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호

“나를 ‘스타 시인’으로 규정하지 마라”

10번째 시집 ‘북항’ 펴낸 안도현

  • 이소리│ 시인·문학in 대표 lsr21@naver.com

    입력2012-07-24 09: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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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에서 ‘北’은 복잡한 의미… 기호의 이중성
    • ‘널리 알려진 시인’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 문학은 세상에 대한 연애편지
    • “민주당 공천심사위원은 맡고 싶지 않았던 자리”
    • “나도 정치인?… 도종환 시 빼려면 내 시도 빼라”
    “나를 ‘스타 시인’으로 규정하지 마라”
    시인 안도현이 지난 5월 열 번째 시집 ‘북항’을 펴냈다. 아홉번째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를 펴낸 지 4년 만이다. 그는 이번 시집에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시인이라는 범주에서 좀 멀리 벗어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최근에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19대 국회의원이 된 민주통합당 도종환 시인의 시를 교과서에서 삭제할 것을 권고하자 “내 시도 교과서에서 빼라”고 반발했다. 7월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그를 만났다.

    “나는 항구라 하였는데 너는 이별이라 하였다/ 나는 물메기와 낙지와 전어를 좋아한다 하였는데/ 너는 폭설과 소주와 수평선을 좋아한다 하였다/ 나는 부캉, 이라 말했는데 너는 부강, 이라 발음했다/ 부캉이든 부강이든 그냥 좋아서 북항….

    -‘북항’ 몇 토막

    ▼ 4년 만에 시집이 나왔네요. 왜 ‘북항’입니까?

    “복잡한 의미가 있습니다. 북항은 부산, 인천이나 목포의 실제 항구 이름이기도 한데, ‘북’이라는 글자가 우리에게 주는 특별한 무게가 있죠. ‘북(北)’이라는 한자에도 다양하고 복합적인 의미가 들어 있고요. 한국 사회에서 ‘북’이라는 한 글자는 사전적인 의미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복잡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기호의 이중성이죠.”



    잠시 생각에 잠긴 안도현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사실, 이번에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시인’이라는 범주에서 좀 멀리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정리하자면 투명에서 불투명으로, 명징함에서 모호함으로 시의 위치를 이동시키고 싶었어요. 그런데 막상 시집 교정지를 받아들고 보니 많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안도현은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에서부터 곤궁한 삶이 있는 현장과 역사의식이 담긴 시를 많이 썼다. 그 뒤 1990년대 끝자락부터 현실을 직접 시로 그려내는 것에 한발 거리를 두다가 이번 시집 ‘북항’에서 다시 우리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 시와 현실은 어떤 관계라고 보나요?

    “현실에서 벌어지는 문제에 대해 단순히 분노하거나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거나 정치적인 소재를 시에 끌어온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아요. 제 작은 몸과 작은 이름으로 정권을 바꿀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궁리 중입니다.(웃음)”

    ▼ 김용택, 정호승, 도종환 등과 함께 많은 독자를 가진 스타 시인인데요, 비법이 있습니까?

    “모두 제가 존경하는 선배 시인입니다. 그들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지만, 그런 카테고리로 제가 규정되는 건 싫습니다. 어떤 울타리 안에 갇히는 느낌이 들어요. 각각 시인들의 특장과 단점을 세분해서 평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독자의 입맛에 맞는 시를 생산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요.”

    안도현 시인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던 해에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그때 시인의 부모는 안동과 예천 사이에 있는 풍산면소재지에서 가게를 했다. 가겟집 아들 안도현은 초등학교에 다닐 때 키가 반에서 가장 작았지만 해마다 반장을 도맡았다고 한다.

    ▼ 모범적인 아이였네요?

    “저희 어머님께 혹시 반장을 맡을 때 치맛바람을 일으키고 다니신 건 아닌지 여쭈어 본 적도 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어쨌든 남 보기에 얌전하고 모범적인 아이였어요. 가게에 딸린 작은 방이 하나 있었는데, 장남인 내 밑으로 사내 동생이 셋이 태어날 때까지 여섯 식구가 한방에서 살았어요. 저는 그저 착실하고 평범한 아이였는데 초등학교 6학년 때 사촌형이 대구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 저도 전학을 갔어요. 고교 졸업 때까지 자취, 하숙생활을 했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식구들과 떨어져 살면서 외로움과 그리움을 참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그게 지금 내가 하는 문학의 자양분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해요.”

    “초등학생 때부터 자취… 외로웠다”

    “나를 ‘스타 시인’으로 규정하지 마라”
    ▼ 개그맨 이경규 씨와 인연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대구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저는 문예반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부산지역 친구들하고 교류하다가 1년 선배인 이경규라는 ‘걸물’을 만났죠. 이경규 씨의 그때 꿈도 개그맨이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그가 하는 일은 무슨 일이든 배꼽을 잡게 만들었어요. 문학을 핑계 삼아 중국음식점 골방에서 고량주를 마시던 사이였죠.”

    ▼ 고교 졸업 후에는 전라도로 가셨죠?

