 기둥이 여덟 치, 즉 24㎝로 나왔는데 저는 30㎝로 해야 된다고 주장했어요. 왜 30㎝냐고 묻는데 설명할 순 없었죠. 공사 현장에서 쌓은 경험에 의한 ‘감’이니까요. 하지만 상대도 왜 24㎝냐고 물었을 때 명확하게 설명하진 못했죠. 그러다 제가 하도 고집을 피우니까 중간으로 갔어요. 서로 3㎝씩 양보해서 27㎝로 말이에요.(웃음) 그런데 다 짓고 나서 일본에서 주춧돌이 발견된 거예요. 주춧돌을 보니 기둥이 30㎝라 결국 공사를 다시 했죠.”

    그에 따르면 숭례문 복원 공사의 전체 공정은 10월쯤 되어야 마무리에 들어가지만 목공사는 6월쯤 끝날 것 같다고 한다. 그는 “숭례문의 목공사가 끝나면 울산 태화루 복원공사를 곧 시작한다. 경복궁 소주방(燒廚房) 복원 공사에도 참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경복궁은 1991년 복원 공사에 들어가 2010년 광화문을 끝으로 20년에 걸친 1차 복원 공사를 마무리하고 2차 복원 공사에 들어간 상태. 지난해부터 드라마 ‘대장금’의 무대인 소주방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그는 목수 일을 시작한 이래 한번도 쉬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느라 절친한 친구 하나 사귀질 못했고 가족들과 따뜻한 정을 나누지도 못했다. 하지만 목수의 길을 걸어온 것을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간 내 손재주에 대해 분에 넘치는 과한 찬사도 받았고, 한편으론 오해와 비난을 사기도 했어요. 그 속에서 꿋꿋하게 한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제가 이 시대 유일의 궁궐 도편수라는 자긍심 때문이었죠. 또한 고건축 문화의 전통을 오늘에 되살려 후대에 계승한다는 중요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로서의 사명감도 한몫했습니다.”

    인터뷰 끝자락에 그는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줬다. 우리나라 고건축의 역사와 실제 자료들, 그리고 그동안 현장에서 쌓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들을 알릴 수 있는 고건축 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이 그것이다.

    “전통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 더 나은 미래는 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옛것들은 저만치 제쳐두고 모두가 다가올 미래만 향해 달음질하는 이 시대에, 한 번쯤은 과거 역사의 흔적인 문화재에도 눈길을 돌리고 고건축에도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아울러 그 속에 스며 있는, 문화재 뒤편에서 묵묵히 땀을 흘린 수많은 장인의 숨은 노력도 잊지 말아주었으면 합니다.”



    인터뷰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