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호

“물류·번역 난제 사라져… 출판도 美서 경쟁해야”

문학박사→과학 출판 대가… 한성봉 스토리

  •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입력2023-04-08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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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선형적으로 뒤틀린 삶

    • 인문·사회書 하고 싶었지만…

    • 少壯 과학자 세대와 만나다

    • 유튜브·챗GPT 시대, 책의 길

    • 국민 50% 책 읽던 시대 끝나

    • 트렌드·어젠다의 최소공배수

    2월 27일 ‘신동아’와 인터뷰하기에 앞서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한 한성봉 동아시아 출판사 대표. [홍중식 기자]

    2월 27일 ‘신동아’와 인터뷰하기에 앞서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한 한성봉 동아시아 출판사 대표. [홍중식 기자]

    인생엔 두 가지 길이 있다. 선형적(線形的)인 길, 비선형적(非線形的)인 길. 선처럼 일렬로 나아가는 삶에는 돌출이 없다. 출발선과 도착선이 직선으로 이어진다. 때 되면 승진하고 때 되면 퇴직한다. 앞선 자의 삶이 교본이다. 불확실성에서 자유롭다. 하루씩 젊음과 생기를 잃지만 돈과 밥과 경력을 얻는다. 버티는 자가 승자다. 진부해도 기껍게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대다수가 택하거나 선망하는 길이다.

    한성봉 동아시아 출판사 대표는 일렬로 나아가는 삶을 거부한 사람이다. 30대의 그는 한국문학 연구자였다. 대학에서 현대소설을 강의했다. 잠시 일본에 체류했을 뿐, 40년 가까이 고향(전북 익산)을 떠난 적이 없다. 그러다 새천년을 한 해 앞두고 선에서 이탈했다. 그의 말마따나 “비선형적으로 뒤틀린 삶”을 택했다. 위태로운 이분법의 복판으로 굳이 걸어 들어갔다.

    “두려운 선택이었죠. 마흔 살에 시골집에 아내와 초등학생이던 두 아이를 남겨놓고 서울에 와서 출판사를 차렸으니까요. 3~4년간 ‘라꾸라꾸’ 침대에서 잤습니다. 월~금은 서울에 있고 금~일은 익산에 가는 생활을 반복했고요.”

    때 이른 기러기였네요. 역(逆)기러기라고 할까….

    “학교라는 세상에서 마흔까지 살다보니 바깥 세상에 나와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어요. 다행스럽게도 책 읽는 걸 좋아했고 흥행 사업에 흥미가 많았죠. 영화를 공부할 생각도 했었고요. 지금이야 출판이 쇠락했다고는 해도 한때 트렌드의 중심에 있었잖아요. 출판계에 들어와 고생했지만 그런 문화적 흐름 안에 있다는 느낌이 좋았죠.”

    ‘우주로부터의 귀환’

    그와의 인터뷰는 2월 27일에 진행됐다. 이날은 두 번째 만남이다. 그를 처음 만난 날은 1월 4일이다. 지인의 소개로 점심을 함께했다. 동아시아 출판사가 있는 충무로에서였다. 동아시아 정도의 출판사라면 파주출판단지에 있어야 할 게 아닌가.



    파주출판단지에 사옥을 두지 않은 이유라도 있습니까.

    “제가 출판계에 들어오기 전부터 파주출판단지는 부지가 확정됐고, 절차가 꽤 진행되고 있었어요. 그 뒤에라도 들어갈 수는 있었죠. 그런데 저는 파주출판단지에서 매력을 못 느꼈어요. 디지털 시대에도 출판은 지식인 간 교류의 장입니다. 출판사는 저자와 독자의 다리 구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책도 대중과 호흡하는 미디어입니다. 충무로는 지방에서 오기도 편하고 서울 동서남북과도 다 통하죠.”