    “서울에 있는 모 대학 국문과에 문예장학생으로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걸 믿고 태연히 놀다가 예비고사를 봤어요. 서울지역 커트라인에 2점 부족하더군요. 그때 마치 망명하는 기분으로 전라도로 가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원광대 국문과 출신의 윤흥길, 박범신, 양귀자 같은 좋은 작가들은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고요. 그 이름 따라 경상도에서 전라도 전북 익산으로 건너왔다고 할 수 있죠.”

    ▼ 언제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까?

    “저는 좀 일찍 시를 썼어요. 고등학교에서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부터 신춘문예에 응모하기도 하던 겉 넘은 아이였습니다. 제가 다닌 대건고는 학생들의 자치활동을 각별하게 용서(?)해주던 학교였어요. 시인인 도광의 선생님이 우리를 지도해주셨는데, 지금도 이 학교 출신으로 문단에 나와 활동하는 선후배 문인이 많아요. 시를 쓰는 홍승우 서정윤 이정하, 소설을 쓰는 박덕규 권태현, 문학평론을 하는 하응백 등이 그들입니다.”

    ▼ 문학은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문학이 치열하고 열정적인 삶에서 태어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생활 태도와 세상을 보는 눈, 책읽기가 어우러질 때 가능한 것일 텐데요, 저는 그것을 세상에 대한 연애 감정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뜨거운 감정 없이는 단 한 줄의 글도 나올 수가 없어요. 어떻게 보면 문학은 세상에 대한 연애편지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전에는 문학을 공부하는 후배들에게 굳이 좋은 글을 쓰려고 하지 말고 열심히 사는 데 더 관심을 가지라고 말하곤 했어요.”

    ▼ 1984년 전북 이리중 국어교사로 재직하다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되었죠? 이후 5년 만에 복직했는데요.

    “1980년대 저의 문학적 관심은 ‘골방의 문학’을 ‘광장의 문학’으로 이동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나’보다는 ‘우리’를, 한국문학의 여성적인 경향을 남성적인 힘의 문학으로 변화시켜보자는 생각도 했고요. 전교조 해직교사 시절에는 문학의 사회적인 기능이나 효용에 대해서 극단적인 태도를 취한 적도 있습니다. 문학이 현실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고 보고, 그렇게 될 때 문학은 현실 변혁의 수단이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 당시에는 문학보다 더 절실한 게 너무 많았으니까요. 그런데 학교에 복직한 이후에는 현실에 대한 저의 문학적 대응 방식이 좀 변하게 되더라고요. ‘그동안 너무 큰 것을 좇는 데 급급하지 않았나’ 하는 일종의 자기반성이 생겼어요.”

    안도현은 해직기간에도 특별한 직업 없이 전교조 사무실에 출근했다. 그는 그때 심정에 대해 “나는 간간이 글이라도 썼기 때문에 덜 외로웠지만 다른 해직교사들은 많이 외롭고 아팠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복직 후 얼마 뒤 그는 교직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골방 문학’을 ‘광장 문학’으로

    ▼ 복직이 됐는데 왜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습니까?

    “복직 이후에는 교육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여전히 보충수업을 해야 했고, 학교나 수업 구조를 개인의 노력으로 바꿀 수도 없었어요. 참 많이 고민하고 힘들었어요. 문학은 자유로움이 생명인데, 교사라는 직업은 모든 면에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을 줬어요.”

    그는 1996년 출간한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가 글만 써도 먹고살 수 있다고 부추겼다고 귀띔했다. 현재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생활에 대해서도 한마디 툭 던진다.

    “학교에서 잡다한 일이 많지만, 가능하면 그것들로부터 멀찍이에서 가르치는 일과 저 자신의 글을 쓰는 일 이외에는 하지 않으려고 해요.”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마라 / 너는 /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에게 묻는다’ 전문

    시인 안도현은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서울로 가는 전봉준’과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등 수많은 시집을 냈다. ‘연어’ ‘관계’ 등 어른을 위한 동화도 많이 썼다. 산문집 ‘외로울 때는 외로워하자’ ‘사람’에 이어 ‘만복이는 풀잎이다’를 시작으로 그림동화책도 쓰고 있다. 그 가운데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는 ‘너에게 묻는다’였다.

    “‘너에게 묻는다’는 갑자기 유명한 시가 되어 있더군요. 실은 해직 시절 저 자신에게 채찍질 삼아 쓴 시였어요.”

    ▼ 시와 산문, 그 경계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시로 다 쓰지 못한, 어떤 서사 구조를 필요로 하는 것은 산문으로 써야죠. 저는 한국문단이 한 작가에게 하나의 장르만을 고집스럽게 써야 한다는 이상한 순결주의를 강요하는 점에 대해 불만이 있습니다. 제가 쓰는 동화나 동시는 제가 시인이기 때문에 쓸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 어떤 게 좋은 시입니까?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세상에서는 시가 언제든지 ‘무기’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그러한 의무감 때문에 상상력이 위축되어서는 안 되죠. 문학은 정치도 종교도 철학도 아니고 오로지 문학이어야 하니까요. 리얼리스트로서의 꿈과 낭만주의자로서의 현실 인식이 만나는 지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안도현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1930년대에 활동했던 백석이다. 그가 백석에 대해 쓴 산문 몇 토막을 들여다보자.

