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살만 왕세자, 젊은 세대 마음 얻으려 콘텐츠 산업 육성
“석유 중심 경제 탈피해야”
수도 리야드에 테마파크도 세워
왕가의 유적지 ‘디리야’는 문화 인프라 구축으로 들썩
2019년 10월 11일 BTS는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의 ‘킹파드 인터내셔널 스타디움’에서 ‘러브 유어셀프: 스피크 유어셀프’ 콘서트를 열었다. [하이브]
서양식 테마마크 개장
지난해 11월에 문을 연 블러바드월드는 사우디 최초의 테마파크다. 정확히는, 보수적인 이슬람 사상과 전통 아랍 문화를 강조하는 사우디에서 처음 문을 연 ‘서양식 테마파크’다. 이런 특성 때문에 사우디는 물론이고 국제적으로도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2월 20~21일 리야드 힐튼 호텔에서는 ‘제2회 사우디 미디어포럼(Saudi Media Forum2)’이 열렸다. 사우디 미디어포럼은 사우디 기자협회와 방송위원회(SBA) 등이 주관하는 미디어와 콘텐츠 관련 국제행사. 2019년 12월 처음 진행됐고, 그동안 코로나19 사태로 중단됐다 3년 2개월 만에 다시 열렸다.
저널리즘, 콘텐츠 산업, 미디어 기업, 인공지능(AI) 등 다양한 주제를 놓고 중동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서 전문가 1000여 명이 참석했다. 사우디 미디어포럼은 비석유, 비천연가스 분야를 육성하고 싶어 하는 사우디의 미디어와 콘텐츠 산업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행사라는 평가가 많다.
2월 20~21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힐튼 호텔에서 ‘제2회 사우디 미디어포럼(Saudi Media Forum2)’이 열렸다. 이 포럼에서 한국 콘텐츠 ‘오징어 게임’이 소개되고 있다. [이세형 기자]
압둘아지즈 빈 살만(왕자) 에너지부 장관, 칼리드 알 팔레 투자부 장관, 마지드 알 카사비 상무부 장관 등 현지에서 ‘실세 장관’으로 통하는 인사들도 행사장을 찾아 발표와 인터뷰에 참여하며 미디어와 콘텐츠 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방송산업 발전을 위해 1977년 설립된 국제기구인 아시아태평양방송개발기구(AIBD)의 필로미나 냐나프로가슴 사무총장은 “사우디가 콘텐츠 산업 육성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앞으로 어떤 전략이 추진되고, 얼마나 큰 변화가 나타날 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王家 발상지 ‘디리야’가 바뀐다
디리야 지역은 왕가 유적이 많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고도다. [사우디아라비아 관광청]
문화, 관광, 스포츠, 미디어 등을 종합적으로 활용한 콘텐츠 산업 역시 무함마드 왕세자가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다. ‘디리야’ 지역에 대한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도 무함마드 왕세자의 콘텐츠 산업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움직임으로 여겨진다. 디리야는 현지에서 사우디 왕가의 발상지로 통하는 리야드의 중심지다. 디리야는 왕가의 궁전과 유적지로 유명한 곳인데 최근 디리야 일대에 대규모 공원과 행사장이 조성됐다. 왕실의 유물과 각종 문화재를 전시할 박물관도 자리 잡을 예정이다.
2018년부터 사우디아라비아 디리야에서 열리는 자동차 경주대회 ‘포뮬러E’. [아라비안 비즈니스 홈페이지]
같은 해 ‘사막의 혈투’로 불린 WBA·IBF·WBO·IBO 복싱 헤비급 통합 타이틀전이 펼쳐졌다. 역사는 짧지만 파격적인 상금으로 유명 테니스 선수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디리야 테니스컵’의 주무대도 디리야다. 사우디 관광청 관계자는 “디리야가 세계적 명성과 가치를 계속 인정받고, 화제의 중심이 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투자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사우디가 2019년 10월 방탄소년단(BTS), 2023년 1월 블랙핑크의 대규모 콘서트를 허용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2019년 유럽에서 제작된 사우디 3대 국왕인 파이살 국왕의 어린 시절을 다룬 영화 ‘왕으로 태어나다(Born a King)’의 상영도 허용했다. 그동안 금기시해온 왕실의 이야기를 주 내용으로 삼은 영화가 상영돼 큰 화제가 됐었다.