    동아시아라는 이름은 동아시아 공동체에 대한 관심에서 유래했단다. 2000년대 초반 한중일 등 동아시아 역내 국가 사이의 협력을 추구하자는 주장이 제법 유행했다. 일종의 대안 담론으로 주목받았다. 역사·문화 도서와 어울리는 뒷이야기다. 정작 동아시아를 키운 건 과학책이다.

    출판사를 창업하면서 과학에 주목한 이유가 있습니까.

    “운이 좋았죠. 한국 출판업은 운동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1970~80년대를 거치며 학생운동권 출신들이 들어오면서 인문·사회 분야 도서의 퀄리티(quality·질)가 막강해졌죠. 인문·사회 도서를 하고 싶었지만 관계없는 사람이 진입하기에는 장벽이 너무 높았어요.”

    문학박사에게도 인문사회의 장벽이 높았다?

    “그럼요. 문학은 말할 것도 없었고요. 일본에 있을 때 책을 많이 읽었는데, 교양과학서가 참 재밌었어요. ‘우주로부터의 귀환’(다치바나 다카시) 같은 책을 정말 재밌게 읽었죠. 출판사를 차리기로 마음먹고 교보문고를 돌다보니 교양과학서 시장이 없더라고요. 그러면 진입장벽이 낮은 거잖아요. 그래서 시작한 겁니다.”

    저자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을 텐데요.

    “예나 지금이나 교양과학서의 경우 외서(外書)의 퀄리티가 훨씬 높습니다. 당연한 일이죠. 과학자와 대중 저술가 층이 방대하니까요. 그중에서 골라 번역해 출간하면 좋죠. 그런데 신생 출판사 대표한테는 두 가지 어려움이 있어요. 제가 일을 시작할 때는 인터넷 시대가 열리기 전이었잖아요. 좋은 정보는 ‘이너서클’이 다 갖고 있는 거예요. 한국의 대형 출판사가 당연히 미국·일본의 대형 출판사와 커넥션이 있었죠. 저로서는 해외에서 무슨 책이 나오는지도 모르거니와, 거기에 접근할 방법도 없었어요. 첫 번째 어려움이죠. 두 번째 어려움도 연결되는 문제인데, 정보에 접근했다 해도 선인세 경쟁을 할 자본이 없어요. 외서를 안 하려던 게 아니라 ‘넘사벽’이어서 국내서에 집중했는데, 그러면서 의식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과학 저술가를 자처하는 이가 많다. ‘셀럽’ 반열에 오른 인물도 있다. 어느 시점을 계기로 그룹이라 할 만한 규모의 과학 저술가들이 동시에 등장했다. 그럴만한 인력 풀이 있었다는 얘기다. 거기에는 세대 요인이 개입한다.

    김대식, 김상욱, 김승섭의 등장

    과학 출판 시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필자들인 김대식 카이스트(KAIST) 전기 및 전자공학부 교수, 김상욱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 김승섭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왼쪽부터). 동아DB

    과학 출판 시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필자들인 김대식 카이스트(KAIST) 전기 및 전자공학부 교수, 김상욱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 김승섭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왼쪽부터). 동아DB

    “국내에서 교양 과학서를 집필하는 과학자들은 대부분 소장(少壯)입니다. 한국은 일제강점기부터 과학기술과 과학 지식체계를 일본을 통해 받아들였어요. 1950~60년대에는 ‘전파과학사’ 같은 걸 중역해 읽었죠. 1970년 이후 출생 세대는 미국서 공부하거나, 영어를 통해 스스로 서구 과학 담론을 접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 출생 과학자까지는 대체로 국가가 키웠어요. ‘과학입국’이라는 말이 나올 때죠. 이 시대를 거친 과학자들은 과학을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도구로 생각했지, 과학을 철학적·사회학적으로 바라보지 않았어요. 다음 세대 학자들은 달랐죠. 덕분에 과학 분야에도 스타 저술가라고 할 사람들이 등장했고요. 이 시점과 제가 과학 출판을 시작한 시점이 잘 맞아떨어졌죠.”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저자들은 김대식 카이스트(KAIST) 전기 및 전자공학부 교수, 김상욱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 김승섭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다. 김대식은 1969년생, 김상욱은 1970년생, 김승섭은 1979년생이다. 이들의 책에는 86세대의 감수성이 없다. 각각의 전공인 뇌과학, 물리학, 사회역학을 밑절미 삼아 사회적인 담론을 설파한다.

