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 자신은 정계개편 문제에 대해 함구하고 있으나 자민련 안팎에서는 정계개편의 폭과 시기 문제는 무엇보다 JP의 의중에 달려 있다고들 말한다. 합당이든 신당창당이든 JP의 역할과 포지션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문제가 해결돼야 구체적인 골격이 그려진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당권 및 차기문제를 둘러싼 DJ와 JP 간 권한배분의 문제라 할 수 있다. JP의 마음속에는 90년 민정 민주 공화당의 3당 합당 이후에 겪은 쓰린 기억이 선연하게 남아 있다. 민자당을 함께 만들었지만 김영삼(金泳三) 대통령 당선 이후 YS측근에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결국 못 견디고 탈당했던 전철(前轍)을 다시 밟지 않겠다는 것이다. 한 측근인사는 “JP가 명색이 대표인데도 YS 측근이라는 사람들이 당대표의 방을 절반으로 줄이려 들고, 옆방과 아랫방에서 지도체제 개편을 운운하는 등 못볼 꼴 많이 봤다”면서 “JP는 앞으로 새 당이 만들어진다 해도 고용사장(대표) 노릇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통합당의 당권, 즉 정권창출의 주도권을 쥔 총재직 등이 보장되지 않는 한 JP가 합당이나 신당 창당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JP가 비록 “어려움에 빠진 나라를 구해서 유종지미(有終之美)를 거두는 게 공동정부를 함께 만든 사람의 도리”라며 공조복원에는 응했지만 그의 머리 속에는 ‘집권 2년 안에 내각제를 시행한다(임기 후반부는 자민련이 국정을 주도한다)’는 97년 대선 합의가 지켜져야 한다는 생각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게 이 측근의 시각이다.
청와대와 민주당 고위관계자들도 이런 분위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별로 없다. 3월6일 민주당과 자민련 대변인단이 함께한 오찬 자리에서도 같은 분위기가 자연스레 표출됐다.
▲김영환(金榮煥) 민주당대변인= 다음에는 김종필 총재님께서 큰일을 하시는 게 순리인데….
▲변웅전(邊雄田) 자민련대변인=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글쎄 말입니다. 그게 순리이긴 한데….
▲김대변인= 합당하면 변선배님을 대변인으로 모시고 제가 수석부대변인 하겠습니다.
▲변대변인= (허허 웃으며) 무슨 말씀을. 제가 부대변인 할게요.
그러나 여권이 통합여당의 ‘김종필 총재님’을 수용하려면 김대통령의 결심은 물론, 차기 주자군 등 민주당 내 다수의 동의가 필요하다. 당 주도권을 누가 갖느냐 여부는 정권 재창출 및 차기정권에서의 영향력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는 이 문제에 대한 합의점을 도출한다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김정일(金正日) 북한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과 경제회복노력 등 시급한 국정현안을 위해서도, 김대통령의 레임덕 방지를 위해서도 차기와 관계되는 논의는 적어도 올 하반기까지는 억제돼야 한다는 게 여권 내의 암묵적 합의사항이다. 하지만 올해 말부터는 다시 ‘큰 틀의 정계개편’ 및 이를 위한 JP의 위상 문제가 다시 부각될 수밖에 없다. 현재의 ‘느슨한 연합’과 ‘불안정한 다수’로는 이회창이라는 단일후보와 영남지역의 반DJ정서를 압도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의 DJP공조를 ‘시드 머니’삼아 다수의석 확보를 기본으로 어떤 형태로든 강력한 범여권의 틀을 구축하는 정계개편이 불가피하다는 게 여권 일반의 공감대다. DJP공조는 정계개편을 향한 예비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제 3월2일 청와대 회동에서도 거듭 확인됐듯 DJP간에는 ‘임기 말까지 유종의 미’ ‘각종 선거에서 공조’라는 표현으로 차기 대선에서의 공조를 논의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논의가 진전될수록 JP의 비중은 커질 수밖에 없다.
JP 마음잡기 나선 여권 주자들
이런 까닭에 여권의 차기주자군은 저마다 JP의 마음잡기에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다. 재야 출신인 민주당 김근태 최고위원이 동료의원들을 대동하고 ‘유신본당’인 JP에게 깍듯이 예를 표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지난 1월 방미 중에 ‘JP 외교성과 뻥튀기’ 논란을 빚었던 민주당 한화갑(韓和甲) 최고위원은 김포공항 귀국장에서 진땀을 흘려가며 이를 해명하고도 모자라 JP를 별도로 만나 “오해를 푸시라”고 극진히 모셨다는 후문이다.
JP와의 관계 구축에 누구보다 애쓰는 이는 여권의 차기주자군 가운데 가장 높은 지지율을 보이는 이인제(李仁濟) 최고위원이다. 이최고위원은 지난해 4·13 총선 과정에 ‘충남권 대권주자’를 자임하면서 당시 공조파기 상태에 있던 자민련의 JP를 ‘서산에 지는 해’로 비유, ‘미운 털’ 신세가 됐다. 그러나 DJP공조 회복 이후 여권 내 위상이 점증하는 JP와의 관계개선은 이최고위원으로서는 대권가도에서 반드시 돌파해야 할 관문이 아닐 수 없다. 이 때문에 이최고위원은 공조복원 이후 JP에 대해 “해는 졌다가 다시 떠오는 것”이라며 과거의 ‘지는 해’ 발언을 발빠르게 수정하기도 했다.
나아가 이최고위원은 기회 있을 때마다 JP를 ‘찾아뵙고’ 지난 일을 사과할 계기를 만들려고 눈물겹도록(?) 노력해왔다. 그는 미국을 방문중이던 1월22일(현지시각) 역시 방미중이던 JP가 같은 뉴욕 인터콘티넨탈호텔에 머물다가 새벽 6시에 먼저 떠나려 하자 시간 맞춰 기다리다가 “안녕히 가십시오. 저도 곧 떠납니다. 서울 가서 찾아뵙겠습니다”고 예를 갖췄다.
하지만 열리는 듯하던 JP의 마음은 양당의 4·26 재·보선 연합공천과 관련, 논산시장 후보공천 문제로 다시 싸늘하게 식었다. 자민련측이 “공조정신을 살려 충남권에 기반을 가진 자민련이 후보를 내는 게 당연하다”고 선수를 친 가운데 이최고위원이 자신의 지역구인데다 전임 시장도 민주당 소속이었다는 점 등을 내세우며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다. 이최고위원은 JP의 불쾌한 반응과 모처럼 시작된 양당공조에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을 꺼리는 당내 일각의 시선 등을 의식, “당지도부가 해결할 문제”라고 목소리를 낮췄으나 JP의 굳어진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JP의 핵심측근인 자민련 변대변인은 “소위 대권을 하겠다는 이최고위원이 소탐대실하려는 자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데 실망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JP의 심기를 건드릴까 우려하는 이최고위원과 민주당 지도부는 ‘대승적 차원의 양보’ 문제를 논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하지만 JP가 내년 대선정국에서 이최고위원의 손을 들어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불가능할 것”이라는 시각이 적지 않다. ‘충청권의 새 희망’을 자처하는 이최고위원의 등극은 곧 전통적인 ‘충청맹주’ JP의 역할종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최고위원측에서는 “무슨 소리냐. 대선배님으로 존경하며 잘 모실 것”이라며 구애에 열을 올리지만 이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민련 인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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