무함마드 왕세자가 경영에 깊이 관여하는 ‘사우디 국부펀드(퍼블릭인베스트먼트펀드·PIF)’도 콘텐츠 산업에 적극 투자하고 있다. 특히 PIF는 한국 콘텐츠 기업에 대한 투자에 파격적인 모습을 보인다. 올해 초 PIF는 카카오엔터테인먼트에 약 6000억 원을 투자했다. 또 지난해 3월에는 게임 기업인 넥슨과 엔씨소프트에 각각 약 2조3000억 원, 약 1조1000억 원을 투자하며 단번에 주요 주주로 등극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속내
‘무함마드 왕세자 시대’에 사우디가 이처럼 콘텐츠 산업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동 전문가들 사이에선 석유 의존도 줄이기와 지속 가능한 개혁·개방을 위한 일종의 ‘체질 개선 작업’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분석이 많다.일단 내부적으로는 보수 이슬람 사상과 문화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자국민, 특히 20·30대 등 젊은 세대의 바람을 반영한 조치다. 테마파크 방문과 공연, 스포츠 경기 관람도 상당 부분 ‘해외여행’에 의존해야 했던 사우디 청년들의 불만은 적지 않았다.
자신을 컴퓨터 엔지니어라고 소개한 압둘아지즈 씨는 “워낙 글로벌화 된 시대라 모든 게 공개되고 있고, 정보와 지식도 빠르게 확산되지 않느냐”며 “온라인과 해외여행으로 얼마든지 보고 즐길 수 있는 문화 활동을 국내에서 못 즐긴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앞으로 사우디는 더 개방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우디 근무 경험이 있는 국내 기업 관계자는 “젊고, 교육 수준이 높은 사우디 사람일수록 자국 내 콘텐츠나 문화 인프라 부족에 대한 아쉬움과 불만이 컸고, 이들이 해외에서 즐기는 여가활동 중에는 보통 나라라면 국내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게 많았다”며 “사우디의 콘텐츠 인프라에 대한 투자는 해외에서 발생하는 외화 낭비를 막기 위한 의도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 사우디는 글로벌 기업의 중동 지역 본부와 법인을 대거 유치하겠다는 전략을 마련했다. 그동안 아랍에미리트(UAE)와 카타르가 강세를 보여온 ‘중동 경제 허브’에 도전하겠다는 전략이다.
하지만 유명 기업들은 쉽사리 사우디로 중동 본부를 이전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즐길 거리, 즉 문화 관련 인프라 부족이다. 물론 사우디도 사정은 있다. 사우디는 이슬람교의 발상지다. UAE와 카타르처럼 외국인들이 제한적으로라도 술을 마시기는 어렵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테마파크나 공연장 등의 시설도 부족하다는 것은 큰 약점이다.
이권형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세계지역연구센터 소장은 “콘텐츠와 소프트파워 역량은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요소”라며 “사우디도 외국 기업을 유치하고, 이곳의 인력들이 장기간 거주하려면 콘텐츠와 문화 인프라를 개선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이어 “사우디가 최근 외국 대중가수의 공연을 허용하고, 아시안게임과 엑스포 같은 국제 이벤트를 유치하려고 나서는 것도 소프트파워 역량을 개선하려는 의지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여성 사회 진출 확대와도 연관
사우디 정부가 자국 내 콘텐츠 산업의 성장 가능성을 높게 본다는 분석도 나온다. 사우디는 이슬람교의 3대 성지(메카, 메디나, 예루살렘) 중 메카와 메디나를 보유한 나라다. 자국 국왕을 공식 석상에서 소개할 때 “두 성지의 수호자”라고 표현할 정도다. 무슬림에게 메카와 메디나 성지순례는 일생 중 꼭 실천해야 하는 의무 중 하나다.필로미나 냐나프로가슴 AIBD 사무총장은 “사우디는 이슬람과 아랍을 주제로 한 콘텐츠 제작에 유리한 조건을 지녔다. 인력과 노하우 등이 갖춰진다면 중동권의 콘텐츠 생산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사우디는 콘텐츠 사업과 연관된 정부 부처 구조도 문화부, 미디어부, 스포츠부, 관광청, 엔터테인먼트청 등으로 세분화했다. 콘텐츠 산업 전반에 대한 정부 지원과 관리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다. 그동안 소극적이었던 외국 언론사의 중동 특파원 유치에도 관심을 보인다. 현지 소식통은 “최근 사우디 정부 관계자들은 UAE와 튀르키예 등에 중동 지국을 두고 있는 언론사 특파원들에게 ‘주재지를 사우디로 옮기는 것을 검토해 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말했다.