    주로 1970년대생에서 새로운 분야의 필자가 나온 건 필연적이었다는 뜻입니까.

    “필연적입니다. 사회가 분화되고 독자 욕구도 늘면서 출판사도 변화를 꾀할 수밖에 없어요. 지금은 의사 집필가도 많고 과학자 중에서도 페미니스트 과학자들이 책을 쓰잖아요. 2000년대 초에는 상상 못 했던 일이죠.”

    1월에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입담(과 함께 마시던 술)에 취했다. 그는 정중하되 정곡을 찌르는 화술을 갖췄다. 균형감도 있다. 이런 재주는 타고나는 걸까, 단련된 걸까. 아무래도 후자 쪽 같다. 편집자는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자기주장을 관철해야 하는 직업이다. 편집은 시장(독자)과 예술성(저자)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과정이다. 그가 건너온 밥벌이의 여정이 그의 말투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런 그가 늦은 나이에 진입한 한국 출판계는 특수한 사정이 있는 곳이다. 군부독재 시기 출판은 민주화운동이었다. 1980~90년대까지도 주요 인문·사회 출판사의 인력 충원은 대학 운동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발행인과 편집자, 영업직원이 운동권 서클 선후배인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진입을 꾀하는 사람 처지에서는 장벽처럼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다.

    운동권 네트워크는 결속력이 강한데 벽을 느껴본 적은 없습니까.

    “출판도 산업인데, 사장끼리 형·동생을 해요. 진라면 공장 사장과 삼양라면 공장 사장 사이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죠.(웃음) 한국출판인회의가 1999년에 만들어졌는데, 올해 처음 선거로 회장을 뽑았어요. 그전까지 ‘다음엔 당신이 해’라고 이어져온 거죠. 단일 목소리를 낼 때는 유용한 조직이지만, 전근대적 문화라고 말할 수도 있죠. 그럼에도 리버럴한 곳입니다. 책과 문화를 얘기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출판을 시작한 후배들에게 가끔 그런 얘기를 해요. ‘첫 책을 낼 때 경제적 요소를 생각하지 말고 출판계에 네가 누구인지 보여줄 수 있는 콘셉트와 어젠다를 제시하라’고요. 제가 했던 출판을 업계에서 좋게 봐준 것 같아요. 그래서 학연·지연 때문에 불편한 적은 없습니다.”

    동질적 경험을 한 사람들이 주류를 꿰차고 있으면 그들의 고민이 생산물로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사회과학의 시대’를 건너온 운동권 출신이 내는 책은 성격이 대동소이할 테고요. 네트워크 바깥에 있으니 과학 출판이 가능했던 게 아닐까요.

    “일정 부분 동의해요. 뒤집어 얘기하면 그분들은 그것(인문·사회 도서)밖에 못하는 거예요. 1970년대 이름 날린 사회과학 출판사들이 1980년대 중반 이후 싹 사라지잖아요. 저는 그런 네트워크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으니 좀 더 자유롭게 고민할 수 있었죠.”

    한국 인문사회과학서의 주된 독자층은 40~50대 남성 아닙니까. 자칫 40~50대 남성의 목소리가 과대 대표 된다고 볼 여지도 있어 보이고요.

    “오히려 최근 10년에 한정해 보면 인문사회과학서는 물론 소설 시장까지 20~40대 여성이 주요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페미니즘 도서가 이렇게 많이 출간되고 그만큼 많이 팔린 나라는 대한민국뿐이에요. 팬덤도 주로 여성 작가에게 쏠려요. 남성 독자가 거의 없어요. 그러다보니 과학을 주제로 삼되 섬세한 문장과 감성으로 접근하는 책이 유행하게 된 거죠. 에세이 형태의 과학책이 잘 팔리는 거예요. 모든 걸 에세이로 풀기만 해서야 되겠느냐는 문제 제기도 있죠. 저희 회사도 책임을 피할 수는 없어요.”