    “내가 백석의 시를 처음 읽은 것은 1980년, 대학 1학년 때였다. 우리 학교의 박항식 교수가 쓴 ‘수사학’이라는 책에 시 ‘모닥불’이 인용되어 있었다. 그 시를 처음 읽었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갓신창’ ‘개니빠디’ ‘너울쪽’ 같은 몇몇 말이 좀 낯설었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단 세 문장으로 이루어진 간명한 시 형식 속에 놀랍게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타오르는 것을 보고 나는 금세 뜨거워지고 말았다. 나는 그 은사님을 찾아뵙고 백석의 시에 반해버렸다고 고백했고, 그의 다른 시도 읽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다.”

    안도현은 그때부터 백석이 쓴 시를 여러 편 읽기 시작했다. 백석의 시를 만날 때마다 노트에 한 편 두 편 옮겨 적기 시작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월북 시인 백석의 시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 시인은 오히려 그 때문에 “백석 시를 베낄 때면 묘한 흥분과 감격에 휩싸이곤 했다”고 회상한다.

    몰래 옮겨 쓰던 백석의 시

    ▼ 백석의 시가 그렇게 좋았나요?

    “백석의 시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면 소주 몇 병이 저절로 비워졌습니다. 사회과학적인 열정과 기운이 문학을 견인하던 1980년대에 백석의 시는 제가 깃들 거의 완전한 둥지였어요. 지금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집회에 참가해서 구호를 외치다가 돌아와 쉴 곳도 그 둥지였고, 잃어버린 시의 나침반을 찾아 헤맬 때 길을 가르쳐준 것도 그 둥지였습니다.”

    필자는 이즈음 정치 이야기로 주제를 바꿨다. 안도현은 지난 4·11 총선 당시 민주통합당 비례대표후보자추천심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 정치는 어떻게 봅니까.

    “우리 현대사는 국민에게 희망을 준 지도자가 거의 없어 불행했다고 봐요. 국민에게 희망을 줘야 할 지도자가 희망을 내동댕이치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죠.”

    ▼ 공천심사위원을 했으면 정치에 간접적으로 발을 들여놓은 거네요.

    “나처럼 어수룩한 사람이 발을 담글 자리는 아니었어요. 다만 대선 출마를 선언한 후보 중에 희망의 생산자가 있으면 좋겠어요. 남북관계를 복원하는 일도 시급하고요. 글 잘 쓰는 작가는 글로, 돈이 여유 있는 작가는 돈으로, 말을 잘하는 작가는 입으로 세상을 바꾸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 당시 민주당 공천심사위원장이 강철규 우석대 총장이었죠? 강 총장은 총선 결과가 나온 뒤 신동아 5월호 인터뷰에서 “민주당은 오만하고 안이했다”고 반성했는데요.

    “그 일에 대해서는….”

    ▼ 강 총장 추천으로 심사위원이 됐나요?

    “뭐, 이미 지나간 일이고, 할 말은 없습니다. 사실은 심사위원도 맡고 싶지 않았어요. 여러 분이 도종환 시인과 함께 맡아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강 총장과는 같은 학교에 재직하고 있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기 곤란합니다.”

    ▼ 국회의원이 된 도종환 시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합니까.

    “도 시인이 문화·교육 분야 일을 잘할 거라는 확신 때문에 (비례대표 후보로) 추천했어요. 가장 합리적이고 신사적인 판단을 할 줄 아는 시인이죠. 추천 당시에 ‘국회의원이 되면 시는 언제 쓰느냐’고 볼멘소리를 하기에 ‘내가 다 쓰겠다’고 했어요. 심성이 착하고 여린 분이라 염려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잘할 거라고 봐요.”

    인터뷰 며칠 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도 의원의 작품과 새누리당 이자스민 의원 관련 내용을 교과서에서 삭제할 것을 출판사에 권고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출판사가 도 의원의 작품을 교과서에 게재하는 것만으로는 공직선거법에 위반된다고 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리면서 해프닝으로 끝났다. 안도현은 7월 9일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이주호 장관께’란 글에서 ‘야당 국회의원이라는 이유로 작가로서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다면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자신은 더욱 자격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교과서에 실린 나의 시도 빼라”고 반발했다. 7월 11일 안도현에게 다시 물었다.

    ▼ 트위터에 글은 왜 올렸나요?

    “시인이 정치인이 되었다고 해서 예전 국어 교과서에 실린 시를 빼겠다는 발상 그 자체가 ‘소가 들어도 하품할 일’이오. 저도 도 시인과 함께 공천심사위원을 맡았잖아요? 그들 말대로라면 저도 정치인이잖아요. 만약 그 때문에 도 의원의 시를 국어 교과서에서 뺀다고 하면 형평성 맞게 제 시도 빼라고 한 겁니다.”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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