사우디는 오랜 기간 ‘은둔의 왕국’으로 통한 나라다. 개방되지 않았던 장소가 가진 신비감도 콘텐츠 제작 장소로 매력적인 조건이다. 2019년 9월 본격적인 관광 개방을 선언한 뒤에는 적잖은 콘텐츠 제작이 사우디에서 이뤄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tvN과 슈퍼주니어 관련 제작진이 최근 사우디를 찾아 여행 예능 프로그램 ‘램프의 기사’, ‘현지인 브리핑: 지금 우리 나라는’ 등을 제작했다.
콘텐츠 산업에 대한 육성은 무함마드 왕세자가 실권을 잡으며 강조하고 있는 여성들의 사회 진출 확대와도 연관돼 있다. 콘텐츠 산업 특성상 젊은 세대, 특히 여성들의 관심이 많고, 전통적으로 여성들이 좋은 성과를 내는 업종이기 때문이다. 콘텐츠 산업과 인프라 육성을 젊은 세대와 여성을 위한 양질의 일자리 만들기 작업으로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집권층, 對이란 체제 우위 드러내는 일에 관심 많아”
사우디는 중동 지역 내 패권과 이슬람교 종파를 놓고 이란(사우디는 수니파의 맹주, 이란은 시아파의 맹주)과 갈등을 겪고 있다. 두 나라는 3월 10일 중국 중재 아래 7년 만에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사우디와 이란 관계는 여전히 풀어야 할 앙금이 많고 서로를 견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양국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사우디가 콘텐츠 산업 육성과 대중문화 개방에 공을 들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이란의 경우 1979년 ‘이란혁명’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중동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로 꼽혔다. 이슬람권 국가 중 세속주의 성향이 강한 나라 중 하나였고, 대중문화도 발달했다. 하지만 시아파 종교지도자들이 중심이 돼 왕정을 무너뜨리고 신정 공화정 체제를 수립한 뒤에는 여성의 히잡 착용을 의무화하고, 외국의 대중문화 수입과 자국 콘텐츠 산업 육성에도 각종 규제를 만드는 등 ‘보수 이슬람 성향’으로 회귀해 왔다.
중동 전문가인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는 “무함마드 왕세자를 포함해 현재 사우디 집권층은 어떤 형태로든 국민에게 이란에 대한 체제 우위를 강조하는 데 관심이 많다”며 “콘텐츠 산업에 대한 투자와 대중문화 개방 움직임도 이런 맥락에서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사우디의 콘텐츠 산업 육성 장애물도 있다. 가장 우려되는 건 사우디를 포함한 중동 국가들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는 ‘예측 불가능성.’ 사우디는 이슬람교에서도 보수적 교리를 강조하는 와하비즘을 국가의 주요 이념으로 삼고 있는 나라다. 그런 만큼, 수십 년간 다양한 방법으로 정부 정책에 크고 작은 영향력을 행사해온 종교지도자들과 보수파 사이에서는 변화에 대한 우려와 반발이 나올 수 있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센터장은 “현재 사우디에서 나타나는 변화 의지와 파격적인 움직임이 앞으로도 순탄하게 유지될 수 있을지는 복잡한 사우디 내부의 상황을 고려할 때 장담하기 힘들다”며 “자유로움과 개방이 중요한 콘텐츠 산업의 성장 여부는 지금의 변화 의지가 지속 가능한지 여부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낮은 교육열 탓 전문 인력 부족
콘텐츠 산업의 핵심으로 여겨지는 전문 인력 부족도 중·장기적으로 극복해 나가야 할 문제다. 사우디와 같은 정치, 경제, 문화 여건을 지닌 나라 중 가장 먼저 미디어와 콘텐츠 산업 투자에 나선 카타르는 각각 중동의 CNN과 ESPN(스포츠전문채널)으로 꼽히는 알자지라와 비인(BEIN)을 1996년과 2012년 설립했다. 또 2008년에는 미국의 명문 저널리즘 스쿨 중 하나로 꼽히는 노스웨스턴대의 미디어학 캠퍼스도 수도 도하 인근의 국제 교육연구특구인 에듀케이션시티에 유치했다. 그러나 카타르가 양질의 미디어, 콘텐츠 인력을 배출하고 있다는 평가는 여전히 드물다. 아랍권 전반의 오래된 문제인 낮은 교육열과 인적자원 육성 노하우 부족이 주요 원인이다.일각에선 무함마드 왕세자가 국왕 자리에 오르고 왕실과 정부를 완전히 장악한 뒤에도 콘텐츠 산업 육성을 비롯한 다양한 개혁 정책이 이어질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희수 교수는 “현재는 젊은 세대의 지지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무함마드 왕세자가 이들의 입맛에 맞는 콘텐츠 산업과 인프라 육성 정책에 공을 들이고 있다”며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뒤에도 이런 기조가 계속 이어질지는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