    고대 그리스 철학자는 모두 과학자

    1993년생으로 포항공대 출신인 김초엽은 근래 가장 주목받는 소설가다. 2017년 ‘관내분실’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대상·가작을 동시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한국과학문학상의 산파 중 한 명이 한 대표다. 그는 김초엽의 작품을 처음 읽고 “충격을 받았다. 한국 소설가가 이런 작품을 쓴단 말이야?”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한국과학문학상은 어쩌다 만든 건가요.

    “제가 최초에 만들었다기보다는 머니투데이에서 SF에 대한 상을 만들자고 저에게 제안하면서 시작됐죠. 지금 교양서 시장이 많이 죽었는데요. 유튜브에 독자를 빼앗겨서 그래요. 이 상황에서 출판은 무엇을 해야 할까. 저는 전 국민의 50%가 책을 읽던 시대는 돌아오지 않겠지만, 지식인의 문자 언어가 더욱 고급화하고 예술화하는 시대가 오리라고 생각해요. 그런 시대가 오면 대중 과학서의 위치가 어떻게 될까요. 고급화한다 해도 학술 저널이 될 수는 없겠죠. 대중은 저널을 읽을 수도 없고요. (모호한 위치로 인해) 한계가 뒤따를 텐데, SF를 통해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봐요. 저는 과학을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르가 SF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을 문화로 해석하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겁니까.

    “대중 과학서를 더 많은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여러 수단을 써보는 겁니다. 빵에 비유하면, 어쩔 땐 ‘팥빵’으로 만들고 어쩔 땐 ‘도너츠’로 만들기도 하고. 과학은 본래 여러 학문과 연결돼 있잖아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도 모두 과학자였잖습니까. 철학과 신화에 이미 과학이 있는 겁니다. 그런 요소를 그간 놓쳐온 게 아닌가 싶어요. 김상욱 교수의 책 제목이 ‘떨림과 울림’입니다. ‘김상욱이 말하는 쉬운 과학 이야기’가 아니고요. 문화적 코드를 입힌 거죠. 실은 ‘떨림과 울림’이 아주 과학적인 얘기거든요. 과학을 사회문제와 연결하는 작업도 많이 했죠. STS(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에 관한 책을 낸 것도 그 일환이죠. 김승섭 교수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질병과 사회문제를 연결한 시도이고요.”

    의문거리는 있다. 교양서 역시 거슬러 올라가면 학술서나 논문에 가닿는다. 비(非)전공자인 독자가 학술서나 논문을 찾아 읽을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교양이라는 명목하에 ‘요약본’ ‘해제본’만 좇아도 곤란하다. 진화론을 요약한 책이 팔리고 진화론의 정수를 논한 책이 외면받는다면 ‘교양과학서’ 전성시대의 그늘이 아닌가.

    과학을 요약·설명하는 책은 선호하나, 본격 ‘과학 담론서’는 큰 반응을 얻지 못하지 않습니까.

    “최근 국내에 들어오는 외서만 봐도 정말 좋은 책이 많아요. 다만 아직까지는 그렇게 쓸만한 국내 저자가 많지 않습니다. 출판사 책임도 있어요. 재밌어 보이면 일단 무조건 계약해 버리니까요. 누군가 4~5년 걸려 역작을 썼는데 1000부 나가면 인세가 얼마겠어요. 당사자에겐 남는 게 거의 없는 일이죠. 독자들은 본격적인 과학책을 읽지 않고, 그러니 필자도 그와 같은 책을 쓸 유인이 없는 일종의 악순환이죠.”

    한성봉 동아시아 출판사 대표는 미국 시장에 진출하겠다면서 “곧 아마존에 ‘코리아북스’라는 출판사를 낼 생각”이라고 말했다. [홍중식 기자]

    한성봉 동아시아 출판사 대표는 미국 시장에 진출하겠다면서 “곧 아마존에 ‘코리아북스’라는 출판사를 낼 생각”이라고 말했다. [홍중식 기자]

    한국에서 과학적 기량과 대중적 글쓰기를 겸비한 사람이 나오기 쉽지 않겠습니다.

    “자주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해외를 노려야죠. 곧 아마존에 ‘코리아북스’라는 출판사를 낼 생각입니다. 영어로 책을 낼 겁니다. 종이책 없이 킨들 e-북으로 유통하려 해요. 일단 실용서 중심으로 내고 최종적으로는 픽션을 낼 겁니다.”

    해외 진출은 그가 택한 또 하나의 비선형이다. 굳이 가지 않아도 될 길이다. 일렬로 나아가는 삶이 생래적으로 싫은 사람임이 분명하다.

    해외 진출을 결심한 이유가….

    “많은 과학자가 ‘저도 영어로 책 쓸 수 있는데’라고 말해요. 거의 다 유학했잖아요. 지금은 가만히 앉아서 뉴욕의 출판사가 우리를 찜하기만 기다려야 하는 겁니다. 최대 난제가 물류였는데 이제 종이책은 중요하지 않아요. 두 번째 난제가 번역이었지만 자동 번역 기술 수준이 굉장한 경지에 올랐습니다. 번역된 내용을 사람이 조금만 손보면 됩니다. 전자책을 내놓고 마케팅하다 보면 미국 출판사가 직접 우리를 컨택하겠죠. 소극적으로 앉아 있을 이유가 없어요. 미국 시장에선 무엇이 팔릴지 출판인의 감각으로 찾는 거죠.”

    해외시장에 뛰어들면 소비자의 수요를 파악하는 시간도 절약되겠네요.

    “독자는 물론 저자도 찾을 수 있죠. 해외 독자들이 ‘이 책은 꼭 사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획을 찾는 과정입니다. 방탄소년단(BTS)에 대한 책이면 그들도 다 사겠죠. 그런데 그건 기획이 아니잖아요.”

    챗GPT와 계급 격차

    최근 출간된 ‘챗GPT에게 묻는 인류의 미래’는 대체 얼마 만에 나온 겁니까.

    “원고 수급해서 나올 때까지 한 달 걸렸어요.”

    대개 출판계는 느릿느릿 흘러가지 않습니까.

    “어떤 현상이 일어났다 칩시다. 신문은 아무리 길게 써도 200자 원고지 25~30매로 한 면에 채워 넣으면 끝나요. 출판은 200자 원고지 1000매를 염두에 두고 쓰는데, 아무리 빨리 마무리해도 1~2년 걸립니다. 현상은 끝난 뒤에요. 출판도 미디어라 하는데, 그렇게 뒤처지면 그게 무슨 미디어예요? 2016년 중력파가 발견됐을 때 한 달 만에 책을 냈어요. 중력파가 발견될 걸 예측하고 원고를 준비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죠. 알파고가 나왔을 때 정말 즐거웠습니다. 알파고에 관해 책을 두 권 냈는데, 사람들이 책을 갖고 얘기했거든요. 과학의 대중화를 증폭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타이밍이 늦으면 효과는 반감됩니다. 책은 깊은 지식을 담고 있어요. 깊은 지식을 독자에게 빠르게 전달할 수 있으면 가장 좋은 미디어죠.”

    그를 인터뷰한 날, 서울 광화문에서 김대식 카이스트 교수의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챗GPT에게 묻는 인류의 미래’ 출간을 기념한 행사다. 김 교수의 발언 중 인상적인 대목은 이렇다.

    “챗GPT 때문에 기자와 작가가 사라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단, 챗GPT를 잘 사용하는 기자와 작가 때문에 챗GPT를 사용하지 않는 기자와 작가가 사라질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생산성이 늘어나거든요. 하루에 기사를 수십 개 쓸 수 있어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뛰어난 도구입니다. 의도가 있는 사람이 먼저 사용해 버리면 미래 사회에 좋지 않을 겁니다. 사회 선동가, 비전문가가 활용하기 전에 여러분같이 팩트체크가 가능한 사람들이 먼저 써야 합니다.”

    종착역에 다다른 크리에이터

    인공지능(AI)은 출판계와 언론계에 위기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지적 활동이 기계의 활동과 어떻게 구별되느냐의 논쟁거리도 생길 테고요.

    “챗GPT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겐 깡통이에요. 챗GPT로 인해 계급 간 격차가 더욱 심화할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있죠. 하지만 도래한 시대입니다. 2016년 알파고와의 대결에서 이세돌 9단이 딱 한 판을 이겼습니다. 그 뒤 인간이 한 번도 못 이겼어요. 알파고는 은퇴해 버렸죠. 그런데 알파고가 나온 뒤로 인간의 바둑 실력이 일취월장했습니다. 전부 공평하게요. 인간은 계속해서 기계와 맞짱 뜨는 겁니다. 과거에는 바둑을 배우려면 문하생이 돼야 했지만, 이제는 AI를 통한 교육 기회가 모두에게 열렸죠. 챗GPT 시대에도 인간은 앞으로 나아갈 것 같아요.”

    그간 출간한 수백여 권의 책 중 가장 의미 있던 책이 무엇인가요.

    “한 권을 얘기하라면 ‘한반도 화교사’를 꼽습니다. 재일동포가 차별당한다는 말은 많이 하지만 재한 중국인에 대한 차별에는 무지해요. 책을 찾아보니 없는 겁니다. 아니, 한국 출판 역사가 몇 년이고 그 많은 운동권이 들어와 있는데 이런 책이 없다고? 2010년부터 필자를 찾기 시작했어요. 명동 화교학교 교장선생님부터 시작해 온갖 사람을 쫓아다녔지만 찾는 데 실패했죠. 포기하던 차에 일본 교토대에서 화교 문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쓴 분이 나타난 겁니다. 그 책이 없었다면 한반도의 화교사가 기록으로 남지 않는 부끄러운 상황을 맞이했을 겁니다.”

    과학책을 언급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후배들에게 ‘트렌드와 어젠다의 최소공배수를 찾으라’고 얘기해요. 트렌드를 좇을 때는 과감히 좇되, ‘이건 정말 해야 해’라는 어젠다는 분명히 밀고 가야죠. ‘한반도 화교사’는 출판인으로서 제가 지향한 어젠다를 실현한 몇 가지 중 하나죠.”

    빅데이터, AI 등 진화한 기술을 이해하고 과학책을 편집할 수 있는 후속 세대 배출은 용이하게 이뤄지고 있나요.

    “가장 큰 문제죠. 편집자가 없습니다. 인문사회도 마찬가지예요. 대학생부터 책을 많이 읽지 않죠. 책으로 숙고하는 시대가 아니잖아요. 300~400페이지 책을 편집할 수 있는 편집자가 많이 등장하기 어렵죠. 다만 10여 년 전에 비하면 우수한 인재들이 출판계에 들어오고 있어요. 한국 출판업이 성장하고 처우도 좋아진다면야 더 많은 인재가 오겠지만, 상황이 녹록하지 않습니다. 물론 책이 없어지지는 않겠죠. 소수를 위한 산업으로 남을 것이고, 텍스트를 근간에 둔 산업을 지향하는 젊은 편집자들도 있을 거예요.”

    그는 1960년생이다. 스스로의 현주소를 “종착역에 다다르고 있다”고 했다. 여태 현장에 발 딛고 있지만, 마무리를 염두에 둔 건 사실인 듯하다. 그의 마지막 말이다.

    “나가는 순간까지 책에 관해 크리에이터이고 싶어요. 새 길을 모색하고 방향을 전환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면 좋겠습니다. 사람은 계속 의자를 물려주면서 살아가는 존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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